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련" 2002-06-07 18:57:58 read : 1662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1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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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3:20~24 >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된다."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 야고보서 1:12~18 >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스스로 아무도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신도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는 변하는 것이나 움직이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뜻을 정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 주셔서 우리를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1~11>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다.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그 때에 악마는 예수를 그 거룩한 도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 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예수께서는 악마에게 말씀하셨다.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또다시 악마는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이 때에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의 시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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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력 상으로 수난절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수난절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부활절 전까지 계속됩니다. 수난절을 가리켜서 렌트(Lent)라고 합니다. 렌트라는 말은 라틴어인데, 본래 뜻은 '봄'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생명의 기운이 온 땅을 뒤덮게 되는데, 우리 신앙의 역사에서는 수난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의 깊은 역설을 되새기게 됩니다. 참된 봄은 수난의 40일이 지난 다음 부활절 아침에 옵니다. 그래서 신앙의 봄을 준비하는 사순절, 부활을 예비하는 형극의 길, 고난의 길은 오늘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의 은혜를 받고 교회를 시작한 이후 몇 십년 동안, 그러니까 1세기가 끝날 때까지는 우리가 사순절이라고 부르는 40일 동안의 절기는 없었습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들의 죽으심을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또는 그것을 직접 전해 들은 사람들이었기에 "수난"을 40일이라는 긴 절기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40일이 아니라, 40시간 동안에 예수의 수난을 되새겼습니다. 그게 수난절이었습니다.
왜 40시간입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시간이 요즘의 시간으로 말하면 금요일 오전 9시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시간이 부활주일 새벽 3시라고 생각하여, 그 사이의 시간을 셈하였습니다. 그게 40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이 압축된 사순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고, 생생한 수난의 현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어지면서, 수난절을 40시간으로 한정하는 것은 너무 짧고 준비 기간도 너무 짧다고 해서 40일로 정했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성서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기간이 40일이었고, 모세가 시내 산에서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의 돌판을 받아오기까지의 기간도 40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협하면서 으르렁대다가 다윗의 돌을 맞아서 죽기까지의 기간도 40일이라고 보며, 노아 홍수 기간도 40일, 이스라엘의 광야생활도 40년,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까지의 기간도 40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40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택하신 시간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40일로 지키기로 했지만, 여러 가지 논란 끝에 수난절은 36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40시간에서 36일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내일 모레 글피의 수요일은 소위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고 통회하는 수요일입니다. 그 수요일을 성회(聖灰)수요일이라고 하는데, 그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수요일을 뺀 부활절 전날까지가 36일입니다. 그래서 4세기까지는 그 36일을 수난절로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325년 '니케아'라는 곳에서 전 교회의 대표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열고서 새로운 결정을 합니다. 그 회의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은 "주일에서 시작해서 주일로 끝난다."고 보고, 그래서 성회수요일에서 며칠 더 거슬러 올라가서 성회수요일이 시작되는 그 주간의 주일(主日)부터 수난절이 시작되는 것으로 정합니다. 다시 말해 이전의 36일에다 오늘 주일부터 성회수요일까지의 4일을 더하여 총 40일을 수난절로 지키기로 한 것입니다. 사순절(四旬節)이란 이 40일의 교회절기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이 결정이 교회의 공식 결정이 되어서 오늘날 우리도 오늘 주일부터 사순절을 시작합니다.
사순절이 되면 초대교회 때는 하루에 한 끼 식사밖에 못하게 했습니다. 나머지는 금식입니다. 저녁식사 전에 한끼를 먹고 그 다음에는 금식하게 했던 것입니다. 한끼를 먹을 때 많이 먹기는 했겠지만, 40일을 한끼만으로 버틴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한끼 식사에서도 생선과 육류를 피했습니다. 심지어 우유와 계란까지도 먹지 않았습니다. 호화생활도 피하고 오락도 금했습니다. 철저한 금욕으로 사순절을 지켰습니다.
