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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수이신 예수님
    2002-08-13 16:37:32   read : 2522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08-04 // 요4:1-26

    동물들의 지능이 어느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에 가장 근접한다고 하는 동물은 침팬지입니다.
    미국 오클라호마 대학의 한 연구팀이 동물의 지능 한계를 알아보기 위하여 열다섯살난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쳤습니다. 갖은 노력을 다해서 140개의 단어를 가르치고 이 단어들을 제 생각에 따라서 결합할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침팬지가 맨 처음으로 표현한 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Let me out." 나를 좀 놓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짐승도 갇혀있는 것, 잡혀있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러하거늘 하물며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자유가 서식하는 곳, 그 곳이 바로 우리의 고향 (B. 프랭크린)과 같기에,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패트릭 힐리)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유와 노예가 공존하지 않듯이(A.링컨) 우리는 죄의 종노릇을 하면서 참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실줄 믿습니다. 참 자유는 오직 예수의 진리와 영안에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도 보면 굉장히 자유함이 많습니다. 예수님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지만, 그래도 자유함을 볼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지만 기도하고 찬송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자유함이 참 부럽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를 만나 자유함을 얻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자유함은 생수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여인을 해갈시켜 주시고 생수를 주심으로 자유하게 하셨는지 말씀드리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생수이십니다.
    목 마른 사람이 생수를 마시면 갈증을 해결합니다. 목이 마르면 죽겠다 그렇습니다. 목말라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생수를 마시면 살 것 같다합니다. 영적으로 갈급한 인생들이 죽을것만 같다가도 예수님을 만나면 그 예수님 때문에 살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생수라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하셨습니다.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여인의 삶의 증거를 통해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본래 소외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할 정도로 자유하고 기쁨이 있는 사람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
    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이 여인이 제6시에 물을 길어 우물에 왔습니다. 유대인들의 제6시는 오늘의 정오 12시입니다. 낮12시는 날이 더운 시간입니다. 더구나 유대나라에서의 12시는 너무나 날이 더워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 당시 풍습으로는 저녁때에 부인들이 동이를 어깨에 메고 물길러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사람들이 모이는 시간을 피해서 나와 물을 긷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은 여성들이 많이 사회활동도 하고 여러 경로로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여 사회적인 지위 뿐 아니라 개인적인 능력도 남자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여인들은 일반적으로 이 우물가에서 서로의 정보를 나누며 교제를 했습니다. 이 여인은 이런 여인들의 축복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외면하기보다는 사람들에 의해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여인입니다.
    주님이 물을 달라 했을 때, 여인의 대답에서 잘 나타납니다.
    여자가 물을 길러 왔을 때 예수님은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했습니다.
    우물가에서 물긷는 여자에게 물 한 그릇 달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대부분의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물을 주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렇게 선뜻 물을 주지를 못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째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여러분, 이 말이 주는 어감이 어떠합니까?
    정말 자기는 사마리아인이기 때문에 유대인인 당신에게 물을 줄 수 없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겠습니까?
    유대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사람이라도 우물가에서 나그네가 물 한 그릇 달라 할 때 그냥 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여자는 일종의 시비를 건다고 할까요? 아니면 의아함일까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거룩한 사람들인데 어째서 사마리아인인 천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물 한 그릇 쉽게 선심 쓸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강팍해져 있습니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한탄과 마을에서의 소외감, 그리고 이 뜨거운 시간에 물을 길러 나아와야 하는 짜증이 이 대답 속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39절에 보면 이 여인은 더 이상 소외된 여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4: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놀라운 사실은 그 동리의 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여인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가 아닙니까? 이 변화는 생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생긴 결과입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기적은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흔히 기적이라고 하면 병을 고쳤다거나,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거나, 눈먼 맹인이 눈을 떳다거나...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은 지금처럼 무슨 이유에서든지.... 자기의 잘못이든지...세상이 나빠서든지...사람들을 만나기를 거절하고 혼자서 생활을 하며 비관을 하며 살던 사람이 변하여 감격하고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즐거워하고 자기가 경험한 좋은 것을 나눠주려고 한다는 것도 역시 기적중의 기적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변하면 세상도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 다니엘 디포(1660-1731)가 쓴 장편소설「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은유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우선 비극의 주인공이 된 크루소의 긍정적 사고는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무인도에 표류하여 홀로 사는 외로움이 있었으나 자연의 과일나무와 생선 등 굶지 않을 환경을 인해서 기뻐합니다. 옷이 없어도 되는 온화한 기후에 대해 감사합니다.
    무기가 없어 처음에는 두려웠으나 사나운 야수도 야만인도 그 섬에 있지 않음에 감사합니다. 대화할 상대가 없었으나 하나님과 얘기할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는 환경과 조건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자신이 변화될 때 이 세상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변하면 가정도 변하고 교회도 변하고 이 세상도 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으면 이렇게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짜증스러운 환경에 처하여 낙심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정말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게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우리 가슴을 주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할 때에 놀랍게도 우리 인생이 더 밝게 보여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변화된 그들의 삶은 당대의 기적이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람이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여인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불행한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그렇게 행복해하는 여인의 모습을 본적이 없다 할 정도의 모습을 사람들이 본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불행한 이 여인에게 어떻게 대하셨기에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러분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은 죽을 것 같다가 살 것처럼 되었습니까?
    예수님 만난 사람은 누구나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짜 변화되었는가?
    더 변화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이 힘써야 될 줄로 믿습니다.

