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내 동성애 전시회 여성성기책 전시 / 해마다 성도 1000명씩 늘어도, 서서 드리는 예배 감수 2015-07-17 11:49:37 read : 1999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서울시, ‘퀴어문화축제’ 서울광장 사용 허가 이어 이번엔 동성애 전시회에 시청 내줬다
음란물 전시에도 규정 어기고 ‘태평홀’ 무상사용 특혜
㈔신나는센터는 11일 서울시청 지하 2층 태평홀에서 ‘프라이드 페어’를 개최하고 여성 성기 그림책 등 음란물을 다수 전시했다. 주최측 관계자들이 사진촬영을 막고 어린이와 청소년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입구에 서 있다.
동성애자들에게 서울광장을 열어준 서울시가 이번엔 규정을 위반하면서 서울시청을 빌려준 것으로 밝혀졌다.
㈔신나는센터는 서울시 시민청(市民聽)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시청 지하 2층 태평홀에서 11일 ‘프라이드 페어’를 개최했다. 신나는센터는 영화감독 김조광수씨가 2013년 9월 남남(男男) 결혼식 때 받은 축의금으로 설립한 동성애자 인권단체다. 행사 목적은 ‘성소수자 문화생산자의 창작물 전시’였다. 서울시 청사를 관리하는 시민청은 이 단체에 370㎡ 규모인 태평홀과 내부시설, 장비의 무상사용을 허가했다.
하지만 ‘프라이드 페어’에서는 행사 목적과 달리 음란물이 전시·판매됐다. 지난달 28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때 음란사진을 게시한 ‘이쪽사람들’과 여성 성기 그림책 등을 전시했던 ‘Bozzy party’ 등은 축제 때 선보였던 음란물을 버젓이 판매했다.
문제는 이 행사가 사업기간과 심사기준 등을 위반했다는 점이다. ‘서울시 시민청 운영 및 관리 조례’에 따르면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 참여와 소통에 기여할 수 있는 전시 공연 행사 등을 위해 대관을 허가할 수 있으며, 허가목적을 위반할 경우 대관허가를 취소하거나 사용을 정지시킬 수 있다’고 돼 있다. 주최 측이 허가 목적을 위반했지만 서울시는 별다른 제재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게다가 ‘2015년 하반기 시민공간지원사업 공모요강’에 따르면 서울시청을 무료로 빌릴 수 있는 기간은 오는 8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였다. 하지만 서울시는 이를 어기고 사업 시작 20일 전 동성애자들에게 공간사용을 허가했다.
태평홀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행사에 참여 가능한가’ ‘시민들에게 공개해도 적합한 사업인가’ 등 8개 심사항목을 통과해야만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시민들의 자유로운 접근권은 제한됐고 공공성은 지켜지지 않았다.
김모(35·여)씨는 “초등학생 자녀와 무슨 행사인지 둘러보려고 했는데 입구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이 보기엔 부담스러운 전시물이 있다’고 통제해 발길을 돌렸다”면서 “박 시장은 시민들에게 공개하지도 못하는 동성애자들의 행사를 서울시청 안에서 개최하도록 허가해준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따졌다.
권모(38·여)씨도 “야한 부위를 그린 책자와 커피를 파는 부스도 있었다”면서 “시민을 위한 공적 공간에서 음란물을 전시하고 팔아도 되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시는 시민들의 항의를 받고 직원 10명을 파견해 전시물의 유해성 여부를 점검했지만 전시물을 철거하지는 않았다.
같은 시간 옆 공간에서 열린 ‘아이조아 놀이교실(유아반)’에 참여하는 학부모와 유아의 우회통행을 유도했으며, 청원경찰을 배치했을 뿐이다. 주최 측 자원봉사자들은 곳곳에서 사진촬영을 금지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공모요강 중 사업기간 위반은 우리의 실수가 맞다”면서 “서류만 보고 서울시청 무료사용을 허가했는데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차후 실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사과했다.
다른 관계자는 “태평홀은 공공장소이기 때문에 규정상 판매행위를 할 수 없다”면서 “여성 특정부위가 그려진 책자를 팔았다는 이야긴 처음 듣는다”고 무책임하게 말했다.
신나는센터는 오는 9월 서울시청에서 토크 콘서트를 개최한다며 장소사용 허가를 받아놓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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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0주년 맞은 100주년기념교회, 해마다 성도 1000명씩 늘어…
“하나님께만 집중” 저력 확인
서서 드리는 ‘불편한’ 예배, 십자가 복음 중심 설교와 투명한 정책 결정이 특징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가 13일 서울 마포구 양화진길 홍보관 예배실에서 개최한 창립10주년 기념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김영봉 와싱톤한인교회 목사의 요한1서 강해를 듣고 있다.
13일 오후 8시 서울 마포구 양화진길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이재철 목사) 홍보관 예배실. 평일 늦은 시각인데도 이곳 예배실과 사회봉사관 등이 성도들로 가득 메워졌다. 100주년기념교회가 창립10주년기념으로 마련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다른 교회의 창립기념집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명 목회자나 부흥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집회는 오직 성경강해로만 진행됐다. 강사인 김영봉 미국 와싱톤한인교회 목사는 ‘그분을…’이라는 주제로 성경 요한1서를 강해했다. 성도들은 부지런히 필기하며 밤 10시까지 강의에 집중했다.
