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3) 2001-12-28 16:34:49 read : 1062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시편 32:1-11
일시: 09/30/2001(주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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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몇 주간 스위스 연수를 잘 마치고 올 수 있게 되어, 먼저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또 위해 기도해주신 여러분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아마 추석(秋夕)을 맞아 고향(故鄕)에 다니러 온 식구들이 더러 있을 줄 압니다. 아무쪼록 고향에 오셔서 따뜻한 품을 느끼시고, 흡족한 마음으로 각자의 삶의 자리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계속해서 "어떤 사람이 주님의 좋은 일꾼인지"를 본문을 통해 같이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자신의 죄와 허물을 주님께 고백하며 사는 사람이 주님의 좋은 일꾼입니다.
5절을 보면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自服)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1절에 보면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다 죄와 허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이나 심층심리학에서는 '자기-발견'(self-discovery), 또는 '자기-인식'(self-knowledge)이란 말을 씁니다. 이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자신의 진정(眞正)한 모습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내적(內的)·영적(靈的)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무엇을 발견하고, 알자는 것입니까? 신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자신의 죄(罪)된 모습과 허물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자신의 죄된 모습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될 수 있으면, 어두운 면을 안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늘 자신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罪人)임을 고백하며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께 진정으로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십니다. 혹시 죄 사함 받은 기쁨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죄 사함 받은 기쁨은 세상 그 어느 것을 얻었을 때의 기쁨 보다 큰 것이요,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사람이야말로 정말 복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살면서 많은 실수를 한 사람입니다. 그는 용사였습니다. 군인으로 살자니, 전쟁에서 많은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득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런 일로 인해서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준비를 다 했어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성전을 건축 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가 죄와 허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실수와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悔改)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32편도 바로 죄 용서함 받은 자의 복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이 시를 <참회시>라고 합니다. 또한 다윗은 시편 51편 1절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仁慈)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慈悲)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 하소서"라고 기도했는데, 이것은 바로 그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同寢)한 후에 드린 회개 기도입니다. 이것을 요즘 식으로 말하면 "끼리에 엘FP이손∼"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끼리에 엘레이손∼ 이라는 기도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냥 입으로 중얼중얼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은 정말 통회(痛悔)·자복(自服)하며 눈물로 침상을 적실 정도로 참으로 회개하며,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본문 3절에 "내가 토설(吐說)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告白)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 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몸은 탈진하고 말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자신의 속에 있는 모든 죄와 악과 허물을 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쏟아 놓을 때까지는 뼈가 쇠할 정도로 고통을 당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요즘 이 시대를 진단(診斷)해보면, 어떤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죄책감이 없어진 시대"라고 진단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는 죄를 죄로 생각지 않은 시대요, 양심(良心)이 무딜 대로 무디어진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앞에서 소개한 다윗의 기도는 매우 낯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은 다윗 처럼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릴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주님의 좋은 일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좋은 일꾼이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부끄러운 존재인지를 알고, 늘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에 보면, 예수님 당시 죄인 취급을 받던 어떤 세리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바리새인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걸 보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 18:14).
"눈에 보이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을 주님의 좋은 일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보면, "의인(義人)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걸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나는 참으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여삐 여기시고, 당신의 일꾼으로 받아 주신다는 겁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은 사람도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총의 빛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날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허물과 죄가 많사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써 주십니다.
2. 마음의 간사(거짓)가 없는 사람이 주님의 좋은 일꾼입니다.
