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학 고전 <두지평> 저자 ‘티슬턴 교수’ 특강 2015-12-16 14:22:12 read : 66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국제신대원ㆍ에스라성경대학원에서 ‘성경 해석학과 설교’ 강의
세계적 성경학자 가운데 한 명인 안토니 티슬턴 교수(영국 노팅험대학교)가 목회자들의 가장 주된 관심이라 할 수 있는 ‘성경 해석학과 설교’란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성경해석학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두지평>의 저자이기도 한 티슬턴 교수는 29일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국제신학포럼’과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의 ‘개교 10주년 초청강연회’에서 두 차례에 걸쳐 해석학과 설교의 지평을 넓혀주는 강의로 많은 박수를 받았다.
설교자는 ‘작인자’ 아닌 ‘작인체’
티슬턴 교수는 이날 강의에서 설교자를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자신들은 투명한 유리창처럼 행하여야 하는 투명한 작인체(作因體 agency)’로 정의했다.
그는 “사도성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이 밝혀주는 바에 따르면, 신약의 사도들은 자신들을 적극적인 작인자(作因者 agent)로보다는 오히려 투명한 작인체로 보았다”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자신들은 투명한 유리창처럼 행하였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복음의 제시 앞에 십자가의 걸림돌 외에는 그 어떤 걸림돌도 두어서는 안 된다”면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투명하게 전하는 데 있어서 주제 넘는 방해물을 그 스스로 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지 부단히 물어야만 한다”고 조언했다.
특히 그는 설교자의 인간적 인격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을 만큼 과도하게 부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설교는 칼 바르트의 말처럼 ‘설교자 자신의 영적 체험의 일화들을 엮어 놓은 것’도 아니며, ‘설교자 자신의 가정생활이나 목회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서전적 이야기로 엮어 놓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에 “만일 설교가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며, 회중의 영적 생명도 설교자 자신의 창백한 성찰 이상을 넘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그가 이렇게 설교자를 정의하고, 중요시 여기는 것은 ‘설교’를 넓은 범주에서의 ‘하나님 말씀’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능한 가장 넓은 범주에서 생각해본다면, 최소한 세 가지의 기본 형태를 띤다”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 그리고 △성경의 주해와 해석과 현실화와 적용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와 살아계신 말씀을 사람들 속에 생생히 드러내는 ‘진정한 설교’를 꼽았다.
이와 관련, 그는 “물론 선지자의 말처럼 설교도 오류를 가질 수 있다”며 “그러므로 그것이 얼마나 성경에 대하여 신실한가 하는 관점에서 점검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가 목회자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사건적 선포로서의 성경적 설교’, 즉 ‘성경적 강해설교’를 추천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성경적 강해설교와 관련,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 및 행위와 뗄 수 없이 결부돼 있다”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한다는 것은 성경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것 이상”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성경적 강해설교는 하나님께서 말과 행위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는 통로, 곧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만나시고 빚으시는 행위의 형태를 띤다”며 “성경의 배경에 대한 지식이나 오늘날의 시대적 정황의 정보를 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포옹하고 키스하는 것이나, 연애편지를 개봉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설명했다.
주해와 해석이라는 ‘두 지평’ 융합돼야
성경해석과 관련해서 그는 주해(exegesis)와 해석(hermeneutics)이라는 ‘두 지평’의 융합을 강조했다.
△본문이 성경 안에서와 고대 세계 안에서 그 자체의 지평들 가운데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고찰과 △현 시대를 이해하는 청중들의 지평들을 고려하여 그 청중의 상황과 필요들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 서로 연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해석이 없는 주해는 정확성은 기할 수 있을지 모르나 추상화ㆍ황량함ㆍ관계성의 부족에 빠질 위험이 있는 반면, 주해가 없는 해석은 청중과의 교류에는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기만의 위험과 설교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체해버리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설교자들이 설교 본문 선택과 관련 ‘자신이 좋아하는 본문들만을 선택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여호수아ㆍ신명기ㆍ잠언ㆍ사도행전 등과 같이 신적 약속의 확신을 주는 예들을 제공하는 책들뿐만 아니라, 사사기ㆍ욥기ㆍ탄식의 시편들ㆍ전도서 등 성도들이 지불해야 할 대가와 아픔이 증거되고 있는 책들도 균형 있게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
설교비평, 멀지만 가야 할 길
강단에서 울려퍼지는 ‘미국 만세! 만만세!!’
