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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낫고자 하느냐?
    2002-07-22 14:11:14   read : 2371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5:1 - 9절 // 02/07/21

    한 어린아이가 맨홀에 빠져 사흘동안 갇혀 있다가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우연히 들은 어떤 사람의 신고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추측건대 이 아이가 맨홀에 빠지게 되었을 때 본능적으로 살길을 찾으려고 맨홀과 연결되어진 하수구쪽으로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리저리 다녀봐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제 겨우 네 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그곳을 빠져 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두려움과 공포심으로 계속 울어대었고 그 울음소리를 우연히 들은 사람이 119 구조대에 신고를 해서 극적으로 구출된 것입니다.

    구출 후, 기자가 그 아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마 사흘동안 하수구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담당의사가 말을 했습니다. 사실 이 아이의 경우 외형적으로 보면 가벼운 타박상만 입었을 뿐입니다. 며칠 치료하고 나면 밖으로 드러난 상처는 다 아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려되는 것은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이 아이는 한동안 극도의 공포심에 시달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는 것이 이 아이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사실 사람이 병들게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이 들게 되면 몸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몸 이상으로 마음이 병 들수 있습니다. 물론 가벼운 질병으로 인해 금방 그 질병이 치유되어진다면 몰라도 그 질병이 장기화되어지면 대개 마음까지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병실에 오래 있는 사람들은 대개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습니다. 그래서 괜한 일에 짜증을 부리고, 신경질적이 됩니다. 또 때로는 굉장히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삶의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병든 사람을 간호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병든 그 마음까지 간호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기 암환자를 돕는 호스피스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호스피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환자의 병 수발을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이 병으로 인해 가지게 된 마음의 병까지도 치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오랜 병에 효자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부모라 하더라도 병이 깊어지고 오래가다 보면 효자였던 자식도 효자이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만큼 병이 오래 지속되면 많은 것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환자당사자 뿐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38년동안이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한 얘기입니다. 먼저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에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명절이 다가오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 명절이 어떤 명절인지 소개를 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어떤 명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월절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듯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명절에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그들의 결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렸을 적에 그 결례에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적이 있었음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신 주님께서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은 단순히 유대인의 결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분명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시고 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가신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지금 주님의 관심사는 복음과 말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마리아지역과 갈릴리 가나에서의 주님행적을 살핀바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태도와 갈릴리 지방에서의 태도가 달랐습니다. 특히 말씀에 대해 적극적이지 못했던 갈릴리 사람들을 보시면서 주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가신 이유는 유대인의 결례에 따른 습관적인 행동이라기 보다는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베데스다'라 하는 못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2절과 3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이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 문을 '양문'이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아 많은 양들이 인접한 성전에서 제물이 되기 위해 끌려갔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떤 이들은 양을 파는 시장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양문에서 멀지 않는 곳에 못이 있었고, 그 못의 이름은 베데스다였습니다. 그리고 이 못 가에 행각이 다섯 개가 있었고, 그곳에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수 많은 병자들이 왜 그곳에 있는 것일까요? 그곳에 훌륭한 시설을 갖춘 병원이 있어서 그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응급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허준' 정도되는 아주 유명한 의사가 있어서 그분에게 특진을 받기 위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도 역시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곳은 환자들을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수용시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병자들을 수용하는 수용시설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병자들이 그곳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전설입니까? 4절에 보면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정말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간 자들 중에 깨끗하게 나음을 받은 사람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곳에 병자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시각장애, 지체장애, 또는 혈기 마른 자 즉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곳에서 그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병든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같을 것입니다. 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심정입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와 있겠습니까? 낫고싶다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들 가운데 여기서 언급되어진 여러 부류의 병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질병의 특성상 남들보다 빨리 행동할 수 없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각장애, 지체장애, 몸에 마비증상이 나타나고 사람, 이들은 남들보다 행동을 민첩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은 물이 동하는 것을 먼저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그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자기에게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곳에서 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5절에 "거기 38년된 병자가 있더라"고 했습니다. 무려 38년동안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병이 어떤 병인지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이 어떤 병이었든간에 자그마치 38년동안 앓고 있었다면 얼마나 고통이 심하고, 그가 병고에 시달려 왔을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기네스북에 오른 내용가운데 어떤 사람이 딸꾹질을 일년 가까이 했는데 그 딸꾹질로 인해 몸무게가 30여 킬로그램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본 내용이어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뭏튼 딸꾹질 같은 아주 하찮은 것도 오래하다보면 고통을 동반하게 되는데 하물며 38년동안이나 병을 앓았다면 그 병명이 어떠하든지 얼마나 고통을 당하였을 것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마 생각건대 그도 처음부터 이곳에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백방으로 의원을 찾아다니면서 치료를 받아 보았을 것입니다. 가족들은 전국에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다니면서 이 사람의 치료를 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은 점점 깊어만 갔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해서는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채 이곳 베데스다 못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희망도 자신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희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 베데스다 못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잘도 들어가는데 자기는 아직 한번도 그곳에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의 주위를 돌아보면 같은 처지의 병자들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곁을 지켜주거나 간호해주는 가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건대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베데스다 못가에 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미 그가 이곳으로 올 무렵에는 그의 가족들도 이 사람에 대해 포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이 사람은 아직 한번도 베데스다 못에 '풍덩'하고 빠져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면 이 사람은 지난 38년동안 병으로도 고생을 심하게 했지만 지금은 병과 더불어 가족으로부터 소외되어진 채 마음까지 병들어 있는 상태일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 줄곧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에도 결혼하기 전까진 자취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학생시절 제일 힘들었던 때가 언젠가 하면 감기몸살을 앓을 때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환절기 때 스팀도 들어오지 않는 그 썰렁한 기숙사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서 끙끙 앓고 있을 때 인간적으로 외롭다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여러차례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부모님 생각이 제일 간절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내가 아플 때 그래도 가족이 함께 있어준다면 위로가 되기도 하고 격려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족마저 곂에 있지 않다면 그 고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사람의 경우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질병이 장기화되어지면서 가족과의 관계마저 단절되어버린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족이 있었다면 이 사람이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내 버려두었겠습니까?

