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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2002-08-20 11:08:01   read : 1940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5:30 - 36절 // 02/08/18

    올해도 변함없이 낙도사역을 은혜 중에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선교를 떠나기 전에 기도하는 내용은 우리 자신이 먼저 구령에 대한 열정을 갖는 것과 악한 세력의 방해가 없도록 기도하곤 했습니다. 사실 이번에 우리가 찾아간 강릉지역은 유교문화의 전통과 불교신앙의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처음부터 전도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물론 전도대원들을 무조건 문전박대하는 분들은 별로 없었지만 막상 복음에 대해서만큼은 완강하게 거절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조차도 복음에 대해 단호하게 거절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사들과 전도대원들의 구령에 대한 열정은 그들의 심령을 파고 들었고 사영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가 하면 학원을 빼먹고 성경학교에 참석한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마지막날 못내 헤어지는 것이 서운하여 눈물을 글썽거리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번 사역은 복음에 대해 아무리 강팍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구령에 대한 열정 앞에는 그 심령이 눈 녹듯 녹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전도할 때 염려하는 것은 타종교로부터 오는 박해나 도전들입니다. 그러나 막상 부딪혀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할는지 몰라도 자주 접촉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을 하면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경계하거나 두려워할 것은 반드시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타종교의 도전이나 반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내부로부터 오는 신학적 도전입니다.

    예를 들어서 현대사회에서 신학자들은 타종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전통적인 신학 방법론의 틀을 깨뜨리는 현대적 신학의 신학방법론이 가미되면서 종교다원주의가 형성되어지게 된 것입니다. 즉 기독교 신학자들 내부에서도 타종교에 대해서 구원을 인정해 주거나 아니면 기독론 자체를 넓게 포괄적으로 해석해서 구원이 가능함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반드시 기독교만 진리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다 똑같은 것이며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동일하게 진리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주자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말처럼 들려질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휴머니스트들이 많은 세상에서 얼마나 폭넓은 이해심을 동반한 주장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결국 진리와 생명에 관한 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말씀을 분명히 목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30절에 보면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의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심판은 들리는 그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누가 뇌물을 준다고 해서 옳지 않은 것은 옳다고 한다든지, 누가 청탁을 한다고 해서 안될 일을 되게 한다든지 그렇게 재판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주님은 '듣는대로' 심판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내가 행한 일에 대해 보고한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며칠 전 뉴스를 보았더니 '카파라치'에게 지급된 금액이 100억이 넘었다고 합니다. '카파라치'란 교통위반 차량을 몰래 촬영하여 신고하고 보상금을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아마 우리들 중에도 어느 날 자신이 교통법규를 위반한 내용의 사진과 함께 범칙금이 부과되어져 나온 통지서를 받아 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어떤 분들은 입을 딱 벌리고 다물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위반사실을 적발하기 어려운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선명하게 사진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위반한 사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도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모습과 차량 번호가 선명하게 찍혀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경우 변명하려고 해도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종종 음주운전 단속에 걸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변명도 가지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박카스를 마셨다고 우깁니다. 박카스 마시고 취해 비틀비틀 거린다는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단속하는 경찰이 얼마나 어의가 없겠습니까? 심지어 되려 단속경찰을 박카스와 술도 구별 못하는 술 취한 사람 취급을 하며 고함을 지릅니다. 어떤 사람은 상주행세를 하면서 잠깐 급한 일 때문에 외출했다가 단속에 걸렸으니 한번 봐달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계가 엉터리라고 말하면서 음주측정기를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변명을 늘어놓아도 결국은 자신이 음주운전한 행위로 말미암아 면허가 대부분 취소되어버립니다. 예수를 믿은 이후에 왜 우리의 삶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까? 그것이 결국은 주님 앞에서 섰을 때 우리가 판단받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니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아도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해 누군가가 그대로 다 보고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이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일이 있는 줄 압니다. 선생님께서 반장에게 칠판한쪽 귀퉁이에 수업시간에 떠드는 아이 이름을 적게 하시는 경우입니다. 반장은 그것 하나가지고 반에서 가장 강력한 권세를 휘두릅니다. 조금이라도 떠들면 가차없이 칠판에다 큼직하게 이름을 씁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하는 수 없이 조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반장이 공평하면 좋은데 가끔은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의 이름은 적지 않고 자기에게 밉보인 아이들 혹은 평소에 별로 좋지 않게 여겨왔던 아이들은 조금만 떠들어도 두말하지 않고 칠판에 적어버립니다.

