신앙생활은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2002-05-31 18:31:51 read : 1618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빌립보서 3:12-14
(2001년 12월30일 마지막주일)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서 각자가 느끼는 감정은 연령마다 다릅니다. 인생의 의미와 방향이 무엇인가를 놓고 갈등하는 소위 '시련의 20대'를 살고 있는 분들은 조금은 불안하지만, 그래도 희망찬 미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겁 없이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소위 말하는 '캐취 30대' 연령의 분들은 인생을 보는 눈이 훨씬 더 담대하리라고 봅니다. 이미 자기의 한계를 어느 정도 인식하기 시작하는 '데드라인의 40대'라고 하는 계층에 속한 분들은 나름대로 진지하고 성숙한 자세로 순간순간을 깊이 묵상하면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재충전이 필요한 '리프레쉬트(refreshed) 50대', 더 나아가서 인생의 겨울이라고 할 수 있는 60대, 70대에 선 분들은 그 나름대로 매우 진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처지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건강하고 형통한 사람은 밝은 눈으로 새해를 기다리고 묵은해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병들고 실패하고 좌절감에 빠져 있는 분들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 더없이 처량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해서 많은 걱정들이 쏟아질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12월 30일 입니다. 내일이면, 올 한 해도 가고 새해를 맞게 됩니다. 이 맘 때가 되면, 마음이 뒤숭숭해집니다. 한 해를 시작할 때는 굳은 각오로 무엇인가 이루고 말 것이라는 결단 속에서 시작했지만, 막상 한 해를 보내는 시점에서는 나이와는 관계없이 아쉬운 맘이 듭니다. 항상, 무엇인가 이루어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에 한 해가 지나가는 것이 아쉽습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한 해를 뒤돌아보고 내년에는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지 결단할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예수님께 붙들린바 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성서학자는 빌립보서가 바울이 순교하기 한 5,6년 전쯤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바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데, 대략 60대에 접어들었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나이 60세에 그가 있었던 곳은 불행하게도 로마 감옥이었습니다. 바울은 지난 30여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소아시아를 누비며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복음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역을 통해 중요한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강해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하기에 힘썼습니다.
바울의 복음 증거는 세계 역사를 바꿔놓았습니다. 서구 문명에 있어 바울의 위치는 대단합니다. 그가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유럽은 기독교 나라가 되었고, 엄청난 발전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문명의 물꼬를 바꾸어 놓았다고 할 만한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누구나 자기의 화려한 업적에 도취되고 만족해서 '이제 좀 템포를 늦추고 적당히 살자'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이만하면 됐다. 좀 천천히 가자. 여유를 갖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정도는 충분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의 말을 들으면 좀 엉뚱한 데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13절, 14절을 함께 봅니다.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간단히 말해서, '아직 나는 목표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말하는 푯대는 무엇입니까? 그가 말하는 푯대란, '예수님에게 잡힌 바 된 그것과 앞에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예수를 미워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메섹까지 가려고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역사로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붙잡으러 가다가, 오히려 자기가 예수님께 붙잡혀 그의 종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그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는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나는 이제 이 예수를 위해 살리라. 이 예수를 나의 인생의 최대 목표요,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살리라.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아볼까? 예수님의 마음에 들고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나의 인생의 유일한 목표요, 내가 달려갈 유일한 푯대다." 그는 그렇게 결심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 말씀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렇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만이 바울 인생의 최고 목표였습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이 찬양 생각나시죠? 함께 불러봅시다.
우리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한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내 삶을 통해서 주님께 영광돌릴 수 있고,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 가지 물어 봅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에게 붙잡힌 자, 예수님의 은혜에 빚진 자,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을 존귀케 해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는 소박한 꿈, 즉 '이것을 놓고 나는 인생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목표가 있습니까? 금년을 우리가 그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 왔습니까? 다가올 2002년을 그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까?
예수님께 붙들린바 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 붙들려야 합니다.
2. 인생의 참 목표를 잡아야 합니다.
세상사람 가운데 목표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루고 싶은 것이 꼭 한 가지씩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라틴어로 목표라고 하는 말이 '피니스(finis)'인데 이것은 종말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왜 '목표'와 '종말'이 같은 어원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생각해 보면,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생의 종말에 가서도 후회하지 않는 목표가 참 목표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러한 참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까? 무엇입니까? 이왕 목표를 정한다면, 진짜 목표를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어떠한 목표를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건강입니까? 재물입니까? 가정의 행복입니까? 자식들이 잘되길 바라는 것입니까?
어렸을 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대통령, 장군, 국회의원, 선생님, 간호사 등 여러 가지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어떻게 됩니까? 대통령은 아예 꿈에서 사라집니다. 현실과 부딪히고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꿈을 접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이 과연 인생의 진짜 목표가 될 수 있습니까?
물론, 이러한 모든 것들도 중요합니다. 건강도 지켜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것도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현실 생활에 바탕을 둔 목표는 이차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그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가장 중요한 종말적인 목표에 비해서 내가 현실적으로 갖고 있는 계획이나 목표는 이차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때로 혼돈에 빠집니다. 아무리 열정이 있고 주님을 사랑해도 현실에 얽매인 존재이기 때문에 현실에 휩싸여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목표를 잃어버리고 현실을 우선시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실 생활에서 추구하는 바 - 건강, 물질, 권력, 가정의 행복 등 -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에 대치되는 것은 아닌 지 항상 저울질 해봐야 합니다.
