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언약 (The Lausanne Covenant) 2002-07-25 22:07:21 read : 1241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 언약은 1974년 7월 16일부터 25일까지 스위스 로잔에서 모였던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의 대표 3,700여명(150여 국가로부터 모였음)이 합의하고 서명한 것이다. 이 글의 초안은 세계적인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가 작성하였다).
머리말 (Introduction)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150여개 국으로부터 모여온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은 크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자신과의 교제와 우리들 상호간에 교제를 가지게 하심을 기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행하시는 일에 깊은 감동을 받으며 우리가 저질러온 갖가지의 실패를 통회하고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복음화의 과업에 도전을 받는다. 우리는 복음이 온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좋은 소식임을 믿으며 이 복음을 온 인류에게 선포하여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 분부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그의 은혜로 결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게 이 신앙과 이 결단을 확인하고 우리의 이 언약의 공포하려 한다.
하나님의 목적 (The purpose of God)
우리는 세계의 창조자이시며 주되신 영원한 한분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인한다. 하나님은 그의 뜻의 목적에 따라 만물을 통치하신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한 백성을 불러내시며 다시금 그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시어 그의 나라의 확장과 그리스도의 몸의 건설과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그 부름받은 백성들을 그의 종들과 증인이 되게 하신다.
우리는 왕왕 세상과 동화되든가 혹은 절연됨으로 우리의 소명을 부인하고 우리의 선교 사명에 실패하였음을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고백한다. 그러나 복음은 비록 질그릇에 담겼을지라도 귀중한 보화임을 기뻐하며 이 보화를 성령의 능력으로 널리 알게 하는 과업에 우리 자신을 새롭게 헌신하려고 한다.
(사40:28, 마28:19, 엡1:11, 행15:14, 요17:6, 18, 엡4:12, 고전5:10, 롬12:2, 고후4:7)
성경의 권위와 능력 (The authority and power of the Bible)
우리는 신구약성경이 하나님에 의하여 영감되었음과 그 참됨과 권위를 믿는다. 성경은 그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유일한 기록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있어서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유일의 정확 무오한 법칙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그의 구원의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경말씀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불변하기 때문이다. 그 계시를 통하여 성령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성령은 어느 문화 속에 있든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깨우치사 이 진리를 그들의 눈으로 친히 새롭게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모양의 지혜를 온 교회에 더욱더 풍성하게 나타내신다.
(딤후3:16, 벧후1:21, 요10:35, 사55:11, 고전1:21, 롬1:16, 마5:17, , 18, 유3, 엡1:17, 8,, 3:10, 18)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 (the uniqueness and universality of Christ)
우리는 전도의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구주도 오직 한 분이요 복음도 오직 하나임을 확인한다. 우리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이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의 불의로써 진리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여하한 형태의 혼합주의와 그리스도께서 어떤 종교나 어떤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신다는 뜻에서 진행된 대화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손상시키므로 이를 거부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신인(神人)으로서 죄인을 위한 유일한 대속물로서 자신을 주시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의 중보자이시다. 예수의 이름 외에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이름은 없다. 죄로 인하여모든 사람이 멸망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어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회개할 것을 원하신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구원의 기쁨을 거부하며 스스로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떠난다.
예수를 "세계의 구주"로 전한다 해서, 반드시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혹은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모든 종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제공한다고 보장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예수를 "세계의 구주"로 전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죄인들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며 마음을 다한 회개와 신앙에 의한 인격적 헌신으로 예수를 구주로 맞이하도록 모든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다른 이름위에 높임을 받아 왔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모든 입이 그를 주로서 고백하게 되는 날을 간절히 고대한다.
(갈1: 6-9, 롬1:8-32, 딤전2:5, 6, 행4:12, 요3:16-19, 벧후3:9. 살후1:7-9, 요4:42, 마11:28, 엡1:20, 21, 빌2:9 -11)
전도의 본질 (The nature of evangelism)
전도한다는 것은 기쁜 소식을 널리 퍼뜨리는 것인데, 기쁜 소식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나시어 통치하시는 주로서 그는 지금도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사죄와 성령의 자유케 하시는 은사를 공급하신다는 것이다. 전도에 있어서 세계 속의 그리스도인의 현존은 불가결한 것이며, 또한 이해하기 위하여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도 없는 수는 없다. 그러나 전도 그 자체는 역사적 성서적 그리스도를 구주요 주로서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개인적으로 와서 하나님과 화목함을 얻도록 설득하는 일이다. 복음의 초대를 함에 있어 제자된 값을 치러야 한다는 일을 감출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의 새 공동체에 속하였음을 분명히 하도록 부르신다. 전도의 결과는 그리스도께의 순종, 그의 교회와의 협력, 세상 안에서의 책임있는 봉사를 포함한다.
(고전 15:3, 4, 행2:32 -39, 요20:21, 고전1:23, 고후4:5, 5:11, 20, 눅14:25-33, 막8:34, 행2:40, 478, 막10:43-45)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Christian social responsibility)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자이신 동시에 심판자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압박에서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권념에 참여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인종, 종교, 피부빛, 문화, 계급, 성 또는 연령의 구별없이 모든 사람이 타고난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은 서로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누구나 착취당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우리는 등한시하여 왔고, 또는 왕왕 전도와 사회 참여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데 대하여 참회한다.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며, 사회 행동이 곧 전도는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가지 부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다같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교리, 우리 이웃을 위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필수적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종류의 소외와 압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부정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것을 공박하는 일을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의 나라에 다시 태어난다(중생함을 받는다). 따라서 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도 그 나라의 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의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는 것이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행17:26, 31, 창18:35, 사1:17, 시465:7, 창1:26, 27, 약3:9, 레19:18, 눅6:27, 35, 약2:14-26, 요3:3, 5, 마5:20, 6:33, 고후3:18, 약2:20)
교회와 전도 (The church and evangelism)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받은 백성들을 세
상으로 보내시는 것을 우리는 확인한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과 같이 세상으로 깊고도 희생적인 침투를 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적 "울타리"를 트고 넘어서 비기독교 사회에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 교회가 희생적으로 해야 할 일 가운데 전도는 최우선적인 것이다.
세계 전도는 전체 교회로 하여금 전체 복음을 전세계에 전파함을 요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우주적 목적을 바로 중심에 서 있으며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그가 지정하신 수단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설교하는 교회는 스스로 십자가의 흔적을 지녀야 한다.
