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예수님 2002-08-13 16:36:56 read : 2509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07-28 // 막5:25-34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로마의 황제가 유대의 랍비를 불러서 하는 말이 "랍비, 내가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는데...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한마디로 도둑일세.." 얼마나 화가 납니까?
"아니 무엇 때문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도둑이라는 말입니까?"
"성경을 보니 창세기에 아담이 잠든 사이에 그 몸의 갈비뼈를 훔쳐서 여자를 만들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도둑이지."
랍비가 뭐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그거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자의 갈비뼈루로 여자를 만든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제 밤에 우리집에 도둑이 들어서 제가 아끼던 은항아리를 훔쳐 갔습니다. 그런데 그 은항아리가 있던 자리에 금항아리를 놓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황제가 하는 말이,
"자네 횡재했구만! 은항아리보다 금항아리가 얼마난 비싼 건가! 그 도둑 정말 정신없는 도둑일세.." 그러니 랍비가 대답하길.."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황제님 말씀처럼 도둑이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도둑과도 같이 작은 갈비뼈 하나 가져가시고 혼자서는 부족해서 살수 없는 우리들을 위해서 배필로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말에 황제는 더 이상 하나님을 비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랍비에게는 분명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결과는 절대 축복이다.
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그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예수님은 사람들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한 불행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행복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사람들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불행을 바꾸어서 행복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혈루병을 앓는 여인의 불행은 무엇입니까?
25-26절 말씀을 보십시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
오늘 이 여인이 갖고 있는 불행은 적어도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사회적으로 여자를 무시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입니다.
요즘에 여자로 태어난 것이 불행이라고 하면 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2000년전.. 예수님 당시의 세상은 여자에 대하여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유명한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지금부터 200여년전에 여자에 대하여 아주 혹독한 평을 내렸습니다. "두통스런 물건 가운데 하나가 여자이며, 간혹 여자가 음악, 시, 미술 등에 대해 아는 체를 하는 수가 있는
데 이것은 그렇게 함으로 남자의 마음을 끌어 보려는 흉내에 불과하다"고 아주 혹독한 평을 내렸습니다.
예수님보다 350년 정도 더 앞서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는 신이 남자를 만들다가 실패한 졸작"이라고 얘기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100년 전 아니 50년 전만 해도 여자들이 남자들과 함께 앉아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식탁을 따로 차렸던 것을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이렇듯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사는 악한 세대에 여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개인적으로 건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여인은 혈루병자입니다.
`혈루증`이란 부인병으로 만성 자궁 출혈병입니다.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오는 불치의 병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내 몸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온다면... 그 자체로도 육체적으로 힘든 일일뿐더러 그렇게 나오는 피를 처리하는 일.. 생각만 해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 정상적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병은 건강만을 가져가 버린 것이 아니라 모든 좋은 것을 많이 빼앗
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많이 배웠다! 돈이 많다! 권세를 가졌다! 고 해도 병으로 고통받고 있고
건강을 잃어버리면 이 모든 것들이 귀하게 사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잠시동안 병원에 있었습니다. 이 병원의 환자는 침대 위에 누워있습니다. 간병인은 그 밑에 딱딱한 간이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딱딱한 간이 침대에 잠을 자는데, 잠이 옵니까? 얼마나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때는 왔습니다. 무슨 치료한다고, 간호사가 살짝 데려가는 겁니다. 그래서 와! 여기서 한번 자봐야지! 얼마나 환자 침대가 좋은지, 막 날아 갈 것 같아요. 그런데도 한시간도 못 되서 와서 또 깨우는 겁니다. 다시 내려가서 잠을 잘려니까, 참 힘들더라구요. 침대가 좋은 줄 그때 다시 한번 또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병실에 5년동안 그 침대에 누워계신 분이 있습니다. 얼마나 편하겠어요? 천만에, 편하기는커녕, 그는 너무나 힘들어 했습니다.