한종호
필자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설교비평 작업을 진행하면서,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설교비평에 대한 지지를 비롯하여 적대적인 입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방식의 반응들을 통해서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한국교회에서 설교비평의 영역이란 매우 뒤처져 있다는 점이다.
문학작품도 바로 읽히고 바로 쓰이기 위한 과정에서 비평작업이 필수적이고, 영화도 그런 비평의 과정을 통해서 발전해나가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좌우하는 작업들에 대한 비평작업은 그 자체로서 이미 그 사회의 정신적 역량을 길러나가는 데서 막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에 깊숙이 닿아 변화를 이룩해나가는 설교야말로 가장 우수한 비평작업이 받쳐주어야 심도 있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등식으로 비평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비평 하면 이는 마치 신앙을 훼손하는 듯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신앙에 무지를 초래하는 일이자 신학적 세뇌에 우리 자신을 그대로 내어맡기는 경우가 된다.
만일 어떤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서, 주인에 대한 종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설파한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설교는 인간이 자유함을 깨우치고, 주종의 관계가 사라지는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주인과 노예의 질서를 강화하는 데 설교가 도구로 쓰인다면 이것은 설교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만일 어떤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서 독재자의 치적을 마치 성서에 등장하는 위대한 지도자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미화한다면 이것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서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하다고 가르치면 이는 설교가 아니라 세뇌이며, 성차별의 설파일 뿐이다.
그런데 설교란 성서를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명제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설교의 메시지에 대하여 일반 평신도가 논리적으로, 조직신학적으로,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명확하게 정리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평신도가 설교를 비평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나 안목을 가지지 못한 채 설교에 노출되면, 그것은 이들 평신도를 설교자의 일방적인 논리에 휘둘리게 만들거나 잘못된 신념을 갖도록 하는 일이 된다. 은혜라는 것은 올바른 메시지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의 결과이지, 잘못된 메시지에조차 무조건 ‘아멘’ 하는 것은 최면이나 오도(誤導)의 결과일 뿐이다.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교회의 강단
최근 한 교계기관이 서울과 경기, 전주 지역 교회를 무작위 추출해 교인들의 예배 의식을 조사한 결과 한국교회 평신도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교회 예배 설교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결과, 응답자 가운데 52%가 설교가 너무 길고 내용이 없어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11%는 설교 내용이 새롭지 않아 영적 양식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하다 못해 구멍가게도 과일 색깔이 바뀌면 물건을 바꿔 진열하는 판인데… 한국교회 설교는‘유통기한’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나가면서 성서적 메시지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것인가, 수준이 달라진 평신도를 대하는 설교자의 설교가 어떻게 질적으로 발전하도록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바로 이것이 설교비평이 감당해야 하는 영역이다. 설교비평이 발전하면 할수록 설교자들의 설교 수준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설교만이 아니라 타자의 설교에서 드러나는 문제나 한계를 민감하게 통찰해나가는 노력이 뒷받침될 때에 비로소 설교는 보다 치밀한 내용으로 구성되고, 보다 탄탄한 신학적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비평작업의 축적이 없으면, 미래의 설교자를 교육시킬 방법도 없게 된다. 신학교에서 설교비평작업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 설교에 대한 교육적 훈련은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이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설교에 대한 비평적 자기반성의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이를 지속적으로 진행시켜 나갈 수 있는 공동의 논의의 현장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설교비평에서 우선적으로 전제되는 것
설교비평은 자칫 좋은 설교를 난도질하여, 본래의 메시지가 주려는 감동은 묵과한 채 해부학적 논리만 지배하여 설교가 다른 장르와는 구별되는 영역을 지닌 것을 간과할 수 있다.