교회가 만일 복음을 배반하든가, 하나님을 향한 산 믿음이 없다든가,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든가, 사업 추진과 재정 등 모든 일에 있어서의 철저한 정직성이 결여될 때 교회는 오히려 전도의 장애물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문화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체제들이나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요17:18, 20:21, 마28:19, 20, 행1:8, 20:27, 엡1:9, 10, 3:9-11, 갈6:14, 17, 고후 6:3,4, 딤후2:19-21, 빌1:27)
전도를 위한 협력 (Cooperation in evangelism)
교회가 진리 안에서 가견적 일체성을 이룩하는 일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우리는 확인한다. 전도는 또한 우리를 하나가 되도록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불일치가 우리가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 무너뜨리고 마는 것처럼 우리의 하나됨은 우리의 증거를 더욱 힘있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적 일치가 여러 가지 모양을 띨 수가 있고 또 그것이 반드시 전도를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란 것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성서적 신앙을 함께 하는 우리들은 교제와 일과 증거에 있어서 긴밀하게 일치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증거가 때로는 죄악 된 개인주의와 불필요한 중첩으로 인하여 저해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고백한다. 우리는 진리와 에배와 거룩함과 선교에 있어서 좀더
깊은 일치를 추구할 것을 약속한다. 교회의 선교를 촉진하기 위해서, 전략적 계획을 위해서, 상호간의 격려를 위해서 그리고 자원과 경험을 서로 나누기 위해서 지역적이며 기능적인 협력을 발전시킬 것을 우리는 촉구한다.
(요13:35, 17:21, 23, 엡4: 3, 4, 빌1: 27요17:11-23)
전도와 문화 (Evangelism and culture)
세계 전도 전략의 개발에는 대담한 개척적 방법이 요청된다. 하나님 아래서 세계 전도의 결과로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 박히고 동시에 각각의 문화에 밀접히 관련된 여러 교회들이 일어날 것이다. 문화는 항상 성경을 표준으로 해서 검토되고 판단받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인고로 인간 문화의 어떤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선하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 전부가 죄로 물들었고 어떤 것은 악마적이다. 복음은 어떤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모든 문화를 그 자체의 진리와 정의를 표준으로 해서 평가하고 모든 문화에 있어서 도덕적 절대성을 주장한다.
선교는 이제까지 복음과 함께 이질적 문화를 수술하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하여 교회는 왕왕 성경에 매이기보다 문화에 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도의 전도자는 겸손하게 자기를 전체로서 비어버리기를 힘써야 한다. 다만 그의 인격의 가장 진정한 것만 남겨 가져서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문화는 문화를 변형(변혁)시키고 풍요하게 만들기에 힘쓰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만 한다.
(막7:8,9,13, 창:21, 22, 고전 9:19-23, 빌2:5-7, 고후4:5)
자유와 핍박 (Freedom and persecution)
모든 정부는 교회가 간섭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 그리스도를 섬기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평화와 정의와 자유의 상태를 보장해야 할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고 유엔 인권선언에 규정한 바와 같이 종교를 믿으며 전파할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또한 부당하게 투옥된 사람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고난받는 우리 형제들을 위하여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우리는 그들의 자유를 위하여 기도하며 일할 것을 약속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의 운명에 의하여 유발되는 협박을 거부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매 우리는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불의에 항거하며 복음에 충성하기를 힘 쓸 것이다. 핍박이 없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경고를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딤전1:1-4, 행4:19, 5:2, 골3:24, 히13:1-3, 눅4:18, 갈5:11, 6:12, 마5:10-12, 요15:18-21)
맺는말 (Conclusion)
그러므로 이와같은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결심에 비추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또 우리 상호간에 전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계획하고, 일할 것을 엄숙히 언약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함께 할 것을 호소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이 언약에 충실하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기를 기도한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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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잔의 역사와 정신 (조종남 박사)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모였던 제1차 로잔로잔 대회가 그랬듯이, 이번 대회도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와 교파에서 수많은 인원이 참가한 국제대회였다. 자유세계는 물론 동구권과 소련 그리고
베트남, 캄보디아, 몽고,쿠바 등 공산주의 하의 기독교 지도자뿐 아니라 이슬람 등 타종교관에 속하
는 국가인 중동, 인도네시아에서도 대표들이 왔다.
참석자들의 교회 배경을 살펴보면, 성공회에서 시작하여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같은 대교파들, 그리고 오순절교회또는 단독교회, 선교단체 (Para-churchorganization)등 역시
다양하다. 그러므로 이대회에 반영된 로잔운동은 그야말로 온 세계각곳에 연결되어 움직이는 큰 운
동임에 틀림이 없다. 현재 한국에도 "한국로잔위원회"가 생겨서 그 호흡을 함께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로잔운동의 성격과 역사는 어떤 것인가? 이 운동의 기초가 되고 있는 신학과 정신은 어떤 것이
며, 그런 운동이 일어나게된 배경과 동기는 어떤 것인지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Ⅰ. 로잔운동의 태동과 그 배경
로잔세계복음화운동(Lausanne Movementfor World Evangelization)은 1974년 7월 스위스의
로잔에서 열렸던 세계복음화국제대회(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에
서 그 유래를 찾는다.
이 대회는 7월 16일부터 150여개국에서 약 2700여명의 복음주의 교회지도자들이 모였고, 한국에
서도 65명이 참석했었다. 이곳에 모인 목회자, 신학자, 선교사, 평신도 지도자들은 성령 안에서 하
나된 성도로서의 친교를 즐기며,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과 역사에 대하여 찬양하며, 함께 기도하
고 연구하고 토의하는 가운데서 지난날의 부족을 회개하며 '세계선교'에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이 대회가 끝나자 「타임(Time)」지는 이 대회 기사를 크게 다루면서 "지난 주 스위스 로잔호수
주변에서 모였던 대회야말로 지금까지 모였던 크리스찬 모임 가운데 아마도 가장 광범위한 모임으
로서 보수적이요, 성경적이요,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활기를 보여준 모임이었다"고
평했다.
그뿐 아니라 이 대회는 로잔에서 30마일 떨어진 제네바에 본부를 둔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가 주도하고 있는 '입장(prevailing philosophy)'에 대해 도전이 되었다. 또한
이 대회를 계기로 복음주의자들이 대회 후에도 계속 모임을 가지며, 결국에는 하나의 생기있는 국제
협의회로 진전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고 타임지는 평가했다.
기독교 밖에서 보는 이런 평이 기독교 내에서는 더 크게 메아리쳤다. 독일의 선교신학자 피터 바이
엘하우스(Peter Beyerclause)는 이 로잔대회를 평하기를 "이 대회는 마치 지금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강들이 한데 모여서 그 물길이 크고 깊어져 복음주의적인 고깃배의 떼를 나를
수 있게 되었고, 20세기 후반기 기독교의 건조한 땅을 영적으로 비옥케 만든 것과 같다"고 했다. 그
리고 그는 이 대회가 참석자들의 신학적 사고와 선교활동에 막대한 자극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 변
화된 참석자들을 통해 세계에 흩어져 있는 복음주의자들은 물론 전체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관찰했다. 이런 점에서 1974년의 로잔대회는 복음주의 운동이 약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
며, 현대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했다.
