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초청으로 내한한 데이비드 라슨(D. Larson) 박사를 만났다. 그는 스텐포드대학을 나와 풀러신학교(M.
Div.)와 트리니티신학교(D. D.)에서 공부했다. 트리니티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으며, 30년 이상 지역교회에서 목회하기도 했다. 이번
방한에서 그는 설교의 역사에 관한 강의와 목회자들이 알아야 할 성경적인 설교의 이슈들에 대하여 강의했다.
이번 한국 방문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됐는지, 이번 방한 세미나에서 강조하고자 하셨던 내용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은 여러 가지 이슈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슈들은 지금 시대에 매우 독특하며 교회와 강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물론 2000년의 기독교 설교사에는 유사한 상황들, 곧 동일한 이슈라고 볼 수는 없지만 상응하는 이슈(parallel
issues)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구약에서 현대에 이르는 설교사에 관해 약 9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썼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설교사를 통해 볼 때 성경의 본문을 예배의 순서나 형식적인 의식에 종속시킨다면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설교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청교도들 가운데는 위대한 설교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고
성경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경의 본문을 그들의 교리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설교에 있어서
매우 제한된 본문만을 오랫동안 다루어 설교했고, 이로 인해 성경의 본문이 손상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 마땅히 숙지해야 할
것들을 잘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상응하는 현상이 목격됩니다. 성경 본문을 가족의 슬픔, 좌절, 슬픔 등에
적용시킴으로써 본문을 상황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성경의 본문을 건너 뛰어 직접적으로 사랑과 신앙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우리의 설교가 역동적이며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성경의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성경의 본문을 다른 어떤
것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의 본문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그럼에도 목회 현장 한편에서는 설교를 사실상 소홀히 대하는 현상이 종종 관찰됩니다.
기독교 설교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성경적 설교가 강력할 때, 교회 역시 강력했다는 점입니다. 반면 성경적 설교가 약해질 때 교회가 상대적으로 약해졌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적 교회 안까지도 이러한 설교의 중요성이 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목사들 가운데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10년 후면 강단에서 설교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반면 모임 장소 가운데 둥근 테이블을 놓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교회에 대한 장송곡과도 같으며, 앞으로 설교가 없어질 것에 대한 전주곡입니다. 설교를 세우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예수님 자신이 설교자였습니다.
사도들은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강력한 성경적 설교는 오늘날도 여전히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만드는 주요 수단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믿음으로 지어지는 방식이며, 말씀으로 세워지는 공동체가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선교사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십자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새로운 경향의 설교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담화설교, 즉 성경 말씀에 대한 흥미를 느끼도록 하는 새로운 방식입니다. 이 세대는 TV세대입니다.
그림, 이야기, 이미지의 세대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아이디어보다 이미지를 더 선호합니다. 성경은 이미지와 아이디어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 목회자들에게 어떻게
그것들을 사용하여 더 효과적으로 그려내며 또 성경의 이야기들과 예수님의 비유들, 산 위에 서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을 바라보는 엘리야의 모습
등을 창조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좋은 설교는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인 방법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우리 모두는 연역적인 방법에는 익숙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원리에 따라 적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귀납적인 방식에
좀더 관심을 많이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즉 성경의 많은 예들을 살펴보면서 성경 본문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 세대에 알맞은 시대정신은
귀납적이고 덜 권위적입니다. 물론 성경의 권위로부터 도망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언약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청중들에게 접근하는 데 있어 좀더
귀납적인 방식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수님같은 분들이 설교를 강조할 뿐 아니라 목회자들 신학의 과정에서 설교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또 목회자들은 졸업 이후 사역 현장에 서면 더더욱 설교가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지를 절실히 느낍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는
성경 본문을 충분히 드러내는 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모든 설교는 귀납적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는 귀납적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이 둘, 곧 귀납적 방법과 연역적 방법을 적절히 혼합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두 방법에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자마자 어떤 의미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진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는 본문을 읽는다면 저는 곧
바로 결론을 선포합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저의 믿음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복음에 대해 그리고 죄에 대해 비지시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지시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귀납적인 방식으로 “그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십니까”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예컨대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는 어떠한 타협의 여지를 남기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보다 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어떤
모호성에 대한 긴장을 참아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삶 속에는 그리고 신앙 속에는 신비의
여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저희는 유한하고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들은 모든 이슈에 있어서
권위적인 태도를 지양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고전13:9)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사역은 복음 전파, 가르침, 고침의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목회자들도 이 예수님의 경우를
자신들의 사역에 대한 모델을 보곤 합니다. 그런데 설교가 탁월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논증하실 수 있는지요?