인체에 대한 이해가 해부학적 접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생명력이 전제되지 않는 인체 이해는 다만 해부도에 대한 이해로 그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해부학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인체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얻지 못하고 또 병이 들거나 시들어가는 생명력을 복원하는 의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설교비평이 수행해야 할 기능 또한 중차대한 것이다.
설교비평은 설교에 대한 해부학적 이해와 접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로써 병에 걸려 있거나 기능이 왜곡된 설교를 파악하고 이를 교정해나가는 힘을 설교자가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작업이다.
따라서 설교비평의 영역이 건강하게 발전하고, 이를 토대로 능력 있는 설교비평작업이 축적되면 이에 도움을 받는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를 놀랍게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설교비평작업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여 설교를 발전시킬 수도 있고, 설교비평에 대한 비평이 이루어지면서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논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논쟁의 훈련이 성숙하지 못한 경우, 설교비평은 인신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논쟁은 감정적 대응으로 치우쳐 본래의 목적을 상실할 수 있다.
따라서 설교비평에서 우선적으로 전제되는 것은 비평작업의 논리적 훈련과 그에 필요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소양과 함께 인격적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적 성숙이 동반되지 않은 비평작업은 ‘난도질’이 되고, 결국에는 인신공격의 차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논쟁이 논쟁다워지지 못하고 결국에는 인신공격적 감정대립으로 치닫고 마는 것은 모두 이러한 요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설교비평이란 설교에 담겨 있는 오류를 지적하고 그 오류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논점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기르고 이것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독자로 하여금 촉구한다. 평신도들이 설교비평적 안목과 지식, 그리고 반응의 능력을 수준 있게 가지게 되면 설교자들은 설교를 아무렇게나 하지 못할 것이다.
깊은 고뇌와, 심사숙고하는 마음과, 치열한 노력, 자기 비평적 시각을 통해서 한 편의 설교라도 그것이 갖는 힘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설교비평의 내용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작업이 꾸준하게 이어질 때, 한국교회의 강단은 새로운 차원의 비약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속적으로 진행시켜야 할 작업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공동의 자산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미국 예찬론’ 설교
최근 M교회 K 목사의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는 ‘미국 예찬론’설교를 살펴보자.
K목사의 “성도의 여유”(단 6`:`10-13)라는 설교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여유를 가지고 감당할 수 있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러한 믿음과 여유를 갖고 세상살이를 대한다는 것은 실로 기본이다.
그러기에 그의 설교는 주제로서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그런 주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난데없이 미국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야기의 본질은 심각하게 훼손되고 만다. 그러면서 K 목사가 이 설교를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들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 있기에 단정은 피하고자 하나, 그 내용 자체는 적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대로 넘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금방 응답받고, 금방 성공하고, 행복하고, 이것저것 다 가지려고 하면 그 사람은 재목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만사에 빨리빨리를 외치고, 당장의 결과를 얻으려는 욕심에 사로잡힌 이 나라 백성들의 심성을, 그는 그렇게 일깨우고 있다.
노벨 화학상을 받은 다나카 고이치의 경우를 들고, 수능 때문에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는 부모들에 대한 경고도 빠뜨리지 않으면서, 그는 다니엘의 본을 주목하게 하고 있다.
다니엘은 지금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는데도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바빌론 나라에서도 쓰임받고 페르시아에서도 쓰임받고 메대라고 하는 나라에서도 지금 총리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런데 같은 동료 총리들이 이 다니엘을 죽이려고 넘어뜨리려 하는 거예요…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 여유가 생기는 겁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거예요. 담대해집니다. 불안이 없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가 전개되면서 기도하는 링컨의 예를 들고, 기도의 힘을 역설하고 그로써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린다고 강조한다. 북한은 이 문이 열리지 않아 고생하고 있다면서, 결국 기도로 모든 것을 해결할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갑자기 이런 대목이 시작된다.