이날 집회에선 지난 12일로 창립 10주년을 맞이한 100주년기념교회의 목회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교회는 2005년 20여 교단과 26개 교계 기관이 참여한 100주년기념재단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관리를 위해 세웠다. 이곳 묘원은 130년 전부터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 별세한 외국인선교사들이 안장된 곳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 위기론이 팽배한 가운데 짧은 시간 급성장한 것으로 더 주목받고 있다. 최근에는 한 해 1000여명씩 성도가 늘어 전체 출석성도가 8000여명에 달한다. 특히 여러 가지 이유로 기존에 출석하던 교회에 실망한 이들이 많이 찾는다.
이재철 목사는 지난 12일 창립기념 주일예배에서 “우리의 소명은 한국 개신교의 양대 성지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과 용인순교자기념관을 관리 보존하고 한국교회 선교 200주년을 향한 비전을 함양하는 것”이라면서 “철저하게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선조들의 믿음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100주년기념교회는 이처럼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기독교의 본질을 추구한다. 특히 ‘자기 부인’의 영성을 강조한다. 주일예배는 ‘불편한’ 예배로 진행된다. 설교와 광고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교인들은 서서 예배를 드린다. 설교도 십자가 복음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정한조 선임목사는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며 “진리를 갈구하는 분들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우리 교회를 찾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교회 정책도 투명하게 공개된다. 이 교회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상임위원회는 교역자 29명을 포함해 79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곳에서 결정된 사항은 306명의 구역장에게 이메일로 전달되며 구역장들은 구역모임에서 관련 내용을 공지한다. 결산보고서도 매달 유인물로 배포되며 교회 홈페이지에도 공개된다.
이덕주 감신대 교수는 “이재철 목사는 공동목회를 추구하며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토론과 의견을 중시한다”며 “한국교회에 흔치 않은 이 같은 리더십이 기존 교회에 실망한 교인들의 수평이동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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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철 목사 “‘동성혼 판결’보다 ‘말씀’ 존중해야”
100주년기념교회 10주년 예배서 동성애에 대한 견해 밝혀
▲이재철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재철 목사가 12일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기념교회(이하 100주년기념교회) 주일예배 설교를 통해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에 대해 언급했다.
이 목사는 이날 100주년기념교회 창립 10주년 기념주일 설교 ‘태반이나 알지 못하더라(행 19:23-32)’ 말미에 “어느 나라보다 여론에 민감한 미국에서, 여론에 따라 세속 법정 대법관 5명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것은 이성적으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서도 “교회가 그 판결과 여론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절대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밝혔다.
그는 “1989년 덴마크를 필두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고 그 판결을 교회가 수용한 16개국의 공통점은, 그 나라의 신학교와 교회들이 이미 무너져 형태만 남았거나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라며 “하나님 말씀 가운데 한 말씀이라도 인간의 입맛대로 요리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집, 교회라는 집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 속에는 우리와 종교, 이념, 문화,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고, 이는 동성애자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라며 “종교가 다르다 해서 불교 신자나 불신자인 이웃을 사랑하지 못해선 안 되듯, 우리는 사회 변화 속에서 동성 커플들과도 차별 없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
이재철 목사는 “우리는 동성 커플들의 결혼을 합법화한 열여섯 나라의 대법관들, 그리고 동성애에 우호적인 분들의 이성과 지성도 존중한다”며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지성이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인 성경 말씀을,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이성과 지성 속에 새겨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존중하는 그리스도인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목사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결혼에 대한 첫 번째 명령은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에 명시돼 있다”며 “결혼에 관한 한 하나님의 이 첫 번째 명령에서, ‘남자’와 ‘아내’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각각 남자와 여자를 뜻할 뿐, 어떤 경우에도 ‘남자와 남자’ 혹은 ‘여자와 여자’로 해석될 수 없다”고 했다.
이재철 목사는 마지막으로 “창립 10주년을 맞아 부족한 우리를 믿으시고 거룩한 소명을 맡겨 주신 주님께서, 이미 영으로 우리 안에 임해 계시고 벌써부터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품고 계심을 감사하자”며 “그 주님의 은혜 속에서 양화진에 묻혀 있는 선교사들의 신앙을 이어받아, 어떤 경우에도 바울처럼 말씀의 순전한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새롭게 결단하자”고 권면했다.
또 “그래야만 우리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향한 길,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친히 보여 주신 말씀과 십자가의 도를 닦아갈 수 있다”며 “바로 그것이 우리 개개인의 믿음이라는 집, 교회라는 집, 우리 국민과 사회라는 집, 온 세계와 인류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집을 견고하게 세우는 길”이라고 했다.
한국교회에 대해서는 “온갖 프로그램과 구호가 넘치지만, 본문 속 에베소의 미련한 군중들처럼 정작 한국교회가 어디로 가는지, 또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풍족한 생활과 부와 번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느라 말씀이 실종됐기 때문”이라며 “그리스도인 스스로 말씀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자신과 교회의 미래를 동시에 허물어 뜨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말씀에 기인하는 삶이요, 교회는 곧 말씀의 집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목사는 지난 2010년 6월 양화진문화원이 주최한 대담에서도 “동성애자들의 인권이나 권익을 지켜야 한다는 대원칙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동성애라는 것이 ‘비정상성’을 가짐은 분명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며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남자와 여자가 합일체를 이루는 것을 결혼이라고 하셨지, 동성적 합일체를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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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탈루 혐의’ 박성철 신원 회장 구속
수십억에 달하는 세금을 탈루한 혐의 등을 받는 박성철 신원그룹 회장(75·사진)이 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 김도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13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조세) 등의 혐의를 받는 박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고 밝혔다. 김 부장판사는 “수집된 증거자료에 의해 소명되는 범죄 혐의의 내용과 성격, 수사의 진행경과 등에 비춰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이날 오전 영장실질심사가 예정돼 있었지만 출석하지 않았다. 지난 8일 검찰 소환 조사를 받은 박 회장은 “자숙하는 취지”라며 영장실질심사를 포기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법원은 기록 검토만으로 박 회장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연합뉴스
앞서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세조사부(한동훈 부장검사)는 지난 9일 거액의 세금을 탈루하고 법원을 상대로 회생사기를 벌인 혐의로 박 회장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은 박 회장은 그룹 지주회사격인 ㈜신원의 워크아웃 이후 경영권을 되찾는 과정에서 가족 명의로 주식거래를 하고 세금을 내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탈루 세액은 종합·양도소득세와 증여세를 합쳐 30여억원으로 알려졌다.
