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의 기쁨을 새 부대에 2002-08-20 11:37:28 read : 278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막2장18-22)2002.08.18.
저는 지난 8일 동안 미국 윌로우크릭 교회 리더십 세미나에 참석하고, 괄목할 만한 성장과 함께 크게 주목받고 있는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예배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거의 성장하지 못하고 침체에 처해있는 미국 교회들 가운데서도 해마다 크게 변화하며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의 특징들을 보면 말씀중심의 사역과 성령의 역사, 뜨거운 찬양사역과 젊은이들의 관심과 변화에 잘 대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겉보다는 내면을 보신다.
빨간색과 파란색은 분명히 서로 다른 색입니다. 빨간색을 가지고 파란색을 만들 수 없습니다. 또한 빨간색만을 알고 있는 사람은 파란색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빨간색을 그대로 가지고 파란색을 받아들이면, 파란색이 되지 않고 빨간색도 파란색도 아닌 보라색이 되고 맙니다.
인간은 빨간색을 가지고 파란색을 보려고 합니다. 더욱이 죄인인 인간은 그 빛을 바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사람이 어떻게 사고하느냐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생각한다는 것, 어떤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기 탓이다' 라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하는 것에 의해 사람은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레위에게‘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 레위는 세리로 있는 자기를 불러 주심에 큰 기쁨으로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인 자기 친구들과 예수님과 함께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동네에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너희들의 선생은 저 모양이냐? 어찌하여 죄인들과 어울려 있느냐?" 하며 비방을 했습니다.
인식의 차이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의롭다, 의인이다' 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금식 때가 되었을 때 금식했고 기도해야 될 시간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제해야 될 때 구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의인이며 메시야, 그리스도가 오시면 당연히 자기들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나 같은 죄인을 찾으러 오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만나기 위해 오셨습니까? 바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복음, 곧 은혜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가리키며 성령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 받았고 예수님의 생명을 받았다면 당연히 새 부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사고의 틀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과거의 무속적인 사고의 틀과 다른 종교에 있어서의 사고의 틀을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
구원은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반성이 아니요 회개이며, 변화가 아니라 부활입니다. 여기에는 전적인 은혜와 인간의 응답이 있을 뿐입니다. 단지 한 가지 알아둘 것은 영성의 부활은 바로 시작되지만, 생활태도의 변화는 오랜 훈련과정을 통해서 성숙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보실 때 겉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을 보십니다. 주님은 일을 하실 때 그 일의 형태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정신을 보십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죄를 짓고 살았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가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그 마음이 교만한 서기관들은 거절하시고 죄인인 세리 마태를 택하시고 그의 집에서 죄인들과 더불어서 식사하시고 즐기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리 마태를 택한 이유이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당신은 죄인들과 같이 지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시면서 저런 죄인, 나라를 팔아먹는 저런 사람과 같이 지낼 수 있는 것입니까?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죄인들과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 말씀하셨고, "나는 이 땅에 병든 자를 위해서 왔다. 나는 이 땅에 죄인들을 위해서 왔다. 나는 이 땅에 괴로움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서 왔다. 가슴이 찢어지는 괴로움을 안고, 남몰래 울고, 탄식해야 만하고, 수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서 왔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살아가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에 바리새인들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물러가자 이제 어떤 사람들이 와서 묻습니다.
세례 요한과 바리새인들의 전통
18절을 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 말은 요한의 제자들,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히 금식에 관한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앙의 형태를 꼬집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금식하고 고행하고 전통을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도 하지 않고 잘 먹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금식하고 하루에 세 차례는 기도해야지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금식도 하지 않고 무슨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있느냐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전통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 반드시 전통을 지켜야 한다. 전통을 따르지 않으면 신앙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지금 금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식이란 무엇입니까? 본래 금식에 대해서는 율법에서 말하기를 대속죄일에 하루 금식하는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처음 금식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회개의 표시로서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일년에 하루만 금식하는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사울의 죽음 앞에 이스라엘은 7일 간 금식하였고, 다니엘은 21일 동안을 금식하였습니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는 40일간을 주야로 금식을 하였습니다. 통회의 표시로써 국가적인 재난 앞에, 혹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종교적인 열심 때문에 금식해 오던 것이 예수님 때에는 일주일에 이틀씩 정규적으로 금식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금식이 기도가 아니라 형식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형식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할 때 그 의미를 상실한 채 기도하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금식할 때에 얼굴에 기름을 바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금식하는 표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사람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실 때면 꼭 한적한 곳, 조용한 곳에 가서 은밀히 하나님을 만나셨습니다.