침대는 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누워있으면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불행입니다.
이 여인은 12년동안이나 고쳐지지 않는 병 때문에 얼마나 지쳤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26절에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사를 만나면 편안해 져야지, 왜 괴로움을 받겠냐..이겁니다.
병고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고 병이 고쳐지지 않는 것으로 인해
많은 절망감에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상상이 됩니다.
참 안됐다! 하는 측은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 이 여인을 보는 제 마음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종교적으로 버림받은 것입니다.
이 병은 종교 의식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종교국가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종교 의식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종교적으로 부정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이 여인이 만지는 사람이나 물건까지도 부정하게 여겨졌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제사장이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사랑도 없는 비정한 사람이라고, 그러나 사실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장의 일을 돕는 제사장들은 한 사람이 고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 두지파로 나뉘어지는 지파마다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데, 이들이 돌아가면서 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맡았습니다. 이 제사장은 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갔느냐? 제사 수행하러 간 것입니다.
그러다 만약에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죽었다. 시체다..그래서 만졌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정해졌는데, 제사 일을 수행할수 있습니까?
어떻게 부정한 사람이 제사일을 수행합니까? 못하는 겁니다.
레15:27에서 부정한 사람에 대하여 말하기를 "누구나 이런 것들에 닿으면 부정하다. 그는 옷을 빨고 물로 목욕을 하여야 한다". 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정이 완전해질때까지 며칠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의 사명수행을 못하는 것이지요.
요즘같은 시대에 목욕한다, 옷을 빤다, 그런 것은 쉬울 수 있지만은 이스라엘 같이.물이 귀한 나라에서 목욕한다, 옷을 빤다,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베데스다 연못 그러는데, 우리는 잉어가 다니는 연못, 천만에, 그거 아닙니다. 그건 저수지입니다. 비오는 것 받아서 일년 먹는 저수 탱크입니다. 그러니까, 이 제사장이 비정해서가 아니고, 이 부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로 하여금 제약을 줬느냐 말입니다.
이런 부정한 여인이 사람들 있는 곳에 간다는 것을 상상을 못합니다. 왜? 그 사람이 닿으면, 이 물건이 부정해 지는데, 내가 부정해 지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사람을 외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멸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혈루병은 이 여인을 개인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버림받게 했습니다.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불행은 예수님을 찾음으로 행복으로 바뀌어 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시작, 그리고 마지막 그것은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행 끝, 행복의 시작
오늘 성경 27-29절에 보세요.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여러분, 그의 옷에 손을 댔다. 이 여인은 부정한 여인입니다. 부정한 여인이 손을 대면, 손에 닿는 그 사람이나 물건도 부정해 진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부정한 여인이 주님을 만졌을 때에 주님은 어떻게 됐냐?
주님은 부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거룩한 사람도 만지면 부정해 지는데, 주님은 만지니까, 부정해 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여인의 부정이 정결이 되고 병이 고쳐지고, 그는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것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때부터 우리의 삶은 새로워 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화요일 상이 난 집이 있어 산소에 가기위해 자유로를 지나 갔습니다. 이 길의 거의 마지막에 가자 한 표지판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분단 끝, 통일 시작" 이 말은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 민족의 기대입니다 언제 될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통일을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나 여인의 혈루병이 고쳐지는 사건에서 볼 수 있는 분명한 영적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찾을 때...부정 끝, 정결 시작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여인처럼 여러분들도 주님을 만남으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혈루증 앓는 여인의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쩌면 제 이야기일수도 있고요, 여러분의 이야기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 지쳤습니다. 삶의 현실에 지쳤습니다. 이 현실적인 절박감과 계속성에 지쳤습니다. 인간의 도움에도 지쳤습니다. 믿었던 친구, 믿었던 직장, 믿었던 사람, 그런 것에 실망했고 지쳤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 시간 주님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어디 계셔요?"라고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은 바로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여기 있어!"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찾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군중들이 있습니다. 흥미거리로, 구경꾼으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고, 책잡으려고 따라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고, 남이 가니까 얼떨결에 따라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배고프니까 빵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따라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미없이, 목적도 없이 그냥 예수님 주변을 맴도는 군중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도 이 교회를 비롯해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 찬송을 들고 교회에 다녀올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아닌 군중으로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린 여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만나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입니다.