박 회장은 2008년 개인파산, 2011년에는 개인회생 절차를 각각 밟으면서 재산이 없는 것처럼 꾸며 개인 빚 250여억원을 탕감받은 혐의도 받고 있다. 검찰은 박 회장이 실제로는 차명재산을 보유하고도 회생절차 때 법원을 속였다고 보고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도 추가했다.
이날 구속영장이 발부됨에 따라 검찰은 박 회장의 구체적인 횡령액을 확인하는 한편 탈세와 회생사기에 관여한 주변 인물들의 사법처리 여부도 검토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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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혼 합헌 판결,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리치 네이선 목사의 편지 10…동성 결혼이 미국에서 환영받는 이유
리치 네이선(Rich Nathan) 빈야드콜럼버스교회 담임목사가 교회 소식지에 쓴 칼럼들을 번역해 연재한다. 그는 종교학, 역사학, 법학을 전공한 후 변호사이자 오하이오주립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부르심을 받아 1987년부터 빈야드콜럼버스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현재 빈야드콜럼버스교회는 네 개의 위성 교회를 가진 교회로 성장했다. 리치 네이선 목사는 복음 전도와 사회정의라는 복음주의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여 복음의 온전성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애써 왔다. 해외 선교와 아울러 노숙자와 이민자들을 섬기는 사역에 주력해 왔다. 그는 미국에서 대내외적으로 유명한 강연자이며 많은 사람들이 지역 방송을 통해 그의 설교를 듣고 있다. - 역자 주
2015년 6월 26일, 미국 대법원은 헌법상 동성 커플의 결혼을 미국의 모든 주에서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할 것을 다수결로 결정했습니다. 동성 결혼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5명의 대법원 판사 중 한 명인 앤소니 케네디는 "대법원은 동성 커플들이 모든 주에서 결혼할 수 있는 근본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습니다"라고 발표했습니다.
▲ 빈야드콜럼버스교회 리치 네이선 목사.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공용)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결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반응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앤소니 케네디 판사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에 대해 심리학적인 분석을 하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앤소니 케네디 판사가 판결문에서 기록한 대로, 미국 대법원 역사상 동성애자의 권리에 관한 견해는 오직 네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앤소니 케네디 판사에게 상당히 영향을 끼친 법조계 내의 멘토가 동성애자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따라서 앤소니 케네디가 쓴 동성 결혼에 관한 법적 견해는, 그가 자신의 멘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쓴 행정적 진술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미국 대법원이 내린 결정을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동성 결혼 허용을 반대해 온 존 로버츠 대법관은 반대 의견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다섯 명의 대법원 판사들이 사람들과 토의를 단절하고 자신들의 결혼관을 헌법에 반영시켰습니다. 결혼관에 관한 문제를 사람들로부터,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법원이 훔쳐 온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동성 결혼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결과를 예측하게 합니다. 이 결정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아주 어려운 엄청난 사회 변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왜 그는 이처럼 강한 언어를 쓰며 반대했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종신 판사들로 이루어진 대법원에서, 단 한 번의 다수결로 미국 사회가 결혼에 관해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결정하는 힘을 행사하여 결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결혼의 문제는 개인들과 주 의회 의원들이 씨름해 왔습니다. 미국 내 11개 주만이 민주적인 행동으로 동성 커플들에게 결혼의 권리를 부여하였습니다. 그중 8개 주는 주 의회에서 결정했으며, 3개 주는 대중들의 투표로 결정하였습니다.
나머지 39개 주는, 이번 대법원의 결정을 포함하여 연방법원의 결정에 따라 자신들의 법을 뒤집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미국인들이 포기와 냉소의 감정으로 대응할 것입니다. 대법원이 단 한 번의 다수결을 통해 그동안 이루어진 민주적인 행위들을 모두 무효화하는 결정을 내린다면, "투표해서 뭐해? 수고롭게 논쟁하고 로비하고 글을 쓰고 캠페인 벌이고 시민운동가들을 괴롭혀서 뭐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법원의 판결을 시민권의 승리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대통령은 백악관을 무지개 색으로 불을 밝혀 대법원의 결정을 축하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의 담화문에 동의했습니다. "이 결정은 미국을 위한 승리입니다. 이 결정으로 수많은 미국인들이 믿고 있는 바를 확정하였습니다. 모든 미국인들이 진정으로 평등하게 대접받을 때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대법원의 판결은 서구 문명 또는 미국 문화가 붕괴되어 가는 증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블로그상에서는 대법원의 결정을 비판하는 기독교인들로 가득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미국을 심판하실 것을 믿는다. 대통령의 언급에서 보이는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매일 주변에서 목도하고 있는 도덕적 붕괴와 다르지 않다."
