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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2002-09-16 14:44:00   read : 2892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년 9월 1일 // 누가복음 10 : 25-28


    눅 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저는 일곱살 때 가족과 함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중동지방으로 나갔습니다. 그 후 한번도 한국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중동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했고, 저희 가족은 인도네시아 필립핀으로, 또 브라질로 다녔지만 안정하지 못한 채 결국 최후의 장소라고들 말하는 파라과이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1등을 해서 장학금을 타지 않으면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기에 열심히 공부했고, 아순시온 국립의과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공부해야 하는데 늘 제시간에 불이 꺼지는 기숙사에서 불이 켜진 곳을 찾다가 시체실은 언제나 불이 켜져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그 시체실에서 공부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생명이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절하게 깨닫게 하는 장소가 바로 시체실이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조그마한 미생물이라도 움직이는 것을 보며 시작된 생명의 신비에 대한 의문은, 결국엔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했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의 일입니다. 의과대학이 마지막 구두시험이었는데 교수들이 그 때까지 배운 것 중에서 질문을 하는 가장 어려운 시험 시간이었습니다. 시험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도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네가 지금까지 공부한 과정을 잘 안다. 그러니 길게 말고 딱 한 문제로 승부를 짓자.' 그 때 저는 이 학교에서 마지막 수석은 내게 주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왜냐면 파라과이에서 한국인은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의 부류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아르헨티나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사귀기 싫은 민족 1위가 한국이었고 그것은 브라질에서도 파라과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껏 수석을 주었지만 졸업시험에서만큼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한국인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 대답을 못하면 영점이 되니 문제를 하나만 내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도교수님은 그곳의 여러 교수님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인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집 앞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채소가게가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문을 열고 노래를 부르면서 가게 물건들을 아름답게 진열합니다. 가게에 갖다 놓은 물건을 늘 정성스럽게 골라와서 그 집 채소는 언제나 싱싱한 최상품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 집 채소라면 누구든지 의심하지 않고 기분 좋게 삽니다. 그런데 하나 더 귀한 것은 주일이면 그들은 정장을 하고 교회를 가서 저녁이면 기쁘게 찬송을 하고 돌아옵니다. 그들을 보면 이것이 천국이 아닌 가 할 정도로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얘기를 마친 교수님은 쉬운 문제를 냈고 저는 수석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나쁜 이미지 때문에 저는 파라과이의 어떤 병원에서도 인턴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언어권인 스페인 국립대학에 인턴으로 가게 되었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박사학위까지 모든 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파라과이로 돌아왔지만 어디서도 저를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마침 외국인이 경영하는 카톨릭 의과대학에서 저를 초청해서 외과 교수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제는 부회장으로 승진했습니다. 명성을 얻자 주변의 사람들, 특히 동창들이 저와 동업하지는 제의를 합니다. 학교를 은퇴하면 가난한 교수 연금만으로 살수 없으니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하며 자신들의 병원에 오면 이런 저런 대우를 해주겠다고 하고 부자들은 병원을 지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가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제가 가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제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의사로 만드신 것은 돈을 벌게 하려는게 아닌 사람을 고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돈이 없는 인도오들에게도 혜택을 줄 수 있는 병원이 바로 카톨릭 의과대학 병원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이 생기면 몰라도 저는 돈 때문에 움직이지 않습니다.

    두번째로 저는 한국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이 이 땅에서 이기적이고 얄미운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오래 전 졸업시험이 있던 날, 저는 저희 지도교수님 이웃에서 채소가게를 했던 아름다운 한국인으로 인해 큰 덕을 보았습니다. 한국인들에 대한 평판이 나쁜 남아메리카에서 저라도 바로 서 있으면 제가 모르는 누군가가 혜택을 볼 것입니다. 저는 바로 섰던 한국인들이 있었기에 덕을 본 사람이고, 그래서 빚진 사람입니다. 제게는 이 빚을 갚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한국인으로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지난 8월 남미 해외 한국 유학생 전도 집회시간에 간증한 어느 청년의사의 간증입니다. 저는 문서를 통해서 이 간증을 들었지만 여러 가지 도전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제 안에 들려오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능력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많은 성경 지식을 아는 것일까? 어떤 직분을 얻은 것일까? 무슨 신앙적인 활동일까? 어떤 기적을 행하는 은사일까?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 하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능력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한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바로 삶입니다. 말씀과 일치되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준행하며 순종하는 삶이 곧 능력입니다.

