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월드컵과 관련된 조크 한마디 모르면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할머니와 손자가 월드컵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포르투칼과의 경기 도중에 해설자가 '피구'얘기를 자주 언급합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손자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축구를 보면서 왜 자꾸 피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 말을 들은 손자가 어이가 없는 듯 '할머니! 저 선수 이름이 피구라구요' 그러자 할머니가 다시 말했습니다. '어쩐지 피구를 잘 하더라니'
중국 천진에서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있은 다음날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사실 그곳에 머무는 며칠동안은 전화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안부를 궁금해 할 것 같아 어렵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제 아내의 첫마디가 '축구 봤어요?', 저의 안부보다 중국에서 축구를 보았는지가 더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어제 4강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어 내고 한국 축구가 세계 축구사를 다시 쓰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뿌듯함을 느낍니다.
그동안 축구를 위해 뿌린 씨가 지금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한동안은 그 씨가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싹을 틔우지도 않고, 열매를 맺는 모습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만 죽어 버린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엄청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그 중에 어떤 이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너무도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그래서 그 씨앗이 죽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습니다. 어느 틈엔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월드컵을 축구의 축제로만 만들 것이 아니라 선교의 축제로 만들자는 얘기가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래서 88 올림픽때 그랬듯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월드컵 경기장을 찾는 내국인과 외국인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경기장을 찾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짜증을 낼른지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그 전도지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꼭 티를 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과 행동에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은 뿌려진 씨가 죽어 버리는 것 같지만 언제 어느 때 그들에게 뿌려진 씨가 살아날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히딩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이미 잊혀진 듯한 350년전의 인물이 다시 소개되고 있습니다. 네델란드인 하멜입니다. 역사책 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하멜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1653년 우리나라 땅을 처음 밟은 뒤 7년동안 억류생활을 하다가 탈출해서 본국으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써서 조선을 유럽에 알린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옛날 하멜의 얘기가 축구를 통해 한국을 세계에 알린 히딩크에 의해 다시 거론되어지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네델란드인 하멜은 역사책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축구를 통해 다시 그 옛날의 얘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우리에게 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뿌려진 복음은 때가 되면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씨가 죽은 것 같아 보이지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미 씨가 뿌려져 있었는데 그동안 그 씨가 싹을 틔우지도 않고 열매를 맺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만 죽어버린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때가 되어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25절에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오래 전부터 메시야에 대한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고, 그분이 오시면 자신의 사악함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말해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녀는 비록 자신의 죄가 지적 당하는 일이 있다할지라도 그 사악한 상태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를 말해주실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신명기 18장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8장 18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신명기의 말씀을 통해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가 나타날 것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자신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지금 자기 앞에 있는 분이 그분이라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바로 자기 앞에 진리가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들보다도 아마 너무 가까이 있고, 너무 손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진리는 먼 곳에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것을 발견하거나 나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생각이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접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 사실을 사마리아 여인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 분이 오시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이번엔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바로 네가 기다리며 기대하고 있는 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이 가지고 있는 기대감에 불을 붙이신 것입니다. 사실 그녀는 메시야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씀을 무시해버리거나 내 던지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대감에 대한 열매를 거두어들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선교 여행중에 강행군을 했습니다. 강행군이란 여행을 위한 강행군이 아니라 귀납적 성경연구를 가르치기 위해 강행군을 했다는 말입니다. 하루에 9시간씩 삼일하고도 돌아오는 날 오전시간까지 강의를 했습니다. 목요일 저녁시간을 제외하고 총 27시간을 강의하고 왔습니다. 사실 돌아오던 날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었습니다. 계속 서서 강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학생들에게 귀납적 성경연구방법은 조금 생소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학생들이 한국의 신학생들처럼 잘 훈련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좋은 서적을 마음대로 구입해서 볼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사실 그런 책도 별로 없지만), 그러기에 귀납적 성경연구방법은 여러모로 소화해 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학생들에게 당부한 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어렵고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속적으로 성경을 바르게 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라는 것과 "절대로 중도에 책을 덮어 버리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씨가 되어서 언젠가는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해 두고 있었습니다. 