어떤 분은 "제가 주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하겠습니다." "돈을 벌어 봉사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바람직한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하기보다 앞서서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서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다윗은 전쟁에 나갈 때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이웃의 나라가 쳐들어 왔습니다. 이 전쟁을 해야 하나요 하지 말아야 하나요?" 아무리 급해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행동을 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행동하겠다. 내생각 경험 다급함 위치 이런것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반면에 많은 사람 중에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 된 사울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그 자신과 그의 가문이 다 망한 것은 바로 그 모든 일에 앞서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을 사람은 그 자신과...그 가문과 그 후손들이 수천대까지 복을 받았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복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어떻게 하루 일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어떻게 주의 일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중요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출애굽의 지도자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애굽의 권력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족을 위해 일을 했는데, 나이 40이 되어 왕궁의 교육도 받고, 젊음도 있고, 지식도 있고, 권력도 있고, 힘도 있고, 이만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려서부터 애굽사람에게 고난을 받는 동족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
그런 마음 가지고 살았습니다. 엄마도 그렇게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가 40세가 되어 자기의 지식과 힘 가지고 무엇인가 동족을 위해 해야 되겠다 했더니...자기의 의도와는 달리 살인자가 되어 애굽은 물론 동족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동족도 자기의 동족사랑의 마음을 알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광야에서 40년을 훈련시키시고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낮아지고 낮아지니까, 아무 것도 없어지니까. 하나님이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능력 주셨습니다. 나이 80세에, 인생의 말년에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만 승리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우리가 살아가면서 꿈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생명과 우리 가정을 지켜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미국에 갔을 때 한 가지 느낀 것은 행복은 이민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돈 때문에 이민을 갑니다. 그 이민은 실패합니다. 돈을 벌어도 실패입니다. 공부 때문에 갑니다. 실패합니다.
원래 미국의 조상들은 돈 벌려고 이민가지 않았습니다. 신앙 때문에, 잘 믿어보려고 이민 갔습니다. 그처럼 잘 믿으려고 이민 가면 몰라도 돈 많이 벌려고 이민 가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시애틀에 있는 샤론의 집, 먼저 그곳 여성들을 위한 쉼터를 시작했습니다.
외국인 남편과 사는게 얼마나 힘이 듭니다. 말을 하마디나 한국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문화적 차이, 때론 매도 맞고, 쫓겨나기도 하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시작한 것이 샤론의 집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교회라고 하는 곳이 예배는 드릴수 있고 사람들은 만날 수 있지만. 진짜 여러분 이곳에 와서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집 하나 세웠다가..나중에 한국의 여러 친구들이 모아서 집을 샀습니다. 교회가 그 일을 하고....그곳에서 하는 프로그램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성들의 친정집. 샤론의 집` 그저 친정에 온 것처럼 한국말 쓰고..늦게까지 자기도 하고. 그러나 한가지 하는 일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 보고, 어떤 사람은 일년쯤 있다가 가기도 하고, 그런데 하루 있든지, 이틀 있든지 그곳에서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가 있습니다.