로잔대회 때 프로그램위원회의 의장이었고현재 로잔위원회 회장인 포드 박사는 말하기를 "이 로
잔대회는 하나의 대회 행사라기 보다는 과정으로 계획되었고 그 준비와 연구에 있어서도 계속적인
활동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이는 이 대회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해 주고 있다.
세계는 1960년대에 이르러 급변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중국대륙이 공산주의에 쉽싸임과 함
께 제3세계라고 알려진 많은 나라에서 반서방주의적 사상의 영향으로 외국 선교사를 배척하는 기운
이 돌고 있었다. 그리고 대교파라고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자유주의신학으로 흐르고 있어서
복음주의자들은 큰도전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 복음주의자들은 자기방어 의식의 게토(Ghetto)정신
비슷한 침체에 빠져있는 듯, 18, 19세기에 있었던 대부흥운동의 열기도 식어가고 있었다. 세계선교
면에서도 위축되고 있어서, 1910년에 에딘버러대회에서 시작된 세계선교운동도 조직체인
IMC(The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1961년에 WCC의 한 부분으로 홉수되면서 전도의
비젼과 열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빌리그래함 박사의 전도활동을 중심하여 전도의 열심을 되찾으려는 복음주의운동도
일어나고 있었다. 1966년 서베를린에서 모였던 세계 전도대회 (The World Congress on
Evangelism)는 이런면에서 크게 성공을 했다고 본다. 이런 후속운동이 남아메
리카에서도(1969년, 보고타대회), 유럽에서도(1970년, 프랑크푸르트대회), 미국에서도(1973년,
시카고 대회)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운동은 더 거센 도전을 받게 되어 선교신학의 양극화 현상을 보게 하였다. 이현상은
1973년 방콕에서 '오늘의 구원(Salva-lion Today)'이라는 주제로 모였던 WCC계통의 대회를 통하
여 심화되었다. 세계 교회에서 복음주의의 소리는 작아지고 그들의 소리가 높아지며, 선교에서 말
하는 구원의 개념도내용이 변질되는 듯 신학적 혼돈을 가져왔다. 마침내 방콕대회는 서방선교의 모
라토리움(Moratoism), 곧 해외선교를 보낼 필요도없고 현재의 선교사도 철수하라고 제창하기에까
지 이르렀다.
이런 시점에서 복음주의자들은 1966년 베를린대회의 연속으로 세계대회, 곧 1974년의 로잔대회
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교회에서 유행되고 있는 선교의 모라토리움 사상과는 대
조적으로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선교의 대과제를 인식했다. 특
히 선교에 있어서전도와 사회참여 문제로 양극화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야기된 신학적 혼돈
(confusion)과 주저(hesitation)에서 성경의 권위를 믿는복음주의자들이 함께 모여 성경의 빛 아래
서 신학적 입장을 정립하며, 적응성있는 선교방법을 모색하고, 온 교회가 이에 협력하여 세계복음
화에 헌신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이에 1966년의 베를린대회를 (실제적인 면에서) 소집했던 빌리
그래함 박사가 주동이 되어 1974년의 로잔대회가 모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서 모였던 로잔대회이기에 그 역사적 의의가 컸다.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포드 박사는 1974년 로잔대회(Lausanne'74)는 카이로스적인
모멘트(hallos moment)였다고 했다.
Ⅱ. 로잔운동의 성격과 과제
이 로잔대회는 모임 참가자들이 함께 헌신할 것을 '언약(로잔언약)'한 세계복음화 운동을 수행해 나
가기 위하여 대륙별로 추천된 사람들을 중심하여 "로잔위원회 (The Lausanne Committee far
World Evangelization)"를 구성함으로 지속적인 운동으로 이어나가게 되었다.
로잔위원회는 어떤 권력구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적 선교사업을 추진하는 촉매제적
역할을하는 조직체이다. 로잔은 하나의 '운동'(movement)이지, 교회들의 연합회 같이 가입한 회원
들로 구성된 기구가 아닌것이 특징이다. 이 점을 우리는 분명히 이해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로잔은 WCC나 WEF(세계복음주의협의회)와 구별된다. 로잔은 단지 로잔언약의 정
신과 신학적 입장에서 세계복음화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그 일에 서로 협력하고, 또 서로 협력
할 수 있는 기회와 계기를 제공하는 일을 담당한다. 그러기에 참여자의 소속 교회나 기관의 다양함
을 개의치 않는다. 이런 운동으로서, 로잔운동이 1974년 대회 이후에 행하여 온 일들을 다음과 같
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 대회는 복음주의적 선교단체와 개인 및 지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세계복음화를 위해 함
께 기도하고, 함께 의논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리하여이 대회를 계기로
계속적인 협력기구요, 세계복음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상설기구로서 "로잔세계복음화위원회
(Lausanne Committee for World Evangelization)"가 조직되어, 로잔대회의 신학적 입장과 정신
에 따라 세계선교의 사명수행을 촉진하는 일을 해 오고 있다. 이런 후속적 조치는 로잔대회에 모였
던 참석자들의 열망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첫번 위원들 50여명은 각 지역별로 투표에 의해 추천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때 필자가 초대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임되어 2기(6년간)를 봉사했다. 이 위
원
회는 정기적으로 모여 세계복음화에 대한 격려와 지도를 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는 큰 조직체라기 보다도 기능을 중심한 위원들이 각 분야와 각 교회의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복음주의 운동과 세계복음화에 촉매작용을 하게 하는데 그 관심이 있다. 그리하여 위원회
안에 신학연구위원회, 선교전략연구위원회, 홍보위원회 및 기도위원회등을 두고 세계복음화에 관
련되는 여러 문제에 대한 국제협의회를 주최하며, 또 여러 기관들과의 협력을 도모하여 세계복음화
촉진에공헌해 오고 있다.