물론 신명기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자기 앞에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 그녀에게 직접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바로 그로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주의 말씀 중 어느 것 하나라도 가벼이 여기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됩니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고 나는 언제든지 듣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아도 결국은 우리에게 좋은 양약이 될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아무리 간단한 말씀이라 할지라도 버리지 아니하고 붙드는 자에게 결국 주님은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많은 말씀을 들어야만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말씀을 듣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버리지 아니하고 내 마음에 새겨두는 자세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에게 말하는 내가 바로 그 메시야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막 이 말이 끝나자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27절에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이상히 여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래 랍비는 길거리에서 여인과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와도 이야기하지 말도록 정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겼다면 아직도 그들은 예수님을 랍비 정도로 밖에는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과 함께 한 시간이 결코 적은 시간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자들도 예수님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이 있다고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갈급해 있는 심령, 주를 기대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주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고 예수가 나의 참된 생명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이번엔 학생들에게 하루 9시간씩 3일을 그렇게 가르쳤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의 눈은 분명 우리와 달랐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으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받아들이고 소화해내려는 자세가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제가 감격하고 제가 사실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실을 강의도중 위험한 일이 세 번씩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은 뒤로한 채 말씀에 대해 갈급해 있는 심령을 볼 때 얼마나 큰 은혜가 되든지 제 숙소로 돌아와서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우리들은 제자들처럼 판단하는 자리에 있고, 은혜 받는 자리에서는 멀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엇을 구하는지 어찌하여 그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지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 묻지 않았을까요? 감히 제자가 스승이 하시는 일에 '감놔라 대추놔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일까요? 스승의 권위에 눌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까이 접근하게 되면 자신들도 한통속이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두 사람사이에 진지한 대화가 오가면 그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예수님과 사마리아여인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고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자신들이 끼어들 수 있는 상황이 분명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왜냐하면 분위기가 사뭇 진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대화를 끊을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아닙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지금 예수님과 사마리아여인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생명에 관한 얘기입니다. '생수' 그것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지금까지 붙들고 있었던 말씀에 대한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분위기 속으로 끼어들 수가 있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습니까? 지금 한명도 아니고, 두명도 아니고 한꺼번에 여러 명의 유대인 남자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만남이 있기 전이라면, 아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버렸을 것입니다. 단지 한명의 유대인 남자와 얘기하는 것도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명의 유대인 남자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는데 어떻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온 선지자의 말씀을 듣는데 몇 명의 유대 남자들이 다가온다고 해서 도망갈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이제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동안 자신안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말씀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을 체험하고 있는데 다른 것이 안중에 있을리 없습니다.
저는 이번 월드컵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좋은 성적을 거둔 것에 대해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어제 아침 뉴스를 보았더니 지난번 이탈리아 전때 표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경기장 입구에서 며칠씩 텐트를 치고 기다렸던 것처럼 어제 벌어진 스페인과의 경기표를 구하기 위해 며칠씩 텐트를 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그렇게 표를 팔지 않는다는 보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씩 경기장 입구에서 텐트를 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기자가 다가가서 도대체 직장은 어떻게 하실려고 이렇게 며칠씩 있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직장이 문제냐? 한국이 4강으로 가느냐 가지 못하느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섰는데'라고 아주 씩씩하게 대답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대단한 애국심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사실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물론 축구를 구경한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축구가 끝나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걔 중에 어떤 이들은 그러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축구 외에는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벌써부터 축구증후군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축구가 있는 날은 아예 일하기도 싫은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축구외에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는 그런 행동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이와는 반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말씀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좀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말씀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이미 여러분 안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안에서 살아서 꿈틀 꿈틀 거리는 것을 체험하고 계십니까?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도록 파고 들어와 있습니까? 만약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자리를 보존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마리아여인 역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28절과 29절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그녀 안에서 꿈틀거릴 때 그녀는 어떻게 행동을 했습니까?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소리쳐 외쳤습니다. 어떻게 외쳤습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한 이 사람을 와서 한번 보라는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여인은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웠고 지금 현재의 삶도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사람들이 있는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물동이를 버려두고 갔을까요? 그러나 단지 급했기 때문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녀에게는 이런 시시한 물동이가 필요치 않습니다. 보화를 캐낸 사람이 시시한 돌 하나에 목을 멜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녀는 지금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영원히 샘솟는 생수를 공급받았습니다. 그러니 물동이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물동이가 필요치 않습니다. 철철 흘러 넘치는 생명의 물이 솟아나고 있는 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물동이를 챙겨야 하겠습니까? 그것을 챙길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갔습니다.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을 붙들지 않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물동이를 붙들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물론 예수를 알기 전에 그녀에게 물동이는 매우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했던 것이 물동입니다. 