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이 사랑하는 자 2001-12-13 20:36:39 read : 1056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3월 25일
엡 6:23-24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속도도 빠르고 변화하는 크기가 엄청납니다.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도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다 변합니다. 심지어는 돌도 변하고 쇠도 변합니다. 사람도 변하는데는 예외가 없습니다. 나는 절대로 변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고 결심했어도 환경이나 여건이 변하면 변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사물이나 환경에 친화하다보면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다가 변하는 것이 상정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향해 미워하는 마음이나 증오하는 마음이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는데 있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신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사랑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변해서는 안됩니다.
어미 닭의 죽음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그의 부인은 늘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에 같이 가보자고 했습니다. 가보니까 그 닭장에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는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글쎄 이게 웬일입니까? 그 암탉이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농부가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저 머리에 난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이 암탉의 몸에서 피를 다 빨아먹었는데도 이 닭은 족제비가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내가 멸망 받기에 그 모든 수치와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상함과 찔림을 당한 예수의 품이야말로 진정 구원과 참 안식의 품이 아닐까요?"
세월의 무상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세월 속에서 살다가 가야만 하는 세월의 동행자들입니다. 영국의 생물학자인 케리카딘 박사는 실험을 했는데 두 마리의 쥐에게 똑같은 환경과 생활 여건을 만들어준 후 한 달 동안 정반대의 현상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쪽은 어둡게 한 후 불안과 긴장과 짜증이 나도록 만들었고, 다른 한쪽은 밝은 빛을 적당하게 비춘 후 즐거운 음악을 들려주면서 행복감에 젖어있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전자의 경우 쥐는 6개월이나 빨리 죽을 뿐만 아니라 암에 걸려 있더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살아온 시간의 무상함에 후회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이 되지 말고 현재 있는 세월 속에서 자랑스러운 일들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내가 짊어진 무게는
어느 날 한 가닥의 희망조차 잡지 못 한 채 절망에 빠진 한 미망인이 자신의 처지가 너무 힘들어 큰 소리로 한탄을 하고 있었습니다. "허구 많은 십자가 중 내가 짊어진 십자가는 왜 이리도 무겁단 말인가. 너무도 불공평한 세상이구나." 그때 하얀 수염을 가진 한 노인이 길을 지나다 이 말을 듣고는, "그것이 그토록 무거우면 그 십자가를 저 많은 십자가 속에 버리시오. 그리고 당신이 가장 가볍다고 생각되는 것을 골라 가져가시오"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미망인은 너무도 반가워서 자기의 십자가를 힘껏 아주 멀리 보이지 않게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짊어질 아주 작은 십자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열심히 찾던 미망인은 자기가 평생 지고 갈 수 있을 만한 십자가를 찾고서 힘을 얻어 다시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하얀 수염의 노인이 미망인이 새로 찾은 십자가가 어떤 것인가를 자세히 보니 그 것은 바로 미망인 자신이 너무 무겁다고 버렸던 바로 그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가장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남이 아무리 힘들다고 하소연해도 항상 나보다는 나아 보이고 내가 짊어진 짐이 제일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내가 받는 고통이 다른 사람이 받는 고통에 비하면 매우 작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새로운 희망이 생기게 됩니다. 희망을 안고 고통을 인내로서 이겨 나아갈 때에 비로소 우리의 어깨는 가벼워질 것입니다.
