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로 기억 합니다. 아들을 멀리 떠나보낸 아버지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종들을 통해 보낸 유서를 보니 기가 막힌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유산 모두를 이 종에게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이 아버지가 남긴 것 중에 한 가지만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아들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나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을까? 아버지께서는 그러실 분이 아닌데” 하며 유명한 지혜자를 찾아 갔습니다. 유언을 보여 주며 아버지가 저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셨고 나에게는 한 가지만 선택하도록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으니 그 지혜자는 말하기를 “아버지는 참으로 지혜가 많으신 분이시군요.” 만약에 이 모든 재산을 당신에게 준다고 적었더라면 저 종은 이 유서를 고쳐서라도 자기 몫을 챙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이렇게 급하게 유서나 소식을 알려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신에게 선택하라 했을 때 이 모든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 상속 받은 종을 당신의 소유로 삼아 버리면 가지고 있는 종의 모든 것이 당신 것이니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지혜로운 분이십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만 선택하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지혜로운 선택 그 것을 오늘 본문 속 아브라함의 선택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3주째 아브라함과 롯과의 선택의 문제를 가지고 아브라함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였다면 롯은 후회할 선택을 하였는데 그 선택은 무엇이며 오늘 하나님을 선택한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이 어떤 복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재산이 많아서 분가하게 되었습니다. 분가할 때에 롯에게 우선권을 주고 그 지역에 있는 땅을 선택하도록 합니다. 롯이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자기가 보기에 좋은 것을 먼저 선택하고 아브라함은 혼자 남게 됩니다. 롯은 잘살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요소가 되는 길을 선택해서 나갔습니다. 좀더 본문을 읽어 나가다 보면 롯은 후에 소돔성에서 명예와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그는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요소를 선택하였지만 그 인생의 종말은 비참하게 끝이 나고 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선택한 것은 이 척박한 땅밖에 없었지만 그는 나중에 복의 근원이 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고 참으로 우리가 부러워할 수 있는 복된 생애를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아브라함!, 그러면 하나님을 선택한 우리에게는 어떤 복이 찾아올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인생 삶 속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며 사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 하지만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아브라함은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조건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선택했는데 그 인생이 복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을 선택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복을 누렸습니다.
14절을 읽어보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자,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 무슨 복이라 할 수 있는지? 돈이나 금광이나 유전을 발견 했다든지 하는 것이 복인지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 복이라 할 수 있는지? 생각 하실 것입니다.
롯이 떠난 아브라함의 마음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롯의 존재는 자식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자녀가 없는 어른들을 보면 조카라도 자녀처럼 생각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할 때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친척은 떠나지 못했습니다. 자기 조카 롯에 대한 집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들처럼 의지하고 사랑할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재산의 문제로 분규가 일어날 때 아브라함이 롯에게 해준 것을 보면 친척에게 해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양보하고 참습니다. 먼저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에 대해서 괘씸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아들을 대하는 심정입니다. 객지에 와서 서로 의지하며 살뿐더러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롯은 더욱 큰 존재로 부각 되어져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이 떠나간 이후에 아브라함은 롯이 살던 집 뿐 아니라 롯이 차지하고 있던 마음의 공간도 텅 비어 있었을 것입니다. 롯이 떠나고 났을 때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마음은 바로 외로움입니다.
Webster영어 사전을 보면 ‘외로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친구가 없는 상태’, ‘타인으로부터 격리 된 것’, ‘사람들과 교류가 없는 것’, '혼자 있어서 슬픈 상태', '쓸쓸하고 처량한 감정을 자아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이 모여서 '우울한 감정'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 중에서 영어 중에서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조사해 보니 loneliness(외로움)라는 단어를 꼽더라는 것입니다.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사람들에게 존경 받고 널리 인정받을 때 “이상한 일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아주는데도 나는 사무치게 외롭다”라고 고백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외로움’을 느끼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리고 무거운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 올 때 축처진 어깨와 걸음걸이에서 외로움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 나라로 먼저 보내고 난 후 홀로 이 땅에 살아가야 될 망연자실, 허공을 향한 눈동자에서도 외로움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가장 함께 했던 친구들을 떠나보낼 때, 심지어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시집 장가보내고 난 후 돌아오는 부모의 외로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고 이야기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사람들이 점점 나를 위해 주는 것 같아도 사회의 주변인으로 몰려 갈 때도 외로움은 찾아옵니다. 그리고 회복될 수 없는 중한 병에 걸려서 이제는 죽음만이 나에게 마지막 남은 결론이라고 생각을 가진 사람도 외로움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단순히 느끼도록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살갗을 파고들며 시리도록 우리의 인생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서정윤시인의 ‘홀로서기’ 시 중에서 “나는 여기 있는데 네 마음은 어디를 다니고 있는지 아직 알 수가 없구나” 라는 표현은 외로움을 잘 나타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로움에서 그 누구도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외로움은 삶의 의욕을 꺾어 버립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질 때 죽은 딸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던 아버지가 7년 만에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외로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죽음으로 우리 인생을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우리의 용기를 빼앗아 버립니다. 외로움은 인생을 밝게 볼 수 없게 만듭니다. 삶의 여정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 인지 무엇이 좋고 나쁜 것 인지 무엇을 먼저 하고 나중에 해야 하는 것인지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인생을 방황하게 만드는 것이 외로움 입니다.