    주님은 그에게 다가가셔서 물으셨습니다.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름이 무엇이며, 앓고 있는 병명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왜 앓게 되었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앓았느냐?'도 묻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만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질문이 참 어리석은 질문처럼 여겨지지 않습니까? 병든 사람에게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이 과연 올바른 질문입니까? 병든 사람 중에 병에서 낫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도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어떤 병자들은 낫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정 받기를 좋아하고, 누군가가 시중 들어주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몸이 약한 것을 즐기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요즘은 바나나가 너무 흔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과거엔 병원에 입원해야만 한 개 정도 먹을 수 있었던 아주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는 바나나가 먹고 싶어서 "좀 아파 봤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외환위기때 교회에 구걸하러 오는 노숙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몸이 아프다, 먹을 것이 없어 노숙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약을 사주겠다 혹은 일용직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라고 말하면 대부분은 그런 제의를 거절하고 그저 돈만 몇푼 쥐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병은 자신이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약으로도 고칠 수 없으니까?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어딘가 분명히 병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병 낫기를 별로 원치 않았습니다. 몸이 약한 것을 이용해서 적당하게 인생을 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병이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은 이 사람이 정말 병 낫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질문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베데스다 못에 왔다는 것 자체가 병 낫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신 것일까요? 아마 그는 병 낫기를 원하지만 병을 나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나 희망은 이미 오래 전에 상실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그 사람의 상실한 심령 속에 새로운 희망과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매우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병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때 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낫고자 원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예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면 될덴테 이 사람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물이 동할 때 자신을 그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자신이 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속에는 여러 가지 원망이 섞여 있는 듯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가족에 대한 원망일 수 있습니다. 만약 가족이 곁에 있었다면 자기를 이렇게 내 버려두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병을 앓다 보니 가족들은 다 떠나가 버리고 혼자 외롭게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 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내버려둘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가족에 대한 원망이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사람의 말속에는 분명 분노와 원망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병을 오래 앓다보면 조그마한 것에도 서운해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육신의 병으로 인해 마음까지도 약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괜히 투정을 부리고, 짜증내고, 웃었다 울었다 감정조절이 잘 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라고 왜 그런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기복이 심한 감정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나을 수도 있었는데 지금까지 병이 낫지 못하고 고통을 받아야 했던 사실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서 그 원인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자신은 옳은데 남이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주장이 강합니다. 나는 별로 잘못한 것이 없고, 항상 상대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있는 문제만 들추어내어서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에게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핑계도 많고, 이유도 많습니다. 거기다가 자기의 잘못이라고 고백하기보다는 다른 사람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원래 이 사람이 질병을 가지게 된 배경이 어디에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본문을 지나 14절을 보면 이 사람이 치료되어진 후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이 사람의 질병은 자신의 죄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질병이 죄로 인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시각장애, 지체장애, 신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장애를 갖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38년된 병자는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질병이 찾아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 질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단지 나을 수 없었던 이유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주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물론 육신의 질병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질병의 원인인 죄에 대해 놓임을 받는 문제입니다.

