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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아들
    2002-08-13 14:02:25   read : 2044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5:19 - 23절 // 02/08/04

    대개 부모들은 자녀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입학할 시기가 되면 "커서 무엇이 되겠느냐?"고 질문합니다. 저도 저희집 아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초등학교 1학년땐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하더니 언제부터인가 '목사'가 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생각이 바뀌지 않고 지속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며칠 전엔 저희집 둘째 아이가 느닷없이 자기의 꿈은 '사모'가 되는 것이라고 해서 한바탕 웃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둘째 아이도 처음엔 커서 간호사가 되겠다고 했었는데 언제부터 생각이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뭏튼 '사모가 되겠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의 꿈은 성장하면서 조금씩 바뀔 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부모나 혹은 가까운 가족 중 누군가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저도 저희집안에 목회자가 없었다면 아마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범위내에서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가업을 잇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가업을 잇는 아들 중에는 일본에서 알아주는 명문대학을 나온 자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대학을 나왔느냐? 와는 상관없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그 직업에 종사하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직업이 어떤 직업이냐? 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식은 원해도 아버지가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이 세계에서 가장 높습니까? 시골에서 농사지을 때 없어서는 안되는 소까지 팔아가면서 대학 다니는 자녀들에게 향토 장학금을 보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같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못 배워서 농사나 짓는 신세지만 너는 많이 배워서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 말라는 뜻에서 논 팔고, 소 팔아 자녀들에게 학비를 보내는 것입니다. 만약 대학 나와서 농사짓겠다고 말하는 자녀가 있다면 '기껏 농사나 지으라고 대학 보낸 줄 알았느냐?'라고 탄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옛날엔 직업과 신분의 구분이 뚜렷했습니다. '사농공상'이라고 해서 선비를 으뜸으로 여겼던 반면에 공인이나 상인들은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사농공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들 중에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의미있는 삶을 개척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명문대학을 나왔지만 아버지를 설득시켜 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 젊은이도 있고, 지금은 찾아보기도 어려울 정도지만 대장간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얼마 전에 독일 분데스리가의 명문인 레버쿠젠에 입단한 차두리 선수처럼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활약했던 팀에 입단을 해서 차범근의 아들이 아닌 차두리로 우뚝서기 위해 전진하는 아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하루아침에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전수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훈련과 삶의 과정을 거치면 오히려 아버지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안식일에 자신이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이유가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셨기 때문에 아들인 나도 일을 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자신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은 안식일에도 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매우 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안식을 범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심히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훤히 뚫어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시 입을 열어 19절의 말씀을 그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의 특성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아버지가 하는 그대로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하는 것을 따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언젠가 저희집 큰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한 여름 때, 그때 제 몸도 많이 뚱뚱했기 때문에 몸 굽히는 것이 매우 불편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풍기를 켜고 끄는 것을 발로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저희 집 아이가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엔 조그만 녀석이 버릇없이 선풍기를 발로 켜고 끈다고 야단을 쳤는데 알고 보았더니 그 행동이 저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여름에 잠을 잘 때 저는 런닝을 배 위로 올리는 버릇이 있는데 저희 집 아이 둘다 잠을 잘 때, 런닝을 배 위로 걷어 올려서 잠을 잡니다. 아내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닮을 수 있느냐?'고 말하면서 '누가 김씨 아니랠까봐 그런 것까지 닮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합니다.