그전엔 남편과 잘 사는 것 같아도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 만나니까, 힘을 얻고 그곳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조금이나마 샤론의 집 후원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청소년 센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습니다. 마굿간을 개조해서 겨울에도 와서 쓸수 있는 숙소도 되고. 청소년들 문제입니다. 공부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돈 안벌고 어찌 아이들 공부를 시키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이들은 학교갔다가 일찍 끝나고, 부모들은 늦게 돌아오고 그 3시부터 남는 시간에 그 아이들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엉뚱한데로 다니거든요.. 그러다가 마약하고, 술하고, 나쁜아이들과 몰려 다니다가, 그 아이들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런 일 감당 못하거든요. 그냥 데려다가 돌봐 주는 것입니다. 공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만나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 여기 엘림 미션센타가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만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가만히 보니까, 여기 엘림 미션센타에 외국인 근로자들이 와서 평소에 자기도 하고 쉬기도 하고, 목사님과 상담도 하고 그러더라구요. 쉼터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 5일 근무제가 되어서 한국교회 큰일이 났다 하고..세미나도 하고 발표도 하고 있습니다. 저번 유성전국집회에 가서 1시간 강의 했던 적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프로그램을 이야기합니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힘들거든요.
그 시간에 아이들을 맡겨야 하는데, 주5일제 되면 학교도 안하지요. 유치원도 안 할 것이지요. 하루 벌어 사는 사람들의 아이들을 누가 봐주겠습니까?
교회가 감당해야 합니다. 집회 시간에만 왔다가, 돌아가는 교회의 모습으로는 이런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늘 24시간 개방해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그래야 합니다. 여기가 쉼터가 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만나게 해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신문에 보니, 어느 교회에서는 주일날 노인들에게 1,000원씩 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이 온다고 합니다. 어느 성당에서는 300원씩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많이 온다고 합니다. 인터뷰하는데, 어느 할아버지가..." 이 300원으로 자식들에게 손벌리지 않고 담배라도 필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라고 합니다.
긍적적인 면에서 볼 때,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도 300원 주는데 줄을 서고 있습니다. 교회 와서 예배드린다. 사실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 만남을 통해서라도..하나님을 만나고 그들의 삶이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이 땅에서도 기도하며 땀을 흘리면 남부럽지 않게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날이 오면 반드시 축복의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회를 떠나면 어디로 가도 잘 사는 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잘 다녀도 흉년이 오고, 가난이 오고, 가난이 오고, 실패가 오고, 어려움도 오지만 그 자리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위로의 때를 기다리면, 그 때는 반드시 옵니다.
이 여인처럼 주님을 만남으로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는 역사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3.주님의 능력은 믿음의 행동하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을 찾은 여인은 "예수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냥 한번 예수님이 어떤 옷을 입으셨는지, 어떤 천으로 만든 옷인지 그것을 알기 위해 그냥 만져 본 것이 아닙니다.
28절에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믿음을 가지고 만진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손을 대니"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합토"라고 하는 단어를 씁니다. `합토`라는 말은 `그냥 손을 대었다`라고 했지만 지나치는 사람이 남의 옷에 슬쩍 스치는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합토는 잡다, 쥐다`라는 뜻으로 일부러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잡았다는 뜻입니다.
의도적으로 `내가 이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나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그런 믿음으로 만졌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막 10:46-52)하면서 소리 지르는 대신에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무릎꿇고 간구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옷자락에 믿음을 가지고 손을 대었습니다.
이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의도적으로, 일부러 잡았다"는 뜻입니다. "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내 모든 절망을 맡기고 잡으리라, 예수님이면 된다, 예수님이 내 희망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희망이다"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직접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기독교의 역사를 봐도 믿음으로· 기도함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한 믿음의 행위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일도 많습니다.
기적은 베풀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기적은 믿음으로 끌어내리는, 소망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믿음으로 손을 댄 여인은 순간 자신의 몸이 깨끗해짐을 깨달았습니다.
혈루의 근원이 다 말랐고, 자기도 ` 나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여인이 어떻게 나았다고 했습니까?
30절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예수님의 능력이 빠져나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여인의 열심이 예수님의 몸에 담겨 있는 능력을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은 내가 달라고 할 때에 비로소 준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준비된 능력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컵을 보세요 물이 가득차 있습니다. 조금만 흔들면 이 컵의 물이 나오지 않습니까? 주님의 능력은 이와 같습니다. 전기줄을 만지면 즉시 감전되는 것처럼.
