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경주 2002-06-25 17:00:47 read : 197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히브리서 12:1~2 //2002-06-23
지금 전 세계는 직경 22.2cm, 무게 450g, 바깥둘레 68-70cm 되는 둥근 축구공 ‘피바노바’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피바노바(Fever-nova)는 ‘열정’을 상징하는 영어의 ‘피바’와 짧은 기간 환하게 빛나는 ‘별’을 뜻하는 스페인어 ‘노바’의 합성어로, ‘열정의 별’이라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2002년 월드컵 공인축구공의 이름입니다. 이 축구공은 독일 샤인펠트에 위치하고 있는 아디다스 축구공 연구 센터에서 그 정확성 및 무게와 원주율 실험에 로봇 발을 이용하여 2000번 이상이나 실시된 결과의 산물입니다. 볼을 차는 로봇 발이 35m의 거리에 놓인 축구공을 맞히는 연습을 2000번이나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중 실패는 두세 번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TV 시청 연인원이 166억 명인데 비해 1994년 미국월드컵은 320억 명으로 거의 곱이나 되었습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은 400억 명으로 늘어났으며,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500억을 훨씬 넘어 600여억 명을 관측하는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다고 보면 지금 지구촌이 열광하는 축구경기의 숨소리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 한국은 지난 6월 4일 부산 경기장에서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2:0으로 쾌승을 거두고, 6월 10일 대구 경기장에서 미국을 맞아 1:1로 무승부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 14일 인천경기장에서 구라파의 강호 포르투갈을 맞아 1:0으로 넉넉하게 승리하였습니다. 이로써 48년만의 숙원이었던 16강의 벽을 뚫고, 한걸음 더 나아가 지난 6월 18일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이탈리아를 선취골을 내준 가운데 2:1로 역전승을 거둠으로 반세기 만에 축구한국의 새 장(章)을 선명하고 뚜렷하게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실 공히 축구한국의 깃발을 전 세계 앞에 드높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열정의 별’로 명명된 둥근 축구공 ‘피바노바’ 앞에서 한국과 일본 양국의 축구스타디움과 TV 앞에서 터지는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함성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경주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역사의 스타디움에서 신앙의 경주를 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절에서는 바울 자신의 신앙여정을 달음질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장 16절과 3장 12절에도 그리스도인의 달음질이 그리스도의 날에 헛되지 않게 되기 위하여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좇아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는 경주자의 생애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본문에도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라고 함으로 우리의 신앙여정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앙의 경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당한 신앙의 경주가 어떤 것일까? 히브리서 저자는 몇 가지 영적 교훈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Ⅰ.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의 격려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 중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한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히브리 선진들의 신앙적 영웅의 역사를 받아 이어주는 말씀입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란 경기장의 관람석을 꽉 메운 초만원의 관중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웅변은 청중에게서 오고, 좋은 경기는 관중에게서 온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여기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경주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관중(증인)은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히브리 신앙선진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경주에 증인(관중)이 됨에는 두 가지 큰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① 저들 자신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증인된 신앙을 고백했다는 사실이고, ② 지금은 우리의 증인으로 우리를 고무시키고 격려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전반부에 보면 아벨은 말하는 믿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아 방주를 짓는 믿음, 아브라함은 미지를 향하여 결단하는 믿음, 사라는 생산하는 힘을 얻는 믿음, 이삭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야곱에게 축복하는 믿음, 야곱은 연단받는 믿음, 요셉은 유언을 소망하는 믿음, 모세는 애굽을 떠나 헌신하는 믿음의 달음질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나아가는 믿음, 라합은 영접하는 믿음,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담대한 믿음의 경주를 경주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11장 후반 부분에는 구약 열왕 시대와 구약과 신약 중간 시대에 일어났던 신앙선진들의 결사적 경주내용들을 요약해 놓고 있습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33~40)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약시대의 경기자들이 구약시대의 신앙경주를 승리로 마감해야 된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달렸던 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예수를 바라보고 달렸고, 신약의 성도들은 이미 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을 믿고 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영감의 저자는, 오늘을 달리는 신약시대의 신앙의 경주자들에게는 이미 믿음으로 승리한 선배들이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관중(증인)들은 이미 승리하여 월계관을 얻은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배우는 유명한 극작가가 관람석에 있을 때 한층 더 노력하여 연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기자들은 유명한 올림픽 선수들이 관전하고 있을 때 몇 배나 더 되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지금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잘 보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경기 현장에는 하늘의 구름같이 둘러싼 승리의 전사들이 지켜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구약에서 달렸던 믿음의 선진들이었습니다. 특히 종말의 경기장에 뛰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는 구약 승리의 역사뿐 아니라, 신약 2000년의 찬란한 승리의 역사가 우리의 종말 경기를 보장하고 격려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Ⅱ. 무수한 장애물을 제거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 중에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라고 하였습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은 경기하는 선수에게 큰 방해가 됩니다. 경기자는 두껍고 무거운 옷을 입고는 뛸 수 없습니다. 수영하는 선수들에게는 긴 머리카락까지도 방해가 됩니다. 신앙의 경주에 있어 장애물과 모든 인생고의 무거운 짐들을 주께 맡겨야 합니다(마 11:28~30). 모든 연약함에서 오는 습관이나 악행 같은 얽매이기 쉬운 죄악들을 주께 고하여 사유함을 받아야 합니다(요일 1:9). 모든 염려를 주님께 던져 버려야 합니다(벧전 5:7). 인생고의 짐에서 해방되고 죄사유하심의 즐거움을 받은 자만이 용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경주에는 날마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져 주시는 주님이 함께 하고 있음을 체험해야 됩니다(시 55:22, 68:19).
