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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
    2002-07-02 11:07:39   read : 1956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4:31-38절 // 02/07/02

    제가 군 복무하던 시절에 전투식량이라고 해서 건빵을 한달에 한번씩 한끼 식사대용으로 먹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건빵을 식사대용으로 나누어주었는지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건빵은 말 그대로 전투식량입니다. 즉 전투시 식량으로 건빵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훈련차원에서 건빵을 먹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나누어주는 건빵에는 별사탕이 한 봉지씩 들어있습니다. 항간에 이 별사탕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즉 건빵에 들어 있는 별사탕 안에 남자들에게는 별로 좋지 못한 성분이 첨가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남자들의 정력을 감퇴시키는 성분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빵을 먹고 난 후, 혹시라도 힘을 못 쓰게 될까봐 별사탕을 먹지 않고 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이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 그 별사탕을 먹지 않고 버린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무근입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 별사탕을 건빵 안에 넣어둔 것은 건빵을 먹을 때 '좀 더 맛있게 먹어라'는 차원이지, 정력을 감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건빵을 먹을 때 별사탕 하나를 함께 입안에 넣어서 먹으면 정말 맛이 있습니다. 특히 건빵은 물이 없이 먹으려면 목이 메여서 먹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별사탕 한개와 함께 먹으면 물이 없어도 목이 메이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일반 슈퍼에서 파는 건빵에도 보면 별사탕이 들어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건빵 안에 있는 별사탕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들어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별로 유익하지 못한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한때 라면을 튀길 때 공업용 기름으로 튀긴다하여 말이 많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후에 사실이 아니라는 말도 있고 해서 어떤 말이 진짜였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감취어져 있다가 드러나는 것은 대개 좋지 않는 것들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래 속에서 흑 진주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선수들의 경우가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 외국의 유명한 팀의 구단주들이나 감독들은 피파 랭킹 40위의 나라에서 무엇을 건질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보화가 있고 진주가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아주 신선하고도 때묻지 않은 보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외국의 감독들은 우리 선수들을 데려가려고 물밑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그들이 원하고 찾던 선수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며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31절에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 사이'란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로 내려간 사이를 말합니다. 그때 제자들은 느닷없이 예수님께 먹을 것을 내 놓으며 그것을 잡숫도록 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굉장히 시장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식사시간을 훌쩍 넘겼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음식을 구하기 위해 동네에까지 갔다 온 상태입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래서 구해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리고 자신들도 빨리 허기진 배를 채우려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제자들은 영적인 양식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육적인 양식에만 관심이 있다고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때가 지나면 배가 고픈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동네에 가서 구해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리면서 잡수시라고 한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오히려 몰래 동네에서 실컷 먹고 오지 않고 예수님을 생각해서 그것을 그냥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먼저 드리고 자신들이 먹으려 했던 그들의 예의 바른 행동을 저는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에 갔습니다. 여기저기 그들의 허기진 배를 유혹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선 허기진 내 배부터 채우고 그 다음에 먹을 것을 구해서 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왜 너의 배부터 먼저 채웠느냐?'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설령 그렇게 했다할지라도 나쁜 행동이라고 말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구해온 것을 먼저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께서 드시고 나면 그 뒤에 자신들도 허기진 배를 채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칭찬해 줄만한 일입니까? 이런 것 때문에 제자들은 '오직 육적인 양식에만 관심이 있었다'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엉뚱한 듯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32절에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가지고 온 음식말고 다른 먹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실망스럽고 기분 나쁜 말일 수 있습니다. 기껏 동네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해왔더니 먹을 것이 따로 있다고 하니 얼마나 기분 나쁜 말입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있다고 했으면 동네에 내려가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오랫동안 허기진 상태로 있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기껏 힘들게 먹을 것을 구해왔더니 먹을 것이 이미 있었다니 얼마나 황당한 말입니까? 제 아내가 외출을 했다가 집에 들어올 때 가끔씩 김밥이나 만두 같은 것을 사가지고 들어옵니다. 저녁도 못 먹고 혼자 있을 저를 염려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힘들게 상록수역에서부터 음식을 들고 왔는데 집에 있는 저는 벌써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고 커피까지 한잔 마신 상태입니다. 전혀 배고픈 기색이 없습니다. 배고파 어쩔줄 몰라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며 왔는데 웬걸 그게 아닙니다.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들고 온 김밥이나 만두가 초라하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그러면 아내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리지'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아니면 '기껏 걱정해서 사왔더니 이게 뭐람? 다음부터는 걱정할 필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사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신혼 때는 이미 저녁을 먹었는데도 안 먹은 척하고 사가지고 온 것 같이 먹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이 동네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해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몹시 시장해 하실 예수님께 자신들이 구해온 음식을 드리면서 빨리 드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제자들이 얼마나 기분이 언잖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33절에 보면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굉장히 점잖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어떻게 행동합니까? 