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위로 걸어라 2002-06-07 19:36:20 read : 1843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2년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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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이사야 51:12 ~ 16
"너희를 위로하는 이는 나, 바로 내가 아니냐? 그런데 죽을 인간을 두려워하며, 한갓 풀에 지나지 않는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는, 너는 누구냐?" 너희는 잊었다. 너희를 지으신 하나님, 하늘을 펴시고 땅을 세우신 주님을 잊었다. 압박자들이 너희를 멸망시키려고 한다 해서, 압박자들의 그 분노가 두려워서, 너희는 날마다 떨고 있다. 그러나 압박자들의 분노가 어디에 있느냐? 갇혀 있는 포로들이 이제 곧 풀려 난다. 그들은 오래오래 살 것이며, 양식이 모자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바다에 물결을 일으키고, 거친 파도를 일으키는 하나님이니, 나의 이름은 만군의 주다. 내가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맡기고, 나의 손 그늘에 너를 숨겨 준다. 나는, 하늘을 폈으며, 땅의 기초를 놓았고, 시온에게 '너는 나의 백성'이라고 말하였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후서 1:8 ~ 11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아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를 신뢰하지 말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십니다. 또 우리는, 앞으로도 건져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하나님께 둡니다. 여러분도 기도로 우리에게 협력하여 주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받은 은혜의 선물을 두고, 우리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감사를 드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14:22 ~ 33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였다. 그들은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셨다.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니, 예수께서 "오너라" 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어서 경배드리고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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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서 본문에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 건너 벳세다라는 곳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홀로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데, 역풍을 만났기 때문에 밤새도록 노를 저어 갔지만 십 여리 정도밖에 못 간 채,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새벽녘에 바다 위를 걸어서, 역풍으로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왔습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그 장면에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저도 한번 바다 위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그래, 믿음을 갖고 걸어보아라.”
예수의 말씀을 듣고 물위를 걷는 순간에, 거센 바람이 불어서 너무 무서워서 떤 나머지 바다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베드로를 건져서 함께 배에 탔더니, 바람도 잔잔해졌고, 제자들은 예수에게 경배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물위로 걷는 예수의 기적, 이 기적이 벌어진 대목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 바로 그 장면에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이 성서 이야기 두 개가 이어져 있는 맥락을 보면, 이렇습니다.
부스러기 열두 광주리가 남을 만큼 배불리 먹은 군중들은 흩어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배고팠던 군중들은 배불리 먹었습니다. 짓밟히던 군중들은 예수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기적도 보았습니다.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던 군중들은 메시아를 맞은 듯 기뻐했습니다. 너무나 기쁜 기적의 순간을 군중들은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해가 저물어 예수께서 돌아가라고 하시는데도 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습니다.
“선생님, 여기 남아서 이 군중들과 선생님과 함께 새 나라를 만드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여세를 몰아서 한번 조직을 만들고 운동을 벌여 보십시다. 이스라엘도 새로 세우고 우리 힘도 과시하고 세도 과시하고 조직도 하여서 이스라엘을 새로 세워 보십시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해 말합니다. “지금 당장 이 군중들을 떠나서, 기적의 도가니를 떠나서,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 벳세다로 가거라. 거기서 또 다른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 주어야겠다.” 그리고 군중들을 다 흩어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다 돌아가거라!”
기적 행사는 하늘의 뜻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예수의 목적은 기적 자체가 아닙니다. 인간사에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기적을 통하여 인생이, 가정이, 나라가, 이 세계가 새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본 군중과 제자들이 예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것, 곧 세속주의를 향해 나가는 것을 보고서, 제자들을 먼저 보내신 다음에 군중을 흩어 보내시고 나서 혼자 산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예수님은 홀로 산을 찾았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며 씨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혼자 있고 싶어하셨다는 것, 산에 올라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로지 절대자인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하셨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다가 외로운 일 많이 당하시죠? 고독도 많이 느끼시죠? 폴 틸리히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런 얘기를 하나 썼습니다. 고독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한가지는 외롭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고독은 남들한테 따돌림을 당하거나, 외톨이가 되거나, 버림받거나, 소외되어서, 즉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혼자 있게 된 고독입니다. 이것은 ‘쓸쓸함’이고 ‘외로움’입니다. 이 양반은 그런 고독을 “lonely" 라고 표현했습니다. loneliness 혼자 됨!
또 다른 고독이 있습니다. 세상사를 벗어나 혼자 한번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 하늘에 계신 전능자 앞에 홀로 서고 싶어서, 스스로 선택한, 자의에 의한 고독, 그런 고독도 있습니다. 틸리히는 그런 고독을 solitude,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solitude, 그것은 홀로 됨이 아니라, 홀로 있음입니다. 혼자이게 됨이 아니라 혼자 있음입니다.