그리고 각 대륙에는 북미로잔위원회, 아세아로잔위원회, 구주로잔위원회 등 지역 로잔위원회가
있어 로잔운등의 확산 내지 지역화를 도모하고 있다. 로잔위원회가 활동한 지 12년이 지났지만 이
위원회가 여러 교파나 기관내지는 지역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우산의 역할을 한 일이 기독교 개신교 역사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광범위한 것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둘째, 로잔대회는 서방선교회가 모라토리움을 제창하여 등한시 하고 있던 해외선교, 특히 아직도
복음을 못듣고 있는 27억의 사람들에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선교의 중요 과제를 인식케 하는데
크게 공헌을 했다. 이 선교를 위해 각 나라, 각 다른 교회에서 온 대회참석자2700명이 "세계복음화
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계획을 세우고 함께 일하겠다"고 하나님앞에 엄숙히 서약한 것은 선교
의 모라토리움을 제창하는 WCC계통의 선교신학에 크나큰 도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세계복음화에 헌신을 다짐한 참석자들의 각성과 후속되는 로잔위원회, 특히지역 로잔위
원회들의 활동을 통하여 불신자에대한 전도, 그를 위한 협력을 도모하는 지역대회가 세계 각처에서
개최되며 세계복음화를 촉진하고 있다. 아세아 로잔위원회에서는 1978년 싱가폴에서 "세계선교를
위한 아시아교회 지도자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 2차대회가 1978년 10월
에 열렸다.
이런 각성과 운동은 지금까지 타문화권 선교에 피선교권이라고 생각해 오던 제3세계 교회들의 참
여를 불러 일으키게 했다. 오히려 27억이라는 불신자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와 같은 제3
세계 교회의 제 일선 참여가 긴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게 되었다. 교회선교에 있어서 이런 획기적인
전환점을 로잔운동이 가져왔다는 데서 이 운동을 높이 평가해야할 것이다. 이런 영향 하에 최근 제3
세계 교회들의 활발한 해외선교를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런 각성은 각성에 머문 것이 아니라 그 실행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 즉이 세기
안에 성취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로잔운동에서는 "온 세계로 복음을 듣게 하자
(Let the earth hear His voice)"라는 제호와 더불어 선교전략 내지는 방법을연구하여 세계복음화
를 촉진케 하는 상설기구가 구성되어 크게 공헌하고 있다. 1980년에도 "어떻게 하여야 그들이 복음
을들을까요? (How shall they hear?)"라는 주제 아래 모였던 "세계복음화를 위한 선교전략국제대
회"에서 선교전문가와 지도자들이 모여각 분야에 따른 선교전략을 연구해서 책자로출판한 것을 비
롯하여 부단히 생산적인 공헌을 하고 있다.
로잔위원회가 연구, 발표하는 'Unreached People Survey(복음이 미치지 못한 곳에 대한 조
사)'나 'People' Group Strategy(언어별 인종과 직종별 사람에 따른 전도전략)'등은 너무나 유명하
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많은 곳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셋째, 로잔위원회가 또 중요시하며 시행해오고 있는 것은 기도 운동이다. 계절별로 나오는 선교에
대한 정보교환과 보급을 위한 기관지 「World Evangelizationj과 함께 기도통신을 내고 있다. 온 세
계에 있는 성도들의 기도운동을 일으킴으로 세계복음화를 촉진시키려는 운동이다. 1984년 한국의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복음화를
위한 세계기도대성회"와 잇달아 개최된 지역별 기도성회는 로잔운동의 한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
겠다.
넷째, 로잔대회가 성취한 공헌은 세계복음화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정리한 것이다. 포드박사는 이
공헌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바이엘하우스는 선교운동의 선배들이신학적 입장과의 계
속성을 지니면서 신학적기반을 정리하는데 그 성숙함을 보인 점이 로잔의 큰 성취라고 말했다.
1910년에 시작한 국제선교협의회(IMC) 운동같은 것은 선교의 열심은 있었으나 그 운동을 됫받침
하고 보호할 분명한 신학적 기초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로잔에 모인 복음주의자들은
세계복음화를 위한 복음주의 운동에 기초가 되는 신학을 정리할 것을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로잔언
약(The Lausanne Covenant)으로 나왔다.
1966년 베를린대회에서 "선교에도 깊은 신학이 됫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던 과업이 로잔에 이
르러 성취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 로잔언약은 로잔운동의 신학적 기초와 복음주의자들의 협력의 기
준과 공통분모가 되고 있다. '언약(Covenant)'이라고 표현했듯이, 이는 하나의 신학 선언문과는 달
리,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이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이행치 못한 것에 대한 회개와 주님의 부르심
에 새로운헌신을 언약하는 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로잔위원회는 이 로잔언약에 나타난 신학적입장에 따라서 현대선교에 연관된 중요한 문제들을 신
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여 세계복음화를 돕는 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한 예로, 국제적으로 또는 지역적으로 여러차례 신학협의회를 주최하여 그 결과를 책자로 출판하
여 왔다. 그 중에서 1978년 버뮤다에서 있었던 '복음과 문화'에 대한 협의회와 1982년 미국 그랜드
래피즈에서 열렸던 '전도와 사회참여의 관계 '에 관한 신학협의회 등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 외
에도 1980년에 '신도의 생활 생태(life style)'에 관하여,
1984년에 '성령'에 대한협의회가 있었고, 1988년1월에는 흥콩에서 '회심(conversion)'에 대한신
학협의회가 있었다.
Ⅲ. 로잔 운동의 확산
이와 같이 로잔운동이 십여년간 역사하여 오는 가운데 로잔운동의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세계에 흩
어져 있는 교회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로잔신학과 정신에 입각한 세계선교를 확산해 나가도록
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1986년에 6대륙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국제자문위
원회가 모여 1989년에 제2차 로잔대회를 소집할 것을 결의하고, 그 대회의 목적과 프로그램의 방향
을 정하였다. 그후2년의 준비 끝에 로잔 2차 국제대회가 1989년 7월에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개최
되었던 것이다.
첫째로 이 대회는 대회 프로그램이 보여주듯이, 그동안 하나님께서 세계 각곳에서 행하신 선교사
역에 대한 찬양의 축제였다. 우리는 로잔 1차대회에서 느꼈던 선교의 모라토리움의 물결이 완전히
역류하여 세계교회가, 특히 제3세계 교회들이 해외 선교를 활발히 행하고있음을 찬양하게 되었다.
또한 이번 대회에는 수많은 나라와 교회(교파)에서 참가자들이 왔었다. 이는 곧 선교협력의 폭이
제1차대회보다 큰게 넓어졌으며, 참가교파들이 매우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48개 이상이나 되
는 소그룹 토의가 있었다. 이토의는 아주 다양했으며 깊이있는 것이 많았다.
이번 대회에서 강연, 설교등의 순서를 맡은사람들의 배경이나프로그램의 문화적 배경등은 로잔 1
차대회 또는 어느 국제대회 때의 것보다 더욱 다양하고 넓어서, 마치 세계교회가 한곳에 모인 기분
이었다. 지금까지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에는 카리스마적인 교회는 거의 제외되었으나 이번 대회에는
그들도 합류하였다.