로버츠 대법관은 기독교인들을 위해, 그가 기존에 쓴 다른 의견들보다 훨씬 더 강한 어조로 반대 주장을 썼습니다. 이 결정으로 미국에서 종교 자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분명한 경고로 들립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행사할 때,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동성 결혼에 관한 새로운 권리를 인정할 수 없는 종교 기관들에서 빚어질 갈등입니다. 예를 들어, 신앙에 기반하여 설립된 대학교에서 결혼한 학생들에게 숙박 시설을 제공할 때 이성 커플들에게만 제공한다거나,
종교 입양 시설에서 동성 결혼 커플들에게 어린이들을 보내는 것을 거절한다거나 할 때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사실, 법무차관은 종교 기관들이 동성 결혼을 반대하면 세금 면제 혜택을 철회할 수 있음을 시인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신앙인들은 오늘날 다수로부터 이러한 일들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독교 학교에 대한 엄청난 압박이 올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종교 학교 시설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 학교들은 이러한 공격으로부터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종교 기관들이 받고 있는 세금 면제 헤택에 대해 도전을 받을 것입니다. 대법원은 "인종적으로 차별적인 사립 교육기관들에 세금 면제를 허락하는 것은 전적으로 양립하기 어렵다"는 판결을 밥 존스와 미국 정부 간 분쟁에서 내린 바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성 결혼을 부인하는 것은 공공 정책에 대한 위반으로서 세금을 면제받지 못하게 되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빈야드콜럼버스교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지도자들은 만장일치로 동성 커플들에게 결혼을 주례하지 않을 것이며, 동성애자를 목회자로서 세우지 않을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대법원이 뒤집을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을 지지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대법원의 결정이 반민주적으로 이루어지고, 법원에 의해 결혼에 관한 정의가 혁명적으로 바뀌어 수천 년 동안 이루어진 결혼관을 내팽겨쳐 버렸고, 종교의 자유가 위협을 받게 되는데도, 대법원의 견해가 왜 미국에서 이처럼 환영을 받을까요? 왜 대다수 사람은 그 견해가 문제가 있음에도 받아들일까요? 왜 수많은 사람이 그것을 지지할까요?
제 의견으로는, 동성 결혼에 관한 대법원의 결정이 오늘날 미국에 가장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철학을 명백히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철학은 버클리대학교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가 1990년 정의한 바 있는 '표현주의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alism)입니다. '표현주의적 개인주의'는 기본적으로 여타의 의무 사항에 우선하여, 최고의 가치를 '진정한 자아'에 둡니다. 우리는 '표현주의적 개인주의'를 이런 식으로 나타냅니다. "그것이 내게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져" 혹은 "나는 내 자신에게 정직해야 할 필요가 있어" 혹은 "거짓으로 살지 않을 거야".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을 폐지하는 선택을 한 대법원은 (14번째 수정헌법의 평등한 보호라는 구절 아래) 동성 커플들이 이성 커플들과 똑같이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케네디 대법원 판사는 "결혼에 관한 선택의 권리는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개념과 부합합니다.... 이러한 자유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율성의 중심에 있는 개인의 선택에까지 확대됩니다. 거기에는 동성 결혼 및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내밀한 선택을 포함합니다"라는 주장을 자신의 판결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케네디 판사의 의견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헌법의 원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표현주의적 개인주의' 철학에 근거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철학은 미국인들의 마케팅과 미디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런던의 패트릭 매디건 교수는 "'표현주의적 개인주의'는 자아를 제한하는 모든 것을 부모의 학대, 심리적 압박, 혹은 문화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거부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표현주의적 개인주의' 철학과 어떻게 다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과제가 예수님의 제자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표현주의적 개인주의'로부터 벗어나도록 훈련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목표를 발전시키는 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즉 자아를 향상하거나 자신들의 진정한 꿈을 성취하기 위해 결혼하고 자녀를 가지며 진정한 사랑이나 그 무엇을 찾고자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도라는 것이 삶의 이러한 목표들로부터 돌아서서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동성 결혼을 허용할 것인가에 관한 정치적 투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동성 결혼 옹호자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제 교회가 기독교인들을 '표현주의적 개인주의'로부터 돌이켜서 예수님을 혁명적으로 따르도록 가르쳐야 할 때입니다.
교회의 공적 증거에 대하여,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데이비드 브룩스는 현명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들은 혜택받지 못한 지역으로 들어가서 가정이 안정적으로 세워지도록 돕는 사람들입니다. 공동체가 없는 곳에 들어가서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경제적 비자립과 영적 빈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를 생각하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변화하고 초월하도록 돕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벌어지는 문화 전쟁은 알버트 슈바이처, 도로시 데이와 가깝습니다. 제리 팔웰과 프랭클린 그레이엄이나 구세군 또는 도덕적 다수 그룹 등이 벌이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이미 사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의도적으로 대중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로 (동성 결혼 결정으로 인한) 성의 혁명을 쉽게 되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실질적으로 해야 할 싸움은, 깨어지고 용서함이 없고 우호적이지 않은 사회를 교회가 보살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혁명적인 부르심을 따르는 사람들을 훈련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에 우리의 노력을 배가하는 것이 최근 이루어진 대법원의 결정에 대해 미국 교회가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식입니다.
강희정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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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여, 위로하려 하지 마라 윤득형 목사의 <슬픔학개론>(샘솟는기쁨)
정현욱
아내가 유방암에 걸리고 나서 몇 가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나는 조심스러워 말을 아예 꺼내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집요하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것이다. 슬픔을 당한 이들을 돕는 것은 어렵다
. 위로라고 하지만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하고, 그렇다고 무관심하면 서운해할 것 같은 걱정이 든다. 나 또한 목회를 하면서 죽음을 당한 가족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무관심한 적도 있고, 교과서식 답안만을 늘어놓기도 한다. 많은 이들은 이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고통은 타자가 공유할 수 없는 고립과 정신적 소외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고립과 소외는 타자로부터 일어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고통당하는 그 사람에게 내재한다. 고통을 당하는 순간 입에서 나오는 말이 '왜?'라는 물음인데, 이 물음에는 '왜 나만 당해야 하는가?'와 '하필이면 내가 당해야 하는가?'라는 원망이 스며 있기 마련이다.