기도는 우리를 모든 위기에서 건져주십니다. 지금 세계는 위기 앞에 서 있지를 않습니까?…소련에 이번에 테러가 일어났는데 한 오십 명이 들어갔는데 그냥 독가스를 넣어 가지고 자기 나라 사람들까지 그냥 수백 명 죽여버린 거예요.
미국은 원칙이 절대로 그렇지를 않거든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한 명이라도 살리자는 겁니다. 프에블로호 납치가 바로 그거예요. 없애버리면 되지만 반드시 살려내는 거예요. 한 사람이라도 살려내는 거예요.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의 목사님이 다녀가면서 그래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미국을 다시 이해를 한대요. 자기들 나라에 와서 싸울 때도 항상 폭격하면 폭격한다는 삐라를 뿌린대요. 전부 방송을 해서 오늘은 어느 지역에 폭격을 할테니까 다 피하라고 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민간인 희생이 하나도 없었어요. 자기들이 보고 신기하다는 거예요.
미국은 걸프전뿐만 아닙니다.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탄 투하할 때도 이틀 전부터 계속 알렸대요. 피해라, 폭격한다, 피해라. 이번에도 이라크와 싸우려 하는 것도 나 같으면 그냥 팍 쏴 버릴텐데 우리가 간다, 싸움할 것이다, 우리 간다, 이런 싸움이 어디 있어요? 우리 곧 갈 거다, 갈 것이다. 이래서 어쨌든 인명 피해를 줄여요. 미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특별히 우리나라는 6·25사변 때 우리에게 와서 피 흘려 몇 만 명의 생명을 희생하면서 우리에게 자유를 찾아주었어요. 우리에게 안 그랬더라면 우리는 지금 북한처럼 저주받아 천하에 굶어 죽는 나라가 되었을텐데 이 번영, 이 자유, 이 발전, 미국 덕택이 아니에요?
해방된 것도 미국이 일본을 넘어뜨려서 우리가 또 해방이 된 거고, 그 이후로도 우리 교인들은 또 우리에게 선교사를 보내준 나라, 여기에 와서 수많은 병원 세우고, 학교 세우고, 우리가 여기까지 올라오도록 수많은 지원을 끊임없이 아끼지 않는 나라인데 미국에 대해서 우리는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그런 은혜를 알아야 해요.”
그러고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우선, 그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사실관계에서 틀리고 있다. 미국의 전쟁행위로 무수한 민간인들이 무고한 희생을 당함으로써 미국은 지금 세계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K 목사는 이러한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고 “미국 만세”만을 외치고 있다.
또한 목사가 설교에서 “나 같으면 그냥 팍 쏴 버릴텐데”라는 발언이 도대체 가당키나 한 것인가? 그는 미국이 목사인 자신보다 윤리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설교는 본질적으로 생명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설교에는 그런 메시지의 중요성은 전혀 간과되어 있고, 한마디로 미국에 대한 보은 심리를 가져라 하는 건데, 복음의 생명적 메시지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날 미국은 본래의 그 복음적 생명관에서 멀어져도 한참 멀어져 있다. 이것이 미국의 비극이다. 게다가 피해자에 대한 시각이 전혀 없다.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으로 인해 희생당하고 있는 이들이 하늘에 무슨 아우성을 지르고 있는지 한번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더욱이 그의 논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폭격을 할 때에 사전에 피하라고만 하면 폭격에 대한 모든 책임이 면제된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그런가? 전쟁을 하면서 사전에 선전포고만 하면, 그 이후의 책임은 없다는 것인가? 강한 무력을 가진 자가 약자에게 “너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죽지 않으려면 피해” 하고 말했다고 해서, 피하지 않은 사람이 결국 책임져야 하는 것인가? 가공할 폭격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주면서 폭격에 대한 희생의 결과에 대해 눈감는다.