신앙은 형식이 아니라 만남이다.
신앙은 형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만남입니다. 신앙은 형식이 앞서면 안되고 내용이 앞서야 합니다. 물론 신앙에서는 형식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는데도 분명한 형식이 있습니다. 신앙고백, 찬송, 헌금, 말씀 우리가 형식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주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그 예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형식이 중요하지만 내용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의존하는 것보다 예수님께 더욱 의존해야 합니다. 전통을 추구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합니다. 어떤 전통적인 틀을 가지고 따지며 이야기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느냐,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애를 쓰느냐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직적 체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조직이 사람과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어야지 교회가 조직을 위해서 있으면 안됩니다. 공동체가 조직화되어 가면 되어갈수록, 조직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화석화되는 것입니다. 현대판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도주의를 극복하여야 합니다. 제도와 조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한 그 교회는 화석과 같은 곳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여러 기관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근본적으로 생명을 가진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는 어떤 고정된 교리나 체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되는 법칙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언제든지 고치고 새로운 진리를 수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적은 그리스도이지 조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도 대신, 조직 대신, 행정 대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성령의 열매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오만과 편견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들의 전통만이 맞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처럼 신앙생활을 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조직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도 용납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신앙이 제일로 옳고, 가장 바르고, 제일이기 때문에 자기들과 같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들이야말로 편견중의 편견이요, 잘못된 것 중에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혼식에 참여하는 것
예수님은 이러한 신앙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통만 주장하여서 변화가 없고, 자기 고집만 부리고, 남을 비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19절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폐쇄되고, 경직된 전통이 아니다. 신앙은 즐거움이요, 감격이요, 기쁨이다. 혼인 집 사람들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슬퍼할 수 없다." 누가 들어도 옳은 말씀입니다. 결혼식 잔치에 가서 누가 금식한다고 합니까? 결혼식은 즐거워하며 먹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랑이신 예수님과 같이 있는 자들인데 왜 슬퍼하며 전통에 따라서 억지로 금식을 해야 합니까?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슬퍼하며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것이다."
여러분 신앙의 근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억지가 아니고 강요도 아닙니다. 자발적인 것이고 기쁨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 마음 한 복판에서 샘솟는 기쁨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사실 바울 만큼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고난이 많았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통을 하면서 힘들게 살아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만큼 기쁨으로 산 사람은 없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문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참지 못할 방법까지 동원해가면서 바울을 괴롭히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쁨은 바울 뿐만이 아닙니다. 베드로 역시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들은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렸기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기쁨이 넘친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기쁨의 근원입니다. 기독교는 종교적인 규율만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잔치에 우리는 그저 나와서 함께 즐기고 기뻐하면 됩니다. "절에 다닐 때에도 시주하였는데 교회 다니면서 연보를 안 할 수 있나"이런 식으로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일이 너무나 많기에 기쁨으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에도 목욕 재계를 하였는데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목욕을 안 할 수 있나" 이런 생각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그분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기에 그 거룩하신 분의 모습에 기뻐하며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전통을 주장하고, 형식을 주장하고, 조직을 주장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즐거움을 찾아야 합니다. 완고함 대신에 자유를, 고집 대신에 환대를, 전통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누어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22절 말씀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느니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신앙은 옛것과 새것이 같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새 포도주의 기쁨을 전통의 낡은 부대에 넣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기뻐하는 것을 근심하며 슬퍼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슬픔의 세상에 기쁨의 빛이 비취었습니다. 흑암에 사는 인생들이 빛 가운데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근심과 슬픔이 제하여지고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옛것을 고집하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직도 옛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묵은 것은 옛 사람이라고 합니다.