많은 성자들이 공통되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라". 성도 여러분, 마음을 비운다는 것의 참된 의미는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마음을 단순하게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단순하게 갖는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한 가지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인생 - 생각해 보면, 짧지 않습니까? 70세 되신 분이나, 80세 되신 분이나, 심지어 100세를 산 분들에게 물어보아도, 인생은 짧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 짧은 인생에 여러 가지 목적을 두고 삽니까? 우리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는 인생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인생에 세운 목적이 무엇입니까? "복음 증거하는 것" 복잡하게 얘기할 필요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인생의 푯대, 그것은 복음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 좇아간다고 말합니다.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부터 인생의 목표를 예수를 증거하는 것으로 삼았습니까? 아닙니다. 바울 역시 세상 학문에 뛰어난 사람으로써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또 다른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삶에 나타났던 모습을 보면,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어떻게 하다 인생의 목표가 바뀌게 된 것입니까? 예수 핍박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의 목표를 잘못 설정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왕좌왕할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런 인생이 됩니까? 분명한 목적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아니지요. 목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분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의 인생의 목표를 이룰 수 있게 합니까? 주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우리 인생의 목표는 주님을 만나야 그 가치를 발할 수 있고 이룰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지 않고도 인생의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언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예수 믿지 않고 이룬 인생의 목표를 무가치하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 해 동안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오셨습니까? 이루셨습니까? 뒤돌아 봅시다. 과연, 내가 이룬 목표에 예수님은 어느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 나라 인간문화재 한 분인 박동진 옹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TV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저는 매일 아침 하루 4시간 이상 소리 연습을 했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몸이 아프거나 피곤하거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리 연습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너무나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그 질문을 받은 이 박동진 씨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소리를 연습 한다는 것은 내가 왜 살아 있는가에 대한 본질을 알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내가 사는 삶의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하기를 소원하는 인생 최대의 푯대를 앞에 놓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판소리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만큼도 우리에게 왜 살아 있는가에 대한 본질을 깨우쳐 주는 것이 되지 못한다면 그 신앙생활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입니까? 지난 한 해 동안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오늘 이 시간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신앙은 내 삶의 존재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가?"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결단을 하시길 바랍니다.
3. 푯대를 향하는 나가는 자에겐 포기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푯대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 무엇을 했을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취하여야 할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3절 말씀을 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첫째는 무엇입니까?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렇습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으로서,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현재에 만족하고 안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은 인생의 푯대에 이르지 못합니다. 푯대가 미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바울은 가말리아의 문하생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요, 세상 권세 누릴 만큼 누린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예수 믿기 전에는 출세가도를 달리던 사람이었고, 예수 믿고 변화된 다음에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안 한 일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좀 쉴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고백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까? "주님, 저는 아직도 주님의 일을 다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처럼 겸손히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감당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볼 때에는 감당할 만큼 감당했는데도 다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육신의 몸은 운동을 해서라도 비만에 이르지 않도록 힘씁니다. 하물며, 우리의 영적 신앙 생활이 비만해져서야 되겠습니까? 신앙생활 역시 현재에 안주하면 영적 비만증에 걸립니다. 신앙생활은 미래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신앙이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일부분일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멈추지 않습니다. 계속됩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계획과 그 속에 있는 충만한 은혜를 기억하며, 바울과 같이 항상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의 굳은 결심으로 사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렇습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 지나간 것, 과거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울의 지난날들의 삶을 보세요. 어떤 삶입니까? 바울은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였습니다. 어찌 보면, 용서 받을 수 없는 과거의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과거 삶에 대해 돌아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과거의 삶에 연연했다면 과연 복음을 제대로 증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과거의 삶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거에서 자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과거의 나의 삶이 비록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하고, 내 자신이 생각해봐도 비록 당당하지 못할지라도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믿고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은혜를 많이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지난 한 해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 많이 봉사한 일이 있습니까? 헌금을 많이 했습니까? 새해를 맞이하는 이 순간 모든 것을 잊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올해 이만큼 했으니 내년에는 좀 쉬어야 겠다!" 아닙니다.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롯의 아내가 왜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까? 과거에 이루어 놓았던 부와 명예, 즐거웠던 생활들을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잊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공만 잊는 것이 아니라, 실패했던 쓰린 경험도 잊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상처받고 원한에 쌓인 마음까지 모두 잊어야 합니다. 용서하세요. 이해하세요.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얽매이게 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방해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교회를 주셨습니다. 왜 주셨습니까? 새로운 출발을 하라고! 이제 우리 교회는 과거의 관습과 전례에 머물러서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아픔이 있습니까? 그래서 너무 힘듭니까? 그래서 멈춰 있고 싶습니까? 멈춰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떠한 아픔을 겪고, 고통을 겪고, 시련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신분은 바뀌지 않습니다. 어떤 신분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됨의 신분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아픔을, 시련을, 고통을, 이결 낼 수 있습니다.
<정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는 소리를 9번 이상이나 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도대체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 기쁨이 어디서 솟는 것입니까? 푯대를 분명히 하고 달려가는 삶을 살기로 바울이 작심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주님이 매일매일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게 했습니다. 육체의 가시도 극복케 했습니다. 감옥이라는 환경도 극복케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에게만 임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임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만 환경을 극복케 합니까? 우리의 환경도 극복케 합니다. 비록 국제정세가 혼돈에 빠지고, 경제 성장이 불투명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해주시면,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이러한 환경은 극복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푯대를 향해 바로 달려가기만 하면 주님이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병이 있습니까? 여러분, 남이 모르는 개인의 상처와 고통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에게 무거운 십자가의 짐이 있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푯대를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가기만 하면 주님은 그 모든 것들을 이기고도 남는 힘을 주십니다.
바라기는 새 해에는, 아니 지금 당장 이 시간부터는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가시길 바랍니다. 주님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담대히 나가시길 바랍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춘천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새해에는 기도를 통해서 능력받고, 말씀을 통해 주님 음성듣고, 전도하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삶을 살고자 결단하는 주님의 사랑받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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