    좀 부정적인 예를 든다면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게는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자신도 아버지의 전철을 밟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가 하는 것을 그대로 할 뿐이라는 말은 그런 종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 있는 이 병자를 먼저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병이 오래된 줄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가 먼저 주님을 발견하고 자신을 낫게 해달라고 애원했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발견하시고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말을 듣고도 매우 퉁명스럽게 자신이 낫지 않게 된 이유가 "자신을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아직까지 낫지 못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자신을 고쳐달라고 말한 적도 없고, 더구나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가 질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에 안식일이라 하여 모른 척 하고 지나갈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 옛날 아담이 범죄한 후에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을 때를 연상케 합니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범죄한 후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겨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해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가시어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은 죄 지은 아담을 책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 짓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아담에게 사랑으로 다가가기 위한 자비로운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찾아가신 일이 어디 이뿐입니까?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셨고 먼저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먼저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개는 찾는 사람 자신이 뭔가 해결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도움을 요청하고자 할 때 먼저 찾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먼저 찾아가는 일을 잘 하지 않습니다. 병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픈 사람이 병원을 찾아가지 병원의 의사가 누가 아픈지 아파트나 주택을 돌아다니면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설령 자신에게 범죄한 자라 할지라도 먼저 찾아가셔서 위로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연약해져있는 자에게 먼저 찾아가셔서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안식일이라고 해서 은혜 베푸시는 일을 중단하시거나 안식일이라고 해서 찾아가시는 일을 머뭇거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한번도 자비를 베푸는 일에 갈등하시거나 고민하시는 것을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를 고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그를 못 고칠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먼저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에게 낫게 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하여 모른 척 할 수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비와 긍휼히 여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오랜 병으로 인해 육체와 마음이 모두 상해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어떻게 모른 척 하고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보여 주신대로 행하였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버린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외면을 해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은 아실 뿐만 아니라고 항상 지켜보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자신을 외면하고 현실세계로 돌아가 버린 제자들이지만 다시 그들을 찾아가셨고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아마 사도 요한이 이 말을 훗날 기록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먼저 찾아가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기록했을 것입니다. 참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해 오신 것들이었습니다. 죄인들에게 먼저 다가가셔서 그들을 부르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병자를 고쳐주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해 오신 일들이었습니다. 그 일을 이제 아들이 감당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그 일을 하실 수 없어서 아들에게 물려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정년 은퇴하실 때가 되어 아들에게 물려주시고 자신을 물러나고자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그 일을 해 오셨기 때문에 아들인 자신이 당연히 그렇게 한 것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행하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이시되 더 큰 일을 보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아들은 아버지가 보여 주신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큰 일을 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보여주신 일은 무엇이며, 앞으로 행하게 될 더 큰 일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병자를 고치신 것은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적지 않게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아들이 그대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단순히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위임하기 위해 그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그보다 더 큰일을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보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차두리 선수가 월드컵을 계기로 독일의 명문구단 레버쿠젠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레버쿠젠에 입단하게 된 것은 물론 그의 가능성을 발견한 구단측의 적극적인 영입의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버지의 명성이 전혀 반영이 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제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레버쿠젠은 아버지 차범근 선수가 활약을 했던 팀이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아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뜻입니다. 차범근씨가 아들을 그곳에 보낸 이유도 그렇습니다. 아버지만큼만 하라는 의미에서 보낸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보다 더 큰 일을 해낼 것을 기대하면서 아들을 그곳으로 보낸 것입니다.

    사실 아들이 아버지를 흉내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과거 아버지가 날렸던 그 명성에 부합하려면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약 과거 레버쿠젠에서 활약했던 차범근선수를 기억하는 독일의 올드 팬들은 그의 아들이 아버지만큼만 활약하는 것을 보아도 적잖게 놀랄 것입니다. '언제 저렇게 컸지? 아버지 명성에 걸맞게 플레이를 참 잘 하는구나?' 하며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전성기때보다 더 큰 활약을 그들에게 보여준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놀라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죄인들을 먼저 찾아가시어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고치시는 것은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은 여기에서 머물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를 통해 더 큰 일을 계획하고 계시며 그 일을 위해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큰 일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21절과 22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아들을 보내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아들이 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려는 것과 아들에게 모든 심판을 맡기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경영자들이 자식들에게 경영을 맡기고 뒤로 물러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개는 나이가 많아서 은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영자의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해 일선에 서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기울어져 가는 기업을 젊은 패기와 도전정신으로 한번 개척해 보라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아들을 통해서 뭔가 부족하거나 충족되지 않은 것들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온 것은 세상에서 부족한 것을 채워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또 아버지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기 위해 온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한 분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그런 이유 때문만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병자를 고치는 수준에서 끝을 내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질병이 낫는 것으로 만족했는지 모릅니다.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앞을 보게 되고, 일어서지 못하던 사람들이 일어서게 되고,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못하던 사람들이 자기 침대를 들고 일어나게 될 때, 그것으로 인해 만족하는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라고 생각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으로 그칠 것 같았으면 굳이 아들이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죄와 허물가운데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워, 생명으로 인도하는 일을 위해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과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분을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인생이 병 고침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교회에 와서 설교를 통해 위안을 받고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열심히 봉사하다가 지친 육신을 이끌고 집에 가서 누우며 '오늘 주를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라는 것으로 위로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말씀을 가지고 좀 더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에 여러분의 생각이 머물지 않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수개월 전에 분재를 하나 선물로 받았습니다. 저는 한번도 분재를 키워 본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재가 귀하고 비싸다는 것은 압니다. 그래서 일단 분무기를 싸다놓고 집에서 열심히 분무기로 물을 뿌렸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 부드러운 가지에 가시가 돋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나무가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제 정성이 부족한 줄 알고 햇빛이 들어오는 곳에 갖다 두었다가 다시 자리를 옮겨주면서 물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가지에 가시는 더 많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에게 물어보았더니 물이 부족해서 거의 죽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정도가 아니라 흠뻑 물에 적셔 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제가 알지 못한 것입니다. 분재를 선물한 분께 미안하기도 하고 멀쩡하게 살아있던 분재가 다 죽게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제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화분이 아닌 땅에 심으면 살아날 수 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교회 화단에 심었습니다. 몇 주동안 계속해서 지켜보았더니 가시가 조금씩 사라지고 원상태로 돌아가려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심하게 몸살을 앓다가 조금씩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식물에게도 생명은 소중합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물을 주어도 생명이 없으면 헛것입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내 안에 생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매주 교회에 나와서 여러분은 무엇을 얻고자 하십니까? 위로입니까? 평강입니까?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이번에 수련회 기간동안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전도사님과 교사 그리고 임원들이 2주동안 매일 저녁 9시에 교회에 모여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평생이 주님 앞에 결단되어지는 은혜가 있게 해달라고,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내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달라고, 그래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그들의 평생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좋은 학교에 진학하게 해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좀 더 나은 환경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구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안에 생명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은 의사를 통해서도 나을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은 남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나고 좀 더 늦게 자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위로가 필요하다면 훌륭한 상담가를 찾아가면 됩니다. 봉사를 원한다면 자원봉사할 수 있는 단체를 찾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생명의 문제는 그들이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내 안에서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내가 이 땅에서 잘 사느냐 못사느냐?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가족중심으로 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인가? 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감히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안에 생명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목사님! 저희가 어린아인줄 아십니까? 예수 믿은지 벌써 수십년이 지났는데 새삼스럽게 그런 것을 물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희 수준을 고작 그정도로 밖에 보시지 않았습니까? 섭섭합니다." 아닙니다.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십니까? 유대인들입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조상 적부터 하나님을 섬겨왔고 종교에 대해서는 박사들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대한 규정도 알고 있고 그 규정에 따라 지금 주님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유대인들을 향해 생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래 믿었다고 자랑할 것 못됩니다. 직분이 장로나 권사라고 해서 어깨에 힘주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는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중국에 갔더니 아침 식사가 주로 빵과 죽이었습니다. 물론 호텔에 머물면 그렇지는 않겠지만 저는 공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먹는 것도 그들이 먹는 것과 똑 같았습니다. 그들은 여기로 말하면 호빵과 같은 밀가루 빵과 멀건 죽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 호빵이지 우리가 먹는 호빵보다는 훨씬 더 단단하고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빵을 매 끼니때마다 먹으려니 목이 메여서 잘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맛도 없었구요?