이에 대해 어떤이는 1차대회 때보다 강사와 순서진행에 있어 권위가 떨어졌다든지 질이 약해졌다
고 평하기도 하나, 이는 분명히 로잔운동이 온 세계 각 문화권 속에서 숨쉬며 역사하게끔 그 활동 저
변이 세계적이 되었다고 평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는 또한 급격히
변화하는 오늘의 사회와 타종교, 이데올로기의 변천 상황과 그들의 도전도 나누고 검토하며, 그에
따르는 신학적인 정리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대회의 특징은 대회가 기도로 준비되었으며
성경공부와 아울러 세계선교를 보다 촉진하여 20세기가 끝나기 전 곧 2000년대에 가서는 복음을
못듣는 사람이 지구상에 한명도 없게 하자고 헌신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대회의 표어 그대로, 로잔
2차 대회는 하나님께서 모든 교회를 부르시어 온전한 복음을 전세계에 전하게 하신다고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복음을 전파하기로 언약하는 모임이었다.
Ⅳ. 로잔운동의 선교신학과 정신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 로잔운동의 근거가 되며 상호협력의 기초가 되는 로잔운동의 신학적 입장과
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자한다.
로잔운동의 기초가 되는 신학적 입장은 로잔 1차대회때 발표한 로잔언약(The Lausarule
Covenant)과 이번 마닐라대회에서 발행한 마닐라 선언문(The Manila Manifesto)에 집약되어 나
타나 있다. 여기서는 1974년의 로잔언약을 통하여 개진된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로잔언약은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교리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 재림'에 관한 교리에 이르기까지
15개항으로 광범위하게 신학을 다루고 있다. 이 신학은 전통적인 복음주의적 신학의 토대 위에서
시작하되, '세계복음화'라는 관심과 '오늘의 선교'라는 문맥(Context)에서 다루어졌다. 아니 '이 과
업에 새롭게 헌씬하려는 자세' 에서 이루어졌다.그러나 여기에서 로잔의 신학 전부를 설명한다는 것
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1974년의로잔이 특징있게 전개했다고 생각되는 선교신학 중 '전도와 사회
참여'에 관한 면만을 다루고자 한다.
1) 전도와 사회참여, 다 크리스찬의 의무
로잔은 원색적인 복음주의가 귀한 유산으로 간직해오다 한때 잃어버렸던 복음의 사회적관심을 되
찾는 공헌을 하게 된다.
"전도와 사회·정치참여는 둘 다 우리 크리스찬들의 의무이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는 다같이 하나
님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도리, 우리이웃을 위한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필수적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의 개인적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총괄
적으로 수행하도록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선교에 있어서 전도와 사회참여로 인한 양극화와 혼동에 대한 로잔의 답이었다.
이런 입장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의 패턴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들
의 '종의 역할'에서 전도와 사회봉사의 좋은 본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사랑하며 순종한다면 크리스찬은 이 주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과 나눠야 할 것이다. 곧 크리스찬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셨는
가(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정의와 자비의 행위(deeds)로써 세상에
봉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크리스찬의 선교가 말로만의 선교(verbal proclamation)에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선교운동에 있어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제사업, 민생을 위한 개발사업에도 관여하며 또한 세상의 정
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일에도 참여하여야 한다. 바로 이것이 로잔언약이 전도와 사회참여 둘 다를
크리스찬의 의무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그러나 로잔신학은 전도의 우위성(primacy)을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로잔신학이 총체적인
(holistic) 견해를 취하나 제네바 신학과는다른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의 영적 고통과
영원한 운명이이 사회에서의 물질적 어려움보다도 더 큰 것임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 전도를 통한 사랑의 변화없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헛된 일이며, 사회
문제의 뿌리는 죄, 곧 죄인인 사람에 있다고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교회가 사회참여를 하는데 있어서 제자화, 곧 제자를 만드는 일과 제자를 성장시키는 전
도의 역할의 중요성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제자가되지 못한 자, 곧 거듭난 신자가아닌 사람들이있다는 현
실을 직시할 때 전도의 중요성을 더욱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에큐메니칼 써클의 사람들은"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해서 새 인간성이 신비적으로
인간에게 부어졌기에 모든 사람이 크리스찬이다"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자만들기 운동과 교회의 영적 부홍이 사회참여를 위해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1978년 전도를 위한 아세아지도자대회(AICOE) 참석자들과 함께 고백한다. "교회가 새로와
지고 정결해지고 동원될때에만 이 사명이 총족되리라고 소망할 수 있다."
2) 사회참여는 슬기롭게
그러면 어떻게 크리스찬과 교회가 이 사회문제에 참여할 것이냐는 실제적 문제가 대두된다. 로잔
위원회에서는 1982년 미국 그랜드 래피즈에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신학세미나를 통해 진지하게 논
의한 바 있다.
그때 주제발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필자는이 문맥에 있어서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을세상에 내보
내실 때에 하신 말씀대로 뱀처럼 슬기로워야 함(막10:16)을 상기시키면서 실천전략에 있어 지침이
될 만한 몇 가지를 제의한적이 있다.
① 사회참여의 형태 : 사회참여(Social Responsibility)에는 봉사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구제, 박애
사업 등이 있는가하면 사회, 정치활동이 있다. 이 사회활동은 정치, 경제적 활동, 사회구조변경을
추구하거나 정의구현을위한 활동들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봉사활동(구제, 박애사업)은 별문제가 야기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여야"(갈6:10)할 것
이다.
그러나 크리스찬의 사회참여가 이런 사회봉사 이상을 요청할 때가 있다. 곧 사회의 구조적악, 사
람과 사회에게 고통을 주는 보다 근본적악을 제거하는 활동(social action)이 요청될때가 있다. 이
를 흔히 사회 정치적 참여(social-political action)이라고 일컫는다.
크리스찬이 이 면에 참여하게 될 때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이에 다음 몇가지의 제의와 주의를 언급
하고 싶다.
② 크리스찬의 천직(vocation)을 통한 교회의 사회참여 : 교회가 크리스찬들의 소명(vocation, 전
문직업)을 통하여 사회참여에임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이 방법은 몇 가지 관점에서 유리한 장점과
또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세상에 보내시어'봉사'하게 하신다. 그러나봉사하는 데 있어서 교회의
구성원은 각기 다른 소명을 받고 있음을 묵과할 수 없다. 곧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사회사업
가로 또는 의사로, 정치가로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러 말하면 복음은 그들이 각기다른 소명인 직업(lift work)을 통하여 인간생활 전면에
침투하도록 되어있다. 교인들은소명 (크리스찬으로서의 직업을 통한 사명)을 가지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역사에 참여하도록 보냄을 받는다.