신약에는
‘설교하다’와 ‘가르치다’에 대한 221번의 용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요한뿐 아니라 예수님에게도 중요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설교를 하기 위하여 왔다. 나는 이곳에서 설교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사도들도 그러했습니다. 37개의 다른 헬라어
동사들이 이 의사전달 과정의 양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설교사역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 모든 다양성 속에서 그들에게 맡겨진 짐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들의 세대에게 전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의 형식, 혹은
설교의 형태는 문화적 조건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수사학의 역사 속에서 발전하여 왔습니다. 기독교는 문화와 상호작용을 하였으며 희랍의 사상과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계시에 부합하게 그것을 해석하고 상황화하여 그것을 유행하는 문화 속에서 표현하려는
인간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교회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 역사 속에서 위대한 설교의 시대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수 천년이 지나, 설교는 종교개혁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것은 생명력의 회복이었습니다. 또한 청교도 시기는 위대한 설교의 시기, 위대한
부흥의 시기였습니다. 이것은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휩쓸고 지나갔으며, 웨슬리와 휫필드가 활약했습니다. 그 중심 역시 설교였으며 성령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형태를 통해 그것을 끊임없이 보게 됩니다. 35~40년 전에는 이런 견해도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는
두 번 다시 설교를 들으러 가는 엄청난 군중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빌리 그레이엄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수천,
수만 명에게 설교를 합니다. 제가 볼 때, 하나님이 여전히 사용하시는 ‘설교’의 방법은 복음을 전달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가 확신하건대, 복음을 전달하는 데 있어 강단에서의 설교와 가르침을 대신할 어떤 것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따라 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마음이 드러나는 것인데 말씀이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예배는
맹신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가 있다고 한다면 복음이 전달되는 설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설교의 형태나 설교의 길이는 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설교의 형태 측면은 이미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만찬과 세례는 성경 말씀 해석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nuda scriptura’라고 했습니다. 단지 성경을 읽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8장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에 하루 종일 서서 성경이 낭독되는 것과 해석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패러다임입니다.
목회 현장에서의 설교사역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과연 성경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 곧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제대로 길어내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를 위한 성경해석의 문제를 일반 목회자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설교학자의 임무이자 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설교학자입니다. 학생들이 저의 수업에
어떻게 설교하는가를 배우러 옵니다. 그들은 주해, 교회사, 신학 등의 지식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저의 책임은 그들이 그러한 요소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성경뿐만 아니라 문화를 주해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 속에서 그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이슈입니다.
우리 모두는 똑같지 않습니다. 저 같은 경우,
박사가 되는 공부를 하였지만 교인 가운데는 문맹인 사람도 있습니다. 게다가 주일 오전예배에서 설교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거의 제한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처럼 다양한 청중에게 이 제한된 시간에 성경이 말하는 심각한 주제를 전달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설교하려는 특정한 성경 본문은 성경 전체로 보아 연속되는 말씀의 흐름 속에 있으며, 전체 문맥 가운데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성경 본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원저자가 그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예를 들어 예수님 또는
아모스 선지자가 어떤 의중을 갖고 설교했는지를 최대한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설교의 서론에도 적절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다양한 청중들과 만나는 접촉점이 됩니다. 설교자는 청중들의 주의를 모아야 하고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하루에도 지나치게
자극적인 이미지와 장면들이 TV와 같은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옛날에는 모든 설교자들이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앉아 있는 청중들은 “감히 나에게 흥미를 주려 하다니, 감히 앞으로 말할 이야기로
관심을 끌려 하다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제가 성령의 사역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가 늘 성경의 신적인 권위의 현존 가운데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저는 또한
“설교는 적용”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나이가 많이 드신 설교자들 가운데서 어떤 분들은 설교의 끝 무렵에 이르러서야 적용을 합니다. 그러나
설교에 있어서 연속적인 적용이 필요합니다. 적용은 심지어 서론에서도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설교와 매일의 삶의 연관성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설교의 중요한 부분은 예화입니다.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은 이야기나 무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갖습니다.
