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2002-09-28 22:29:21 read : 3889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고전10:31-33
눈이 가득 내린 날 학교 운동장에 세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누가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일직선으로 나란히 만들 수 있느냐 하는 시합을 벌였습니다.
첫번째 학생은 자기 발등만 내려다보고 똑바로 걸었지만 결과는 비뚤 빼뚤하였습니다.
두번째 학생은 첫 번째 학생이 발만 보고 가다가 비뚤게 가는 것을 보고 아예 눈을 감고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역시 방향을 제대로 못 잡고 엉망이 됐습니다.
세번째 학생이 나왔습니다. 그는 정면에 있는 소나무에 고정시킨 채 그대로 걸었습니다. 발자국은 나란히 곧게 뻗었습니다. 바로 이 학생이 1등을 하였습니다.
인생의 걸음도 목표가 정확해야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누구를 위해서 사는가?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사는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알면 하루하루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힘이 있고 똑바르게 살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사는 의미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우리가 사는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31)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연인을 노래하는데 있지도 않고 내 명성을 노래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게 하는데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보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요11:4).
죽을병에 걸린 이유가 슬픔과 절망 가운데서 살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은 물론 병든 자들을 보실 때도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할 존귀한 존재들로 보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보시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불행하게 살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각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에는 변화와 혁명이 일어납니다.
"나 같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니!" 삶의 보람과 감격과 기쁨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의 전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데 두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산다는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생각에 사로잡혀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음악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가정 일을 하든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을까?
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좋아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
자기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생애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입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기쁨을 받으며 사는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를 기쁘시게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사랑하심과 축복하심을 받으며 사는 존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이전까지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이제는 버리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인생관을 정립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말은 '인생의 모델이 바뀌어졌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세상에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내 모델이었다면
이제는 예수님이 내 인생의 새로운 모델이 된 것입니다.
전에는 사람을 믿고 사람의 힘을 의지하여 살아 왔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만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모델이 마음에 안들면 바꾸듯이 우리 인생의 모델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모델로 교체된 것입니다.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무엇보다 모델을 잘 선정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성공하려면 모델이 제대로 선정되어야 합니다.
실패한 인생을 모델로 삼고 살면서 성공을 바라고, 미래가 없는 모델을 바라보면서 미래를 꿈꾼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았고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자녀들에게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에게 나중에 커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의 부모님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만든 사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상실하면 자연히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이크의 존재 목적은 저의 음성을 담아서 여러분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입니다.
마이크가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여기에 둘 필요가 없습니다.
꽃은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하여 만들어 진 것입니다.
자동차는 사람을 태우고 달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목사는 목사로서 선생님은 선생으로서 목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들로서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자식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마땅히 늙은 부모를 모시는 효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면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일본에 우찌므라 간조는 말하기를
"사람이 실패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1) 죄로부터 자유를 주셨습니다.
요한 1서 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자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사도바울은 옥중에서도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었다. 우리의 몸은 묶어 둘 수 있으나 영혼은 자유로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다.
2) 죽음으로부터 자유 -
사람은 죽는다는 것 만큼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는 순간에 다시 새로운 영생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주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유함을 얻었으니 이제 우리가 자유의 몸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전에는 나를 위해 살았으나 이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을 말한다.
오늘 바울이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영광을 드리는 삶이란
① 먹는 일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인생은 먹어야 삽니다. 어떤 분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사는등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서 무슨 직종에서든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추어서 일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도 사업을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장을 볼 때도 운전을 할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② 마시는 일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식후에 여유가 생김으로 자연스럽게 마시는 것을 찾습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등 악한 것에 취하지 말고 마시는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시는 것입니다.
둘째: 당신은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32)
초등학교에서 운동회를 할 때 달리기를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달리다가 작은 돌을 미쳐 보지 못하여 돌에 걸려 넘어지고 손과 발에 큰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달리기 할 때는 달리는 길에 거치는 돌이 있는지를 잘 살펴 보아야합니다.
이와 같이 거치는 돌은 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고 사회에도 있습니다
주님이 세우신 가정과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어서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① 유대인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율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율법을 무시함으로서 유대인에게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② 헬라인에게도 거치지 맙시다. 헬라인은 지혜자들입니다.
우리가 지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혜를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16)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일을 지혜롭게 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교회에서 거치는 자가 되지 맙시다.