사람마다 유일한 한가지 소원이 있다고 하면 행복일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행복의 평가 기준 열 가지를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친구의 사업이 성공하고 잘 될 때에 내 마음이 흐뭇하고, 성공한 친구를 만날 때에 조금도 샘이 나지 않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남을 위해 돈을 쓸 때가 있는데 구제를 한다든지, 봉사를 한다든지, 점심 한끼를 낸다든지, 남을 위해 돈을 쓸 때에 아까운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이 부자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돈을 쓸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고, 떨떠름하다면 이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셋째로 자녀가 평범하게 성장하였을 때에 여기에 대해서 감사가 떠나지 않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마다 내 자녀만은 특별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로 그 생각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보통이면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내 자녀만은 특별해야 한다는 그 생각 때문에 자녀도 불행하고 부모도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잘 자라주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넷째로 여러분은 식사 기도할 때에 얼마나 감사하십니까? 이 좋은 음식! 이 건강! 이 왕성한 식욕! 그리고 소화력, 그리고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을 수 있는 이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고 행복하십니까?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섯째로 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는 사람! 새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사람! 가을에 붉게 물들어 가는 가을 하늘이 눈에 보여지는 사람! 봄이면 예뿐 싹이 땅위로 고목 나무 같은 곳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아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그 사람!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언제 싹이 나왔는지! 언제 꽃이 피었는지! 단풍은 어떻게 되어 갔는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항상 불만과 불평과 욕구에 노예가 되어서 늘 쫓기는 듯한 사람을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만하면 넉넉하다! 나에겐 분에 넘치는 것이다! 이렇게 넉넉한 마음! 자족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일곱째로 남을 비판하는 횟수보다 남을 칭찬하고 남을 축복하는 말을 더 많이 하며 사는 그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꼭 남의 흉만 보기를 좋아하고 비판이나 하고 잘못된 것만 보이는 그 사람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비뚤어졌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모든 사람이 아름답게, 귀하게 보여지는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덟째로 현재나 과거를 막론하고 후회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미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항상 미래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이렇게 미래 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아홉째로 아무리 바쁘고 절박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열 번째로 죽음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공한 사람입니까? 행복한 사람입니까?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바울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족하는 마음이 있었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살았고, 늘 겸손하게 살았고, 감옥에서도 감사하며 살았고, 축복하면서 살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이미 이룬 것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계속적으로 좇아가는 삶을 살았고, 죽음을 기다리면서 당당하게 맞이하는 그의 모습을 우리가 보면서 그는 과연 행복한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오늘 에베소서를 마치면서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은혜라는 단어가 13회 나오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말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아래 사람에게 호의로 몸을 굽힌다." "인사하다, 친절하다"라는 말로 사용될 때가 있고 또는 "유쾌하게 되다. 행복하다, 너그럽다, 기쁨"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많이 쓰이는 말로는 "카리스"라고 해서 "호의를 베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높은 사람에게 값없이 베풀어주는 호의를 말합니다.
바쿨레이라는 주석가는 말하기를 은혜를 "매력"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은혜는 사람을 매력 있게 만들어 줍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 수록 아름다워지고 매력적이게 됩니다. 외모도 그렇게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이 아름다워 지는 것을 봅니다. 세상에 많아서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많을수록 좋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고, 아무리 많아도 부작용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과 삶은 황폐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떠나서는 도저히 우리는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
세상에 사랑이란 용어가 풍부하여 넘치는 것 같이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랑 부족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하며 사랑을 받으려고 헤매다가 헛된 것으로 허무한 세월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참된 사랑 즉,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려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신 그 엄청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좋은 가문, 학벌, 직위를 배설물처럼 여기고 내 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하고 최선을 다해 주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빌3장)
오늘 본문은 그런 바울이 스승이 아니라 아비된 심정으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기를 바라며 이 은혜 즉, 대가없이 받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있기를 구하는 마지막 인사입니다.
이 변함이 없다고 하는 말은 한결같다 혹은 꾸준하다는 말입니다. 이에 반대되는 말로 변덕, 변절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변덕이란 것은 무척 피곤한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사람을 만나 사귈 때 변덕스러운 사람을 만나면 참으로 피곤합니다. 좋다고 할 때에는 자기의 살이라도 다 먹일 것처럼 하다가도 얼마 안가면 완전히 돌아서서 꼴도 보기 싫다고 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럴 이유가 아무 것도 없는데도 그렇게 합니다. 자기가 손해를 봐서 그렇다면 손해를 배상해 주면 되는 것이고 다른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사과하고 고치면 되는데 이런 저런 이유도 없이 싫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덕은 사람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주면 그 장난감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흔들어 대면서 좋다고 합니다. 죽을 것처럼 좋아하다가도 하루 이틀이 지난 후에 다시 집어 주면 집어 던지고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소위 아이들의 변덕인데 이처럼 사람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는 사람은 참 피곤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예수님께 싫증을 느끼면 그것은 곤란합니다. 그러면 믿음 생활에 변덕이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이와 비슷한 의미로 변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변절이란 좀 다른데 반드시 이해 관계가 따릅니다. 그래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이익이 있다고 생각되면 절대 변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손해가 될 것 같으면 혹은 이용가치가 없으면 안면을 완전히 바꾸어 버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한결같은 사람, 변함이 없는 사람, 꾸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이 가르쳐 주는 뜻입니다. 여하간 변덕쟁이가 되거나 변절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미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몸이기에 당연히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이기에 환경과 조건 따라 변하기도 하기에 변함 없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고 물어보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그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결과를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를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삶을 생각해 봅니다.