옛사람들은 더러운 이야기를 해야 좋아합니다. 옷은 깨끗하게 입었더라도 마음이 더럽습니다. 옛 사람은 물질, 정욕, 음란, 호색, 불의함을 쫓아 살아갑니다. 신앙이 있는 것 같아도 물질 앞에서는 신앙이 사라집니다. 옛 사람은 악합니다. 살인과 강도와 절도와 폭행과 싸움이 지배하는 삶을 삽니다. 옛 사람은 파괴시킵니다. 미움과 원망과 시기와 불평과 원수를 맺는 일을 합니다. 옛 사람은 용서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원수를 맺습니다. 이해할 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 허물이 있는데도 남의 허물을 들추어냅니다. 그러기에 이런 자들에게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슬픔과 무거움과 완악함과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창조적인 삶을 삽니다. 구습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건설합니다. 새 사람은 관용과 용서의 삶입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삶입니다. 누가 누구를 속박할 수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은 서로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삶입니다. 남을 강요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모습을 즐거워하며 그 다양한 것들이 제 힘을 발휘하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새로운 삶은 참 기쁨의 삶입니다. 문둥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 주시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주시는 주님이 곁에 계시는데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슬퍼해야 합니까? 새로운 삶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의 축복과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새 삶, 새 자유, 새 기쁨을 누리십시오. 예수님은 슬픔을 대신해 꽃 면류관을 주시고자 합니다. 슬픔 대신에 희락의 기름으로 채우십시오. 전통만을 고집하는 대신에 자유와 창조의 새로운 세계로 달려가십시오. 견제와 속박 대신에 따뜻함과 격려로 향하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의 근심 대신에 찬양의 옷을 입히시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 진정한 기쁨이 있고 능력이 있고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어떤 원칙과 종교적 경건의 규례들을 지켜 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는 또 다시 낡은 껍질 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안주해 버리게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 버리면 그래도 다행인데, 그렇게 될 때 새 것을 새 것으로 보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놓쳐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새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 새 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할 수 있을까? 입니다. 우리는 종류가 같은 것이라도 그 전에 사용하지 않던 것, 전에 경험하지 않았던 것을 새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성서적 관점에서 말하는 새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성서에서 의미하는 새 것은 생명, 사랑, 치유, 회개, 창조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새 것을 볼 수 없는 가리워진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러한 것이 종교적 편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편견은 자기 의라는 것인데 그것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에서 보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모든 것이 다 정죄의 대상이 됩니다.
피가 돌고 눈물이 있는 살아 있는 예수
칼릴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지브란은 77인의 그 시대 사람의 입을 빌어서 예수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 77인 중에는 예수의 대적도 있고 친구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시리아 사람, 로마 사람, 유대 사람, 그리스 사람, 페르시아 사람 등 여러 가지의 사람이 예수를 말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제사장, 창녀, 세리, 시인 등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공통점은 교리의 틀 속에 갇혀 있는 예수, 석고화된 예수가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피가 돌고 눈물이 있는 살아 있는 예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 77인 가운데 대표적인 한 사람을 선택한다면 막달라 마리아를 택할 수 있습니다. 그가 사람의 아들 예수에게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 그의 인생의 가을이 와도 거울 속에 자신을 드려다 보기를 겁내지도 않고 침범 당하는 일도 없는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예수의 사랑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아름다움이 마리아에게는 새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아들 예수에게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본 후로는 거짓으로 꾸며가는 아름다움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달픈 생을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그러한 삶의 변화들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엄격한 종교 형식과 율법을 준수하고 있었지만 실제 있어야 할 새로운 삶은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주는 것은 그들이 새 것을 새 것으로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새 것은 모두 정죄, 갈등, 적대감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삶의 문제에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것들을 지켜가는 것으로 그들은 스스로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의 호의를 사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사랑, 자유, 성취, 충만은 그들의 종교의 경건의 틀을 파괴하는 것으로 비쳐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새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거나,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의라는 축을 중심으로 해서 이해하고 받아드리려고 했습니다.
죽은 것의 특징은 신축성이 없고, 부드러움이 없습니다. 뻣뻣하고 딱딱합니다. 생명력이 없는 것은 신축성이 없습니다. 새로운 삶, 새 역사는 진리를 바르게 보고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새 사상, 새 사건, 새 생명, 새 의미, 새 목적, 새 가치입니다. 이 새 것을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를 이해하는 관점은 시대에 따라서 그 강조점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기독교가 이 땅 위에서 없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라는 문제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새로운 미래시대에 우리의 희망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에 묶어두어서도 안되며, 교리의 틀 속에 가두어 두어서도 안됩니다. 잘못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낡은 종교적 형식의 틀 속에 가두어 둘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낡은 옷에 생베 조각을 붙이거나,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낡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회적으로 통념되고 있는 것들로 지역주의, 학벌주의, 뇌물이면 다 된다는 엉터리 신조, 돈, 권력, 출세를 생의 제일 목표로 삼는 인생관, 자연환경의 그 아름다움과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값진 혜택을 보지 못하는 탐욕 등입니다. 그리고 종교인으로서 갖는 편견입니다. 종교는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야하는데 오히려 더욱더 편견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종교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무서운 것은 독선, 절대주의, 편파성, 자신의 경건을 절대시하는 아집 등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관점에서 예수를 이해할 때 그 예수는 어디까지나 자기교파, 자기교회, 자기 자신 만을 수호해주는 수호신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예수는 자기 그룹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그룹 이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예수가 되어버립니다.