예화와 적용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기술들이 필요하며 이를 계발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설교의
결론은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 부분이 취약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설교에 있어서 설교의 결론을 매듭짓는 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설교자는 세일즈맨처럼 해야 합니다. 세일즈맨은 열심히 이야기를 끌고 가서 결론의 정점에 달합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거래가 성사되지요. 그것이 바로 결론입니다.
교수님은 평소에 설교에 있어 상상력의 요소를 강조하시고 또 문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상상력의 요소에는 조심해야 할 부분도 없지 않다고 보는데요, 설교에 있어서 상상력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설교사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 듯이 고대 이집트에 오리겐이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알레고리 해석에 있어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본문을 영해(靈解)하였습니다. 그는 늘 어떤 숨겨진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잃게 되고 너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와 같은 해석은 비판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하고,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그리고 가능하다면 문자적인 본문의 의미를 추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21장 11절에서 잡은 고기
153마리에 대한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다가 그만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의 교훈, 그리고 심지어 제자들까지 모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153!
십계명과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를 합하면 17, 17에다 숨겨진 성령의 역사로 3으로 곱하면 51! 여기다 다시 3을 곱하면 드디어 153이
나오는구나! 아, 드디어 진리를 찾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러한 해석은 상상이며, 알레고리이며, 영해입니다.
본문에서의 문맥은 예수께서 낙담에 빠진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가시는 것이고 여기서의 강조점은 그와 제자들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도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함으로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성경을 문자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산들이 기뻐서
뛴다”, “나무가 손뼉을 친다” 등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을 읽을 때 평범하고,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찰스 디킨스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한국말로 된 잡지를 읽게 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하고,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그리고 가능하다면 문자적인 방식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설교에 있어서 본문을 정확히 해석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만약 성경 본문의 바른 의미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성경을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본문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극입니다.
물론 성경 본문의 말씀에는 비유도 있고 은유도 있으며 직유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수사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비유는 주의 깊게 다루지 않으면 매우 어렵게 됩니다. 또한 설교자는 상상을 이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설교란 진리를
전달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진리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영상, 비유, 은유, 직유 등은 매우 중요합니다.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저에게 늘
물어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설교를 위해 더욱 상상력 있고 창조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읽고, 읽고, 읽으십시오.” 여러분은 책 읽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이야기꾼의 자질은 독서로부터 나옵니다. 읽은 사람이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좋은 음악을 들으십시오. 좋은 예술품을 보십시오. 그리고 뇌의 부분을 자극하십시오. 성경은 결코 진부하거나 지겨운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성경이 그토록 흥미롭다면 어떻게 지겨움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조금 염려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 이성적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적인 차원도 중요하지만 불과 같은 열정 위에 그러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와 더불어 열정이 필요합니다.
목회자에게 설교란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동시에 지역교회 목회자에겐 교회성장 문제 역시 끈질긴
과제입니다. 이런 와중에 설교의 능력을 확신하고 신실하게 말씀사역을 하려고 하더라고 현실적으로 교회의 외형적 성장이 따르지 않는다면 설교에 대해
가졌던 확신이 흔들리거나 말씀에 헌신해야겠다는 결심이 흐려지는 상황을 보곤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교인들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늘 바람직한 현상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그러한 기쁨을 주시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미국에는 25년 전과 비교하여 그 당시의 인구의 절반에 불과한 지방 도시와 시골 지역이 많습니다. 소규모의
농가들은 모든 것을 팔고 떠나갑니다.
과거에 무엇을 했건,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했던 간에 인구가 감소하는 경향에서 교인수의 증가는
불가능합니다. 만일 대형 교회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런 교회에서 몇 년간 사역한다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수적인 성장 외에
다른 성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성장입니다. 또한 교인이 거룩해지고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도 성장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교인수 문제는 우리가 십자가 아래 내려놓아야 될 성질의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들이 떠나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도시에서 수천 명이 출석하는 큰 교회를 섬겼습니다. 1년에 200명의 새신자가 새로 등록을 합니다. 그러나 교인의 숫자에는
큰 변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는 성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온 많은 노년층의 성도들이
돌아가시기도 하지요. 또 도심으로 이주해 온 독신자들, 대학생들이 몇 년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등록을 하지 않아 통계에 전혀 영향을 못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성장을 계속 강조하는 분들을 이해하기가 가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교회성장을
원합니다. 그러나 다양한 차원의 교회 성장이 있습니다. 만일 제가 60가정을 상대로 목회를 한다면 이것은 평균적인 크기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아마도 약 300~400명 가량의 교인수를 상대로 하는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상황이라면 저는 규칙적으로 그리스도께 나와 거듭나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영적으로 양육하고 이들을 보다 깊은 영적인 예배로 인도하고, 또 슬픔을 당한 이들을 위로하는 사역은 400명 정도의 규모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역시 삶을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필요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공하지 않고 있는 경우에도 지속돼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크고도 근본적인 위기라고 한다면 복음에 대한 불확실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죠. 이와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신학적인 혼돈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위기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것은 우리에게 특별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말해 풍요로워진
세상에서는 말입니다.