    불신자의 유일한 성경책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불신자들은 성도들의 삶을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꼼꼼히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성도들이 불신자들에게 그렇게 큰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80이 넘은 고령의 할아버지께서 평생을 모은 돈 200여 억 원을 KBS 방송국에 기탁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건을 보며 저는 두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첫번 째 생각은 그 팔순의 노인은 과연 그리스도인일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결단을 하였다면 저 노인이야말로 참 지혜로운 분이시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인이 아닌 분으로서 그런 기탁을 하였다면 무엇이 저분으로 하여금 그러한 결단을 하게 하였다는 말인가? 우리 그리스도인을 부끄럽게 하는 행위가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하나의 생각은 만약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왜 교회가 아닌 방송국에 기탁을 하였을까? 교회와 선교단체와 사회복지 시설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그분은 그곳이 아닌 방송국에 보냈을까? 신, 불신을 떠나서라도 교회가 교회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면 혹시 교회에 보내지지 않았을까?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교리도 있고 고백도 있고 탁월한 지식은 있는데 삶이 연출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어서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전도와 선교의 열매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이 없는 지식, 삶이 없는 신앙생활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어느 날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에 대해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주님으로부터 답을 얻기 위해 질문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질문의 목적은 하나, 주님께서 무엇이라 답하시든 간에 그 대답을 빌미로 주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의 대답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 말씀으로 꼬투리 삼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악함을 모를 리 없는 예수님께서 오히려 그에게 반문을 합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이 말씀은 말하자면 이런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넌 자신 만만한 율법사가 아니냐? 너 스스로 율법에 통달한 자라면서? 그렇다면 네 자신이 이미 답변을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냐? 그것을 말해보지 않겠니? 이에 율법사는 주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자신 만만하게 대답하였습니다.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것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모범답안이었습니다. 율법사는 구약의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과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을 토씨하나 빠짐없이 그대로 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그는 율법사로 불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예수님 차례입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올 답변을 기다리면서 예수님을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모범 답안이 예수님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율법사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율법사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만큼 안다는 것을 과시한 반면,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짧은 대화를 통해서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웅변적인 메씨지가 무엇입니까? '믿음은 앎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하고 하는 메씨지를 들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통달하였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행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자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형식주의에 빠져 있는 율법사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신 분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온전한 삶을 이루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말씀의 인격화, 말씀의 생활화가 100%이루어진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만약에 몸소 행하지 않으시고 말씀만 가르치셨다면 그 말씀은 하나의 교리나 관념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될 수 있으며, 살리는 영일 수 있는가? 그 말씀이 곧 삶이고,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신기함을 느꼈습니다. 전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권세 있는 자와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목소리가 커서가 아닙니다. 어렵고 딱딱한 말을 사용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얼마나 부드럽고 조용하게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쉽고 평이한 말씀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이 그렇게 지식이 많고 공부를 많이 하고 율법에 통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지 않고 권세 있는 자의 교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삶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전혀 차이가 없이 완벽한 일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설교하는 목사가 설교처럼 산다면 얼마나 존경받는 목사이겠습니까? 기도하는 성도가 기도처럼 산다면 그 성도는 얼마나 아름다운 성도가 되겠습니까? 성도들이 고백하고 말하는 대로 산다면 그 성도가 있는 교회는 정말 능력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점이 바로 말씀을 전하는 대로, 기도하는 대로, 고백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율법사나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 쉽게 말해 위선자라 부르셨습니다. 겉 다르고 속이 다른 그들의 이중성을 꿰뚫어 보신 까닭이었습니다. 이 단어가 헬라어로 '휘포크리테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본래 배우를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당시엔 인쇄술이 보급되기 전이어서 일반인들은 고전작품을 극장에서 배우의 대사를 통해서만 감상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일반인들에게 배우란 모두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말하지만 '휘포크리테스' 란 호칭 자체는 전혀 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똑같은 단어를 '위선자'란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크리스쳔은 배우가 아닙니다.