이것은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께 구하기만 하면 예비된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믿음의 손짓으로, 여러분의 믿음의 기도로, 찬양으로 항상 예비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대로 순서대로 진행하다가 예배 마치고 돌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여인의 믿음의 행위는 결코 소극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매우 적극적입니다.
믿음의 행동이란?
1) 먼저, 주님의 소문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야 생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27절에 보면 "예수의 소문을 듣고"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막 1:21-28)
·문둥병자를 고치시고(막 1:40-45)
·중풍병자를 고치시고(막 2:1-12)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막 3:1-6)
· 바다를 잔잔케 하신 분(막 4:35-41)
이라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회당장 야이로의 요청에 의해 그의 병든 딸을 고치시러 가신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여인은 그 소식을 들으면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분이면 나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이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롬 10:17)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는 들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믿음으로 가득차시기를 바랍니다. 큰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여인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었던 얘기 그것을 들으면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로마서 10장 4절에 보면 "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 생깁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가장 큰 불행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소리는 지루하게 느끼고, 세상 소리에는 귀를 번쩍 뜨는 것이 불행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불만과 한을 쏟는 대상을 찾는 경향이 있는데, 요새는 정치인들이 그 좋은 대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모이면 정치 얘기뿐입니다.
이상하게 정치인들 욕하는 소리는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지루하게 듣지 않습니다. 마치 "정치인이 없으면 이 세상 재미없어 어떻게 살까!" 하는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는 물이 간 생선처럼 눈에 초점이 없어지다가 증권 얘기, 아파트 얘기, 정치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살아나니 이 무슨 조화입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 듣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축복은 말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살고,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사는 길은 복된 말씀을 듣는 데에 있습니다.
원래 터키 땅은 영적으로 축복을 많이 받은 땅이었습니다.
성경 신구약에서 중심지 역할을 한 곳으로, 예루살렘 못지 않은 성지가 터키입니다.
초대 교회 부흥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초대교회들이 터키 안에 있었고,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도 터키에 있었습니다. 그처럼 은혜가 넘치는 땅이요 초대교회 당시 가장 부흥하던 땅이 바로 터키였지만 그 복된 땅을 회교도가 점령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땅에 더 들리지 않으면서 지금은 과거의 영화를 거의 잃고, 가난과 지진만 연상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문화재도 엄청나게 많았지만 좋은 소식이 사라지니까 축복도 사라져버렸습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제일 문화적으로 자랑거리가 많은 나라가 어느 나라입니까? 옛 문명국이었던 이집트, 그리스, 터키, 인도, 중국 등에 문화재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옛날의 문명국이 지금은 세계에서 어떤 위치에 처해 있습니까? 좋은 문화재를 산더미같이 가지고 있으면서 지금은 얼마나 어렵게 삽니까?
우리는 이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을 알고 우리 삶의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추구하고 진리의 말씀 듣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의견부터 내세우려고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빳빳하게 서서 따지듯 말합니다.
그런 모습은 마치 하나님이 채무자요, 우리는 채권자인 것처럼 비추어집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다 설명해보세요"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말씀은 거부하고 자기 의견을 진리요 우상으로 삼겠다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순종하고 우리의 찬양받아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논리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말합니다. "잘 믿으면 복 받습니다"고 하면 어떤 분은 "기독교가 기복주의냐?"고 따집니다. "기도하면 된다"고 하면 "기도가 밥 먹여주냐! 땀이 필요하지!"라고 받아칩니다.
언뜻 생각하면 그렇게 논리적으로 잘 받아쳐야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면 하나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분이 잘 삽니다.
우리가 승리하며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아무리 바닥에 있는 인생도 반드시 축복된 길이 열릴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복된 존재가 되도록 하나님 말씀에 "예!" 하기를 원하십니다.