가치는 매우 물질적이고 번영을 추구합니다.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습니다. 서구사회와 한국에서도 그러한 번영은 있습니다. 산업화로 인해 보다 높은 생활수준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삶에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번영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화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상하시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땅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번영을 약속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신약에는 크리스천과 교회에 주는 지상의 번영과 부(副)의 불확실성, 부를 의지하는 위험들에 대한 경고가 발견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매우 가난합니다.
저는 유럽의 스웨덴에서 이주해 온 사람입니다. 저의 할아버지께서
이민을 오셨는데, 그는 매우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그러나 매우 신실한 신앙인들이었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성경을 알
수 있었으며, 누가 그들에게 신학을 이야기 해주었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부자들, 진짜
부자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할 때 우리의 영은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을 더욱 더 많이 필요로 하고 그에게 호소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혼돈에 관하여 말씀드리자면, 오늘날 많은 유명한 책들 속에서는 자아 도취적이고 성취적인 아이디어들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크게 만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좋은 느낌을 주며 행복한 이야기라는 식의 미국식 풍조를 따라 어느덧 교회도 행복을 강조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 신학적
깊이는 너무도 얕습니다. 너무도 피상적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은 현상을 개선해야
할까요? 여기서 저는 최근에 읽었던 책 한 권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롤스로이스의 뒷좌석에 앉아 성경을 들고 있는 한 부자의 이야기인데, 이 책의
제목은 「부자가 행복해지는 비결」(How to be happy, those rich)입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성경의 선생들, 곧 목회자들과 설교자들은 문화에 대해 경계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현시대의 문화적 흐름에 도전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며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청지기의 도를 강력히 가르쳐야 합니다.
미국 다우존스 주식의 역사적 급 상승세로 인해 백만장자가 된 새 갑부들도 있습니다. 설교자들은 그런 점에 대해서도 매우 현명한
방법으로 말해야 합니다. 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역할 때 어느 날 저는 매우 열심히 설교를 했는데, 샌프란시스코의 부동산협회 회장으로 있는 어느
집사님 한 분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키는 겁니까? 목사님은 저에게 캐딜락을 팔고 폭스바겐을 사라고 하시는 겁니까? 제가 제단사에게서
옷을 맞추어 입지말고 싸구려 기성복을 사 입으라고 하시는 겁니까?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저에게 어떤 도움이 됩니까?
제가
모임에 들어서면 저의 동료들이 저를 보고 웃을 겁니다.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설교자는 돈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떻게 쓰여지는 것이
현명한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것은 예전의 목회자들에게 없었던 새로운 도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네아폴리스에서 교인수 약 2,000명 정도 되는 교회를
섬기기도 하셨는데, 목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주시겠습니까?
설교의 사역에는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청중 가운데 누가
듣고 있는지 모릅니다. 또한 성령이 그들의 마음에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설교사역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희망적입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학교 친구들 가운데는 변호사나 의사가 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부럽지
않습니다. 저는 평생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씁니다. 그리고 메시지와 강의를 준비합니다. 그것은 설교자로서의
특권입니다.
물론 사역이 힘이 드는 때도 있었습니다. 중직을 맡고 있는 성도가 스캔들에 빠졌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는 도시에
살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끔찍한 범죄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교회에게 매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늘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이 선교의 현장으로, 또 목회의 길로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목회자의 큰 기쁨입니다. 그리고 저의 세 자녀가 모두 크리스천인데, 이것이 저의 가장 기쁨 중 하나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상처가 아직껏 아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성적인 혁명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10년 전 미국에서는 결혼한 인구의 15퍼센트가 혼전에 동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50퍼센트입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저희는 매우 엄청난 변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많은 질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슈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