그러나 자기 앞에 있는 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고는 물동이를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버려 두고 동네가 내려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 아주 중요하게 붙들고 있었던 물동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주를 만난 사람이라면 만난 그 후에는 과감하게 그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사람을 만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곳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마음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될까봐 오히려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것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가 더 염려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지금까지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가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녔습니다. 물도 정상적인 시간에 길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가 그녀에게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동네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기의 모든 행한 것을 알고 있는 이 분을 와 보라고 증거했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확신에 찬 말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이런 경험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을 얘기할 때 많은 기도를 한다든지 아니면 열심히 봉사한다든지 이런 것을 통해 믿음을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확신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의 경우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도도 잘하고 봉사도 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확신이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래서 내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제 개인적인 간증을 조금 소개한다면 저도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일학년시절 학생회 수련회에 참여했을 때입니다. 물론 그동안 전혀 신앙적인 체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살아 계심을 확신하고 그분 앞에 삶을 헌신할 것을 결심했던 때가 고등학교 일 학년때 학생회 수련회에 참석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회 수련회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 중에 한사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적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학생회 시절에 주님을 만날 기회를 상실한다면 수 십년이 지나도 만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인이 되면 그 마음이 이미 굳어질대로 굳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만큼 기회가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학생회 수련회 혹은 주일학교 여름 성경학교에 여러분의 자녀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흘 보충수업 빠진다고 해서 추락하는 날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수련회에 참여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끝없는 추락으로 내 몰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확신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괴로운 것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본 경험이 없는 신앙생활은 고역입니다. 확신없이 걷는 인생의 길은 풍전등화와도 같습니다. 언제 그 불이 꺼져 버릴지 모릅니다.
예전에 우리나라 축구경기를 볼 때 얼마나 조마조마 했습니까? 도무지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특히 뒷심이 부족해서 다 이겨놓은 경기도 막판에 뒤집혀서 져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축구경기 보는 것이 신이 납니다. 경기만 하면 무조건 이길 것 같은 확신이 막 솟구칩니다. 그래서 응원을 해도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확신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물론 확신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 당사자보다 더 괴로운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내가 주일만 되면 '교회가자'고 통 사정을 하니 안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가자니 내키지는 않고, 와서 예배를 드리기는 하는데 도무지 하품만 나오고, 한 시간 앉아 있기는 앉아 있는데 말 그대로 죽을 맛입니다.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남들은 열심히 설교를 들으면서 가끔씩 고개도 끄덕이며 '아멘'하고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은 것 같은데 자기에게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녀는 더 이상 부끄러울 것도, 감출 것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지금 동네에 들어가서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녀는 손가락질 당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이나 결혼에 실패하고 여섯 번째는 아예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동거생활하고 있는데 뭐 잘났다고 온 동네방네 떠들어대며 다닙니까?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녀에게는 지금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남들이 손가락질하면 어떻습니까? 남들이 부정한 여인이 부끄러운 줄 모른다고 수군거리면 어떻습니까? 그녀는 지금 너무도 확신에 차 있습니다.
설령 자신의 부끄러운 것을 드러내 놓는다할지라도 더 이상 목마른 상태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마시면 또 다시 마셔야 하는 우물물을 길으면서 인생을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와서 한번 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확신에 찬 행동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미 그녀의 모든 상처가 치유되어졌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사람을 기피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감추거나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녀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보다 현재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상처가 치유함 받는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상처는 주님을 통해 치유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인아이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치유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라야 합니다.
그녀의 확신에 찬 고백은 결국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0절에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로 오더라'라는 표현은 무리가 즉시 뛰쳐나와 예수를 향해 달려가는 행동을 말합니다. 마치 월드컵 경기에서 승리를 경험한 응원단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달려가는 모습과 같습니다.
지금 세계는 우리가 월드컵 4강의 기적을 이룬 사실에도 주목을 하고 있지만 열렬하게 응원하는 전 국민의 응원열기에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마 어제 4강을 확정짓는 홍명보선수의 페널티킥 성공은 전 국민을 흥분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집에서도 거리에서도 모두 좋아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 들게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냉철하게 우리를 돌아보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축구가 아닌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월드컵 열기로 인해 거리로 뛰쳐나가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생수는 한 두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필요한 분이십니다. 여러분 안에 이미 들어간 말씀의 씨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 씨가 죽어 있었는 줄 알았는데 죽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물을 주지 않아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그 싹을 틔워야 할 때입니다. 이 자리에 마냥 주저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내 인생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감격과 기대감을 가지고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동네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며 담대하고도 확신에 찬 함성을 지르시기 바랍니다. 오 필승 코리아가 아니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라고 외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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