    2. 생수이신 예수님은 무엇을 주셨습니까?
    예수님이 주신 생수는 과연 무엇인가? 어떤 것을 주었길래 이 여인이 변화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생수이신 예수님이 여인을 알아 주셨습니다.
    알아주심으로 생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알아 준다는 것은 기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어려서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수업중에 교무실에 가서 분필을 가져 오라는 심부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공부시간에 일어난다, 공부시간에 복도를 다닌다, 이건 있을수 없는 일 아닙니까? 문을 열고 나가며 으시대고 나갑니다. 선생님이 나를 인정했다. 이 때 선생님들이 많이 계신 교무실에 당당히 들어 갑니다. 그리고 교실에 와서도 당당합니다. 선생님이 알아준 것이 좋아서 말입니다. 지금도 누가 나를 알아 주면 좋은 것은 나이가 들어도 변할 수 없는 사실인가 봅니다. 반대로 누가 나를 무시하면 이보다 속상한 일이 없습니다.

    일본이 낳은 최고의 전도자요 저술가요 자선사업가인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를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첩인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본처의 집에서 말할 수 없는 구박과 천대와 멸시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지고 어두웠습니다.
    소년시절 어느 날 양지 바른 담장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매스꺼워 기침을 했더니 붉은 피가 올라왔습니다. 진단결과 몹쓸 전염병인 폐병 3기로 치료의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오후 햇빛을 받고 앉아 있었는데 북을 치며 찬송가를 부르면서 “예수를 믿으세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고 전도지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전도자를 붙들고
    “나 같이 가난하고 병들고 천한 기생의 자식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럼요!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는 그 순간 예수를 믿고 그 순간부터 기생의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세계의 전도자로 빈민들의 아버지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성자가 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성경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12)

    본문의 16-18절을 보세요.
    4: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4: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도다
    하는 말이 옳도다
    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인은 5명의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고 지금은 6번째 남편을 두고 있는 가련한 형편에 있다. 이런 상황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랑을 할 형편은 아닙니다. 부끄러운 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시간에 물을 길러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어떤 인격의 사람인가요?