제자들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해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도대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사마리아지역에서 누가 먹을 것을 갖다주었단 말입니까? 제자들은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만약 자기들 몰래 혼자서 음식을 먹었다거나 감추어 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면서 제자들의 행동을 굉장히 점잖게 표현하고 있지만 제자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아직 자초지종을 들어보지 못한 터라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만약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생각이나 마음상태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궁금해하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방금 자신이 말씀하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란 실제로 먹는 음식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제자들은 지금까지 온 마음을 다해 무엇을 찾아다녔습니까? 먹을 양식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배고플 때 먹을 양식을 찾아다니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고 해서 그것을 주님께서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주님이 배고파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배고픔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성취하는 것이 곧 자신의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월드컵 4강전을 치루기에 앞서 신문이나 기타 텔레비전 뉴스에서 히딩크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승리에 목말라 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승리에 굶주려 있다"라는 표현입니다. 사실 우리의 목표는 16강입니다. 그런데 파죽지세로 4강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내친김에 결승까지 올라가려 했던 것입니다. 이미 목표를 초과달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히딩크 감독과 우리 선수들은 승리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승리를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강진입할 때까지 한번도 패하지 않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승리에 대해 목말라하고 굶주려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배고파하신 것은 육적인 배고픔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배고픔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 곧 주님의 양식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여인을 통해 그 양식을 채우셨습니다. 오랫동안 죄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하던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죄로 인해 사람을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대인기피증에 우울증까지 겹쳐 있었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새 생명을 찾아 주었습니다. 과거에 그녀가 알지 못했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 것을 경험한 사마리아 여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기뻐하는 모습으로 마을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양식에 대한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배고픈 것을 먼저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데 배고픈 것을 채우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를 믿으려해도 배가 불러야 정신차리고 믿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픈데 예수 믿겠다는 말이 나오겠느냐?"는 것이 제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자들만의 생각이 아니고 오늘 우리들의 생각일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옳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떻게 현실을 무시하고 살 수 있느냐?" 이것이 우리의 생각이며 입장입니다.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현실은 믿음으로 사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는데 어떻게 그런 현실을 무시하면서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현실을 적당하게 고려한 상태에서 믿음생활을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예수님처럼 살수 없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그 말씀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씀처럼 들려질 수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하루 종일 전도만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당장 먹을 땟거리는 어떻게 합니까? 누가 먹을 것을 책임져 주느냐? 말입니다. 세금은 어떻게 낼 것이며 교육비는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쌀은 어떻게 사겠느냐? 말입니다. 이런 것은 안중에도 없고 매일 전도만 다니는 남편이 있다면 아내된 사람의 속이 새카맣게 타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아마 천불이 날 것입니다. 아내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매일 교회일 한답시고 남편 식사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고 교회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가니 믿음 없는 남편이 보기에 도대체 뭐하냐? 싶지 않겠습니까? 아내가 나와 결혼했는지 교회와 결혼했는지 헷갈리지 않겠습니까?

    설령 자신은 전도하면서 영적인 기쁨을 누리며 살는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생계를 책임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군가가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어야지 힘을 내어 전도도 하고, 교회 봉사도 할 것인데 그런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고 무조건 교회 일에만 매 달리고 전도하는 일에만 정신을 쏟고 있으니 이거 미칠 노릇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말이 뭡니까? 믿어도 좀 적당하게 믿어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선에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생각입니까?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활을 모두 무시하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활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우선 먹는 문제보다 사마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엄청난 영적 추수의 현장에 우리가 함께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가 4강 안에 들어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거리에서 보여준 응원은 전 세계를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사실 저도 그곳으로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다녀온 사람들의 얘기가 무엇입니까? 그곳에 가보니까 아무리 점잖게 있으려 해도 '대∼한민국'이 저절로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화장실에 가도 다섯 박자 노크를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똑똑 똑똑똑' 그러면 안에서 '대∼한민국'으로 자신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저도 새벽기도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면 그 밤에 시청으로 광화문으로 나가서 그 열기를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영적 추수의 현장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마치 시청앞을 가득 메운 그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처럼 우리를 영적 추수의 현장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먹을 것 때문에 현실과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배가 좀 고프면 어떠냐? 는 것입니다.