스스로 타인들로부터 배제당하고, 고립되었다고 생각한다. 슬픔은 높고 두꺼운 분리의 담을 쌓는다. 그 담을 허물고 치유의 공간으로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내 스스로 지금 나의 상황에서 누군가가 어떻게 말해 주는 것이 좋은가를 생각해 보았다. 당사자인 나도 무엇을 말해야 할지 난감하다.
▲ <슬픔학개론> / 윤득형 지음 / 샘솟는기쁨 펴냄 / 248쪽 / 1만 4,500원
"삶은 죽음을 통해 성장하고 슬픔은 표현됨으로 치유된다!" 문장이 가슴을 울린다. 죽음은 삶을 진실하게 만들어 준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누군가의 농담처럼 태어날 때는 주민등록순이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일 때가 많다.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당황한다. 죽은 당사자는 말이 없지만, 남겨진 유가족들의 아픔은 치유될 수 없는 아픔으로 남겨진다. 죽음도 연습과 준비가 필요하다. 저자는 삶 속에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일러 준다.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어떻게 죽음을 인식시켜야 할지도 알려 준다.
저자는 아버지의 병으로 인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서원 기도를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 아버지는 돌아가신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가 던졌던 질문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였다(26쪽).
하나님은 바위처럼 요동하지 않는다. 때론 무정하고 비정하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절망과 실의(失意)는 삶의 의미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집착하게 만든다. '고통에는 뜻이 있다'고 하거나, 하나님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위로는 오히려 상처를 주고, 믿음에서 떠나게 한다.
"그 시간이 지나면서 아픔과 슬픔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에게 섣불리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위로의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략) 혹은 적당한 말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 그저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요'라고 말하는 것 또한 삼가는 것이 좋다. 차라리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 주고 함께 있어 주는 것만도 못하다." - <슬픔학개론> 26쪽
차라리 입을 다물고 손을 잡아 주는 것이 훨씬 낫다. 수년 전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기겁을 한 적이 있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茫然自失)하여 울고 있는 성도를 향하여 집례 목사는 "집사님 그만 우세요. 천국에서 만날 텐데 왜 그리 슬퍼하십니까?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축복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의 경험 속에도 비슷한 사례가 읽힌다(87쪽). 교리적으로 죽음을 풀어 나갈 때 슬픔을 당한 자들은 큰 고통을 당한다. 인생은 수학 문제가 아니다. 뻔한 공식으로 인생의 문제를 풀 수 없다. 그럼에도 소위 믿음이 좋다 하는 이들은, 대체로 죽음은 곧 천국이니 슬퍼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도리가 아니라는 공식을 대입한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위로를 할 수 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완벽한 위로는 불가능하다.'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37쪽)." 또한 '극복의 대상'도 아니며,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다(38쪽). 있는 그대로를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애도(哀悼)의 과정인 것이다.
저자는 모두 7장으로 나누어 슬픔의 문제를 다룬다. 대체로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문제를 다룬다. 거대한 슬픔에 노출된 유가족들의 아픔과 상처를 공감해 주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슬픔의 치유책이 될 것이다. 저자는 슬픔의 치유 전문가답게 슬픔의 이론적인 부분에서 죽음을 어떻게 직면시킬 것인가, 자녀들에게 죽음을 교육하고(3장), 병원과 사회 속에서 삶과 죽음을 나누는 방법(4, 5장) 등을 세세하게 알려 준다.
151~152쪽에 소개된 알렌 울펜 박사의 '슬퍼하는 사람과 동반하기' 11가지 원칙은 슬픔을 공유하기 낯설어 하고 방법을 몰라 당황하는 이들에게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슬퍼하는 사람과 동반하기는,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다(1). 슬픔을 해결해 주려는 책임감에서 벗어나야 하고(2),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4). 해석자가 아닌 증인 되어 주라(5). 이끌지 말고 곁에 있어 주라(6). 말로 채워 가지 말고 침묵의 거룩함을 발견하라(7). 혼란과 혼동을 정리하려 하지 말고 상황을 그대로 존중하고(9), 가르치려 하지 말라(10). 즉 신영복 교수의 조언대로,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성장의 논리에 함몰되어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무관심하고 소외시켜 온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책이다. 이젠 앞만 향해 달려가는 급행열차가 되지 말고 천천히 주변을 되돌아보는 완행열차가 되었으면 좋겠다. 참 좋은 책을 만났다.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싶은 이들에게 주는 최고의 책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영적 돌봄을 추구하는 목회자와 교사, 구역장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정현욱 / 로고스서원 연구원, 반석교회 부목사
동성결혼식 케이크 제작 주문을 거부했다가 최근 오리건주에게서 13만 5,0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기독교인 빵집 주인이,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쓰레기 수거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클라인 부부는 최근 더데일리시그널(The Daily Signal)과의 인터뷰에서 “빵집 문을 닫은 후에 수입이 급감한 데다, 벌금형까지 받아서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남편인 애런 클라인은 생활비 마련을 위해서 쓰레기 수거 일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클라인 부부는 13일(현지시각)까지 벌금을 내라는 통지서를 오리건주 노동·기업인권국에게서 받았으며, 이를 내지 못하면 집이 담보로 잡히게 된다. 현재 이들을 위해 온라인을 통해 모금운동이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미국 전역에서 기독교인들의 도움이 계속되어 20만 불이 넘게 모금된 상태다.