    제가 어릴 때, 이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 있었던 것을 두고 남편을 다섯 갈아치운 것으로 설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 남자와 결혼하면 행복할까해서 결혼했는데 막상 하고 나니 거기 행복이 없어서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거기도 만족이 없어서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이러다 보니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고, 다섯 번 다 행복을 얻지 못해 이제는 결혼도 하지 아니하고 다른 남자와 살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이렇게 결혼하는 과정에서 얼굴 잘 생긴 남자와도 결혼해보고, 부자와도 결혼해보고, 이런 저런 사람 다 결혼해 보았지만 행복은 없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해석은 이야기로서는 재미가 있습니다만 현실성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부터 이천 년 전 세상인데 어느 나라 관습에 여자가 남자를 마음에 안 든다고 옷 갈아입듯 바꿔치울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이라면 구미에서는 혹 돈 많고 아름답고 거기에 도덕성이 별로 없는 여자라면 그런 일이 가능하겠지만 주님 당시 유대나라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관습에 의하면 이혼의 권한은 오직 남편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분명히 버림받았고 상처받았습니다.
    자신은 원치 아니했지만 부득이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 중의 몇 사람은 죽었기 때문에 헤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또 몇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결혼도 하지 아니하고 남편도 아닌 다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우물에서 뿐 아니라 온 마을에서 소외당한 사람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피곤한 삶을 마지못해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여인의 형편을 아신 예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하시고 있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남편이 다섯명이었고 지금도 한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면 이 사람과 계속 말하고 싶겠습니까?
    "참 당신은 남자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에게도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겠습니까? 그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는 위로를 한다해도 다시는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세상인심입니다.
    그래서 물을 길러 나오는 시간에는 사람을 가급적 만나지 않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증거하기를 예수님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4: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이 여인이 상대한 예수님은 보통사람과는 다른 신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라고 믿었고 그리스도라고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하나 주님이 자신을 알고 이해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허물을 아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
    남편이 다섯이나 되었던 허물이 많은 여인이라는 것...
    그리고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 못된다는 것... 이 여인의 허물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이 여인의 허물을 안다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 소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멀리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 때 주님은 뭐라고 가르치십니까? 그렇습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시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죄라고 시비를 걸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사람을 살리우기 보다는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사탄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가장 싫어했던 것은 교회를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생들은 모이면 온통 교회의 부정적인 얘기들만 합니다.
    대안을 찾는데 힘쓰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을 찾는데 너무 힘을 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문제를 나열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최선의 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못 찾아서, 비판이 없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찾고 그것을 위해 땀을 흘리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믿음 좋은 것, 영적인 것을 말로만 과시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무실역행을 주장했습니다.
    나라가 잘되려면 사람이 바로 되야 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책무 다하는 자로서(무), 실속 있게(실), 힘써서(역), 행하라(행)는 것이 무실역행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을 품을 때, 즉 탁상공론에 가까운 모습을 보일 때 선생님은 무실역행을 주장했습니다. 적을 욕하는 데에 시간을 쓰지 말고 힘써 나를 준비시키자는 것입니다. 누구나 문제를 보면 분노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파헤치는 것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노력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율법주의자들은 옳은 것이 무엇이냐에 관심을 지나치게 됩니다.
    그러나 옳은 것(what is right)이 반드시 선한 것(what is good)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문둥병자가 마을에 들어오면 돌을 던져 쫓아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옳은 일은 한 가련한 영혼을 파괴하는 악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옳은 일에만 관심을 가지면 반드시 이런 악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옳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말하자면 바리새인을 따를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옳은 태도를 가지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옳은 일에 사랑이 수반되지 않으면 혹독한 비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고 남의 것을 빼앗는데 마음을 쓰면 그 자신이 가난해지고,
    사랑이 있고 남에게 주는데 마음을 쓰면 우리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죄인까지도 살리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녀의 허물을 책망하거나 비판하지 않으십니다. 알면서도 어느 것 하나쯤은 말씀하실 만도 한데....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녀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계십니다. 이런 주님의 태도가 그녀의 마음 문을 열게 하고 자신의 고민, 즉 예배의 장소는 어디에 가야 하는가요? 라는 신앙적 질문을 할 수 있는 신뢰가 생긴 것입니다.

    이 여인은 생수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를 합니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다음 스스로의 고백했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그 분은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말했기에 그가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인은 예수님 자신의 모든 것을 알았을 때 처음에는 선지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분은 처음부터 나를 아셨습니다. 이 더러운 나를 알고도 만나주셨고, 대화해 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배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랑해주셨습니다.
    나의 이 처지를 알고도, 내 이 부끄러운 모습을 알고도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아무도 사랑해주지 아니 했는데, 아니 다른 사람은 나와 상종도 아니했는데, 그 분은 나를 만나주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여인의 상처가 치료됩니다. 여기서 여자가 메시야를 만납니다. 여기서 여자는 은혜의 생수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사랑 받고 싶은 것 아닙니까?
    내 단점도 내 거짓도 내 위선도 다 알면서도 나를 사랑해주는 그 분, 그 분을 만나고 싶은 것 아닙니까?
    그 분에게라면 온 마음 온 정성 다 비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모든 부끄러운 것을 다 알고도 사랑해주시는 그 분이 누구입니까? 그 진실을 다 아는 그가 누구이며, 그리고도 사랑해 줄 수 있는 분이 누구냐는 말입니다.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주님만이 내 이 모든 추한 허물을 덮어주시고 끝까지 나를 사랑해주십니다.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보십시오. 여자는 감격해서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뛰어 들어가서 온 동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더 이상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남편이 다섯이건, 여섯이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 모든 것을 아시는 메시야가 사랑으로 나를 만나주셨다는 사실 앞에 감격하여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은혜의 물결이 바다처럼 넘치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너무도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이것이 주님 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입니다.

    2) 예수님을 알아 갈 때 생수와 같은 만족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내게 생수가 되셨습니다. "나는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한번 먹은 물은 다시 찾지 않습니다. 그릇속에 없으니까, 하지만 샘의 물은 가서 푸면 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샘의 물을 한번만 마시는 것이 아니고 오늘도 마시고 내일도 마시고 모레도 마시고 샘물되신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기쁨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무엇보다 예수를 알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회를 너무 잘아는 것도, 목사님을 잘 아는 것도, 사람들을 많이 아는 것도 예수님을 아는 기쁨에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프랑스 어느 마을에 새로 부임한 목사가 교인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목사가 다녀간 후에 남편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내가 말했다.
    "오늘 새로 오신 목사님이 다녀가셨어요."
    "목사님이 뭐라 하셨는데?"
    "목사님은 제게 묻기를, `이 가정에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십니까?`
    하시는 거예요. 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이 말을 들은 남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그럼 당신은 우리가 점잖고 훌륭한 가문의 자손이라고 말하면 되잖아."
    "저도 처음엔 그러려고 했지만, 목사님이 물으신 것은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아, 그러면 우리 식구들은 매일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책을 읽고 있다고 그래야지."
    "그렇지만 여보, 그것도 목사님이 질문하신 것은 아니잖아요?"
    남편은 점점 더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당신은 우리 식구들이 매주일 항상 교회에 출석한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것도 목사님은 묻지 않으신걸 어떻해요. 단지 그 분은 그리스도께서
    여기 이 집에 거하시느냐고만 하셨단 말이에요."