이것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들이 적용한 본보기(pattern)이기도 하다. 성 경은 성도들에게 권
고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주께 받을줄 앓이니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3,24).
호웨(Howe)가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 속에서 봉사하고 흩어져 있는 교회의 일에 있어주요한 일
꾼(miruster)은 교인(평신도)들입니다. 그들은 집에서나 사무실에서나 또는 길거리에서나 장터에서
나 학교에서나, 세상일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면 그 어디서나 그 생활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하고 있
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일꾼(Minister)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교회는 크리스찬들이 그 천직에 있어서 귀한 사회참여의 책임이 있음을 가르쳐야할 것이
다. 사회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신앙양심이 늘 각성해 있도록 가르쳐서 그들이 그 나름대로 기
여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찬에게 각
별히 지켜야할 명령(mandate)을 주셨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모
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으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그러므로 모든 크리스찬들은 그들이 하는일(vocation)을 통하여 세상의 소금과 빛(마5:13∼16)
이 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크리스찬들인 우리는 단순히 인류의 한 부분일 뿐 아니
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교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교회가 세상의 국가가 하고있는 일이나 또는 국가가 하여야만 할 일을 다해야 한다
거나 그 일에 있어서 국가와 경쟁을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③ 교회로서의 집단적 사회참여 : 우리는 크리스찬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께서 그 지체인교인들에
게 부여하신 은사를 통하여 그 사명을 수행해 나간다는 것을 언급했다. 그러나 교회가 공동체로서
사회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는 바람직한일이다.
교회는 집단적으로 함께 예배를 드린다. 때로는 전문그룹 즉 전도자들의 인도에 따라 온교인이 전
도집회에 참여한다. 이것이 가져오는 효율성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렇다면 같은 원리와 패턴이 사회관심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겠는가? 곧 이번에는 사회관심에 대
한 전문그룹의 인도를 따라 교회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공동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
는가 말이다. 이런 행동은 기도로(행4:24, 29), 항의로(행5:29) 또는 적절한 형태로 시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타트가 제의하듯이, 교회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대한 연구·실행위원회를 구성하여
문제를 신중히 연구·검토케 하여야할 것이다.
이 위원회로 하여금 문제의 복잡성과 그에관련된 일들을 신중히 그리고 예리하게 파악하고 그에
대처할 교회의 책임적인 행동을 제의토록 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는 그들의 제안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적인 빛 아래서 조심스럽게 연구·검토하고 공동
적인 행동으로 옳겨야 할 것이다. 이는 상황에 따라 지역적으로 또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동적인 행동을 어떤 문제 그리고 어떤 차원에서 할 수 있느냐는 점에서 심각한 어려
움과 의견의 엇갈림이 생길 수 있다. 월든 스코트(Waldon Scott)는 우리의 사회참여를 두세 가지
단계, 즉 구호사업(Relief), 개발사업(Development), 해방(Liberation)으로 분류했다.
구호사업 이란 일반적으로 그 원인을 다루는것보다는 나타난 현상을 다룬다. 개발사업이
란 '오랫동안 있어온 문제에 대해 장기적인 해결을 시도'하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해방'이라는 카
테고리에 들어갈 적도 있다. 개발사업이란 일반적으로 사회, 정의, 자립, 그리고경제성장을 도모하
는 것이다.
피터가 말한대로 개발사업은 사람에게 그 초점을 두고 있다. "이는 본래의 인간성을 약탈하면서
인간을 경시하고 노예화하는 모든것으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고 해방하고 회복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
으로 인간을 온전케 하며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개발사업은 로잔언약
에 사용한용어인 '사회·정치참여 '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교회가 구호사업에 참여할 때에는 별로
문제가 없으나사회·정치참여에 관여할때에는 종종 아주 심각한 긴장과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호세 미구에즈 보니노 (Jose Miguez Boni-no)는 교회가 관여하는사회활동에 네가지 차원에 있
다고 말했다. 즉 목회적 차원, 예언자적 차원 그리고 의식화 작업과 직업 활동이다.
남미의 해방신학에 있어서는 "교회가 의식화작업(conscientization)에 관여해야 하고 더 나아가
인권운동, 인종투쟁을 위해 직접 행동에 가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73년에 모였던 아세아 기독
교회의(CCA)에서는 모든 크리스찬이 "지금이야말로 행동할 때"라는 것을 인식하라고 도전했다. 여
러 교회는 이에 호응하여 사회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이런 직접활동이 많은 어려움을
초래했다는 것과, 심지어는 교회의 전반적인 선교 활동에도 지장을 가져온다는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선 교회가 어떤 사회활동에 직접 참여하게 될 때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동일성(identity)이 위협
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러한 경우에 교회가 어떤 정당이나 정치적 노선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받게 될 염려가있기 때문이다.
사회참여의 과정에 있어서 교회는 종종 어떤 상황에서는 특정한 목표를 갖고 있는
세상의 조직체와 일시적으로 결연된 것처럼 보일때가 있다. 아시아의 어떤 교회들은 그런 직접적인
활등 때문에 그들의 순수한 동기가 순수기독교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때로는 마치 마르크스 주의자
들과 동조한 것처럼 오해를 받게된 때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교회선교가 지장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런 차원에서의 교회활동은 효율적인 전략이
라고 보기 힘들다. 교회는 그의 사회참여의 방법에서 "뱀처럼 지혜로와야"(마10:16, 참조 마10:23)
한다.
로잔언약이 말했듯이 "교회는 어떤 특정한 문화나 사회적 또는 정치적 체계나 이데올로기
(ideology)와 제휴하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을 위하여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았긴 해
도, '태가(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
다(요17:16, 18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공동적인 사회참여가 목회적인 차원을 넘어설 때에는 매우 조심해야 한
다. 어떤 의미에서는 목회적 차원에 머무르라고 제의하고 싶다.
교회가 목회 적 차원에서 사회참여를 하게될 때, 교회는 교인들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이있음을 인
식시키며 사회의 문제에 민감하여 필요한 사회참여에 기여할 수 있도록 목회적으로 교도(敎導)하여
야 한다. 이런 일을 하기위하여 교회는 어떤 사회문제에 관하여 전문가들로 특별연구위원회 같은 것
을 구성하게 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교회는 교인들을 통하여
다양하게 사회에 기여하면서도 '하나'를 유지하며 교회의 '동일성(identity)'을 지키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이런 교인들의 사회참여가 그 교인이 얼마나
충실한 제자가 되어 있느냐에 깊이 연관됨을 알아야한다. 제자만들기운동, 곧 전도의 중요성을 다
시 지적하게 된다.
