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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표적
    2002-07-15 15:48:33   read : 1866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4:43 - 54절 // 02/07/14

    요즘 권력을 가진 분들의 아들들이 말썽입니다. 대통령의 아들들은 뇌물 수수혐의로 이미 구속이 되었고, 한 정당의 대통령 후보는 아들의 병력기피문제와 해외출산이 구설수에 올라 한때 지지도가 급락하여 정치적 생명마저 위협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국무총리로 발탁된 총리의 아들이 미국국적을 가지고 있다 하여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들의 한국국적 포기는 그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입니다. 그리고 보면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고 자식 때문에 부모들이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오늘 본문도 아들에 관한 문제입니다. 누구의 아들에 관한 문제인가? 하면 '왕의 신하의 아들'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똑같이 자식에 관한 문제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아들로 인해 온 가족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아들 때문에 부모가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고통스러워했던 이유는 그 아들이 어떤 비리나 나쁜 일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질병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것이 이 부모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본다면 차라리 비리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는 것이 낫지, 질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본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저희 집 큰 아이가 몇 년전에 가벼운 접촉사고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급하게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사진촬영을 한 결과 아무 이상이 없다하여 간단한 조치만 취하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주일저녁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저희는 그때까지만 해도 교통사고에 의한 것인줄 몰랐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잘못 먹은 줄로만 알고 '화장실 몇 번 다녀오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방바닥에 뒹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걱정이 되고 당황이 되든지…

    그날 밤을 겨우 지내고 다음날 아침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이유는 교통사고때 장에 충격이 가해져서 약간의 염증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며칠간 약을 먹고 나았지만, 한번도 아프다고 말한 적이 없던 녀석이 아파하는 모습을 볼 때 부모로서 마음이 아팠고, 그 아픔을 대신 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저를 더 힘들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치료를 받고 다 나았다고는 하지만 혹시 또 아프다고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한동안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아들이 비리에 연루되었을 경우에는 죄 값을 치루고 나오면 됩니다. 물론 그 일로 인해 부모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어떤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 도 있습니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자식은 부모에게 가장 큰 불효를 저지르는 자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다는 것은 부모에게 가장 아픈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의 아들에 대한 내용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먼저 본문 43절에서 45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마리아지역을 빠져나오셨습니다. 사마리아지역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우물가에서 만난 한 여인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아와서 예수님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틀이나 더 자신들과 함께 있어줄 것은 간청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말씀을 듣는데 적극적이었습니까? 또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런 보장이 있다하더라도 말씀 듣는 일을 미루어 둘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말씀의 달콤한 맛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셨을 때에는 그런 적극적인 모습을 갈릴리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본문에 의하면 그들이 친히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영접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을 소홀히 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이번에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룬 선수들이 대표선수 해단식과 더불어 대부분의 선수들은 자신의 고향을 방문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고향을 방문했을 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그 선수들은 '고향의 자랑'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선수들은 그렇게 자신을 환영해 주는 고향 분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높힘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 자신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주님은 오히려 자신이 높힘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대대적으로 환영을 해 주어야 환영을 받았다고 말씀하실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고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큰 글씨를 고향입구에 내 걸고, 카퍼레이드도 벌이고 ,오색 종이가루를 뿌리며 열광적으로 환영을 해야 환영을 받았다고 말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엇에 서운해 하셔서 '고향에서는 높힘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어쩌면 그들이 오늘날과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환영을 표할 수 있는 각종기구나 도구를 활용해서 예수님의 고향방문을 환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고향에서 높힘을 받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분명 예수님께서 그런 식의 환영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원하시는 환영은 그런 환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말씀에 대한 그들의 태도입니다. 분명 사마리아 사람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있는 곳을 벗어나면 언제 다시 그곳을 방문하실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머물러 줄 것을 요청하면서 이틀동안이나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삶을 지켜보는 일에 적극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사마리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랙카드를 내 걸지는 않았지만, 오색종이가루를 뿌려주지는 않았지만, 말씀을 듣고자 하는 그들이 적극성이 무엇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했고, 주님을 환영하는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향사람들은 달랐습니다. 말씀을 들으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관심을 보이며, 예수님을 환영했을 뿐입니다. 그런 것은 진정으로 주님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월드컵 대표선수들이 고향을 방문했을 때 고향사람들이 그를 환영하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환영식장에서 그 선수가 하는 말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입었던 운동복과 축구화에 관심을 보이고 또 대통령으로부터 수여받은 훈장에만 관심을 보인다면 과연 그 행사장이 환영식장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선수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너 이번에 얼마 벌었냐?' '훈장은 어디에 두고 왔느냐?'는 식으로 반응을 보인다면 그 환영행사가 그 선수를 기쁘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우리들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다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환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통해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자꾸 텅 빈 내 영혼의 가슴을 채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열심히 봉사를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모임이란 모임에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정작 말씀을 듣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설교시간에 계속해서 졸기만 합니다. '아멘' '아멘'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사실은 은혜 받아서 '아멘'하는 것이 아니라 졸려서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안타까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설교시간에 조는 분들을 볼 때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피곤하면 저렇게 교회에 와서 조시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집에 돌아가서 열심히 성경을 읽는 것도 아닐텐데 일주일에 한시간도 말씀 듣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저렇게 졸다가 돌아가면 도대체 그 영혼은 무엇으로 양식을 공급받고 이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안타까움이 늘 마음에 자리를 잡곤 합니다.