어느 목사님이 '힘 빼! 신앙'을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악기 연주를 익히는 일이나 새로운 운동을 배우는 첫 걸음은 힘을 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치려면 손가락에서 힘을 빼야하고, 테니스나 골프를 배우려면 어깨와 팔에서 힘을 빼야하고 수영을 시작하려면 몸에서 힘을 빼고 물에다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의 일도 자신이 할 수 있다고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자기 힘일 다 빠질 때 건져서 사용하십니다.
모세가 40세에 자기 권세와 지식과 젊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하고자 했으나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광야로 피신 시켜 40년을 더 힘을 뺐습니다.
80 노인으로 늙어서 아무 힘이 없을 때 그를 붙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애굽의 바로를 꺾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주님을 좇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무엇이 된 것처럼 여길 때는 사용하시지 않고 자기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것임을 깨달을 때 사용하십니다.
김장 할 때 배추도 소금에 절여 풀이 푹 죽어야 간 도배고 맛도 드는 것처럼, 자기가 죽어야 예수님의 맛도 향기도 능력도 우리 인간에게 스며들어 하나님이 마음놓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힘을 줌으로서 주변 사람들에 거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깨에 힘을 빼고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문해 봐야 합니다
"나는 거침돌인가? 아니면 디딤돌인가?"
나를 가리켜 주위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한 사람을 세우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많은 희생과 인내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허물어뜨리는 일은 너무나 쉽습니다. 상처를 주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쉽게 허물어뜨릴 수 있습니다.
셋째: 당신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뻐게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33)
하나님의 자녀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가 상대방을 세우는 일을 하려면 나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면서 살겠다고 작정해야만 합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모임 속에서 상대방의 유익과 기쁨을 구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세우는 일에 크게 쓰임을 받게 되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람들을 세우고, 무엇으로 사람들을 허물어뜨리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한 사람에게 큰 격려와 힘을 줄 수도 있고, 엄청난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상시 나의 말로 인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세움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상처를 받고 있는지를 관심있게 살펴봐야 합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생활 습관이 되도록 합시다.
뉴욕 전화국에서 사람들이 어떤 말을 제일 많이 쓰는가 조사를 해 보았더니 나라는 말을 제일 많이 쓰더라고 합니다.
5000번의 대화 중에 40000번이 나에 대한 이야기더라고 합니다.
대부분 현대인들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기만의 유익을 구하는 자는 개인주의자요 이기주의자입니다.
내가 아니고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면 그 인생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입니다.
남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남을 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한 번도 자신의 주장을 하나님 앞에서 내세우거나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한 희생, 철저한 헌신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다 버리셨습니다. 하늘의 보좌도 버리셨고, 육체도 버리셨고,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저주의 가시관을 쓰셨고, 고통의 채찍을 맞으셨고, 온갖 욕설과 수치와 조롱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버리려야 버릴 것이 없는 지경에까지 가서 사형 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전 인생은 이렇게 타인을 위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다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요, 제자는 스승을 본받는 자들을 말합니다.
내가 아니고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면 그 인생은 진정으로 가치있는 인생입니다.
복음은 최고의 기쁨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예수를 만남으로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도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고전 9:19-22절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했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바로 이런 자세입니다.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내가 그 사람을 위해 사랑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을 때 오는 감격은 세상에 그 어떤 것에 비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제
1)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받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의 몸된 교회에 거치는 인생이 되지 말고 디딤돌 같은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3) 우리는 내 유익보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처음 예수 믿었을 때 작정하고 결심하였던 그 약속과 믿음을 변개치 마십시오. 절대로 중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유혹이 밀려오고 핍박이 와도 오직 예수님만 믿고 끝까지 인내하십시오, 승리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여러분, 고지를 눈앞에 두고 정복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삶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한 걸음만 더 가면 승리가 있는데, 거기까지 기를 쓰고 와 놓고는 바로 눈앞에 있는 승리를 포기하면 되겠습니까?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앞의 시험, 눈앞의 유혹만 이기면 곧바로 승리의 기회가 있는데 그걸 견디지 못하고 마음을 바꾼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모습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인생의 모델로 삼고 예수를 닮으면서 살겠노라고 하는 처음의 그 결심이 언제까지라도 변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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