종교적인 경건의 형식을 절대시하는 사람들에게 맞는 예수는 요즈음 어린 십대들에게나 젊은이들에게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하는 예수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선호하는 예수는 항상 그들과 같은 사람들만을 옹호해주고 감싸주며 합리화시켜 주는 분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경멸하는 예수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주는 예수는 그러한 형식적인 경건에 묶여있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예수, 세리, 창녀, 죄인들에 대해서는 경멸과 증오를 퍼붓는 예수가 아닙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주는 예수는 우리의 낡은 사고의 틀 속에 안주하는 예수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아들 예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새 것을 낡은 도식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새 것의 의미는 없습니다. 새 것은 새 것으로 바라보며 그 새 것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교회의 성패는 예수를 누구로 고백하고 따르느냐에 있습니다. 새로운 미래의 기독교의 전망도 여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새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기대했습니까? 그것은 새로운 미래가 가지고 있는 새로움의 의미 때문이었습니다.“신사는 새 것을 좋아한다”라는 영화 제목도 있듯이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해가 바뀔 때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큽니다.
새로움의 두 의미
그런데 새로움이란 것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새로움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새로움, new”라고 하는 말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는 없었던 것이 새롭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개념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이 개념에 속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 만이 할 수 있습니다.
새로움의 또 다른 하나의 개념은 변화입니다. 이것은 현재 있는 것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에는 외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이 있습니다. 외면적인 변화는 외관상으로 나타난 모양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롭게 보이기 위해서 머리를 단장합니다. 화장을 합니다. 새 옷을 입습니다. 집안 내 가구를 이리, 저리 옮깁니다. 페인트를 칠하거나 도배를 합니다. 헌 차를 버리고 새 차를 삽니다.
사람들은 새로움을 주기 위해 이러한 외면적인 변화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내면적이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내면적인 변화란 정신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의식의 변화를 말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외면적으로 변한다고 해도 내면이 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내면이 변하지 않고는 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여자가 돈을 많이 들여서 주름살 제거 수술을 했습니다. 얼굴이 뺑뺑 해져서 처녀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 여자는 수술 전의 여자 그대로 입니다. 얼굴의 주름살만 폈다고 해서 변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이어트를 해서 몸이 날씬해 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도 그 사람은 옛날 그 사람입니다. 몸의 군살이 빠졌다고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아무리 오래 믿어도 심령이 변하지 않는다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얼굴 표정을 근엄하게 짖고 걸음을 천천히 걷는다고 변한 사람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봉사를 잘 한다고 변한 사람이 아닙니다. 심령이 변해야 정말로 변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변해야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심령이 변해야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옛 사람, 옛 자아, 옛 성품 가지고는 안됩니다.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22절 이하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늘 새로운 환경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에 적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적응하시겠습니까? 대항하시겠습니까? 변화를 하려면 대항을 해야 합니다. 적응하다 보면 변질하게 됩니다. 새로운 환경에 겁낼 것이 없습니다. 과감하게 도전해야 합니다. 변화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 아니면 변질" 이라는 말이 있듯이 변질되어 버리기보다는 변화를 끌어안는 편이 낫습니다.
새 시대의 사람은 새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새 의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의“생각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새 시대에 맞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옛날 생각, 옛날 사고, 전통을 고수하는 것은 오히려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사고와 의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늙었다고 하면 보통 나이가 많은 것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늙은 것은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생각이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더라도 생각만 새롭게 가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창조적이고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특히 나이가 들어갈 수록 생각을 새롭게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아서는 안됩니다. 지금 새 시대는 새 사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새 사람이 됩니까? 새로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이 변하지 않는 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새 사람이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에 어느 일을 하실 때 반드시 변화된 새 사람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변화된 사람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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