    아마 응원하러 간 사람들은 배고픈 것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배가 좀 고프면 어떻습니까? 그 자리는 집에서 식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냥 빵 먹고 우유 마시면서 끼니를 때워야 하는 곳입니다. 설령 그렇게 끼니를 때우면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인터뷰때 하는 말이 응원하기 위해 직장까지 그만뒀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물론 응원하는데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축구 응원하는데 배고픈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직장 그만두는 것도 어떤 이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승리의 기쁨은 더 크고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기쁨으로 잠시 배고팠던 것은 모두 보상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영적인 추수의 현장은 어떻겠습니까? 더욱 풍성한 포만감을 안겨다 줄 것인데 왜 현실문제에 발목 잡혀서 이 엄청난 기쁨과 감격을 상실하고 있느냐? 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차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추구해야할 우선의 양식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양식을 얻기 위해 필요한 보조수단일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뒤바뀌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뒤바뀌어 있습니까? 먼저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차후에 영적 양식을 해결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일차적인 양식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양식문제는 그 다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이 말씀은 먹을 것을 위해서 일을 하면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얻어야 할 양식을 위해서 먹는 양식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자신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밥은 누가 하고, 빨래는 누가하라고 교회일에 그렇게 몰두하느냐? 이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어떻게 먹고살라고 전도만 하고 다니느냐? 이것이 아닙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는 말은 성경에 나오는 말이고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돈을 주며 누가 쌀을 주느냐? 이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이 말씀을 굳게 신뢰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실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보지도 않고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지 않더라고 강변합니다. 정말 맡겨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합니다. 어중간하게 맡겨본 사람들이 대개는 '아니다, 결국 먹는 문제는 내가 책임져야 할 문제지 그 어느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전도만 하면 굶어죽기 십상이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가 먼저 추구해야할 양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이때가 아직 추수하기에는 넉 달 정도 남은 시기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농부들은 이때가 되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대개 가을 추수 때, 늦은 비가 오기 마련입니다. 그때 추수할 준비를 하게 되는데 파종과 추수사이에는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추수 때가 오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는 그들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엉뚱하게도 '눈을 들어 밭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보는 관점과 주님이 보시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입으로 들어가는 양식을 얻기 위한 추수의 때는 아직 넉 달이 남아 있을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것이 사실입니다. 분명 넉달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양식을 얻는 추수의 때는 넉 달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눈을 들어 밭을 보는 그 때가 바로 추수의 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할 때 참 많은 핑계가 있습니다. 마치 아직 추수의 때가 넉 달이나 남은 것처럼 행동하며 말을 합니다. "집사님! 헌신하시지요? 봉사 좀 하시지요?" 그럴 때 어떤 대답을 하십니까? "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제가 보기엔 아직도 추수하려면 넉 달이나 남은 것 같습니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 넉달이나 남았는데 자꾸 추수를 재촉하십니까? 그러다가는 농사를 다 망쳐버리고 맙니다. 그냥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이런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그런 말들이 사실은 핑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믿음 없는 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그렇게 말하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추수는 때가 없습니다. 넉달을 기다리려고 했다가 오히려 낭패를 만나기 십상입니다. 가만히 넉달을 기다리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수 없습니다. 현실과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현실 문제를 먼저 해결해 놓고 하겠다는 것은 '넉달을 기다리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님은 지금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에 가서 자신의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예수에 대해 전했습니다. 한번 와서 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동네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더구나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이유를 주님은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36절과 37절에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까? 이미 거두는 일에 대한 삯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임금을 선불로 지급 받았다는 말입니다. 만약 임금을 선불로 지급 받은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당장 해고입니다. 지난 외환 위기때는 열심히 일한 사람들 중에서도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해고당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부부가 함께 같은 직장에서 일하면 부부중 한사람이 그만두어야만 했습니다. 일자리는 없는데 한 가정에서 두 사람이 일을 하게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임금을 받은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해고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나라에는 일자리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얼마든지 일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삯을 받고도 일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무슨 삯을 이미 받았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이 곧 우리가 받은 삯입니다. 그 삯을 받은 사람들은 영생하는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열매는 그냥 먹어서 없어지는 열매가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열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받았습니다. 그녀 안에 있던 모든 상처가 치유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동네로 가서 외쳤습니다. 영생하는 열매를 모으기 위해 그녀가 가장 가기 싫어했던 장소로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어디 사마리아여인뿐이겠습니까? 사실은 저와 여러분도 그 삯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아직 넉달이나 남았다고 말하며 핑계를 대시겠습니까?