오리건주 관계자는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물론 항소할 수도 있다”고 했다.
클라인 부부의 변호사인 자유수호연맹(Alliance Defending Freedom)의 애나 하몬(Anna Harmon)은 “이 통지서는 주정부가 총을 빼든 것과 같다”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예배에 열심인 아름다운 관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마 전세계의 교회들 중에서 한국교회처럼 공예배가 많은 교회는 드물 것입니다. 특히 전체 교인수의 약 80%가 출석하고 있는 중대형 교회로 가면 더욱 그렇습니다.
주일 아침부터 시작해서 2부예배, 3부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구역예배, 금요일 철야예배, 그리고 토요일 찬양예배에 이르기까지 한주일 내내 예배가 많습니다. 매일 있는 새벽기도회도 명칭은 기도회이지만 그냥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와 찬송이 있으니 사실상 새벽예배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물론 예배가 많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과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리고 서로 교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를 우리는 자주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6:6)."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제사만 열심히 드리면 그게 곧 '하나님을 잘 경배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조차 삶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자주 어기면서도 희생의 제물을 잘 바치거나 화목의 제물을 바치기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피를 즐기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먼저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사는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형식일 뿐이었지요. 그런데 그만 껍데기가 내용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계속 끊임없이 지적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는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3)."고까지 말씀하셨을까요.
그런데 오늘날도 우리는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절기와 주일을 지키고 예배로 모이는 데에는 아주 선수입니다. 그 덕분에 세계에서 등록 교인 출석율 1위는 분명히 한국교회일 겁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도 다른 것은 몰라도 신도들을 동원하는 데는 매우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서 어찌 하든 열심히 모여서 예배하고 물질을 바쳐야 할 근거를 아주 성공적으로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큰 무리를 모으고, 큰 건물을 세우고, 대형 교회를 만드는 데에는 대단한 교회사적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삶이 결여된 예배
하지만 문제는 그게 거의 전부라는 데에 있습니다. 매주 아침부터 그리 힘들게 모였으면 거기에 합당한 거룩한 열매가 풍성하게 나와야 정상이건만 신도들의 삶은 그다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흥행하여 사람 모으기에는 큰 성공을 했지만, 오히려 종교 장사로 변질한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진리가 없고, 영혼이 없고, 그리고 실천이 없는 설교가 공예배를 종교 이벤트로 전락시키기도 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를 지적하여 "한국교회의 설교 시간은 성도들의 세속주의적 욕망과 목회자들의 성공주의적 욕망이 만나 춤을 추는 현장"이라고 극평을 합니다.
최근 필자는 일부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를 자주 듣고 있습니다. 헌데 이건 예배가 아니라 무슨 무당 굿거리 같습니다. 도리어 평생 그런 기복적 설교를 듣고서 교인들의 삶이 변화한다면 그게 더 기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예배는 매주 무당 목사의 '원맨쇼'를 매우 비싸게 관람한 후 '아멘'과 '할렐루야'로 답하면 그게 끝입니다. 한국교회는 "모여라, 돈 내라, 집 짓자!"라는 말밖에 모른다는 탄식이 괜히 나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인들의 눈에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향기를 잘 느끼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모두 경건하고 독실한 신도들인데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갑자기 그 향기가 실종됩니다. 과연 이게 무슨 조화일까요.
그리고 어쩌다가 고작 간증한다는 것이 주로 이상한 은사를 받았다던가, 병이 나았다던가, 남편이나 자식이 성공했다거나, 아니면 부자가 되었다는 '복 이야기'들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목회자들은 그걸 믿음의 큰 축복이라고 화답하며 신도들을 그 방향으로 고무시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복이 없으셔서 평생 그리 가난하게 사셨던가요? 왜 우린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다가 무수히 고난을 받고 지지리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잘 안 할까요. 예수님을 믿어도 사업에 망하고, 중병에 들고, 승진에 탈락하고, 시험에 낙방하고, 그리고 동네 거지 나사로처럼 가난할 수 있다는 말은 왜 안 가르치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을 그리스도의 작은 제자가 된 기쁨으로 감사하게 살고 있다는 놀라운 간증은 왜 보기 힘든지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목사는 교인의 삶이 변화하도록 성실히 노력하는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그저 예배만 열심이면 과연 만사가 형통할까요. 왜 오늘날 그 많은 예배에도 불구하고 툭하면 교회돈을 횡령하거나 교권 남용, 뇌물 수수, 성추행, 표절, 세습, 성직 매매, 황제 식사, 사치 골프, 잦은 해외 여행, 고소 남발 등 목회 만행이 그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예배라는 성스러운 이미지를 이용하여 그것을 상업화하고 헌금을 많이 걷어 사욕을 채우려는 사악한 세력들이 분명히 교회 내에 상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요즘 개신교 목사님들께서 못 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거꾸로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말로는 주의 일을 한다고 아름답게 생색을 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사익을 챙기기 위한 종교 사업에 열을 내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던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여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백성들은 '사랑의 삶'은 성실히 실행하지 않으면서 그저 예배만 뜨겁게 드리고 세속적 복을 듬뿍 받으면 되는 것으로 자족합니다. 그래서 작금의 개신교는 세상을 향해 비상하는 '독수리 교회'가 되지 못 하고, 허구한 날 온실같은 예배당 속에서 응석을 부리는 '병아리 교회'가 된 것입니다.