    지난주에 등록하셔서 새 가족이 되신 황권사님댁을 며칠 전에 심방을 했습니다. 나이드신 권사님께서 예배 후에 성경을 필사하신 노트를 보여주었습니다. 수년에 걸쳐 신구약을 세 번씩이나 쓰셔서 자식들에게 한권씩 나누어주었고, 지금 또 다시 쓰고 계신다며 자랑삼아 보여주셨습니다. 여든이 넘으신 분이 또박 또박 써내려 가신 말씀구절을 보면서 심방 갔던 모든 분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마 자녀들에게 그보다 더 큰 유산은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수년동안 열심히 필사하신 성경,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한절 한절 기록하신 그 흔적을 볼 때 자녀들이 어머니의 신앙을 읽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만약 말씀이 설교시간의 한 순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말씀을 듣는 일에는 소홀히 하면서 다른 무엇인가로 신앙생활을 채우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겉으로 벅적지끌하게 환영하는 행사를 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를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는 없고, 말씀이 무시된다면 아무리 다른 것으로 열심을 낸다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우리가 주님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온 무렵이 바로 이때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등한시하고 있을 무렵 이 사람도 말씀이 아닌 능력을 바라고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아들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46절과 47절을 보면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병든 사람은 왕의 신하의 아들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왕의 신하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로 미루어보건대 그는 하급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당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이 가진 권력이나 부유함을 가지고 아들을 치유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래도 아들의 병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행하신 일에 대해 그도 평소에 듣고 있었던 터라 마침 예수가 갈릴리 가나에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황급히 예수께로 나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 정도의 권력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부하를 보내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친히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면 얼마나 아들의 병이 고침을 받는 문제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쉽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서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요청했습니다.

    그가 이토록 절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아들을 위해서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아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정도의 수고로움을 감수하지 못할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는 심부름꾼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찾아갔습니다. 이쯤되면 왠만하면 그의 청을 들어줄 법도 한데 예수님의 대답은 엉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4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느닷없이 이런 말씀을 그에게 던지시는 것일까요?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이 결국은 무엇인가를 보아야만 믿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왕의 신하 한 사람에게 국한된 책망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유대와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주님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으면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실 표적이나 기사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했던 표적을 중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서 자기 아들을 고쳐주실 것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사실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그곳에 나타나셨다 하니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원래 곤경에 처해있는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법입니다. 괜히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부여해서 믿고 싶은 마음이 작용합니다.

    우리나라가 독일과 4강전을 치루기에 앞서 재미있는 내용이 보도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개최국의 정상이기 때문에 폐막식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었고, 독일의 총리는 차기 개최국 정상으로 3-4위전 경기를 관람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우리나라가 결승전에 진출하기를 소망하면서 하는 얘기가 우리나라 대통령은 요코하마로 가게 되어 있고, 독일의 총리는 대구로 가게 되어 있으니까 독일과의 4강전에서 우리가 이겨 우리 선수들은 대통령과 함께 요코하마로 가게될 것이고, 독일은 독일 총리와 함께 대구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괜히 의미를 부여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아마 이 왕의 신하도 예수님께서 다른 곳도 아닌 갈릴리 가나에 나타나셨다는 얘기를 듣고 굉장한 의미를 부여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담담한 마음으로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도 대단한 믿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방으로 의원을 통해 치료해 보았지만 아무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의원이 고치지 못한 것을 예수가 고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께 자식을 고쳐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참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 속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오셔야만 한다는 사실과 또 만일 지체하여 내려가던 도중에 아이가 죽게 된다면 이미 늦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너무도 엉뚱했습니다. 한시가 급한데 지금 주님은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믿지 아니한다는 말씀으로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러자 한번 더 간청을 합니다.