    만약 자기와 친한 친구가 떠들어서 하는 수 없이 이름이 적히게 되는 경우 편법을 씁니다. 어떻게 편법을 씁니까? 조용하게 있는 사람들은 다시 지워주겠다고 해서 그 아이의 이름을 지워줍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종례시간까지 최종 명단이 확정되면 선생님은 칠판에 적혀 있는 명단을 보고 어떤 경우엔 체벌을 가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벌로 화장실 청소를 시키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불의하게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 앞에 거짓된 보고나 한쪽으로 편중된 보고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주님은 언제나 바른 판단을 가지고 심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아야 할 줄 압니다. 여러분에 대해 누군가가 여러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점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굉장히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친하니까 내 이름은 칠판한쪽 귀퉁이에 적혀 있던 떠드는 아이 명단에서 빠지듯이 그렇게 빠지게 될 것이라고 믿는 분들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 주님은 우리가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해 바르게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청탁이나 개인적인 감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듣는대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의 삶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까 이젠 됐다'가 아닙니다. 그 이후의 삶은 우리가 예수를 알기 이전에 삶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주에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면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만 우리의 행위가 믿음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고, 여러 가지 엉뚱한 고민에 휩싸이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특히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정말 하나님이 계시느냐? 라고 말하면서 계시다면 계시다는 증거가 무엇이냐?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차라리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한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예수를 믿어왔다고 말하는 분들 중에 어의없게도 이런 질문을 툭 던지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질문들은 신앙의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현대신학자들의 질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유대인들이 품고있는 의문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라는 한 젊은 청년이 나타나더니 삼십팔년동안 병석에 누워있던 한 병자를 고쳐놓고 느닷없이 하는 말이 하나님을 두고서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자신도 이제까지 일한다'면서 안식일 날 일한 것에 대해 자기 변호를 스스럼없이 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함으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한마디로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안식일을 범하고도 참 메시야라고 주장할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아니 신성모독죄로 그를 차라리 죽여야겠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자신을 반대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주님은 분명한 자신의 모습을 밝히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참됨을 증거하기 위해 증거자료를 열심히 찾거나 밤잠을 설쳐가며 청문회 답변을 준비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에 대한 변론을 준비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됨은 이미 여러 사람들을 통해 증거되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 사람의 병역비리를 캐기 위해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비리의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고자 안달이고, 공격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방어할 수 있는 증거를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아마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증거를 찾고자 부산을 떨고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기가 자기를 증거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도 사실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할 뿐이며, 자기 방어를 해야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 대해 자기가 변호하고 방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1절과 32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지 않아도 자신을 증거하는 자가 있고, 그의 증거가 참되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증거하는 것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부풀리는 경향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자신에 대해 말하면 우리들이 하는 말은 '그 사람의 말은 반만 믿으면 된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 말은 허풍이 심한 사람들을 두고서 하는 말이지만 실상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정직하지도 않고, 편견을 버리지도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만약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스스로 증거하고 다니셨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 온 것임을 확신하고 계셨기 때문에 스스로 증거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보내신 이가 증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이 무엇으로 증거되어졌습니까?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랐던 제자들조차도 그분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온전히 주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단지 자신을 보내신 이의 말씀에 따라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자신을 보내신 그분이 자신을 증거하실 것임을 굳게 믿었고 그 증거야말로 그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참된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 이상으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더 분명히 증거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 사실에 대해 빌립보서에서 증거하기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사람과 사람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 나에게 그 일이 자꾸 불리한 쪽으로 작용되어지려 할 때 우리는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꾸 나를 증거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문제로부터 돌파구를 찾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다가 더욱 심각한 상태에 놓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차라리 방어를 위해 자신을 스스로 증거하기 보다는 그냥 참고 견디면서 언젠가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다보면 나에 대한 증거가 바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도 않고 손을 놓아버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나를 방어하기 위해, 나를 무조건 변호하다보면 오히려 나에게 더 나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참된 구원의 길이며 진리입니까? 그리고 참된 생명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실리심으로 그분을 증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굳이 증거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증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기 전에 다른 이들을 통해 이미 증거하신 바 있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세례요한입니다. 요한은 스스로 자신에 대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33절에 보면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시며 자기는 그분의 신들메도 감당키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요한이 말한 것에 대해 그가 진리에 대해 증거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진리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예수가 진리라는 사실을 이미 말씀하였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던 세례요한이 예수에 대해 '진리'라고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증거를 전적으로 요한에게 의지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래서 34절과 35절에 보면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고 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요한의 증거에 매이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과 예수님의 최종목적은 우리를 구원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이 증거하는 것을 귀담아 듣기만 했어도 결코 생명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리를 거스려 행동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진리를 거스려 행동하거나 말씀을 멀리했던 것은 아닙니다. 35절의 말씀처럼 그들이 일시적으로는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했었습니다. 