2절에 보면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定罪)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간사가 없는 것은 속이지 않는 것, 즉 거짓(deceit)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그 속에 간사가 없고 거짓이 없는 사람―은 그가 비록 죄인일지라도, 결코 정죄(定罪)를 받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솔직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진실한 사람을 당신의 일꾼으로 쓰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중에, 나다나엘을 가리켜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한 1:47).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의 속을 꿰뚫어 보신 겁니다. 여기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나다나엘이 친구의 권면을 따라 진리를 찾아오는 그의 모습이 진실하게 보였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 즉 진실한 사람에게는 간사한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과거를 뉘우치고 하나님을 상대하여 복을 받게 될 때 새로 받은 이름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약삭빠른 사람이었습니까? 얼마나 간사한 사람이었습니까? 그가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환도 뼈가 부러졌습니다. 즉 간사한 게 다 깨져버렸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야곱―형 에서 보다 먼저 나오려고 뒷다리를 잡고 그 후에, 계속해서 시기와 속임수로 살았던―의 모습을 버려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간사하고 진실함이 없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진실(眞實)은 통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모름지기 진실(眞實)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 속에 진실함이 없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진실해야 하나님이 그를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사야 32장 6절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리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하며 목마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어리석은 자와 간사한 자를 같이 보고 있습니다. 즉, 간사한 것과 어리석은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표준새번역』성경에 보면 '간사'를 '불경건한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간사한 사람은 경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간사'를 다른 말로 하면 '거짓'입니다. 그러니까 거짓이 없이 진실한 사람이 바로 경건한 사람이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꾼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간사함(거짓)을 버리고 진실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3. 늘 기도하는 사람이 주님의 좋은 일꾼입니다.
6절에 보면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경건한 자는 주님을 만날 기회를 잡아 늘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앞에서 진실한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다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사람, 즉 진실한 믿음의 사람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 늘 기도에 힘쓰는 사람입니다. 저는 요즘 기도의 중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 된 이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이번에 스위스 세미나에 갔을 때도, 저는 기도의 기회로 삼고, 시간이 날 때마다 주님과 조용히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너무나 좋았습니다. 지난번에 일어났던 미국의 테러로 인한 참사(慘死)로 온 세계가 충격을 받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걱정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밖에는 없는 줄 압니다. 근심하고 걱정하는 대신, 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알지 못하던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란 나 자신의 무능(無能)을 고백하고, 주님께 나의 삶을 전부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며 간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좋은 일꾼입니다. 그러므로, 엄청난 일을 하려 하기 보다,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기 보다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보여주십니다. 기도하는 자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를 허락하십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① 환난(患亂) 중에서 안전(安全)하게 보호(保護)해 주십니다.
6절 뒷부분을 보면 "홍수(洪水)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환난(患難)이 닥쳐올지라도 하나님께서 막아 주시는 것을 믿으십니까? 시편 121편 7절에 귀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患難)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靈魂)을 지키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이제까지 목회 하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닥쳐오는 모든 환난을 물리쳐 주시고, 또 내 영혼을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을 믿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② 하나님께서 은신처가 되어주십니다.
7절에 보면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 세상에는 안전한 것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숨을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은신처가 되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자에게 주시는 큰복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기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숨을 곳이 되어 주신다는 겁니다. 숨을 곳, 즉 '은신처'를 영어 성경에는 'hiding place'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숨을 곳(피난처, 은신처)이 되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③ 가야 할 길을 지시하고 가르쳐 주십니다.
8절에 보면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지,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적당히 가르쳐 주시는 게 아닙니다. 밝히 보여 주십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고, 어떤 길로 가야할 지 분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사방이 어둠뿐인 요즘입니다. 깜깜한 밤 같은 세상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갈 길을 알지 못해 헤매게 됩니다.
시편 107편 14절에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뉴만이 이 말씀에 기초해서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429장)라는 찬송을 지었습니다. 이 찬송 시를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빛 되신 주
저 본향 집을 향해 가는 길 비추소서
내 가는 길 다 알지 못하나 한 걸음씩 늘 인도하소서(1절).
이전에 나를 인도하신 주 장래에도
내 앞에 험산(險山) 준령(峻嶺) 당할 때 도우소서
밤 지나고 저 밝은 아침에 기쁨으로 내 주를 만나리(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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