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사명을 가지라! 2002-08-13 17:00:01 read : 250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창세기 12장 1-3절 // 2002-7-28
이미 두 시간에 걸쳐 청지기는 어떠한 사람이며, 청지기로써의 성도는 시간과 재능을 잘 관리함으로써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청지기로써 부르셨다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청지기로써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청지기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정말 평생에 걸쳐 '이것이 나의 사명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이 특히 '아직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나는 이 사명을 붙잡고 살겠습니다!'라고 결단할 수 있는, 그런 사명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왜, 우리는 평생 사명을 말해야 합니까?
오스 기니스(Os Guiness)라는 사람은 "소명(The Call)"이라는 책에서 평생 사명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에 응답하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존재이유이며 인간 존재 목적의 가장 고상한 근원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럼으로, 모든 인간은 두 종류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사는 사람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사명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하게 산 사람과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주어진 시간에 따라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에는 사명을 알고 그 사명대로 사는 사람을 보기가 점점 힘들 정도가 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왜 존재해야만 하는 지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장 1-3절 말씀을 통해서 온 인류가 가져야 평생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평생 사명이 무엇입니까? "축복의 근원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되 충만히 받지 못하면 복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충만히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양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복의 지속성을 의미합니다. 한번 받고 그만이면 헛일입니다. 지속적으로 받아 흘러넘쳐야 합니다. 작은 샘이 바다를 이루듯, 성도가 축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우상숭배가 득실거리는 세상 한 가운데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복의 근원으로써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양다리 걸치기식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 아닙니까?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떠나라"할 때 떠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둘째,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받은바 은혜를 나눠주어야 합니다. 받은바 은혜를 내 안에 가둬 두면 썩게 되어 있습니다. 내 안에 아집이 생깁니다. 교만이 생깁니다. 곳곳에 성도가 있어도 세상이 악해져만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받은 은혜를 흘러 보내지 못하니까, 그 영향력이 약해지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축복의 근원으로써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10절입니다. "10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가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믿음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명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습니다. 바로 여기에, 평생 사명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을 깨달은 사람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칩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롤랑 퀴볼러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은 많다. 그러나 그 많은 길을 다 가보기에는 생이 너무 짧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주어진 인생이 짧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사명을 깨닫고 살아가기만 하면, 아무리 짧은 인생을 산다 하더라도 그 인생은 귀한 인생이요, 그 누구보다 긴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2. 그렇다면, 내게 있어 무엇이 사명일 수 있습니까?
누구에게나 축복의 근원으로써 살아야 하는 사명은 있습니다. 단지, "어떻게 사는 것이 축복의 근원으로써 살아가는 것인가?"하는 문제만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명이 "이것입니다"라고 밝혀주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처한 곳에서 축복의 근원으로써의 삶을 살게 되는 순간 여러분의 존재 가치가 바뀌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J.M. Nouwe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새 이름을 주신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으며, 사울이 바울이 되었고, 시몬이 베드로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도 새 이름을 찾아야 한다. 그 새 이름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유한 사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존재 가치에 변화를 주기를 원하십니까? 한 층 더 높은 존재 가치를 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내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먼저, '내 삶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자문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살펴봅시다. 그에게 있어 삶의 중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족이었을까요? 아니면, 아버지에게 물려받을 유산이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고향 땅에서 친척들과 재미있게 삶을 보내면서 느끼는 행복감, 혹은 쾌락이었습니까? 적어도 아브라함의 삶의 중심에는 이러한 것들이 놓여져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 말씀을 들은 아브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4절 말씀을 보니까,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에 따르면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곳"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경력과 돈, 쾌락과 명성, 이러한 것들이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들이 하나님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그 다음으로는 "내 삶으로 어떠한 분야에 기여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에게는 베르톨도 지오바니(Bertoldo di Giovanni)라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베르톨도는 열 네 살인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재능을 보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고 싶으냐?" 미켈란젤로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그러자 베르톨도는 또 다시 물었습니다. "위대한 조각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가진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미켈란젤로가 대답하자, 베르톨도는 미켈란젤로를 향하여 "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먼저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 분명히 결정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미켈란젤로를 술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조각품이 있었습니다. 조각품을 본 미켈란젤로는 "선생님, 술집에 아름다운 조각이 있네요."라고 말했습니다. 베르톨도는 "아름답지만 조각가는 이 조각을 술집을 위해 사용했다"며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거대한 성당에 갔습니다. 그리고 성당 입구에 세워진 아름다운 조각상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르톨도가 미켈란젤로에게 물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저 술집 입구에 있는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같은 조각품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쓰였고, 다른 하나는 술 마시는 사람들의 쾌락을 위해 쓰였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어디에 쓰기를 원하느냐?" 미켈란젤로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쓰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는 곧 사명과 직결됩니다. 다시 말해, 은사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술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기여할 수 있습니다. 문학적인 재능이 있다면 그것으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습니까? 거기에 여러분의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무조건 맡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과 은사를 따라 일하십니다. 그럼으로, 성도는 자신의 재능과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고, 사용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삶을 통해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드러내는 메시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다윗은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무엇을 포기해야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부활이 있음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싶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에게 꿈을 주고, 절망하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고, 미워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이 땅의 것에 심취해 있는 사람에게 영원한 하늘나라의 비전을 전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말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무엇입니까? "복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돈 많은 것이 복이 아닙니다. 