1. 언제나 함께 하는 삶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 절대적인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하시고 계속해서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마 10:37-39). 부모, 자식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기를 요구하셨으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십니다. 이 말씀과 같이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늘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제일 먼저 주님을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의 사랑도 많은 관심을 갖고 늘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하셨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이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그러기 위해 늘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쉬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할 것은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 환경, 가문에 관계없이 계속적으로 기도하는 삶이 주님과 늘 함께 사는 삶이요,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2.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 (말씀)을 지키라"(요 14:15) 하셨습니다. 계명 곧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마음먹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똑같고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는 것이라면, 주님 말씀이 삶 전체를 주관하도록 말씀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가는 삶이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삶입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 감정과 기분에 따라 달라지고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 형편과 입장에 따라 흔들리며 사는 것은 변하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요 사도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은 한 번만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유혹에 89년 동안 한번도 잘못되게 아니하신 주님을 내가 어떻게 모른다 하겠는가 하며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하셨으니 말씀이 가는 곳에 가고 머무는 곳에 머무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헌신과 봉사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내 모든 것 다 주어도 아깝지 아니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머리에 삼백 데나리온의 거금의 향유를 붙고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여인을 다른 사람들은 수군거렸으나 예수님은 내게 좋게 하였다고 칭찬하시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막 14:9, 마 26: , 눅 22: , 요 12: )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에게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고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진정 주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깨달았다면 내 것이 무엇이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내 힘도, 정성도, 물질도 시간도 주님을 위해 바쳐지는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항상 자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좋은 것은 자랑하고 싶듯이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다 좋게 보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증거에 열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며 교회를 많이 자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어떤 복을 받게 되었습니까?
1. 주안에 평안을 얻게 됩니다.(23절) 주님이 가지신 참된 평안(요 14:27)을 얻게 됩니다.
2. 믿음을 겸한 사랑을 얻게 됩니다.(23절) 올바른 사랑은 믿음을 동반합니다. 거기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없이 공통의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3.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24절) 은혜란 공로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며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주실 복입니다.
물통 속의 나뭇조각
성 프란시스가 고향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자기 집 하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에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인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릴 때마다 조그만 나무토막 하나를 넣는 것이었습니다. 궁금해진 프란시스는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물을 퍼 올릴 때마다 나무 조각을 넣으면 물이 출렁거리지 않아 넘쳐 버리는 걸 최대한 막을 수 있으니까요."
성 프란시스는 하인의 말 속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친구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 물통 같은지 ...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마음, 고통으로 요동하는 마음, 절망으로 부서지는 마음... 거기에 십자가를 던져보면 어떻겠나 ..."
결론으로 우리는 변함 없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런 사람은 변함 없이 주의 일에 협력하는 자, 변함 없이 인생을 바로 살아가는 자, 변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이와 같이 변함 없는 자가 될 때 평안과 믿어주는 사랑과 은혜의 복이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러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생각과 마음이 주님께 향하여지고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며 아낌없이 봉사하고 헌신할 뿐만 아니라 자랑을 많이(전도) 하므로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기도하고 말씀 순종하여 주안의 평안도 얻고 믿음을 겸한 사랑도 받으시되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늘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조용히 하던 일을 멈추고 주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사순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바쁘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틈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은 그분이 이곳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듣는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변함 없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경건한 삶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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