그리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논리로 이어지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에게는 희생자들이 계속 발생하는 시스템 자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지켜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는 아무런 대답을 마련해주고 있지 않다.
오로지 미국에 대한 신앙적, 종교적 충성심에 사로잡혀 인간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눈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미국이 바로 이러한 극우적 종교관에 의해 새로운 방식의 십자군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 그것을 그는 아는 것인가, 모르는 것인가?
K 목사의 또다른 설교인 부시의 ‘악의 축’ 발언에 대한 설교를 보면 한마디로 점입가경이다.
‘악의 축’발언은 하나님의 책망?
이 설교는 요한계시록 3장 14-22절을 본문으로 한 “책망받는 자의 행복”이었다. 그는 사랑을 동기로 한 책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면서,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이니 이를 귀중히 여겨 우리 자신에 대한 회개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로서는 가장 적나라한 신학적 정당화가 아니었나 싶다. 전쟁불사를 외치면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한 강대국의 오만한 발상과 발언을 하나님의 경고로 등치시킨 논법을 우리는 어떻게 정리해내야 할까?
뿐만 아니라, 그의 ‘미국 예찬론’을 들어보면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그는 미국을 신처럼 모시는 모습을 보이기조차 한다. 미국이 말하면, 미국이 행동하면 그것은 언제나 온당하고 따라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생각과 주장이 ‘말씀 선포’라는 방식으로 관철되고, 이를 교인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심리적 강박관념에 몰리게 된다면 이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K 목사는 이렇게 그의 전제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우리가 죄로 인하여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에 바로 징계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경고도 해주시고 책망도 하시고 권고도 하여주십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권고와 책망을 들으려고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행복이며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나팔만 듣고 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 사랑의 품안에서 다시 한번 은혜를 받게 되고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의 제목이 “책망받는 자의 행복”이라고 되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다시피 그는 하나님의 책망은 우리를 향한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니 이를 받아 바로 깨닫는 것이 곧 은혜요, 복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관건은 현실에서 그 책망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책망인가 하는 데에 또한 문제의 핵심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추가하자면, 그 책망의 동기에 대한 파악이다.
우선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책망하시는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우리를 일생 동안 끊임없이 책망해주시는 분이 계신데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내 안에서 내 길이 잘못될 때, 불의할 때, 위험한 길을 걸어갈 때 성령께서는 말씀해주십니다.
꿈으로도 말씀해주시고, 어떤 사건을 통해서도 보여주시고, 어떤 아픔을 통해서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고, 또 특별히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여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책망이 나타난 사례를 짚고 있다.
지난 한 주간 우리에게 있었던 몇 가지 사건은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요,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심히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부시 대통령께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명한 것입니다. 전세계에 있는 200여 국가 가운데 가장 강도 같은 나라, 강도보다 몇 배 비교할 수 없는 나쁜 나라로 온 인류의 암덩어리로 북한과 이란과 이라크를 지목했습니다.
미국이 그렇게 경고하는 것은 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역사에 미국을 그렇게 경홀히 여기고 가볍게 생각하는 나라들은 모두 큰 재앙과 심판과 멸망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아프가니스탄도 큰소리쳤죠. ‘소련이 두 번이나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6년 동안 우리와 싸워도 우리를 이기지 못했다. 프랑스도, 영국도 이기지 못했다.
누구도 우리를 이긴 나라가 없다.’ 그런데 미국은 한 달 만에 다 멸하고 정권을 다 바꾸고 테러 사건이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나라의 지도자들이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미국 사람은 큰 전쟁에서 군인 한 사람이 죽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미국을 간단하게 보면 안 됩니다. 미국의 진단은 정확합니다.