이런 목회적인 차원에서의 사회참여와 아울러 "교회는 필요한
때에 이 사회의 양심의 소리로서 예언자적 소리(prophetic voice)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어
떤 당면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인들이나 대중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고 절실히 느낄 때
에는 그에대한 교회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official stat-ement)'이 나옴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도 교회는 기도하는 가운데그리고 조심스럽게 행하여서 교회의 통일(unity)과 동일
성(identity)을 해치지 않아야한다. 또한 교인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는 일이 없는 범위로 제한하여
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선교의 원동력이 교회가 분열될 때에는 상실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교회가 '메시야적 공동체(messianic community)'라는 것을 상기하여야
한다. 죤 드라이버(John Driver)는 "사회정의를 위한 전략에 대하여'Bl 유익한 말을하였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메시야적 공동체 '로서이 세상 안에서 역사의 참 의미를 간직한 공동체로 인
간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intention)를 보여주는 본보기(paradigm)이다. 교회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공동체요,또 화해를 이루어나가고 있는 공동체로서 이 사회에서의 정의가 하나님의 은
혜와 역사에 의해서만 구체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거 하는 존재 이다.
이런 교회의 증가(testimony)가 세상을 향하여 인간의 사회관계 또는 이 세상의 사회문제를 해결
함에 있어서 일반세상이 시도하고있는 방법과는 '아주 다른 새방법(a radicallynew way)'을 전달하
게 된다.
드라이버가 제의한 대로 이 메시야적 공동체인 교회가 사용하는 사회참여의 전략은 메시야이신 예
수님께서 전략으로 취하신 그 형태(form)에 의해 결정지워져야 한다.
교회는, 이 세상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여 종종 사용하고 있는 방법들,
예를 들면 폭력, 거짓, 사기, 인격멸시 등의 도구를 사용하려해서는 안된다. 이런 도구나 방법은 메
시야적 공동체에서는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메시야 왕국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의 사회참여에 있어 적극적으로 취해야 할 형태는 '종의 자세(servanthood)'이다. "우리
의 선교를 그리스도의 선교와 동일시하는 가운데 우리는 '종'이 되는 것이다."
바젤 서신(TheBasel Letter)은 교회가 '종의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사랑하는 형
제, 자매들이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우리
가 취하여야 할 최고의 의무와 우대한 특권은 그리스도께서 취하였던 바로그 역할(role)을 취하여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셨던 것입니다(막
10:45)."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제자훈련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메시야적 공동체의 회원 곧 교인들의
영적인 갱신과 헌신이 효율적인 사회참여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배워야 한
다. 바젤 서신이 말한대로 사도 바울은 "그가 약하나 그는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
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는 것을 알았다"(고후10:3 ∼ 5 참조).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계속하여 대함에 있어서"(엡6:12)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전신갑주를 의존했다.
그러므로 로잔언약은 전도와 세계선교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 능력의 중요성을 믿으며, 모든 크
리스찬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성령의역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V. 마닐라 선언문의 요지
마닐라 선언문의 가장 핵심되는 요지는 온전한복음(The Whole Gospel)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
다. 로잔의 선교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이심을 믿는 그리스도 복음의 유일성을 강조
한다".
그리스도 복음의 유일성을 신봉해 온 것이 복음주의 신학의 전통이지만, 이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
질 때 선교의 열심은 식어지곤 했다. 때로는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높
이는데 분명치 못하거나, 또는 이 신앙 때문에 교만하거나 타종교를 적대시 하는 등 잘못을 저지르
기도 했다. 마닐라 선언문에서는 이런 과오에 대해 회개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주제강연자 파르자
니가 지적한대로, 일부 가톨릭신학자 또는 WCC계통의신학자들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불신
을지적하는 동시에 복음주의자들의 그룻된 자세내지 응용을 지적하는 말이다.
첫째로, 구원이란 단지 전쟁이나 빈곤 또는 정의나 환경오염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는것이다. 그
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없는 인간간의 화목은 성경적 구원이 아닌 것이다. 더 나아가그리스
도의 유일성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유지하시며 구원할 것
을 믿는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구원없이 스스로 구속할 수 있다(self-edempoon)고 생
각하는 인간이 지어 만든 유토피아적 관념을 배제한다.
이 말은 다른 한편,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나라에 기독교 신정국가를 설립하고자하는 기
도(intention)도 반대한다. 기독교의 신정국가를 설립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따르지않는 자들을 폭
력으로 다스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유일한 구주이
신 주님께서는 친히그의 적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파
르자니의말대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선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설사 그들이 예수의 복음을 거절
할지라도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사랑하는개방된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들도 우리가 사랑하고
전도해야 한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예수의 복음의 유일성 때문에 흔히
갖기 쉬운 배타적 소외적인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닐라 선언문에서는 타종교와의 대화에서나 전도의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을 보다 확고하게 하여 아무런 타협없이 나갈 것을 다짐했다. 예수의 유일성에 대한 확신은 또한 주
의 명령인 선교명령에의 절대복종을 의미한다. 따라서 잃은 양들을 사랑하고 세계 모든 족속들을 그
리스도의 제자로만들겠다는 다짐과 헌신을 촉구한다. 여기에 마닐라 선언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절
대 유일성(The absolute uniqueness of Christ)을 확인한 것이다. 이 '절대'라는 형용사를사용한것
이 로잔언약에 비해 새롭게 강조된 것이다.
또한 복음은 말과 행위와 능력으로 전파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유일성을 주장한 마닐
라 선언문은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을 전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복음(The gospel)
을 '온전한 복음'이라고 표현함에 우리는 주의하여야 한다. 이는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되 성경이 말
하고 있는 복음(the biblical gospel)의 충만함(in its fulness)을 가지고 전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복음이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이라면 이 좋은 소식은 하나님 나라의 충만함 그 모든 면
(dimension)을 포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로잔언약에서는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톨하여 마련하신 영의 구원(죄에서 용
서받으며, 자유롭게 하는 은혜-로잔언약 4)으로 주로 말하였지만, 마닐라 선언은 복음을 악의 권세
에서 해방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건설, 그리고 모든 면에서의 주님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기쁜소식으로 말하고 있다. 곧 성경이 말하는 구원, 하나님의 나라
는 죄와 세상의 권세(죄의세력), 그리고사단의 지배로부터의 해방 모두를 포함한다.