공예배를 잘해도 망한 교회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제사를 아주 잘 드렸어도 망했습니다. 그들보다 더 제사를 철저히 잘한 민족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외형상 바리새인들보다 더 율법을 잘 지킨 사람들도 드물 것입니다. 그들보다 더 십일조를 잘한 교회도 찾기 힘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과 한 세대 후에 모두 몰살을 당했습니다. 아무리 제사를 잘 드리면 뭐합니까. 그것이 종교 장사로 변질되어 종교지도자들의 배만 불리고 단지 백성을 우민화하는데 이용되었을 뿐인데요.
중세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교회당 속에 신도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주일마다 엄숙하고 장엄하게 미사를 잘 드렸지만 그래도 결국 망했습니다. 겉만 화려하면 뭐합니까. 속이 썩었는데요. 겉모습은 아방궁이었지만, 속은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나는 교만하고 호화스러운 교황적 미사에 대해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고 진리를 말하노라. 세상이 이 미사로 인해 전적으로 황폐할 것이고, 멸망할 것이고, 상실될 것이고, 그리고 파멸될 것이다." 이는 1534년 어느 개혁자에 의해 프랑스 전역에 퍼졌던 벽보에 쓰여진 글입니다. 그 벽보는 성직자 중심으로 변질된 타락한 미사에 대해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어떤 교회들은 그 중세적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한국교회에 예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차라리 그 많은 대형 교회들 중에 단 몇 교회만이라도 그 우아한 주일 2부 예배를 잠시 보류하고 그 시간에 소외받는 노숙인이나 이웃들을 찾아 그 기름진 십일조를 조금이라도 함께 나누었다면 이리도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일마다 사랑과 헌신을 열심히 설교하면서 실제는 사랑을 별로 실천하지 않는 표리부동한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가 아닌지요. 매주 교회 헌금을 그토록 열심히 모아서 도대체 우린 지금껏 뭘 하고 있던 걸까요. 큰 건물을 세우고 귀족 목사님들에게 고급차와 고액 연봉을 풍성히 주자고 모이는 것인가요. 아니면 아직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역보다 더 크고 중요한 다른 사역이 있다고 생각을 하시는지요.
'예배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 사역'입니다. 제사의 본래 정신이 사랑입니다. 따라서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도들을 통해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이며, 그리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삶이 예배가 되어야
지금 한국교회가 당면한 주요 문제 중 하나는 예배의 문제입니다. 예배의 겉모습은 경건한데 삶이 방자합니다. 예배는 거룩한데 삶이 저속합니다. 예배는 화려한데 삶이 공허합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는 뜨겁게 하늘을 펄펄 나는데 일상의 삶 속에서는 바닥을 기고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어떻게 하든 예배를 보암직하게 잘 포장하여 종교적 야욕을 채우려는 배역한 세력이 너무 많습니다. 예배라는 신성한 이미지를 이용하여 신도들을 모으고, 예배를 명분으로 신도들을 교회당 속에 가두고, 그리고 예배를 제사화하고 바침을 강조하여 교회와 직분자들이 부를 쌓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유한 동네는 물론이고 가난한 서민들이 사는 빈촌에도 성채같은 예배당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교회 역사를 보십시요. 진리가 누락된 곳에는 언제나 과장과 포장과 치장이 성행하는 법입니다. 또한 진리가 어두워진 시대일수록 교회당 건물이 커지고, 예배가 화려해 지고, 성직자의 옷이 요란을 떠는 법입니다.
왜 예수를 따르기 위해 예배당을 사치하게 건축해야 합니까. 왜 소박한 예배에 목사가 제사장 가운을 입거나 치렁치렁한 영대를 두르고 법석입니까. 어떤 목회자는 "영대는 목회자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예배 집례자에게 겸손을 상기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고 주장을 하시지만, 마치 중세 사제를 연상케 하는 그 무당같은 복장이 정말로 겸손하게 보이십니까. 초대교회의 사도들조차 그런 불필요한 복장을 착용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지금 우린 예배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속화하고 상업화하여 직업종교인들에 의해 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정한 가르침은 예배 의식에 몰두하는 삶이 아니라, 성도의 삶이 직접 제물이 되고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손수 제물이 되셔서 그 모든 제사를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구약적 제사와 제물이 필요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예배의 진정한 의미는 매주 모여 헌금이나 봉사 따위를 걷어 바치고 복을 구하는 종교 의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체인 성도들의 삶이 온전히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고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신자 자신과 공동체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일상의 삶이 곧 '거룩한 사역'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샬롬!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12:1)."
신성남 / 집사·<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나는 일주일에 세 번씩 던킨도너츠가게에 갑니다. 아내에게 3불만 달라고 하지요. 우리는 결혼초에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재정관리입니다.
“월수입이 천만원 이상이면 남편이, 천만원이하면 아내가 맡는다”
결혼 50년동안 나는 단 한번도 돈을 주물러 본적이 없습니다. 수입이 적었으니까요. 우리집 재정관리는 아내 전권입니다. 돈에 관한한 나는 마이너스 손이고 아내는 마이더스 손입니다.
아내는 100만원이건 10만원이건 한달 살림을 하고나면 절반을 남기는 재주가 있습니다. 아내 주머니는 항상 두둑합니다. 그렇다고 짠 것도 아닙니다.
