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삶 2001-12-13 20:03:49 read : 1064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3월 4일
갈 5:22-26
사람 가운데에는 욕심이나 욕망, 그리고 야망이 큰 사람과 작은 사람으로 구분될 수는 있지만 욕심, 욕망, 야망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욕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본능입니다. 아무리 욕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그 뜻을 다 이룬다고 해도 인간의 욕망이나 야망은 무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한대의 욕망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송두리째 빼앗거나 생포하는 엄청난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보통은 사람이 동물을 사냥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사냥하는 더 힘있는 세력도 있습니다. 동물들을 사냥하는 방법은 각각 다른데,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고 합니다. 우선 주둥이가 좁은 항아리를 나무에다 묶어놓고 그 속에다 번쩍거리는 금속 물체를 집어넣어 두면 원숭이들은 나무 타기를 즐기다가 태양에 반사돼 번쩍거리는 물체를 보게 되고, 이를 본 원숭이들은 그 항아리에 가까이 다가가 안에 있는 물체를 잡으려고 손을 넣고 금속 물체를 꼭 쥔 후 손을 빼려고 노력하지만 손을 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손에 붙잡고 있는 물건을 놓으면 자유롭게 손을 뺄 수 있지만 원숭이는 항아리 속에서 잡은 물건을 붙잡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생포됩니다.
무한대의 욕망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한다
세상에 있는 많은 물질을 사용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작은 항아리에서 나오는 금빛 찬란한 물체를 탐하는 원숭이처럼 탐욕의 법칙인 눈앞의 작은 이익에 붙잡히면 우리 인간도 올무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무가치한 것에 대한 욕망이나 야망 그리고 재물 등으로 인해 우리의 영적인 자유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이나 이 땅위의 축복에 대해 새로운 눈을 가질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은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
인생은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 때는 공부와의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좀 더 자고 싶고 좀 더 놀고 싶은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물론 적당히 놀기도 하고 자기도 하여야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과하게 되면 그는 매우 중요한 초반 싸움에서 패배하게 되어 불리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한 생활을 위하여서도 자신과의 싸움을 하여야만 합니다. 음식을 절제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과의 싸움인데 음식을 절제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조금만 식사를 절제하고 매일 최소한 30분만이라도 운동을 한다면 좋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이 작은 싸움에서조차 승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본능이 있습니다. 그 본능은 보통 욕심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통 네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물욕과 명예욕과 식욕과 정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본능과 욕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우리들에게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만일 생각 없이 함부로 없앤다면 심각한 문제가 우리들에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우선 산업이 발달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회는 도태하고 몰락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의 치명적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물질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저들의 사회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에 사람들은 열심을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지나친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아주 무시하고 사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명예욕도 마찬가지인데 명예욕이 없어도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사회가 되려고 하면 보다 높은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명예욕이 없다면 그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실력 있는 사람들을 배출해 내는 것이 어려워지게 될 것입니다.
식욕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싶은 욕망이 지나치게 되면 비만이 되어 건강에 문제가 되지만 식욕이 전혀 없어진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다이어트를 하다가 잘못하면 거식증이라는 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일종의 정신병인데 음식을 거부하는 병입니다. 거식증은 그 병에 걸린 사람의 15%가 굶어죽게 되는 아주 무서운 병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능입니다. 그것을 추한 것으로 여겨 없앤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중의 하나는 대가 끊기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욕심과 본능을 무조건 죄악시하고 버리려고 하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와 같은 본능을 죄악시하고 버리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라 그것을 잘 다스리라고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본능과 욕심은 잘 다스려야 한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은 본능과 욕심은 잘 다스려야만 합니다. 그것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없애거나 모자라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잘 통제하지 못하여 지나치게 되어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물욕이 지나치게 되면 사람은 그로 인하여 온갖 죄를 짓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서 물질을 사랑하게까지 되면 그 때문에 만가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명예욕도 지나치게 되면 이전투구의 현상이 일어나 자신과 사회를 어지럽힙니다. 식욕이 지나치면 건강을 잃습니다. 성욕이 지나치게 되면 음란한 사람이 되어 자신과 가정과 국가를 망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양극단을 버리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가에 우리의 싸움이 있습니다. 지나쳐도 문제가 되고 모자라도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육체의 소욕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를 알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잘 다스리지 아니하면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다스리게 되면 일어나게 되는 일이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지 못하여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다스리게 되면 온갖 악하고 추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심각한 것은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육체의 소욕을 다스릴 수 있는가? 즉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 해답을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5:16-17)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려고 하면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른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려면 성령이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하여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해답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면 육체의 열매가 맺히듯이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면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삶에 맺히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2-23)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살게 되면 맺게 되는 열매들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맺는 열매가 분쟁과 시기와 다툼인 것에 비하여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희락과 화평입니다. 마음에 기쁨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습니다. 육체의 열매가 분냄과 다툼인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어려운 일을 전혀 만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아니하는 자가 똑같이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좇아 사는 사람과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에 관한 것입니다.