예배 참석 집회 참석 열심히 하십시오.
성경통신과 열심히 하십시오. 어느 교회 목사님 사모님이 오셔서 성경 더 많이 보라고 합니다. 자기 아들이 엄지 발가락에 혹같이 발가락이 계속 자라 나서 수술을 햇는데 계속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성경 통독 프로그램에 갔다 왔습니다. 일 주일 동안 갔다 왔는데 돌아오는 날, 그 혹이 싹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어떤분은 피곤해서 설교테이프를 통해 설교를 다시 듣습니다. 한번 듣고 두 번 듣고, 은혜를 받고 기뻐합니다. 설교 테이프를 갖고 가는 것이 이분의 낙인데, 요즘 자랑거리가 또 생겼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 설교테이프를 주니 잘 들었다고 인사를 하더니 다시는 오지 않더랍니다. 이처럼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는 이단도 접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안에 살지 않으니까, 이단들이 와서 못살게 구는 것입니다. 기독교 방송이나.극동방송 들어야 합니다. 엄마, 할머니가 아이들 잘 키운다고요? 옷 잘입히구, 기저귀 갈아주구? 그건 안 믿는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에게 말씀을 들려줘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의 삶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2) 열심있는 믿음의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남들보다 더 큰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사람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무릅쓰고 한 행위입니다.
"나는 부정합니다. 부정합니다. 물러서시오"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다녀야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이 사람들 틈에 끼어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발각이 되면 돌에 맞아 죽을수도 있는 행위입니다.
죽고 살기로 간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목사이며 찬송가 작가인 보너(Bonar Horotius 1808-1889)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천사가 보너의 신앙 열심을 저울질 한 후 100점이 된다고 하면서 그 열심을 분석해 주었다.
*이기심 때문에 나타내는 열심 14점
*파당적인 열심 15점
*명예 때문에 나타내는 열심 22점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나타내는 열심 23점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 26점
잠에서 깨어난 보너는 자신의 열심히 얼마나 인간적인 발상에서 우러난 것이었는가를 깊이 회개한 후 비로소 변화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니라"(롬10:2)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을 위해 봉사한다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상처받으면 얼마나 교회를 원망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열심은 있지만.. 우리의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주님을 쫓은 것은 아닌지. 진짜 주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3) 세 번째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능력으로 병이 나은 것을 간증했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향해 물었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절) "누가 내 옷을 만졌소. 누구요?"
야단치려고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누군지 알려고 물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만진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스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소. 믿음으로 내 옷을 만져서 내 능력을 빼앗아간 사람이 누구요. 내 능력을 가져간 사람이 누구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숨어 살 수밖에 없고, 사람들 틈에 감히 낄 수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할 수 없는 여인, 부끄러워 예수님 뒷편에 가서 살그머니 예수님 옷을 잡았던 여인을 예수님은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냥 내 버려 두면 어때서 찾으십니까?
로마서 10장 9-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스쳐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내 옷에 손을 대서 병이 깨끗함을 받았구나 라고 지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러 주셨습니다.
"누구요. 내 옷에 손을 댄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인은 자신이 은혜받은 자임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거를 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여인에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 여인의 행복이 시작이 됐음을 선언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주님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마귀의 팔복
1. 피곤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나의 가장 큰 일군이 될 것임이요.
2. 목사의 과오나 흠을 보고 트집을 잡는 자는 복이 있나니, 백날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할 것임이요.
3. 자기 교회이면서도 나오라고 나오라고 통 사정을 해야 나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교회 안에서 왕따가 될 것임이요.
4. 남의 말 옮기기를 좋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것임이요.
5. 걸핏하면 삐죽거리고 트집 잡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일년에 12번 교회를 옮겨 다닐 것이요.
6. 하나님의 일에 인색하고 자기는 헌금하지 않으면서 누구 십일조안한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가장 큰 친구가 될 것이요.