    왜 사람들은 아직 넉달이 남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추수의 기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과정에서 힘든 것만 생각하고 추수를 통해 얻게 되는 기쁨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추수의 현장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모로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이야 기계가 잘 발달되어 농사의 모든 과정을 기계로 해버리기 때문에 과거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농기계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엔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수고를 해야만 했었습니다.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그 힘든 것 때문에 파종만 하고 추수할 때를 미루어 둔다면 그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오늘 성경이 뭐라고 했습니까?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뿌리는 자는 누구며 거두는 자는 누구입니까? 뿌리는 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거두는 자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함께 즐거워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생각하기를 영적추수의 현장에서 수고하면 결국 그 기쁨은 주님이 다 가져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한 영혼을 향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데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수고는 주님께 큰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만 기쁨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똑같이 그 기쁨이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를 보면 2장 6절을 보면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수고했는데 그 수고의 기쁨을 주님이 몽땅 가져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수고한 농부도 동일하게 누리게 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당시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직접 뿌리지 않은 곳에서 추수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씨뿌리는 자가 추수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는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세상일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에서 어려운 회사 살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수년동안 연구 개발비를 투자하여 개발했더니 어느새 대기업에서 유사한 제품을 내놓고 대대적인 광고 마케팅으로 오히려 더 많은 이득을 챙겨버리는 실례가 얼마나 비일비재합니까? 그래서 우리 속담에 '죽 쑤어서 개준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사실 월드컵도 그런 경우입니다. 물론 우리가 4강에 진입해서 여러모로 경제적인 특수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월드컵만 생각하면 우리에게 이득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심히 잔치를 벌여놓고 돈은 피파가 다 챙겨가 버렸습니다. 기껏 4강안에 든 우리에게 100억 정도되는 배당금만 주고 온갖 생색을 다 내고 있습니다. 피파가 한 일은 사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름 빌려주고 이득은 자기들이 다 챙겨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열심히 전도했더니 다른 교회에 등록했더라' 이게 아니란 말입니다. '혼자 신앙생활하는 것처럼 야단이야' 이게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열심히 전도한 사람이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 등록하여 다니면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실망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누군가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욱 열심히 하도록 칭찬하고 도와줘야지 '예수 혼자 믿냐?'는 식으로 비아냥 거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영적인 일은 함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따지고 보면 거두는 기쁨을 누리실 분도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기쁨에 함께 동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3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노력한 것'이란 추수의 대상이 되는 '열매'를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 노력의 주체인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마음의 상태를 만들므로 영적인 추수를 준비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추수를 위해 우리들이 할 일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없고, 힘들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추수를 위해 거쳐야 할 어려운 과정은 이미 다 지나갔다는 말입니다. 사실 저는 농사를 지어보지 못했습니다. 농촌에서 자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농사를 짓는 것은 그 과정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 추수하는 것은 그렇게 힘든 작업이 아닌 줄 압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추수하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영혼을 위해 사전 작업을 다 해 놓았다는 말입니다. 단지 우리는 눈앞에 있는 많은 열매로 인해 교만하지 않고 앞서 노력한 분들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부흥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래 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복음을 위해 기꺼이 수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 땅에 복음을 위한 거룩한 피 흘림이 있었기 때문에 그 후대에 사는 우리들이 별로 노력하는 것도 없이 열매를 거두어들이고 있는 것 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에 가서 예수를 전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몰려오는 그 영혼들을 추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서 멀리는 구약시대 많은 선지자들이 준비를 했고, 가깝게는 세례요한이 이 영적추수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제 거두는 일이는 추수만 남았습니다. 그 일에 주님은 제자들이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만 하시는 얘기가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한 우리 주님의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혹시 아직도 이 추수하는 일에 머뭇거리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현실과 타협하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그러면 먹는 것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하며 반문하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을 주님이 가지고 계신 관심으로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넉달이나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양식을 구하시겠습니까? 한끼 먹고 나면 또 다시 우리를 배를 고프게 만드는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일생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양식을 위해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오늘은 한해의 절반이 지나가는 6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연초에 주님앞에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결심했던 부분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에 여러분의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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