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구원에 이르는 길 2001-12-28 13:45:04 read : 1159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로마서 10:8-13
일시: 03/04/2001(주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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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어떤 결정적 구원 사건을 준비하고 예비하는 기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유랑했으며, 예수님은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고 시험받으셨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40일은 세례를 위한 마지막 집중적 기도와 금식과 헌신의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은 사도행전 14장 23절의 모범에 따라 특별한 헌신과 훈련의 기간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 교회에서는 부흥회를 오늘 저녁부터 열어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운 훈련을 받으며 주님께 헌신할 수 있는 자세를 가다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에 읽는 서신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도리(길)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는 구절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까이 있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가까이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성경을 집어들고 읽을 수 있고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경을 얘기하는 것이고 보기보다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더 좋을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대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살다 보면 어떤 때는 주님이 나와 전혀 관계없는 분으로 느껴질 때도 있을지 모릅니다. 또, 주님이 다만 저 멀리 계시는 막연한 어떤 존재로 생각 될 때도 있을지 모릅니다. 은하계 저 너머에 계시는 분으로 생각된다면, 그분이 아무리 좋은 주님이라도 나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구원의 주님이라면 나와 관계가 있어야 되고, 또 나와 함께 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계속 됩니다. "말씀이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말씀이 우리 입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날마다 읽는다는 말이요, 그것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아니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또한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다시 말해 가까이 계신 주 예수님을 우리가 믿을 때에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나는 주님이 나와 가까이 계심을 느낀다. 나를 돕고 계시고, 나를 인도하시며, 지금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는 믿는다면, 이런 삶에는 구원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예수님이 저 멀리 계신 분으로 느끼십니까? 아니면 주님을 가까이 느끼십니까? 구원이란 주님이 나와 가까이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 가운데 계심을 확실히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사는 삶 속에 주님 주시는 구원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또 이렇게 사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복되고 즐거운 삶, 소망이 넘치는 삶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구원을 얻는 도리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9절, 10절, 13절에 구원을 얻는 길이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9절 상반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큐리오스(kurios)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가 바로 세상을 구원할 주님이시다"라는 것을 고백할 때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1) 스승으로서의 예수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랍비(선생님)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존경하는 표현입니다. 저희가 대학 다닐 때는 신학교에서는 교수님을 그냥 "∼교수님 또는 ∼박사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다른 학교에서는 그저 아무나 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인천에 있던 전문대학 교목으로 갔더니 거기 교수님들이 저를 보고 선생님이라고 불러서 저는 목사라고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학교의 목회자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아무나 보고 선생님이라고 하지만, 랍비라고 하는 말은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어찌되었건 예수님을 그저 위대한 선생님 정도로 보는 시각이 오늘날도 많습니다. 이런 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2) 성인으로서의 예수
예수님을 공자나 노자나 석가, 혹은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회교도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위대한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마하트마 간디같은 분도 힌두교도였지만 예수님을 성인으로 매우 존경하였고, 특히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을 늘 실천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특히 마하트마 간디의 무정한 비폭력의 아힘사(Ahimsa: 不傷害) 정신도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 연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단순한 성인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것도 부족한 것입니다.
3) 세상을 구원할 주님으로서의 예수
이것이 본문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큐리오스라는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주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저 훌륭한 스승이나 성인 중의 한 분이 아닌, 내 영혼의 구주라고 믿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주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이시며, 기쁨이시며, 소망이십니다"는 고백을 하며 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이런 삶을 살 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사신 것을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활의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으로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의로워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의 사건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나를 위한 구원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본문 9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보면 "마음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우선, 마음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어야 된다는 이 말씀을 여러분이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선 마음으로 믿어야 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입으로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을 고백을 해도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면, 믿음이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10절에 보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했는데 이것은 칭의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을 기도에 대입시켜 봅니다. 기도란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이며, 더 나아가서는 단지 눈길만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 분을 관상(觀想)하는데 만 몰두하여 말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혼의 상태(샤를 드 푸코)라고 봅니다. 즉 기도란 사랑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지의 구름』(Cloud of Unknowing)의 저자가 즐겨 쓰는 '마음'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마음'을 일깨우려면 우리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되며, 그 '마음'이 우리의 존재를 온전히 하나님께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려면 '마음'을 개발해야 하고, 또한 그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불순물들을 깨끗이 제거함으로써 '마음'이 영원한 자석에 끌려 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불순물들이란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때 그 분과 우리 사이에 끊임없이 끼여드는 생각과 말과 이미지를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침묵의 중요성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갈망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떤 텅빈 공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비가들은 하나님과 보다 깊은 친교를 이루려면 우리에게 이런 공백이 필요하며 이런 공백을 갖고 고요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진정 주님과의 만남을 이루게 되며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텅빈 공백을 가끔 가짐으로써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마음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3. 입으로 고백할 때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입으로 시인하여(고백해서) 구원에 이르리라"(10절)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뿐이어서는 안 됩니다. 입으로 표현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입으로 당신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라십니다. 빌립보서 2장 11절에서도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걸 보아도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신앙 생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 생활에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의 말을 하는 것(Speaking Words of Love)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말을 해야 할 때 침묵을 지킵니다. 말을 하지 않고는 사랑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 부모, 애인, 친구들에게 "정말 사랑해요"라거나, "늘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자주 생각해요," 또는 "당신은 나의 가장 큰 선물이에요"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로 생명을 주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빠 전 아빠를 사랑해요"라고 어머니가 딸에게 "얘야 난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새로이 축복 받은 커다랗고 살기 좋은 장소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말은 생명을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말로 직접 표현할 때 오랫동안 말이 축복을 주는 말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느 대 사업가의 아들이 탄 경비행기가 사막을 지나다가 폭풍을 만나 추락했습니다. 아버지는 수색대를 조직해 며칠 동안 샅샅이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디가 추락 지점인지, 또 아들이 생존해 있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며칠 뒤 추락 지점을 발견했지만, 비행기의 잔해와 비행사의 시체만 있고 아들의 시체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일단 아들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아들을 구출할 작전을 구상하며 기도 드렸습니다.
"하나님, 내 아들이 살았는지, 살았으면 어디에 있는지 저로서는 알 수 가 없습니다. 저와 제 아들을 도와 주시옵소서." 기도가 끝난 후 아버지는 수백만 장의 전단을 뿌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전단에 무엇이라 쓸 것인가?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쓸 것인가, 무엇을 잡아먹고 사나운 짐승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를 써야 할 것인가 난감했습니다. 고심을 하던 아버지는 결국 "My Son, John, I Love You"라고만 써서 뿌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기진맥진하고 좌절감으로 죽어 가던 아들이 이 전단을 받아 보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아빠는 반드시 나를 찾아 올 것이다. 용기를 가지고 버티자"하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후에 아들은 수색대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풍성한 은혜를 주신다)"라고 했고, 13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구주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합시다. 남편이 혹시 실직했을 때 아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힘내세요"라고 말해 준다면, 그 때 그 말이 힘이 되고, 축복이 되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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