외로움은 우리의 인생을 우리답게 살지 못하게 중단 시키는 마음의 병! 그렇지만 누구든지 찾아오는 병이라고 생각할 때 아브라함의 외로움 속에 주님이 찾아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 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선택 했기에 그에게 외로움이 찾아 왔습니다. 이 외로움은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순종한 다음에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51장 5절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로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찾아가서 그에게 복을 주어 창대케 하였느니라”라고 말씀 합니다. 홀로 남은 아브라함을 아무도 도와 줄 수도 없고 위로 할 수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만나 주시고 부르시고 장성케 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외로울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 왜 우리에게 복이 될까요? 외로움은 삶의 의욕을 빼앗아 갑니다. 용기를 빼앗아 갑니다. 우리에게 분노하게 하고 사랑할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외로운 사람에게 찾아 오셔서 그에게 구원의 놀라운 소식을 선포 합니다. 우리를 외로움에서 건져 주실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을 가지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찾아 온 분은 누구 입니까?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나를 만드신 분입니다. 내 마음과 감정, 내 육체까지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나를 낢마다 새롭게 만드실 그 분! 새롭게 만드실 분이 바로 주님입니다. 그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에 사랑을 전할 사람이 나 밖에 없는 것처럼 나만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나를 위해 찾아오시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를 격려하시고 일으키시고 나와 동행 하시는 분이 바로 그 분 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나 신앙 세계에 나오는 인물을 살펴 보십시요. 그들에게 특별한 인생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외로움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녀가 죽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고독의 삶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로 낙심하고 절망하여서 주저앉고 싶을 때도 참으로 많았던 것입니다.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생명처럼 여기던 것을 잃어버리는 갖가지 인생의 고초와 고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의 삶 속에 찾아오신 주님을 만날 때 그들은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찾아오심을 통해서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도 인생의 만족감이 없었던 사마리아 여인! 지금 있는 남편까지도 자기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여 방황하던 그 여인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난 이 후 그 방황은 끝이 났습니다. 그의 삶의 괘도가 달라지고 인생 방향과 걸음이 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귀를 누리고 있었지만 공허했던 삭개오! 그는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지만 주님을 만난 이후 생명처럼 여기던 물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바로 그 주님이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때문 입니다.
요즈음 구역장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새벽 5시 40분부터 20분 간격으로 하루에 10명 이상 계속 만나고 있습니다. 제가 구역장들에게 공통적으로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기회가 있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들 입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들이 있습니다. “저는 인생에 있어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절망이 있었습니다. 외로움 속에 있을 때 주님이 찾아오셔서 저를 어루만져 주셨고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고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재산이 많다는 것이 복입니까? 권세가 있는 것이 복입니까? 권세가 있어도 자기에게 찾아오는 외로움과 두려움 앞에 극복할 힘이 없는 사람들은 권세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돈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에 진정한 복은 내 인생 속에 나를 주저앉히는 곤고함과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 외로움 속에 나를 건져 주시고 나로 하여금 내 인생길에 당당하고 힘차게 마침내 승리의 길로 걸어갈 수 있게 도와주신 주님과의 만남을 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만나 주십니다.
여러분! 외롭습니까?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나만의 눈물의 의미가 있는 분이 있습니까? 인생에 있어서 홀로 되었다고 하는 순간이 바로 주님이 찾아오시는 가장 좋은 때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에게 계획과 비전을 깨우쳐 주시고 보여 주었다는 것이 참으로 복되다는 것입니다.