Ⅲ.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 곧 불굴의 인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 하반절에 다시 말하기를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인내’라고 하는 ‘휘포모네’(uJpomonhv)는 역경을 뚫고 나아가는 추진력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의 역경들을 극복해 나가는 강한 투지력을 말합니다. 소극적으로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그 어려운 것을 이겨내고 나아가는 투지력, 추진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단지 말도 하지 않고,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오는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수하는 침묵이 아닙니다. 아니면 팔짱만 낀채, 머리를 숙이고, 만사를 체념하는 마음으로 그저 그저 되어가는 대로 맡겨버리는 태도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곤란한 사건이나 어려운 과정들을 어떤 날개를 달고 뛰어넘어 버리려고 하는 공상적 개념도 아닙니다. 어떤 경우의 장애에도 굴하거나 낙담하거나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또 멈추지 않고, 분명한 목적의식과 향방을 가지고 뚫고 나아가는 강한 생존적 투지력을 의미합니다. 모든 경우의 경기는 사실상 온갖 역경의 종목들에 대한 인내의 싸움입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인내는 필승의 비결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인내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약 5:11).
Ⅳ. 예수를 향한 경주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예수를 바라볼까?
1. 그는 우리 신앙경주의 창설자, 선구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믿음의 주’라고 할 때 나타난 ‘주’는 ‘알케고스’(ajrchgov")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곧 ‘창설자’, ‘앞서 인도하는 자’, ‘선구자’를 뜻합니다. 예수가 우리 믿음의 경주를 창설하신 분입니다. 그가 우리의 구원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주셨습니다(엡 2:8). 그래서 히브리서 3장 1절에는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2.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참뜻은 우리 구원을 완성하시고 성취시키시는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적 표현대로 말하면 그는 우리 신앙경주를 완성시키시고 성취시키실 자라는 뜻입니다. 넉넉하게 우리를 이기게 하실 분이시라고 하였습니다(롬 8:37).
3. 우리 앞에 모범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중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33년 동안을 달렸습니다. 부끄러운 십자가의 코스를 달렸습니다. 마침내 보좌우편에 앉으시는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이러한 앞에 있는 즐거움을 내다보고 달렸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그는 우리 신앙경주의 유일무이한 모범이시었습니다.
4. 그는 우리 신앙경주의 목표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중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바라보자’라는 말은 옆눈을 팔지 않고 한 초점을 향하여 주의깊게 집중하고 응시하라는 뜻입니다. 그는 우리 신앙경주의 ① 출발점이었습니다. ② 그리고 동행자였습니다. ③ 또한 마지막 종점, 곧 결승점이십니다. 스데반은 그 최후의 결승점을 쳐다보고 그 얼굴이 빛났습니다. 그리고 이르기를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 4:7~8)고 그의 최후 결승점을 알려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세계는 월드컵 경기 때문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아니 열병을 앓고 있다고 함이 좋을는지도 모릅니다. 키신저는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국민성이 나타나는 경기라서 더욱 재미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온 세계가 열광하는 축구 스타디움의 숨소리를 함께 하면서 여기 지구라고 하는 스타디움에 하나님이 시작하신 신앙의 경주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상 이 경기의 창시자는 예수 자신이고, 진행자도 예수 자신이고, 완성자(온전케 하시는 이)도 예수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위하여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악의 장애물을 벗어야 합니다. 인내하는 불굴의 투지력이 있어야 합니다. 목표를 잃지 않는 마지막 승리 지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는 끝이 좋습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 그것은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그것은 상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또 영원히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축복이요, 상급이요, 칭찬이요, 영예입니다. 그것은 행함에서 얻는 극치의 보상입니다. 말하자면 죽고자 하는 자는 마침내 살고 마는 생명의 경주입니다. 할렐루야!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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