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2002-09-16 15:00:58 read : 2622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출애굽기 1:8-2:10) // 2002년 8월 25일
오늘 읽은 본문은 유명한 모세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애굽(이집트)을 다스리게 되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백성들보다 많아진 것을 걱정한 나머지, 이스라엘 자손에게 혹독하게 강제 노동을 시켜서 그들을 억압했습니다. 그런데, 억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더욱 불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몹시 싫어하였고, 더욱 혹독하게 그들을 부렸습니다. 이집트인들은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이나 밭일과 같은 온갖 고된 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은 사는 게 매우 힘들었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이집트 왕 바로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아주 잔혹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만약 히브리 여인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주게 될 때 그 아이가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살려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아이들을 살려 두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출애굽기 1장 17절에 나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집트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여기 이 말씀을 우리가 잘 보아야 합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그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1:21에 보면,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라고 했습니다. 그 산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나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아기들의 생명을 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 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남자아이들을 그 산파들이 살려두자, 왕이 그들을 불려서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 "왜 남자아이들을 살려 두었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아주 지혜로운 대답을 했습니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애굽)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이를 낳아버립니다"(출 1:19). 하나님이 그런 지혜를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결국 이 산파들로 인해 아기 모세도 생명을 건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세의 생명을 살린 이들이 다 여성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모세의 누이 미리암, 산파(産婆)들, 또 목욕하다가 모세를 담은 갈대상자를 건져 온 바로의 공주의 시녀(侍女)들, 그리고 그 아기를 자기 아들로 삼은 공주 등. 이것은 심리학적(心理學的)으로 볼 때, "여성적 원리"(女性的 原理; feminine principle)가 생명을 구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오늘 여성적 원리에 대해 얘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것에 관심을 두고 함께 그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씀은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신명기 10:12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했습니다. 또 욥기 1:1에는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욥의 인물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병(時代病)이 있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병든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무관심과 무감각입니다.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어떠한 자극이 와도 감각이 없다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단단히 병이 든 것입니다. 특히 영적으로 병든 현대인의 모습은 영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이 그 주 증상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섬기는 것이 진정 신앙적인 삶인데, 현대인은 이것을 상실했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악을 행하여도 양심에 가책이 전혀 없다면 큰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 일부러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이집트의 왕 바로는 악의 화신(化身) 같이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악을 행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의 아기가 태어날 때, 남자아이면 무조건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볼 때, 그는 무척 잔인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바로"라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바로가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포악(暴惡)한 힘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남을 혹독하게 괴롭히고, 부자유하게 하는 악한 성향(性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죽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심리학자 칼 융은 "그림자(shadow)"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한 세력에 눌려서 살지 않고, 이러한 것들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사로잡혀 있으면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해방되려면 우선 이러한 것이 우리 안에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동시에 날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1절 말씀을 한 번 봅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고 했습니다. 새번역으로 이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5:22)고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던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作家)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 말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떨까요? 그런 사람은 아무 일이라도 마구 행합니다. 자기 욕구에 따라서 무슨 일이든지 다 합니다. 그래도 아무런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실수로 잘못을 저지르고 나면 매우 괴로워하고, 또 그 잘못한 것을 심히 뉘우칩니다. 이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과 전혀 다른 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양심에 찔림을 받고, 괴로워하게 되면, 아직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서서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신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서 끝나지 말고, 자녀 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있어서 아들이나 딸이 그 아버지를 두려워하기만 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좋은 관계가 아닙니다. 물론 아버지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요즘에 많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존경하고 좋아하면서, 또한 그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감리교 신학대학 학장을 지내신 윤 성범 박사는 그의 책,『효』에서 예수님을 효자(孝子)라고 하면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부자유친(父子有親)의 관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허물없이 친한 관계라는 뜻도 됩니다. 그런데 좀 더 나아가서 이것은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리고,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자식이 할 일임을 얘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과 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에베소서 4:30에 보면 아주 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근심하지 않게 해 드리는 것을 넘어서서 성령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이게 신자(信者)의 삶이어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5:9에 보면, "우리가 몸 안에 머물러 있든지 몸을 떠나 있든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항상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생각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7장에 보면,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 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32-34)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옳은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과연 주님을 얼마나 기쁘게 해 드렸는가" 생각해 보니,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애를 씁니다. 또 우리는 아내나 남편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남편이 어떤 경우에는 자기 아내 생일에 장미꽃을 수북하게 주문하기도 하고, 설거지를 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별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오직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썼던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말을 들어 봅시다.
나는 주께 몸을 바친다고 하여도 그래도 부족한 것밖에 없습니다. 몸이 열 개가 있으면 그것을 다 주께 드리어 주님을 기쁘시게 만 하고 싶습니다. 나는 오래 살지를 원치 않습니다. 하루라도 온전히 주의 뜻대로만 살면 그것이 나에게는 큰복이요, 영광입니다.
3.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랑하며 삽니다.
본문 6절을 봅시다.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겼다"는 말이 나옵니다. 에베소서 4:32에도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라는 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기 모세가 갈대상자 안에 담겨져서 나일강에 띄워졌는데 그것을 목욕을 하던 바로의 딸이 보고, 갈대 상자 안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불쌍히 여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녀가 잔혹한 마음을 가진 이집트 왕의 딸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약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아기가 히브리인의 아기인줄 알면서도 강에서 건져서 자기 아들로 삼은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의 공주가 건져낸 것이 모세입니다. 이 사건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자기 아버지가 히브리인의 남자 아기는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때였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면서도, 그 아기를 자기 아들로 삼은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왕의 딸이지만 왕의 명령을 어기면 자기에게 큰 해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아이(모세)를 자기 아들로 키웠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속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마음에 감화감동(感化感動)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은 원래 불교 용어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에서도 이 말을 씁니다. 사실 좋은 말입니다. 좋은 말은 같이 써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서 "자비(慈悲)"라고 할 때 "자(慈)"자는 "사랑"이라는 말이고, "비(悲)"자는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자비"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신명기 4:31에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烈祖)에게 맹세하신 언약 을 잊지 아니하시리라"고 했고, 시편 103:8에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비라는 말은 "사랑하는 것"과 "불쌍히 여기는 것"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36에 보면,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