    이 부부는 여러 날 동안이나 목사님이 하신 이 심상치 않은 물음의 의미가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부부는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되었고, 죽으신 분이 아니라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사랑이라든가 그 분의 영광의 신비의 놀라운 체험을 통하여 그 분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그 가정에 진정으로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주후 4세기 때 교계의 큰 지도자였던 성 어거스틴이 완숙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기 전의 일입니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자기가 죽어서 천국의 문앞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천국의 문지기가 어거스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어거스틴은 "나는 진실한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문지기가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당신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머리와 생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 키케로의 사상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것과 생각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판단합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어거스틴은 꿈에서 깬 후 굳게 결심했습니다.
    "나는 진짜 크리스천다와야 되겠다. 그런고로 나는 크리스천답게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에 전념하리라."

    초대교회때 사도들은 몇천 명이나 되는 성도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육신의 조건을 채워주려고 골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라파 유대인인 성도들은 자기 쪽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진 것에 대해 원망했습니다.
    사도들의 머리속은 예수님의 분부로 가득 차 있어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형제 자매의 육신을 보살피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변함없이 능력의 말씀을 외치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며 묵상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목회자와 전도자의 옳은 태도일 것입니다.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2-25)

    오늘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얼마나 아십니까? 예수님과 얼마나 가깝게 사십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알아갈 때 무엇보다 신앙과 함께 기쁨도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예수님에 대한 인식은 낯설고 교만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인 당신이 왜 나 같은 사마리아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가? 하는 저항감을 표시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겠다는 말에 이상한 남자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몇마디 더 이야기하는 가운데 발전하여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라고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보통사람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네 번째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메시야요 구원자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만나면 점점 신앙이 발전해야 합니다. 점점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인식이 깊어져야 합니다.
    결혼을 하는 신랑신부에게 왜 결혼을 하냐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합니다. 사랑이 뭔지 아십니까? 맞는말 같긴 합니다만, 이건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으로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사랑을 배워라... 사랑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궁무진한 진리 아닙니까? 계속 배워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계속 배워야 합니다. 더 배워야 합니다.

    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4: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스트로맨이라는 연구원이 교회를 드나드는 청년 7천 명을 대상으로 연구조사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 60% 이상이 선한 생활에 힘쓰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참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좋습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0% 이상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통계자료가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공로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공로주의를 배격하십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지혜는 무엇인가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절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인정하시는지 않으니까?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경건생활에 힘써도 내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기까지 헌신해도 자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드는 자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3. 생수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살자.
    생수의 은헤를 받은 사람으로 사는 것은
    1) 나를 알아주시는 예수님께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에 기쁨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할 때 흔히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얼마나 일을 많이 했나를 생각합니다. 실적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주님의 마음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주님은 한 사람의 변화된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마시는 생수입니다.
    4: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4: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
    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성에 갔을 때에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러 간 사이에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입니다.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4:29 내가 행한 모든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4: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여러분, 예수님의 양식과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배고파도 기쁨을 가지게 한 것이 무엇이냐, 여자가 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 자체보다는 일을 통해 나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주님의 마음을 알아가야 합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저 이 성가대 30년 했습니다." 30년 중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30년동안 봉사할수 있도록 생명을 지켜 주시고 믿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왜 일을 하느냐? 그 일을 통해 주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 속에 주님의 형상이 드러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에서 예수의 모습이 나타날 때 여러분은 생수의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얼마만큼 변화되었는 줄 아십니까?
    4: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여러분, 자세히 이 성경을 보시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이 얼마나 많이 변화가 되었고 그 변화된 모습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을때에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와 가지고 그 자리에 같이 있자 예수님이 이틀동안 유하시면서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분의 변화 뿐이 아니라 우리 존재까지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생수이신 예수님이 주시는 그 은혜, 나를 알아주신 그 사랑, 그리고 주님을 더 알아가면 알수록 주님이 깨닫게 하시는 은혜, 그 은혜를 가지고 생수를 받은 자처럼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 한 주간도 이 말씀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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