15절,16절 말씀을 읽어보면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지금 아브라함이 무엇을 보고 있겠습니까? 동쪽을 보면 비옥한 땅과 아름다워 보이는 땅, 롯이 선택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있는 땅은 척박하고 기근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너 있는 곳에’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서있는 자리가 어디 입니까? 롯이 떠난 외로움의 자리입니다. 또한 비옥한 것과 물질 ,행복한 것과는 상관없는 척박한 황무지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것이 네 인생속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 합니다. 보이는 것 그 이면 속에 내가 너를 위하여 숨겨둔 계획과 놀라운 꿈과 비전을 설명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만큼 섬세하게 설명하신 줄 아십니까? 본문 속에 ‘내가 주리니’, ‘내가 하리니’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신다는 것과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 특별한 어떤 것을 책정할 때 쓰는 단어 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특별히 구별해서 보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후손이 많아지겠다는 것과 그 땅을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어쩌면 불가능해 보입니다. 현실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 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현실의 눈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십니다.
10절 말씀에 ‘롯이 눈을 들어’라는 표현이 있는 데 14절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라는 표현이 동일하게 나옵니다. 10절에 ‘롯이 바라본 즉’ 14절에 ‘아브라함이 바라본 즉’ 10절에 ‘롯이 온 땅을 보았는데’ 15절에는 ‘아브라함 역시 모든 땅을 바라본’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12절에 ‘롯이 장막을 옮겨’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18절에는 ‘아브라함이 장막을 옮겨’라는 표현이 서로 대조를 이루며 나타납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정하는 과정을 동일하게 주님께서 반복하시면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앞에 롯이 했던 이 사건의 주어는 롯 자신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표현 합니다. “So Lot(롯) chose for himself." 롯은 자신을 위해 선택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셔서 그가 고개를 들고 땅을 바라보고 명령에 따라 삶의 자리를 옮긴 것입니다. 그것이 차이 입니다. 롯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선택한 것을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바라본 것은 비전이라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정말 답답할 때가 언제 입니까? 정말 고통스러울 때가 언제 입니까? 고난 자체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이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지 희망이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더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고난과 답답함이 마지막이라면 살만한 가치가 없을 겁니다. 얼마만큼 지치고 힘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면서 “그것이 끝이 아니야” “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야. 그 너머에 너를 위한 계획이 있다.” 라고 말씀 하실 때 우리에게 꿈과 비전이 있으며 그게 바로 복이라는 것입니다.
퓰리쳐상을 받은 한 종군 기자가 한국전쟁 때 취재를 했습니다. 포탄이 떨어지는 참호속에 있는 한 흑인 병사에게 기자가 물어 봅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질문하자 그는 “Give me tomorrow!"(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라고 대답 합니다.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나에게 내일이 있다면 내 인생이 두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 중에 내일이 보장된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내가 눈을 뜬 것처럼 당연히 내일 아침에도 눈을 떠서 내일의 생활을 하리라 계획하지만 그것이 보장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날 어쩌면 어느 순간 우리가 눈을 떴을 때 이 땅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서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고 허락하실 때 가능한 것이 내일 입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 머물러 있다면 절망과 좌절 밖에 없지만 그러나 현실 너머에 꿈과 비전을 보여 준다면 우리는 고난을 이길 힘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출애굽해서 좌절하고 방황하고 원망하고 포기하려 했던 이유는 12정탐꾼들의 보고에 그들의 삶이 달려 있다고 봅니다. 12명의 정탐꾼 중에 10명의 정탐꾼이 정확하게 보고 했습니다. 그들은 둔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한 지파의 지도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사건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그 사건의 실체를 볼 줄 아는 이지적인 눈과 분석력을 가진 지도력을 가진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가나안 땅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거하는 사람들은 정말 거대한 사람이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땅이었음을 그들은 보고 했습니다. 희망이 없음을 알 때 인간은 뒤집어 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빠진 것이 있습니다. 그 현실 너머에 그 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은 광야가 더 이상 고난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꿈이 이 세상 뿐 이라면 우리만큼 불쌍한 삶이 없다고 바울은 경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죽어서 영원한 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에 복된 인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풍요로운 사람이 내일이 없이 산다면 어떻습니까? 그 삶이 복된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죽기 전에 돈이라도 실컷 써보자는 사람이 정말 고상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엉망진창일 것입니다. 미래가 없는 인생은 희망이 없다는 사실 입니다.
축복이 무엇 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너머에 있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 보여질 때 복이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복을 받은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베푸신, 좀더 신학적으로 들어가면 이 때부터 아브라함에게 이방인에 대한 비전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삶의 현장에서 좋은 것 다 빼앗기고 남은 것 이라고는 척박한 땅과 외로움 속에 있다할 지라도 나를 축복하시고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보면서 눈물을 거두고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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