    배우는 자신이 외운 대사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대사대로 살아야 할 의무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의 대사는 무대의 막이 내리는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그러나 크리스쳔은 배우가 아닙니다. 크리스쳔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크리스쳔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읆기만 하고 삶으로 실행하려 하지는 않는다면, 그는 배우일 수 있으나 하나님을 믿는 신자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배우란-휘포크리테스란 결코 칭찬의 말이 아니라 그것은 위선자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거룩한 결단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읆기만 하는 배우가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크리스쳔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능력이 있고, 교회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능력 있는 크리스쳔의 삶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말씀과 삶이 다른 이중적 삶이 아니라 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권세 있는 삶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과 접촉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이 그렇게 권세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성부하나님과 접촉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 :19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그를 보내신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뜻하시고 보여주신 것에 온전히 충실하게 사역을 하셨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었고, 예수님의 사역은 역사가 일어났고, 예수님의 기도는 완전한 응답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과 삶이 일치되는 권세의 삶, 능력 있는 크리스쳔의 삶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도 철저하게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에게 접촉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을 때 우리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주님과 내가 연합되어 일체가 되어 있을 때 진정한 크리스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연합되어 있는 사람, 주님 안에 거하여 있는 성도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자발적으로 순종합니다. 순종의 행복을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되풀이하고 있는데도 아무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많은 활동을 하는데 기쁨이 없고, 열매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하나님과 접촉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의 많은 프로그램은 여러분의 방을 통과하고 있지만 텔레비전 채널이 거기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프로그램을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많은 활동을 하고, 선교사업을 하고, 성경공부를 한다고 할지라도 전인격적으로 주님 안에 접촉되어 있지 않으면 능력 있는 삶은 연출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접촉되어 있기 위해서 시급하게 회복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묵상의 삶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음성으로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도에 대한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기도는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조용하게 되어서 결국 기도는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은 모든 열매맺는 사역,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전주곡입니다. 저는 하루일과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은 홀로 있는 시간입니다. 홀로 있으면서 기도하는 시간, 묵상하는 시간, 독서를 하다가 진리를 깨닫는 그 시간입니다.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인 수원지인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께서 흘려주시는 생명수를 공급받음으로 우리의 말이 헤프지 않고, 우리의 행동이 조급하지 않고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권세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을 뒤흔드는 기도'라는 책을 써서 많은 성도들에게 믿음의 용기를 주고 있는 미국의 론멜 목사님이 게십니다. 이분은 백혈병에 걸려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불가능하다는 눈빛이었습니다. '과연 내가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올해는 넘길 수 있을까? 애들이 고등학교는 졸업하는 것을 보고 죽어야 할 텐데! 과연 나는 손자를 볼 때까지 살 수 있을까? 보험금이 나오면 그것으로 가족들의 생계가 해결될까?'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 홀로 있으면서 오직 주님만을 주목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는 믿음으로 백혈병을 극복하였고 그 와중에 정상적인 목회와 방송선교사역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과만 접촉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가장 우선순위는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주목하고 하나님에게 접촉되어 있을 때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말씀을 순종하는 능력 있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게 하시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당위성은 알지 만은 막상 실생활 속에서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을 대단히 힘들어하고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 자체를 도저히 질 수 없는 짐으로 여기고 고통스러워하거나 아예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체념해 버리기도 합니다. 이것이 말씀대로 살아야 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딜렘마입니다. 그런데 그 뚜껑을 열어보면 그 속에 공통적인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산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말씀대로 살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항상 짐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당신만을 위하여 우리에게 말씀대로 살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게 산다고 해서 거룩한 하나님이시고, 타락한 가운데 산다고 해서 거룩함이 손상을 입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행동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십니다. 지존하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속여도 속임을 당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대로 살 것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너희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의 율법을 순종하라. 순종하라. 순종하라." 왜 말씀을 순종하여 살 것을 반복해서 명하시고 강조하시겠습니까?? 한마디로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축복된 삶을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10 : 12-13을 보시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며 네 하나님을 섬기고 네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네 행복을 위하여 하고 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사는 민족이 어떻습니까? 축복을 누리며 살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다윗 왕조 때 그들은 번성하고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과 온역과 기근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씀에 불순종하기 시작할 때 나라는 갈라지고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질병과 가난과 저주스런 나날들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갓)의 말씀을 사랑하여 아메리카 신대륙을 찾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와 더불어 번영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골드, 황금을 위하여 남미를 찾은 사람들은 하나님도, 황금도 얻지 못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지금 거지의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말씀이 아니라 황금을 위해 찾았던 나라였습니다.

    코메디언 이주일씨의 광고이전에 보건복지부가 텔레비전을 통해 내보내고 있는 금연 캠페인을 혹시 보셨는지 모릅니다. 그 광고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광고에 등장하는 사람은 후두암을 앓으면서도 담배를 피우다가 마침내 목소리를 잃어버린 실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있는 힘을 다해 목구멍의 바람 소리만으로 단 한마디를 말하는 것으로 광고는 끝이 납니다. 그러나 전문인이 아니고서는 그 바람소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에 실제로는 화면에 자막이 나타나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 자막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말입니까? 이것은 그릇된 삶에 대한 회한의 절규였습니다. 인생은 한순간에 흘러가 버리는 안개와 같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화살처럼 지나가는 삶이 복되고 풍성한 삶이 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바로 생명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삶이 되고 인격이 되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아무렇게나 살고 예수 믿었으니 천국만 가면 그것이 영생의 삶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좆아 살고 그 말씀이 내 인격과 삶을 이룰 때 그것이 바로 영생의 삶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영생, 에버래스팅 라이프, 영생의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잃어버린 묵상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과 접촉되어 말씀이 삶이 되고 인격이 되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진정한 영생의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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