서양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면 배가 고프기 때문에 생겨난 전통이 있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3일 전부터 먹을 수 있는 짐승이나 물고기는 다 잡아서 실컷 먹는 축제가 그것입니다. 그 축제가 말하자면 카니발입니다. 실컷 먹고서 단백질과 지방을 비축해서 40일을 버티자는 것입니다. 카니발이라는 말은 그때부터 유명해졌는데, 이 카니발은 두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카르니"라는 말과 "발레"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카르니"란 말은 육체라는 뜻입니다. 몸뚱이! "발레"란 말은 안녕이라는 뜻입니다. 합하면 "육체여 안녕!"입니다. 3일 동안 실컷 먹었으니 40일 동안 안녕, 그 뜻입니다.
"사순절 시작하기 전에는 실컷 즐기고 먹고 마시지만, 사순절 시작되면 다 끊읍시다. 우리의 모든 욕망이여 안녕! 욕심도 안녕! 그래서 사순절 시작되는 때부터는 몸과 마음을 비우고, 예수의 수난을 생각하면서 부활절 아침이 되기까지 회개와 명상과 금식 속에서 신앙을 새롭게 합시다." 이것이 우리의 전통입니다.
오늘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 전통의 금식과 금욕에 관한 것 하나 하나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 예수께서 시험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근본적으로 사순절은 인간의 고통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고난과 십자가를 향한 길, 형극의 길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근본 문제 한 가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왜 생겼습니까? 어디서 이 고통이 시작되었습니까? 창세기로 가보겠습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창세기 말씀에 보면 뱀이라 이름하는 사탄이 하와를 유혹합니다. 에덴동산 가운데 있는 열매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와가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걸 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뱀이 대답합니다. 절대 죽지 않습니다. 따서 드십시오.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는 고통과 죽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고통과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되려다가 실패한 역사 자체가 인간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나님처럼 살려고, 눈도 밝아지려고, 선악도 구분하며 살려고 하다가 에덴에서 쫓겨난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역사는 실낙원의 역사입니다.
이제 실낙원의 역사가 시작되자 발가벗은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을 갈며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은 꿈이 되어버렸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뭐냐하면,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질서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역사입니다. 최근의 예를 든다면 광우병 파동을 들 수 있겠습니다. 광우병으로 온 세계가 난리가 났습니다. 왜 초식동물인 소에게 육식을 하게 하여 창조질서를 뒤흔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를 위반하면 결과는 죽음입니다.
진리는 단순하지만 심각한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은 타락입니다. 그 후에는 좌절과 고난의 역사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탄의 일입니다. 사탄을 무슨 귀신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탄이란 하나님과 인간의 대결 구도를 만들고,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 대신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에 세우려는 인간의 악한 욕망을 고조시키는 세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이 등지게 하는 악한 세력입니다. 하나님과 등지는 것,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성서 전체를 살펴보면 분명해집니다. 죄가 뭐냐! 죄란 하나님한테서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것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과 적대관계가 되는 것이 죄입니다. 거꾸로 구원이란 등을 돌렸던 하나님께로 향하여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대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서 하나로 화합하고 평화를 이루는 것이 구원입니다.
사탄의 역사는, 오늘 또다시 시작되는 사탄의 역사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리에 서고 싶은 욕망 속에 빠트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서 이런 유혹이 시작됩니다. 야고보서의 오늘 본문 말씀대로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어서 신이 되고 싶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야고보서는 그것을 욕심이라 이름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신과 갈등하며 대결을 벌이는 죄를 낳고, 그 죄가 커져서 죽음을 낳습니다. 죽음 일보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 죽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사순절! 보냄 받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날부터 사탄과 싸우는 대결의 시기를 시작합니다.