    49절에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시가 급하다는 것입니다. 빨리 가서 조치를 취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도 엉뚱했습니다. 5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여러분이라면 이 말을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는 32킬로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교통이 발달되고 통신수단이 발달되어 있다면 금방 확인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그곳에 가지 않는 한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자신이 없으니까 '가라'고 해놓고 이 사람이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는 사이 도망을 가버릴는지 누가 압니까? 그렇다고 해서 만약 낫지 않았다 하여 다시 따지러 여기까지 오겠습니까? 그렇게 낭비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아들을 치료하기 위한 다른 방법을 간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왕의 신하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믿고 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런 표적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상한 표징을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처방전을 써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서 보면 이미 아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과연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믿고 갔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과 이 왕의 신하에게서 너무도 닮은 모습을 한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여인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동네로 내려갔습니다. 말씀에 대해 결코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즉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만약'이라는 말로 말씀을 의심하지 않습니까? 왕의 신하는 '만약 그렇게 말씀은 하셨지만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건지' 묻지 않았습니다. '만약 낫지 않는다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기에 그대로 믿고 돌아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만약'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혹시'라는 말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만약이라는 말로 의심하고 확신을 하지 못합니다. 분명 내가 판단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말씀 속에서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말씀은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맞는 말인데 실제로 해 보면 그렇게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맞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현실은 동떨어져 있어서 우리의 삶을 무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당시에만 말씀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과 달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능하다고 말하면 내가 보기에 불가능해도 그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자꾸 하나님의 말씀에 '만약'이라든가 '혹시'라는 토를 달아서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시면 살아난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져도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면 나의 이성이나 판단을 초월해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는 믿음의 자세, 그것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합니다.

    얼핏보면 이 왕의 신하가 요청한 것이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만 말하고 그 어떤 표적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것은 거절당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어리석은 사람은 화를 내고 돌아가 버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엘리사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나아왔던 나아만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사는 그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말하며 그를 돌려보냅니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 나라의 장군이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찾아왔는데 아무런 조치도 취해주지 않고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했으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거절당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거절당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했으니 그렇게 했던 것뿐입니다. 그랬더니 그의 몸이 거짓말같이 깨끗하게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거절당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두고 기도했는데 그 기도에 즉각적인 응답이 없다든지 아무런 증거가 보이지 않을 때 "내가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절이 아니라 어쩌면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주께서 시험하고 계시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됩니다. 뒤돌아서서 가 버리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제자들이 취한 행동 가운데 가장 큰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포기하고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요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 모두 거절당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돌아갔습니다. 이제 자신들이 현실로 돌아가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돌봐 주겠느냐?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할 때 내가 요구한 것에 대해 거절당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도무지 응답이 없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현실세계로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말씀을 굳게 붙들고 인내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하시던 그 선택으로 찾아오는 결과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책임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 왕의 신하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한다'라는 말씀을 주께서 하셨을 때 "고쳐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왠 잔소리가 그렇게 심하냐?"면서 돌아가 버렸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는 자신의 아들이 살아나는 기적과 같은 일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붙들지 못하고 현실세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결과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뭏튼 이 말을 들은 왕의 신하가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종을 만납니다. 51절과 52절에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 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내려가던 길에 만난 종들은 너무도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아이가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낫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지를 물었습니다.

    그가 왜 그 때를 물어본 것일까요? 사람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질문을 할 때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왕의 신하가 종들에게 물었던 것은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질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자신의 자녀를 살려주셨으리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왕의 신하가 주의 말씀을 굳게 믿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종들의 대답은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는 말을 듣고 그 즉시 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날 종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왕의 신하가 그 즉시 내려가서 확인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왜 그 즉시 내려가지 않고 다음날 내려간 것일까요? 그는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굳이 서둘러서 가버나움까지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는 32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거리 대부분이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밤에 길을 떠나 집으로 간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만약 아들이 촌각을 다툴 정도로 여전히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 아들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서라도 그 밤에 험한 산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나았다는 확신이 있는데 굳이 위험을 무릎 쓰고 그 밤에 아들에게로 가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다음날 가버나움으로 내려갔고 도중에 종들을 만나 아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이미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일로 인해 자기와 그 온 집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다른 가족들은 아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아들이 낫게 되었는지 분명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간밤에 의원이 다녀갔는데 그 의원의 처방 때문에 병이 낫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왕의 신하의 질문을 통해 증명되어졌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께로부터 아들의 병이 나았다는 얘기를 들었던 때가 지난밤 7시경이었고, 아들이 병이 나았다는 것도 7시경이었기 때문에 그가 낫게 된 것은 의원들이 훌륭한 처방전을 내려서도 아니고, 가족들의 눈물어린 보살핌으로 인해 낫게 된 것도 아니라 오직 주의 말씀으로 인해 낫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의도적으로 낫기 시작한 때가 언제였는지를 물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어졌는가? 하는 것을 가족에게 알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물어보았다는 정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온 집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그 집의 가족모두에게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다 죽게 된 아들을 보면서 가족이 얼마나 마음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이 질병에서 치유되어짐으로 온 가족이 주님을 믿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것이 주님께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표적의 핵심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려 주었다는 것입니까?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누군가를 살려주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은 말씀보다 앞서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결국 왕의 신하와 그 아들과 가족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은 공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말씀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날도 여전히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셨듯이 오늘날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의 생명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가라 하시면 가야 합니다.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시면 아무것도 보지 못해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주의 말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까? '그렇게 사는 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성경적 모범일뿐 우리의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살면 망한다'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한번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안에는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말씀을 신실하게 붙들기 않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주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 문제에 대해 거절하시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거나 낙심치 말고 다시 주께 매 달리시기 바랍니다. 아니 말씀을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때 반드시 주의 영광을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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