    이 병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지금 당장은 질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질병에서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병은 그 원인을 찾아내어서 치료하기 전 까지는 완전하게 치료되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8년된 병자는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의 원인은 죄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있는 죄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온전하여 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터넷상에 음란사이트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청소년들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며칠 전엔 한 벤처회사에서 음란사이트 접속이나 사진을 차단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기존에 개발되어진 것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진 이 프로그램은 음란사이트나 사진과 관련되어진 모든 것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설치한다고 해서 우리 자녀들을 완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의 가정에서는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친구 집에서도 할 수 있고 피씨방에 가서도 얼마든지 접속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이것은 하나님보시기에 결코 옳지 않은 행동이다'라고 깨닫기 전까지는 그런 모든 노력들은 임시방편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병자에게 필요한 것은 물론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질병을 얻게된 원인은 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육체의 질병만 치유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죄 문제도 해결되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고통스러워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녀문제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대인과의 관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돌파구를 찾습니다. 밤 잠을 설쳐가면서 경제적인 이윤을 추구하기도 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강구해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정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어지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에 내가 고통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에 내가 고통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고통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다른 사람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더 많은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남의 탓을 하기 이전에 나에게 있는 그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병자에게 물으셨듯이 우리를 향해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도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과연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병들었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나는 별 문제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말썽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요즘 저 사람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38년된 병자는 물이 동할 때 자신을 물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자신이 낫지 못했다고 그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물어오신다면 적어도 저와 여러분은 다른 사람 핑계 댈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먼저 깨닫기를 원합니다. 육체의 질병에 대한 심각성만 깨달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주님께 나아오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주께서 우리들에게 원하는 것은 우리가 단순히 질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거나 골치 아파하는 문제들로부터 해결되어지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에 대한 깊은 반성과 고백입니다.

    그때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왜 주님은 이 사람의 얘기를 듣고 "그래 그렇다면 내가 너를 그 못에 넣어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것일까요? 사실 이 사람은 스스로 일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리를 들고 갈 만한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정도의 힘이 있었다면 그는 벌써 그 못에 풍덩하고 빠졌을 것입니다. 자기 몸도 주체할 수 없는 지경인데 어떻게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들고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부분을 가리켜서 '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께서 그에게 있는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나음을 입은 후에도 그의 믿음에 관한 부분을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질병을 치유하신 이분을 메시야로 알지 못하고 예수로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 9절을 보면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생각하기에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은 순전히 '얼떨결에'였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는 믿음을 발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으므로 그 즉시 그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주께 온전히 열지 못했습니다. 말씀은 능력이 있어 그를 일으켜 세웠지만 그는 자기의 마음을 활짝 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이 있어야만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그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 주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가 얼마만큼 마음을 열고 그 말씀 앞에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질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고 또는 여러 가지 골치 아팠던 일들이 해결되어진다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내가 마음 문을 열고, 주를 만나고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질병이 치유되어진 것으로 만족할는지 모릅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단순히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은 정말 불행한 인생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에서 회복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 단절되어진 주님과의 관계에서 이제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오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채 그저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데만 급급해 있을 뿐입니다.

    사실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병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줍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죄인된 우리들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시각장애인들은 누굽니까? 그들은 앞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구세주로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죄인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자신들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런가하면 지체장애인은 누굽니까? 그들은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길 걷기를 원치 않은 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주님과 함께 인생의 길을 걷고자 합니까?

    옛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때 두 분이 외출하시면 어떻게 걸으십니까? 할아버지는 뒷짐지고 저만큼 앞서가고 할머니는 할아버지 뒷 꽁무니만 보고 따라가셨습니다. 나란히 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아녀자와 함께 길을 걷는 것이 창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님과 함께 인생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창피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 쏜살같이 저만큼 달아나 버립니다. 혹시 여러분의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저만치 처져 있지 않습니까?

    또 혈기 마른사람, 즉 신체 특히 손에 마비증상이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주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열심히 살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38년된 병자입니다. 그는 무기력했습니다. 힘이 없었습니다. 혼자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보셨던 그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만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주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임을 믿고 여러분의 마음을 주의 말씀앞에 활짝 열어놓고 계십니까?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데만 관심을 가짐으로 정작 말씀앞에서는 너무도 무기력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가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아무리 밖으로 나타난 어떤 골치아픈 문제들이 해결되어졌다고 해서 다는 아닙니다. 모든 질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죄'는 아닐지라도 많은 경우,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죄는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의 죄성이 고백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낫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육체적 질병입니까? 여러분 안에 있는 마음의 상처입니까? 먼저 주의 말씀 앞에 여러분의 죄성을 솔직히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안과 밖이 건강해지는 진정한 치유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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