에덴동산의 유혹 이야기는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예수께서 시험받으시는 광야에서 제2의 에덴동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광야로 끌려나온 예수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습니다. "돌로 떡을 만드시오." 그 말은 하나님의 소유인 모든 물질을 당신의 소유로 전환하라, 등기 이전하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빵을 만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느니라. 빵과 말씀의 이원화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빵으로 살되 그 빵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우주만물이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다시 한번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성전 꼭대기로 데려간 사탄에게 예수께서 또 다른 시험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와서 받쳐 줄 것이고 다치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힘을,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능력으로 비하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 능력을 어느 인간이 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높은 산으로 끌려갑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 주면서 유혹합니다. 나한테 한 번만 절하면 이 모든 나라와 영광을 그대에게 주겠노라. 예수의 말씀입니다. 이 모든 나라와 영광은 하나님의 것, 경배는 하나님께만 하는 것, 나는 사탄에게 경배할 수 없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 분만 모셔라. 이 시험이, 수난절의 이 시험이 우리에게도 옵니다.
예수께서는 에덴동산에서의 실패의 역사 이후 하나님과 인간이 갈라진 현장에 오셔서 다시 둘을 합치려고 합니다. 사탄이 갈라놓은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치려고 합니다. 합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인간 가운데로 들어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고통 속에 하나님이 오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말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는 인간의 고통 한가운데에 친히 임하셔서 인간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삼으셨습니다. 진실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기의 고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고통받으시는 것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의 고통을 갖다놓고 동일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순절의 시작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고통 속에 임재하신 목적은 우리의 고통을 걸머지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받으시는 예수, 그 예수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고린도서에 있는 말씀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주셨던 복이 오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합니다. 우리를 다시금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 오십니까? 고통을 겪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서 말씀에 따르면, 고통 속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고통은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담긴 고통, 그 고통이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진 고통입니다.
사순절은 고난을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몸을 찢어서 금식하며 남들 보기에 고통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아닙니다. 고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참 자기를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랑이 오늘 사순절에, 이 고난의 역사 속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구원하는 사랑, 그 사랑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일본에 유명한 신학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목사로서 전후에 일본 기독교계에 신학적으로 상당히 영향을 많이 준 사람입니다. 이름이 기타모리입니다. 이분이 일본이 패망하기 3년 전인 1942년에 책 하나를 탈고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입니다. 탈고하고는 출판을 못해서 일본이 패망한 다음 47년에야 출판되어 나왔습니다.
내용의 요약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본을 그 지은 죄 때문에 멸망시키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진노가 눈에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본을 너무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내가 배운 신앙의 고백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용서할 수밖에 없는 사랑, 이 둘 사이에 하나님의 고통이 있다. 진노에서 사랑으로 넘어오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이다.
그래서 이분이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을 만들었습니다. 훌륭한 신학적 논리가 되어서 서양의 모든 신학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반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일본을 멸망시켜야 하지만 용서할 수밖에 없기에 생겨나는 고통? 좋다. 이해하겠다. 그러면 일본한테 핍박받아서 엄청나게 희생당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용서할 수밖에 없는 사랑은 어디 있는 것인가?
아마 기타모리 목사님은 일본이라는 눈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한국으로 중국으로 바꾸면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어쨌든 그건 그것대로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인생살이의 고난, 일본의 압제로 받은 고난, 그 고난을 예수께서 함께 짊어지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시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주 3.1절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그 어떤 고난도, 그 고난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시면, 그분의 사랑이 임하면 더 이상 고통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한테 사랑의 원천으로 임하시기를 빕니다. 마음의 고통, 근심 걱정, 우리 사회의 무질서, 도덕의 타락, 이 모든 고통 속에 예수께서 임하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그분이 함께 고통받으셔서 우리를 십자가까지 끌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함께 못박히면, 그 몸과 피를 먹고 마신 우리가 함께 일어날 부활의 아침을 고대할 수 있습니다.
수난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는 부활절 아침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행진을 하십시다. 사랑이 있는 고난을 함께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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