7. 성경 읽고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바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마침내 나의 조롱거리가 될 것임이요,
8.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자기의 형제와 이웃은 죽도록 미워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임이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이야기는 다른 것 아닙니다. 예수믿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증권, 아파트, 패션, 연속극, 이성 이야기..무슨 이런 이야기하는 사람이..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우리 교회 게시판에...재미있는 글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브라질 월드컵 우승에서
브라질 월드컵 우승에서,"Jesus loves you" 얽힌 사연~~!!!
지난 월드컵 우승에 브라질 선수들이 "Jesus loves you", "I belong to Jesus."라는 하얀 티를 입고, 기도하던 장면을 기억하시지요. 또 선수들이 매직으로 "Jesus 100%"라고 쓰기도 하고, 선수들과 스탭 전원이 센터 써클에서 무릎꿇고 손을 둥글게 잡고 기도하던 장면들....
우승한 브라질 팀의 믿음 퍼레이드의 사연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믿음과 월드컵 승리가 100% 연관있다고 생각하기보다 승리한 자들의 감사하는 모습이 아름답지요..그래서 올립니다. ^^)
1989년 브라질에 아주 유명한 카 레이스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아주 믿음이 좋은 신앙인이었답니다. 한번은 경주용 자동차 전체에 Jesus loves you! 라고 도색하고 출전을 하기도 했는데 신앙과 스포츠를 연계시킨다고 큰 논란이 사회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예수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후는 그는 은퇴하고 브라질 스포츠선교회를 결성했고 이후 각 종목 선수들을 위한 활동에 들어갔답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이분이 브라질 대표팀의 목사로 여정에 함께 하며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을 했는데 그 당시 대표팀 25명 중 12명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 결승전에서 맞붙은 이탈리아 팀과 승부차기를 했는데 이탈리아의 마지막 키커는 말총머리로 유명한 불교신자 바지오였고, 브라질 골키퍼는 이번에도 우승 후 골대에서 팔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기도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라질에선 불교도와 기독교도와 대결이라고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날 득점왕이고 베스트 선수였던 바지오는 골대 위로 킥을 차버렸고 브라질이 우승을 했습니다.
다시 4년후 프랑스 월드컵엔 목사의 월드컵 팀 수행을 못 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들의 반대로 무당이 같은 일을 수행했습니다. 결승전 전날 호나우두는 갑자기 발작을 시작했는데 다음 날 경기에 출전했지만 신문들은 평하기를 마치 호나우두는 귀신들린 것처럼 경기장을 뛰어다니기는 했지만 아무런 활약을 못했고 프랑스에 영패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4년이 지나고 2002 한일월드컵, 4년 전 무당을 보내서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번엔 목사님을 수행목사로 보내자고 제안! 94년 스포츠선교회 목사가 오게 되었습니다. 브라질 선수 중 5명은 아주 독실한 신자들이고 이들과 함께 기도하며 다른 선수들을 위해 기도하며 도왔는데 이 5명이 경기후 Jesus loves You! I belong to Jesus! 등의 셔츠를 입었고 글씨가 잘 보이지 않을 까봐 금메달을 뒤로 돌려버리기도 했습니다. 주장 카프가 컵을 받기 위해 높은 단 위로 올라갈 때 매직으로 100% Jesus!라고 쓴 옷을 입은 것을 온 세상 수십 억이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선수가 경기장 안 센터서클 원에 무릎 꿇고 기도하던 장면은 아주 충격이였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을 꼭 붙잡은 여인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 한마디가 무엇이길 바라십니까? 내가 아니라, 내자식 내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실 분이라는 것. 이것을 드러낼 때 .주님은 계속 새로운 은혜를 주십니다. 이 여인이 받았던 축복이 여러분의 축복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하나님 만나는 것 귀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이 한 주간도 이 여인처럼 열심있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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