    그런데 세 번째 방문했을 때에는 그 빵 안에 약간의 팥고물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거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중국사람들도 한국사람들처럼 빵에 앙꼬를 조금씩 넣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먹은 빵은 처음 먹었던 것보다 훨씬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앙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빵은 앙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흔히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서 얘기할 때 "그대 없는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요, 항구없는 배요 앙꼬없는 진빵입니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하찮은 찐빵에도 앙꼬가 없으면 맛이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인생은 어떻습니까? 내 안에 생명이 없다면 우리인생은 무슨 의미가 없습니까?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연일 텔레비전에 보도되었습니다. 많은 인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영동고속도로는 거의 주차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대가족이 가는 경우 여러대에 나누어 타고 목적지까지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휴가를 즐기려면 가족이 목적지에서 다 같이 만나야 합니다. 비록 갈 때는 차를 나누어서 이리저리 탔다할지라도 최종집결지는 한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갈때는 같은 차를 타고 신나게 잘 달렸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가족이 다 뿔뿔이 흩어져 버리게 되었다면 그 휴가는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종종착지가 같아야 합니다. 비록 달리는 동안은 차를 바꿔 탈 수도 있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갈 수 있지만 최종 종착지에서 가족이 모두 만나야 즐거운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종착지도 모두 같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안에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아들을 통해서 얻게 되는 생명이 없다면 리무진을 타고 인생을 달린다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의하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사실이지만 또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심판까지도 맡기셨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믿기만 하면 생명을 주시지만 그 아들을 거절하거나 불순종으로 일관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을 심판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신 것입니까? 23절에 보면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아들을 공경하게 함으로서 아버지를 공경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아들을 공경하지 않습니까? 그 안에 교만한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반면에 어중간하게 경험한 사람들은 교만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잘 아는 것처럼 거들먹거립니다. 왜 그렇게 교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까? 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 생각을 주께 복종시켜서 겸손한 자세로 나아오지 않는다면 주님의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모세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다윗시대때 왜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퍼졌습니까? 다윗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왜 이런 교만이 찾아온 것입니까? 다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 중심으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대 그러면 안됩니다. 우리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내 생각의 중심도 그리스도요, 내 행동의 중심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나 많이 말합니까? 정말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한다면 그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시도록 나를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내 생각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기꺼이 맡기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나의 이성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는 부분도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각이나 사고가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도 아닌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주님께 심판을 맡기셨습니까?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장상 총리서리의 국회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총리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습니다. 청와대에서는 그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한 심기를 들어내었습니다. 총리서리에 대한 부결은 곧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대통령과 총리사이도 그런데 하물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어떻겠습니까?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공경하는 자라면 당연히 그 아버지를 공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경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그에게 합당한 찬양과 순종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공경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마음과 말 그리고 행동까지도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드려져야 합니다.

    가끔 텔레비전에 나와서 학생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부분 부모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들의 행동이나 태도를 보면 전혀 부모를 존경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를 향해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존경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찬양하며 주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노라 기도한다할지라도 우리의 마음과 말과 행동이 그분을 높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이 되고 맙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아들로 두셨듯이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일을 감당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께서 구원자로서 감당하신 사역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의 가슴에 생명을 안고 주의 일에 함께 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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