미국이 강도라고 그러면 강도입니다. 미국이 암이라고 그러면 암입니다. 미국의 진단은 정확합니다.…(일본에 원자탄이 떨어진 것을 말하면서) …딱 3초 만에 30만 명이 동시에 다 죽었어요. 건물이 그냥 녹아져 내렸어요.…미국의 대통령이 100가지를 분석해 가지고 말하지, 즉흥적으로 말하는 일은 없습니다.……
K 목사는 미국의 생각과 미국의 세계관이 정확하고 정당하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귀중하게 금과옥조처럼 여기지 않으면 큰 코 다친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은 세상의 정의이자 심판자이며, 미국의 군사 행동은 그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선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에게는 전쟁의 원인이나 전쟁의 결과, 그 전쟁으로 인한 희생과 이로 말미암아 온 세계에 번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적대감의 의미가 무엇인지 눈에 들어오고 있지 않다. 오로지 “미국은 옳다, 미국은 의롭다, 미국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미국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라는 식의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결국 그에게 미국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낸 예언자이며, 경고자이고, 미국이 북한에게 한 ‘책망’(?)은 우리에게 행복으로 여겨져야 하는 권고라는 것이 된다. 솔직히 그의 이야기는 황당하기조차 하다.
미국 부시 정권의 ‘악의 축’ 발언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강력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전쟁을 장기화하려는 의도를 정당화하려는 논법이자, 평화적 해결을 외면하는 군사주의적 논리라는 지탄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하면서 자신의 발언이 엄청난 저항에 직면하자 ‘악의 축’이라는 표현은 두 번 다시 꺼내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리고 무수한 사람들에게 미국이야말로 엄청난 대량살상 무기를 소지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악의 축이 아닌가라는 반문에 시달려야 했다. 정작 하나님의 책망은 이렇게 사람들의 분노와 지탄 속에서 미국을 향해 쏟아졌던 것이다.
미국이 이러한 책망을 귀중하게 받아들여 자신들의 군사주의 노선, 전쟁 정책을 새롭게 반성하지 않으면 미국은 점점 더 고립되어갈 뿐이라는 게 자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반미운동의 거센 불길은 미국이 정당하고 옳다고 외치는 K 목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을까? 이 반미운동과 미국에 대한 불쾌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책망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고 마는 것일까?
정작 책망해야 할 자는 누구인가
또한 그는 아프가니스탄이 미국을 무시하다가 크게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아프가니스탄의 정세는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그 과정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산하가 철저하게 파괴되고, 무고한 민간인들이 무수하게 희생당한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가난하고 척박한 나라의 백성들을 대 테러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마구 학살하고 포로를 짐승처럼 다루어 세계의 비난을 받은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미국도 이 전쟁의 과정에서 희생자들이 늘어났고, 전쟁을 확대하고, 여기저기서 대 테러 전쟁을 벌이겠다고 장담했다가 상황이 쉽게만 돌아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동맹 세력인 유럽연합(EU)까지 미국의 확전 논리에 강한 반기를 들고 있다. 그렇다면 유럽도 인류에게 던지는 하나님의 책망과 맞서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교만한 강자를 미워하시며, 도리어 그런 강자를 책망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강자들의 횡포와 폭력에 시달리는 약자들의 편에 서신 분이다. “미국이 강도라면 강도이고 암이라면 암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K 목사는 하나님의 생각보다 미국의 생각을 더 높이 떠받드는 모양이다. 이집트도, 바빌론도, 로마도 모두 강한 힘을 믿고 오만하게 굴다가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책망은 그 패망의 과정에서 발견해야 한다.
K 목사는 책망의 대상을 잘못 골랐으며,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책망, 그 육성에 귀가 멀어 있다. 정작 책망받아야 할 자를 그는 책망의 주도자로 인식하는 엄청난 착각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 착각의 오류 속에 구원은 없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귀를 열고 이 시대의 위기를 조장하는 세력에 대한 예언자적 질타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식의 설교가 한국교회에 미국에 대한 맹목(盲目)을 조장하고, 식민지의식을 세뇌시키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비판의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한국교회는 이제 미국에 대한 성서적 이해와 예언자적 육성을 내야 하는 절박한 시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지난 12월 14일에 있었던 광화문의 촛불집회, 자주와 평화의 함성을 교회는 어떻게 담아내려 하는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