권력 있는 것도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 믿는 것-예수 믿는 것이 복입니다. 그럼으로, 성도는 예수 믿는 복을 전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권력입니까? 재산입니까? 아니면, 그 밖의 세상 것들입니까? 권력을 물려주어 보세요. 재산을 물려주어 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것 보시면 모르시겠습니까? 재산 물려주니까, 더 많은 유산을 차지하겠다고 싸우지 않습니까? 권력을 물려주려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과 싸움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내 자식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우리의 자녀들에게 예수 믿는 바른 믿음을 심어주지 않으면 재산도 권력도 소용없습니다. 권력 물려준다고 고마워할 것 같습니까? 재산 물려준다고 해서, "우리 부모님은 축복의 근원으로써의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믿음을 유산으로 남겨줄 때, 참된 축복의 근원으로써의 삶을 살 수 있게 됨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3. 그렇다면, 사명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⑴ 사명자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국제 투명성 기구가 2001년 6월에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부패지수는 조사 대상 91개국 중 세계 42위입니다. 정치계만을 놓고 말하기는 좀 뭐하지만, 사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때문에 정치계에 대해 불신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가 그토록 정치계를 불신하고 있는 것입니까? 국민들의 탓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정치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자신들이 이권만을 생각한 정치-물론, 정치인들은 자신들만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습니까? 정권 유지에만 관심 있지 민생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주일 설교 시간에는 정치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지만, 오늘만은 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정치인들은 자신이 먼저 헌신해야 함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헌신하지 않고는 사회개혁, 사회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사명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떠나라"할 때 떠났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 할 때, 바치려 했습니다. 내게는 힘들어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기득권마저 포기할 수 있는 것-그것이 참된 헌신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헌신하지 않는다면, 축복의 근원으로써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교회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하는 성도가 없으면 교회부흥도 없습니다. 선교회에서 "비록 내 힘은 미약하지만, 내 작은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지"하는 마음으로 헌신해 보세요. 교회학교에서는 "우리의 어린 아이들에게 바른 믿음을 키워주는 것은 미래의 하나님의 일꾼을 양육하는 일이지" 이런 마음으로 헌신해보세요. 성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노래는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찬양 때문에 기쁜 삶을 살고 있는 내 모습이 드러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라는 마음으로 헌신해보세요. 반드시 교회는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속회도 마찬가지요, 주차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본을 보이면서 헌신할 때, 우리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부흥의 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명자로써 헌신의 본을 보여 보세요. 헌신할 때, 나머지 인생은 주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시편 기자가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신다(시편 37:5)"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⑵ 사명자는 평생 배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성도로써 사명을 깨닫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정말로 어려운 것은 사명을 끝까지 완수해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목적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름대로 최고의 목적을 설정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목적을 이루며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최고의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선의 노력은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그것은 바로 배우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빌 게이츠(William H. Gates 혹은Bill Gates)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학습은 적응을 위한 최선의 대비책이다. 숙련된 기술에 대해 사회가 지불하는 보상액은 점점 올라갈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평생 동안 지적 관심을 유지하고 새로운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크게 쓰실 수 있도록 실력을 키우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실력은 학문적 지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사명자는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실력으로 승부했습니다. 그가 보여준 실력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믿음이라는 실력이었습니다. 믿음이라는 실력은 무엇입니까? 세상 방법대로 해서 성공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방법을 먼저 추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방법을 세상의 방법보다 앞세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가 세상의 방법대로 성공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누가 영광을 받습니까? 내가 영광을 받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으로 성도는 성공하고 나서도 자신이 영광 받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래, 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하게 된 거야!"라는 말을 들어야 진정한 성공을 거둔 사람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학문적 실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실력을 보여준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 학문적인 지식까지 더하셨습니다. 다니엘서 1장 17절입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성도 여러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 학문을 배워야 할 때, 그것이 이방 학문이라고 해서 게을리 했을까요? 신앙에만 의지한 채 넋 놓고 앉아 있었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학문을 쌓아갔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만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명자로써 성장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배우기를 힘쓰십시오. 특히, 이 자리에 있는 젊은이들은 더욱 배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받고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속된 말로 "멍청하다"는 말을 듣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가 탁월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믿음과 지식으로 탁월한 자녀가 되도록 양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⑶ 사명자는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비록 육신적으로는 연약한 존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명자로써, 더욱이 축복의 근원으로써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사명자에게 있어서 삶의 원칙은 말씀이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울 왕이 본래부터 악한 왕이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악한 왕이 되었던 것은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3절에서 사무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아무리 사울 왕이 베냐민 지파의 출신이라 할지라도 사울 왕에게는 적어도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이 사울 왕의 사명을 지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명자는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언제 자유함을 얻게 됩니까? 세상 지식이 충만할 때입니까? 진리이신 말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 말씀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연장을 항상 잘 수리해 두어야 한다. 쇠가 무딘데도 그 끝을 갈아 두지 않으면 그만큼 힘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기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이길 무기는 지식도 아닙니다. 경력도 아닙니다. 능력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정 리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청지기로써, 또 사명자로써 부르셨습니다.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십시오.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게 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삶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 고민하십시오. 그리고 그 일에 투자하십시오. 비록 어려운 순간이 놓여질지라도, 아브라함의 축복의 근원으로써의 삶을 살기 위해서 본토를 떠났던 것처럼, 과감히 사명에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배우기를 더디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자는 평생 배워야 합니다. 세상의 학문도 열심히 배워야 하겠지만, 말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도록 말씀의 깊이를 더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춘천중앙교회 온 성도들은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명자임을 깨닫고 자신의 사명에 헌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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