하나는 강요된 외로움, 하나는 스스로 택한 기쁨과 영광의 홀로 있음! 예수는 오늘 홀로 있음을 택했습니다. 여러분은 영광이라는 이름의 고독 속에서, 인생을 한번 살펴보고, 따뜻한 음악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 예술의 아름다움에도 깊이 침잠해 보고, 깊은 사랑에 빠져보고, 가장 깊고 가장 넓고 가장 높으신 영원한 분과 한번 대좌하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 다시 산을 향하는 예수를 따르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율에 의한 강요된 외로움을 많이 겪습니다. 외로움에 둘러싸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옥입니다. 감옥은 건물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슴속에 감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감옥같이 생겼는데, 그곳에 가면 절대자를 만나고 몸과 마음을 풀고 뭔가 새로운 희망을 선택하게 되는 곳이 있습니다. 똑같이 생겼는데 이름이 다릅니다. 그것은 옛날 우리 교회사에서 수도원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수도원과 감옥, 우리는 이 두 군데를 왔다갔다하며 살아갑니다. 강요된 외로움 속에서 고통당하시렵니까? 박차고 나와서 스스로 선택한 수도원과 같은 정적 속에서 홀로 전능자를 대면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예수는 수도생활과 비슷한 ‘홀로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고난!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아파야만 고난이 아닙니다. 홀로 있음 자체가 더 큰 고난입니다. 십자가는 완전한 홀로 있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오늘도 오천 명이나 되는 엄청난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군중들이 환호했을 겁니다. 환호하는 군중들 속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 아닌데 하고 생각합니다. 소위 군중 속의 고독입니다. 그 고독을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이사야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랑하는 너희들을 고난의 풀무질로 달구어서 계속 시험하였노라.”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했다는 것입니다. 왜 시험했느냐 하면 “너희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참 엄청난 말씀입니다. “나를 위해서 너희를 달구어 연단시켰다. 내 영광이 남한테 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 나의 영광은 내가 취하는 것이지, 다른 그 누구도 나의 영광을 가질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이기주의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시키고 고난 속에 두되,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말씀이 예수의 입을 통해서도 나옵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처럼 사랑하라.” 잘 생각해 보십시오.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사랑 중에 최대의 사랑은 자기 몸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능가할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타적인 사랑? 언어만 있지 실제는 없습니다. 자기보다 어떻게 남을 더 사랑합니까? 자기보다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랑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시지 인간을 더 사랑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 인간을 사랑하되, 나는 너희들이 예뻐서가 아니라 나를 위하여 사랑하노라. 너희들 속에 담긴 내 형상 때문에 사랑하노라. 나는 내 영광이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 너희들을 사랑하노라. 내 영광이 너희들 안에 있느니라. 내 영광 때문에 너희를 사랑하니, 너희도 너희를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여라.”
이 사랑의 표출이 바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다 알아도 괜찮겠다 싶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많은 분이 병마로 고생을 하십니다. 요즈음 왜 그렇게 암이 많은지 암 때문에도 고생을 많이 하십니다. 우리 정진위 집사님을 지난주에 만났습니다. 저와 둘이 나눈 이야기입니다만, 공개해도 된다고 하여 말씀드립니다. 건강하시던 분이 갑자기 위암 선고를 받고 수술을 하였습니다. 며칠 후 제가 방문을 했는데, 건강한 사람처럼 의자에 앉아 계셔요. 수술 받은 분이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수술 부위는 조그맣고 초기라서 다 떼어내고 건강해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 하시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제가 위암 선고를 받고 딱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인간으로서의 좌절과 허무! 이렇게 인간이 무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두 번째는,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절대자 하나님이 이렇게 고마울 수 있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한계선상에 도달하면 그런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인생은 사실은 항상 한계선상에서 살아갑니다. 신체의 건강을 장담할 수 없는 한계상황도 있고, 우리의 심리적 한계상황도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무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럴 때 “제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사랑해 주십니까.”가 아니라,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내 몸 좀 보살펴 주십시오. 창조주 당신은 자존심도 없습니까?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위엄을 위해서 날 좀 사랑해 주십시오.” 이렇게 호소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8편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지만, 하나님이 누릴 영광과 존귀의 왕관을 씌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이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나를 택하시고 연단하시고 심판하시고 살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내 영광을 위해서!” 그 영광은 하나님의 이기적 영광이 아니라, 만물을 만드시고 품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 만물을 사랑하시는 구세주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오늘 베드로가 “나도 바다 위를 걸어가고 싶습니다.”라고 합니다. 예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대에게 명한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여라. 단, 믿음으로 참여하여라.” 베드로가 참여했으나, 폭풍 앞에서 다시 좌절하니 물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기적은 뭡니까? 병이 낫는 것도 기적이지만,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것, 동행하셔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나를 보살펴 주시는 것, 하나님이 동고하시는 것, 하나님이 동락하시는 것,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래서 자기 영광, 우리 속에 있는, 아주 비참한 인간 속에 있는 그분의 영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저는 그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다 제한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기대가 채워지지 않았다고 좌절하지는 마십시오. 인간은 제한된 삶을 삽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그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이 채워 주십니다. 그것이 한계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아름다움입니다.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정성으로 사랑을 하셨다면, 그걸로 일단 만족하십시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완벽한 사랑은 하나님이 함께 동고동락하실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움, 그게 우리의 복입니다.
슬픔의 눈물을 다 흘리지 못했노라고 탄식하십니까? 마음속 깊이로부터 많이 우셨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슬픔의 눈물은 아름다운 구원의 기쁨으로 피어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완전히 용서하고 싶었지만 용서하지 못했다고 부끄러워 마십시오. 그건 한계입니다. 내 힘껏 용서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십시오. 그분이 완전한 용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한계 앞에서 겸허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입니다.
찬송을, 기도를, 학문의 업적을 많이 만들지 못했노라고 너무 좌절하지 마십시오. 빈곳은 하나님이 채우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하고 함께 걷자.”는 것입니다. 바다 위를 같이 걷자는 말씀은 너희 속에 내가 같이 있을 여백을 달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최상이, 인간의 최고가 완벽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 부족함 속에 내가 함께 있겠다. 영광, 위엄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있고 싶다. 그래서 너희와 나는 동행하고 싶다. 동고동락하고 싶다.”
이 진실을 아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함께 하심, 홀로 있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그 깊은 사랑의 진면목을 오늘 여러분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떼는 떡, 마시는 잔, 그걸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여백 속에 함께하십니다. 여백은 우리 생의 바탕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깊은 신앙으로 희망 속에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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