육체를 좇아 사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음으로 소망도 없습니다. 소망이 없음으로 어려움을 견뎌낼 인내도 없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음으로 그에게는 소망도 있습니다. 소망이 있음으로 그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도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는 결국 소망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넷째는 자비와 온유함입니다. 육체를 좇아 사는 사람은 인내심 부족함으로 자비와 온유함을 지닐 수 없습니다. 조급하며 신경질적인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인내심이 있습니다. 인내심이 있음으로 자연 자비롭고 온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나이 들어가면서 아름다워지는 길이 바로 이 자비와 온유함에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 늙어서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은 똑똑하다거나 용감하다는 것이 아니고 자비하다, 온유하다, 덕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살아갈 때 우리들은 그렇게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게 되면 추하게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섯째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되면 절제의 은사를 받게 됩니다. 절제처럼 우리의 삶에 중요한 은사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이 절제의 은사를 사모하셔야만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능에 대하여 생각을 하였습니다. 본능을 무조건 죄악시하여 부인하여도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잘못하여 그것을 다스리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면 또 그로 인하여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적당히 잘 조절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자라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절제의 은사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결단으로 본능을 끊는 일은 쉽지는 않지만 혹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불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어려운 것은 그것을 끊지 않고 잘 조절하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결단과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본능을 끊는 것보다 몇 배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도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되면 가능하게 됩니다. 절제의 은사를 받게 되면 그 놀라운 일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고 사는 삶을 욕심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24절에서 26절 사이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생활해야 할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함께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주와 함께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구주와 함께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한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 되면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면서 살 수 있게 되면 그는 진정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삶
사도 바울은 바로 그와 같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가 잘 아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됨으로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고 사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쓰시는 사람이 되려면 늘 우후죽순처럼 불쑥불쑥 피어오르는 교만의 잡초를 뽑아버리고 그분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제 겸손하게 살았어도 오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쉽게 교만해져서 높은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과 멀어지기 쉬운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의 위대함은 하나님과 가까워짐에 있고 우리의 위대함은 내가 연약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 때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 유명한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버리고 지체부자유자들에게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주위에 있는 자들이 왜 그런 결정을 하였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세상적으로 유명해지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을 때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내가 공원에서 지체부자유자를 만났을 때 그에게서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계신 그 장소로 갑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천상의 시인"으로 불렸던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란 시입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하늘나라로 돌아갈 때까지 하루하루를 극심한 고통과 가난 속에서 살았던 시인이 고백하고 있듯이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행복하게 하였을까요?
소유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돌아갈 영원한 생명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루하루를 가장 귀한 선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하루하루 삶이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자
우리의 생명이 양식에 있다고 생각하면 양식을 우상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대로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믿으면 하루하루 삶이 "일용할 양식’으로 너무나 행복하고도 감사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사는 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큰 능력이 나타난다
새해를 시작한지 어제 같은데 벌써 삼월입니다. 지난 두 달 동안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역사 하셨는지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쓰시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유명해지기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기보다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려고 다짐해야겠습니다. 우리 주위에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큰 능력이 나타납니까? 수력발전소는 수차가 크면 클수록 큰 에너지를 가집니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이 높아지고 우리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큰 능력이 나타납니다. 가장 겸손한 사람에게 가장 큰 능력이 나타나고 그 능력이 계속 유지됩니다.“교만하면 사탄과 가까워지고 겸손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는 아름답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을 사는 이 세상은 더욱 더 아름답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오늘은 너무나 행복합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의 삶에서만 이 행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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