하지만 듣기만 했지 그 진리를 붙들고 변화되기를 원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등불이었습니다. 요한의 말씀을 들을 때 십년묵은 체중이 쑥 내려가는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변화되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주에 다이어트에 대해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운동을 통해 체중을 줄이는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가능합니다. 그러나 줄어든 체중을 관리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들 염려하는 것이 요요현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요요현상이 일어나는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방심을 해서 운동을 적게 하거나 식사량이 늘어나면 요요현상이 일어날 확률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요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더 중요한 것은 식사패턴을 바꾸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대개 뚱뚱한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은 거의 동일합니다. 밀가루 음식에다 탄산음료, 커피, 육류, 등등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다이어트를 하고 난 다음에 아직도 체중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고민이 있습니다. 체중을 줄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좋아하는 음식이나 식생활은 여전히 과거에 몸이 비대했을 때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운동량이 조금이라도 줄고 식사량이 초과하면 여지없이 체중이 늘어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식생활을 개선하지 않고, 체중을 줄인 이후에도 체중이 많이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식사패턴을 유지한다면 요요현상이 일어날 확률이 거의 100%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학적인 근거를 가진 이론이 아니라 순전히 제 경험상 그렇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어쨌든 식생활의 변화가 없으면 다이어트는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제가 경험으로 얻은 결론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말씀을 듣고 기뻐하는 것으로도 안됩니다. 아무리 주일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그치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내 삶 속에 적용하여 구체적인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 이 부분에 대해 우리들에게 너무도 명쾌하게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고, 어떤 씨는 돌작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돌작밭에 떨어진 씨에 대한 해석을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자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씀을 기쁨으로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을 붙들고 견고하게 서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이 없으면 말씀을 들어도 진정으로 들은 것이 아니요, 내 귀에 들려져도 진정으로 듣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더구나 말씀을 듣고 기뻐했던 자들 중에 진리를 떠나는 자들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반문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오늘 이 말씀 속에 나타난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관해 듣는 것은 좋아했지만 진리로 변화되어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니 결국 진리로부터 그들이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요한은 타오르는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참 빛이요 진리되신 예수를 증거하는 자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붙들어야 할 뿐 아니라 진리가운데 거하며 진리로 변화되어지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의 증거보다 더 분명한 증거는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었습니다. 36절에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르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지금까지 행한 놀라운 일들이 결국은 인기에 영합하거나 세상적인 권세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38년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 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많은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로부터 시작을 해서 죽어가고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찾아가지 않고도 고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도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런 기적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예수께 주사 이르게 하신 역사로 이루어진 일들이었습니다.

    물론 이적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한 증거가 세례요한에 의한 간접증거보다 뛰어나다는 것일 뿐 이적이 믿음을 앞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번 낙도선교에서 사역자들의 활동은 이미 보고드린대로 교사팀은 여름성경학교를 열고 전도팀은 조별로 미리 할당해 둔 지역으로 가서 사영리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든 혹은 어른들이든 우리들이 목표하는 바는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 자신이 예수가 생명이며 진리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예수가 생명 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논리적으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하여 실망할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에 관한 것, 진리에 관한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는 자세가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순종해 본 사람은, 말씀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겨본 사람은, 주를 신뢰하며 그분께 자신을 의탁해 본 사람들은 굳이 어렵게 설명하지 않아도 압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잘 되지 않아도 분명한 확신이 그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왜 현대신학자들 사이에 종교다원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입니까? 논리적인 설명만 생각하고 그 말씀 앞에 순종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 앞에서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놓고 회개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조차도 대안 없는 비판을 가하며 진리에 대해 의심하는 말들을 일삼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말씀에 순종함 없이 그저 머리로 이해하고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앞에 순종해 본 사람들은 이 진리를 거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증거가 참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 앞에 의심나는 것이 있습니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순종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를 드려보시기 바랍니다. 진리가 내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이 내 안에서 꿈틀 꿈틀 거리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실 머리로 계산하며 믿는 신앙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고 용납되어지는 것을 가지고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은 온전한 신앙의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웃이 하는 행동을 보면 줬던 것도 도로 빼앗고 싶은 마음이 들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런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열에 하나를 떼어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살려면 힘이 있든지, 돈이 있든지 아니면 남보다 많이 배우든지, 그것도 아니면 처세술에 능하든지 그래야 이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지 어리버리하게 믿음하나 가지고 살아가겠다고 해서 누가 잘 봐줄 것도 아니고, 내 안에 생명이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막상 그 안을 들여다보면 시커먼 속 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말에 흔들리거나 현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진리는 증거되어졌고 그 진리를 붙들고 있는 자가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될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이 시간에 예배를 드리십니까? 복 받기 위해서입니까? 사업이 잘되고 형통하기 위해서입니까? 자녀들이 좋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정성을 쌓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해, 생명에 대해 하나님께서 증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분을 통해 얻는 기쁨과 감격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이 증거 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한 평생 진리이시며 생명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진리에 대한 증거를 붙들고 변화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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