이러한 신학적 접근은 로잔의 신학분과위원회 (The theological working group)와 WEF의 신학
분과위원회가 1985년에 공동주최했던 "성령과 전도"에 관한 신학협의회(The con-sultation)에서
이미 개진되기 시작한 것이지만, 이번 마닐라 대회에서 두드러지게 고조되었다고 느껴진다. 이는
그동안 격렬한 선교의 현장에서 '전도'가 결국 영의 대결(power en-counter), 성경이 말하는 구원
도 영의 싸움에서 이해된 데서 기원된 것이라고 사려된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은 사단의 일, 곧 그의 지배를 깨뜨리는 일이었다. 따
라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책(the guilty of sin)에서 해방하시고(롬3:24, 엡
1:7, 골1:14, 히9:15) 이 세상 곧 죄의 세력에서 현재 (점진적으로) 해방하고 계시며(딛2:4, 벧전
1:18), 이렇게 하시므로 사단의 세력을 격파하시고 승리자의 행진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골2:15).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선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며, 이는 사단에게서의 해방을, 곧 하
나님 능력의 나타남을 부분적으로 나마 동반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구속(themost basic of all
bondage)- 죄와 그 결과들에서의 해방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곧 복음)은 죄의
용서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볼)의 회복뿐 아니라 세상의 임금을 심판하여 이 세상의 그룻된 가치
관에서 자유케하며, 더 나아가 사단의 지배에서 자유케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복음전도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임재의 표로서 표적과 기사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최근에 이 문제에 대해 선교신학에서 많은 논란이 있어 온 것을 우리는 안다. 이 문제에 대
해서는 다른 신학적 해석과 이해가
있어 왔으며 또 있을 것이다. 필자는(지면관계도 있지만) 여기에서 이 문제를 토론하지는 않겠다.
이번 마닐라 대회에서의 강연자였던 헤이포드는 복음이 그 충만함에서 전파될 때에 이는 말씀과 사
랑의 행위로, 그리고 권능(곧 표적과 기사)으로 전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그의 충만함으로 전파된다고 말하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과 신도들의 사역에
서 나타난 것이었다고 하였다. 이는 1974년의 로잔언약이 기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 혜이포드는
다음과 같이 로잔언약을 인용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믿는다 ‥‥‥세계 복음화는 오직 성령
이 교회를 진리와 지혜, 믿음과 거룩함으로, 사랑과 능력으로 새롭게 할 때에만 실제적으로 가능하
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크리스찬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성령이 임하시
기를 위해 기도할 것을 요청한다"(로잔언약 14). 이렇게 함으로 로잔에서(1974) 복음전파에 사회참
여를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번 마닐라에서 그 구체적인 표현을 더욱 고조하였지만, 다른 한
편 상당수의 참가자들이 그 위에 사단의 지배를 격파하는 하나님의 능력(표적과 기사)을 동반하여
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로잔 선교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신학으로 전개되어 가는듯 했다.
또 다른 한편, 이렇게 함으로써 로잔운동은 그동안 함께 손잡고 협력하기를 주저하는 듯 했던 카리
스마적 신학을 영입하게 되었다. 이 대회의 강사나 프로그램에서도 카리스마적인 교회(오순절 교
회)의 지도자가 적지 않게 섞여있었다. 이런 흐름에 대해 일부 참가자들은 우려와 반대 의사도 표시
했으나, 로잔위원회(실행위원회)에서는 오랜 시간의' 토의 끝에 로잔운동은 카리스마적인 형제와도
함께 세계복음화를 확산해 나간다고 공식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마닐라 선언문에서 "성령충만"이나
"기적"을 의심하거나 불신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기쁜소식을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전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마닐라 선언문은 교회선교에 있어서 복음전도
- 말씀의 선포에 그 우위성(primacy)을 계속 고조하고 있음을 잊꺼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하나
님 나라를 선포하실 뿐 아니라 또한 자비와 능력의 사역으로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이시곤 하셨지
만, 우리들의 주요관심은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Lord and Savlou.)로 받아들일 기회
를 갖게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라고 마닐라선언문은 말하고 있다. 이점에서 로잔 선교신학은 여전
히 고유의 특징과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로잔선교신학이 사회
참여를 주장하고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 예언자적인 사명을 말한다고해서 WCC계통의 선교신학
입장과 혼동하여서도 안된다.
마찬가지로 전도에서 능력의 역사, 곧표적과 기사의 동반을 말하지만 그것이 주된 사역일 수는 없
다. 마닐라 선언문은 마6:33을 인용하면서 이 제목(온전한 복음)의 부분을 마치고있다. "우리는 하
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마닐라선언문은 이어서
온교회에 총동원, 온세상의 현실파악과 그에 따른 신학과 선교전략을 개진하였다. 1974년의 로잔
언약이 구체적인 실현을 추구하는 신학적 개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면관계로 설명을 생략할
수 밖에 없다.
Ⅵ. 맺는 말
오늘날 더욱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교회를 세우신 그 애초의 목적과 기대에 대한심각한
질문을 던지며 "세계선교"의 중요한사명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때에 로잔운동은 성경적 선
교를 믿는 기독교 지도자들이함께 모여 기도하고 계획하며 일할 수 있는 우산의 역할을 한다. 이 점
에서 로잔은 세계교회에 크게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나 크리스찬들이 주님의 대부분이신 세계선교를 중심삼아 로잔신학이 주장하듯이 교회가 선
교하는 주체가 아니고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때에 교회는 서로 경쟁
하는 정신을 협력의 정신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선교를 희생시키면서 자기 교회의 내적활동과
성장에 집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선교학자 스나이더(Howard Snyder)는 앞으로 50년간 교회가 직면할 10대 중요 변화를 말하면서
미래의 세계교회 활동의 중심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지고 있다고 했다. 이는곧 한국교회 주도의
선교시대가 오고 있다는 말이다.
세계교회가 주후 2000년을 이정표로 삼아세계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이 복음에 한국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을 계획하고 이를 위해 보다 폭넓은 협력이 있기를 바란다. 두번째로 로잔운동
은 신학을 선교중심에서 접근할 뿐 아니라 신학을 선교의 콘텍스트(context)에서 개진한다. 특히
신약성경에서와 같이 전도를 영의 싸움(power encounter)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한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으로 본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는 말씀과 자비와
권능의 역사와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게 된다. 이리하여 전통적인 복음주의의 로잔운동
은 조심스럽게 비판적으로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크리스찬과 또 복음전도에서 성령의 권능과 표적
의 동반을 강조하는 카리스마적인 크리스찬을 모두 수용하며, 모두 함께 "복음전파"에 협력하기에
이르렀다. 오늘에 있어
성경적 전도는 너무나 긴급하며 따라서 모두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로잔의 정신은
한국에서도 보다 폭넓은 성도의 사귐과 선교에서의 협력의 문호(doorway)를 마련하는데 공헌하리
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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