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의 사랑 2002-08-20 11:52:13 read : 2354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잠 20 : 22 - 24) 2002.08.18
영국 성공회의 역사깊은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면 지하묘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름은 잊었습니다만, 성공회 어느 주교의 묘비에 의미심장한 글이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다.
좀더 나이가 들어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시야를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마지막 시도로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만일 내가 먼저 변했다면 내 가족이라도 변화시켰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정말 자기가 변화되지 않고는 남들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교훈을 따라 자기를 변화시키지 않고 남이 변하기를 바라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미 게가 새끼 게에게 너는 옆으로 걸어가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는 옆으로 걸어가면 과연 어미 게의 말이 새끼 게에게 통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자주 잊어버리고 맙니다.
오늘 읽어드린 성경말씀도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우리의 모습을 전합니다. 우리는 악을 갚기에 충분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악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나서서 갚아서는 안되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에는 먼저 악을 행하지 말라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악을 갚는다면 이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모순일 것입니다.
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동의 유익을 해치는 행동들을 말하는데, 나의 욕심과 유익을 위하여 상대방의 유익을 힘으로써 제한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윤리적인 관점에서의 악입니다. 그 예로 오늘 말씀은 정확하지 않은 저울추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게를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하나님은 미워하시는데, 윤리적인 면인 악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악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악에 대하여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그 악을 뿌리뽑겠다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한 자를 미워하며 살아가곤 합니다. 악한 자는 벌을 받아야 하고 그 악한 자가 행한 이상의 댓가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곤 합니다.
이 세상은 악을 갚는 방법을 통해서 꼭 선해지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변호사를 하다가 신학을 시작한 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변호사가 된다는 것은 한국에서 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그 여학생이 변호사직을 그만두고 신학생이 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녀는 변호사 가운데 범죄자들을 변호하는 형사변호사였습니다. 그녀는 범죄자들을 변호하면서 억울함을 밝혀 사회정의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어떤 경우 확실한 범죄자의 경우 그들에게 오히려 죄를 물으면서 댓가를 치루게 하면 미국사회가 그래도 좀 더 선해지지 않겠느냐는 신념에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형사변화사 일을 아무리 해봐도 그녀가 생각했던만큼 악이 사라지고 선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체벌로써 사회의 정의를 이끄는데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게 된 것은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일보다는 그들을 선으로 인도하는 일이 더 효과적이다 생각하고 신학교에 들어와 목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악은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 자체를 악이라 합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에밀 부룬너도 그의 책 『모순 속의 인간』에서 악은 서구의 철학사가 규정하려고 시도한 것처럼 선의 결핍이 아니라 인간의 적극적인 부정의 행동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악이란 창조주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아직은 악을 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악을 갚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악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우리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여겨지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루터가 말한 바 의인이요 동시에 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악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을 심판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생각해 볼 때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교회 안에서 악한 자를 쉽게 심판하려 하지 말도록 가르치신 바 있습니다. 교회 안에 선한 자도 있고 악한 자도 있는 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그러한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갈 백성들을 분명 교회 안에 뿌렸는데, 어두움을 타고 사단이 와서 악한 자들을 뿌려놓고 갔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러한 현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이 가라지를 뽑을 것을 제안할 때 예수님은 가만 둘 것을 명령하셨고 또한 마지막에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님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악이 제거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세상의 악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원칙을 세우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이기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속이는 저울추가 발견될 때마다 그 주인을 다 멸망시킨다면 어느 누가 이 세상에 남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기다리시면서 그 악한 자가 회개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정직해 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고자 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라 한다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속이는 저울추 하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전자저울을 만드는 김동진 사장님입니다. 그가 맨처음에 전자저울을 만들었을 때 어느 누구하나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장사하는 사람들이 속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퇴짜맞고 저기서 퇴짜맞고 그의 길은 정말 험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구청 담당과에 가서 저울을 관공서에서 이용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담당 공무원이 대신 무게를 속이는 일로 경고를 받은 어느 정육점을 소개해 주었고 그 정육점 주인은 할 수 없이 그 저울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속일 수 없으니 불평을 하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고객들이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정육점이 그 이유를 알아보니 전자저울이 무게를 속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너도나도 그 저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한국에서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로 수출을 하는 저울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악을 행하지 아니하고 기다리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길은 오늘날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는 방법을 고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우선 “너희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언 25:21-22에 가면 더 적극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이러한 가르침을 나중에 사도 바울도 받아서 가르칩니다. 로마서 12:20을 보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그리고 나서 이렇게 선언하지 않습니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법칙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직접 악에 대하여 심판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인간적으로 아쉬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을 가지는 그 자체도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아쉬움의 사랑’은 조금은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사랑의 자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도록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게 속한 권한같이 여겨지지만, 최종적인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바로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우리들에게 아쉬움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처음에 사람을 만들어 가장 아름다운 동산 에덴동산에 들여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산을 관리하고 경작하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바램은 너무 큰 바램이었을까요? 사람들은 그 바램과는 반대로 그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결국 그 동산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다시 사람을 창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실수와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되었을까요? 아무튼 하나님은 그렇게 하질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돌아오지 아니하는 사람들에 대해 아쉬워하며 긴 세월을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하나님은 스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실 일을 감당하시기를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자신이 창조한 사람들을 다시 영원한 생명의 길로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쉽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결과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바로 그 사람을 구원하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다가 아쉽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최종적인 결정을 맡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사람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사람이 자기의 명령을 거스리고 죄를 졌을 때 아쉽지만 살려두신 이유는 끝내 사랑으로 구원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남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이는 상당히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를 발견한 사람은 어느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취성을 지닌 클로로포름을 발견하고 당대에 뛰어난 과학자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던 제임스 심프슨 경은 어느 날 그의 친구로부터 한 가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을 뽑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심프슨 경이 어떤 과학적 공헌에 대하여 말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심프슨 경은 주저함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발견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구세주 예수를 발견한 것이라고 하겠네!” (주제별 교회사에서... 160쪽)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가 사랑은 베풀며 악을 선으로 이기는 삶을 살면 그보다 더 좋은 삶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렇게까지 살지 못한다면,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자세를 유보하는 자세를 최소한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이는 소극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도 이러한 기다림으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악을 갚기보다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세를 가지게 하셨습니다. 이제 앞으로 악을 선으로 이기는 모습을 갖추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할 때 구원받은 자들이 더 힘껏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께 널리 풍성하게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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