"3불이 뭐예요. 남자가 20불은 있어야지요?“
“아냐, 3불 갖고도 차고 넘치고 남아요. 해즐러커피 스몰 레귤러한잔에 보스턴크림도너츠 한 개면 2불 90센트야. 노인이라 10센트 디스카운트 받으면 21센트나 남는다구. 40분을 걸어서가고 올때는 돌섬비치로 돌아오니 버스값도 필요 없는걸”
그런데 4불을 달라고 하니 아내 눈초리가 이상할수 밖에. 사정이 생겼습니다. 언제부터 던킨가게 앞에 거지가 등장했습니다. 해적선선장처럼 생긴 애꾼눈입니다.
“커피 마시고 달랑 21센트 남았는데 이거라도 받겠소?”
21센트를 줬더니 20센트만 받고 1센트는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4불을 달라고 증액 요청을 한겁니다. 삼일후에 갔더니 애꾸눈 거지가 아는 체를 합니다. 1불을 주니 두손을 번쩍 듭니다. 만세삼창이라도 하려나 했는데 그게 아닙니다.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축도를 하는 것 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갓불레스 유!”
거지에게 축도 받아보기는 생전처음이라 별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혹시 저 거지가 은퇴한 목사님은 아닐까?‘
미국이나 한국이나 은퇴하고 거지가 된 목사님은 없습니다. 그러나 은퇴후에도 교회를 기웃거리면서 구걸하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설교 구걸입니다. 설교를 하고 싶어서 해외선교사로 지방 신학교강사로 찾아다닙니다. 100세 된 어느 목사님은 비행기로 미국까지 와서 설교합니다. 아들 손자 사돈의 팔촌자녀들 까지 불러모아 설교콘서트를 열고 갑니다. 손주뻘 되는 이에게 물어봤더니 시큰둥합니다.
“재하자는 유구무언(在下者 有口無言)이라 참고 견디지만 솔직히 지겹지요. 해마다 너무 늙고 낡은 레코드를 다시 듣는 기분이니까요”
전국연합집회 마지막순서자로 나온 조목사는 두손을 들기전에 입부터 열었습니다.
“내 축도하기 전에 딱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신나게 30분짜리 설교를 했답니다. 설교하고 싶어 헐떡거리는 목사님처럼 추해보이는 거지는 없습니다. 모든 목사가 다 그렇습니다. 나는 더 합니다. 뉴욕에서 20년 넘게 목회하면서 교회설교로도 모자라 나는 매스컴까지 타고 다녔습니다. 신문 잡지에 1000회 이상칼럼을 썼습니다. 라디오로 육성칼럼을 방송했습니다. TV좌담프로를 진행했습니다. 축사 격려사를 나 만큼 많이 한 이도 드믑니다.
그러나 부탁한다고 무턱대고 나가지 않습니다. 나 보다 잘하는 놈이 있으면 절대로 안 나갑니다. 들러리만 서고 마니까요. 그래도 어쩔수 없이 나가야 할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는 엉뚱한 소리로 상대를 당황케 만듭니다. 뉴욕 라디오 코리아의 2시간짜리 토요토론이 있습니다. 패널들이 양쪽으로 갈려 한시간동안 주제토론을 하면 청취자들이 1시간동안 전화 토론을 벌립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어느날 주제.
“노무현전대통령이 자살하자 김동길박사는 김대중전대통령도 자살하라‘고 나왔습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동길박사측에서 김동길박사가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전화로 참여하지만 음감이 생생합니다. 반대측 패널로 내가 나섰습니다. 한편에 두세명씩 나오던 패널이 그날은 양자대결입니다. 천하의 김동길을 어쩌지? 김박사가 먼저발언을 할테니 말 꼬리나 붙잡고 늘어지자. 그런데 예상을 뒤 엎고 사회자는 나보고 먼저 모두발언(冒頭發言)을 하랍니다. 기선을 제압해야 합니다.“오늘토론을 준비하느라 ‘노무현전대통령이 자살하자 김대중전대통령도 자살하라’는 글을 쓴 김동길박사님의 인터넷을 열어봤습니다. 벌떼처럼 올라온 댓글 ‘자살할 사람은 김대중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김동길 당신이다’였습니다. 아마 오늘 토론 끝나면 ‘이계선당신도 자살하라’고 할게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둘다 살아남기 힘들지 모르는데 괜찮을까요?”
사회자도 청취자들도 웃었습니다. 김박사는 횡설수설했지요.
목사 출판 기념회에 축사를 하러가자 아내가 말렸습니다.
“축사자가 10명이나 되는데 무엇하러 끼어들어요?”
“축사자중에 세계최대교회 당회장님이 오셨으니 오기(傲氣)로 나가 봐야지요”
한인회장 후원의 밤에 10명의 연사들이 찬조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연사도 청중도 하품입니다. 내가 다섯 번째로 나가 함박웃음을 터트려 줬더니 그때부터는 즐거운 잔치한마당입니다. 7번째 연사로 나선 변영로아들 변천수가 손을 잡고 웃었습니다.
“하여튼 이목사님, 참 말 잘혀”
난 7분 연설을 위해 며칠동안 준비합니다. 둘째 딸은 그걸 모릅니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아빠는 입만 열면 짧고 재미있는 축사가 술술 나왔어요”
이민초기에 만난 아마추어 관상쟁이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습니다.
“이목사님이 코미디쪽으로 나가셨다면 이주일 저리가라는 스타가 됐을겁니다”
“이주일도 못 웃기는 나를 당신이 웃기니 당신이야말로 이주일보다 나은 코미디언이오”
던킨도너츠 가게 앞에서 만난 거지가 나의 지나간 망상을 떠 올리게 해줬습니다.
‘내가 목사하길 잘했지. 목사 안하고 다른대로 빠졌으면 아마 내가 저 거지자리에 있을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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