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영혼과 정신,육체를 파괴하는 음악과 그것을 생성시키는 음악의 경계선은 무엇일까’.
농촌진흥청 잠사곤충부 이완주 박사는 최근 ‘파괴적 음악’과 ‘생성적 음악’의 경계선을 찾고자 무와 콩나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했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높은 음으로 제작된 헤비메탈곡을 이들에게 1∼3주씩 들려줬다. 6000∼7000㎐의 헤비메탈곡을 들려준 무는 1주째에는 잎이 약간 뒤틀리는 현상을 보이다가 3주째에는 무의 아랫부분에 심한 균열이 생겼다. 콩나물의 경우도 3주째가 되자 머리가 95%가량 갈라지면서 일부는 뒤틀려졌다.
주파수와 음의 높낮이는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그 둘은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6000∼7000㎐의 높은 주파수대의 음악은 식물에게 심한 스트레스를 줄 것으로 추정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또 다른 실험을 실시했다.
이번에는 낮은 주파수의 헤비메탈곡과 이와 음역대가 비슷한 감미로운 옛 팝송이나 단소로 연주한 우리 음악을 각각 들려줬다. 낮은 주파수의 헤비메탈곡을 들려준 무와 콩나물은 6000∼7000㎐의 곡을 들려줬던 때와 상태가 다르지 않았으나 팝송이나 우리 음악을 들려준 무와 콩나물은 별 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박사는 파괴적 음악과 생성적 음악의 경계선은 음의 높낮이보다 음악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에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단서라고 강조했다. 피아노에서 가장 높은 음의 주파수는 4699㎐인데 비록 높은 주파수대의 음이라 해도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를 유발시키지 않는다는 주장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부분이다.
파괴적 음악이란 하나님 대신 흑암의 세력을 찬양하는 음악을 일컫는다(단 3:5∼7,5:4?^23). 이는 육체뿐 아니라 정신,영혼까지도 무너뜨린다. 반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은 그것들을 소성케 하는 생성적 음악이다(삼상 10:5∼6). 그래서 성서는 입이 있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하고(시 103:1) 파괴적 음악을 즐겨 부르면 영혼과 정신,육체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타락한 음악을 좇는 자들의 결과는 ‘죽음’이 아닌 ‘죽임’을 당하는 것(단 5:30)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흑암의 세력을 찬양하는 파괴적인 곡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성적 음악의 가사를 붙여 이를 찬송가처럼 사용하고 있다면,특히 이런 사실조차 모른 채 이 곡을 부르면서 눈물까지 흘리고 은혜를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해 근대 교회음악가 제임스 데이비스가 자신의 저서 ‘Sing With Understanding’에서 밝힌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성적 음악에 대한 규정은 민감한 이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생성적 음악의 범주를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하나님께 올리는’ 노래 △인간이 ‘인간에 관해 하나님께’ 올리는 노래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인간에게’ 전하는 노래 등 세 영역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반면 인간이 ‘인간에 관해 다른 신에게’ 드리는 노래를 파괴적 음악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생성적 음악은 하나님을,파괴적 음악은 다른 신을 기쁘게 하는 음악으로서 그 목적과 방향이 뚜렷이 구분된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에 관해 인간에게’ 전하는 노래 즉,보편적 은혜속에 나타난 음악은 이들 영역중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어느 영역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지를 놓고 그동안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견해 차이가 있었다. 교회음악의 세속화를 우려하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해온 이들은 이를 파괴적 음악쪽에 무게를 둔 반면 진보적인 사람들은 오히려 이를 활성화해 예배음악내로 끌어오는데 주력하고 있다. 전자는 성서의 문화관에 대해 ‘특정한 문화에 대항하시는 하나님’(Christ Against Certain Culture),후자는 ‘모든 문화에 초월하신 하나님’(Christ Above All Culture)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 전문가들은 고린도교회에서 제사음식을 놓고 한창 논쟁이 벌어졌을 때 사도 바울이 보낸 서신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제사음식)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리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
남병곤기자 namb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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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음악가와 고통의 관계… 불후의 명곡 대부분 육체적 장애안고 창작
천재는 보통 사람과 다르게 태어났고 다르게 살았음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35세에 요절한 모차르트,31년밖에 살지 못한 슈베르트,26세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한 페르골레지,그 외에도 퍼셀(36세) 벨리니(34세) 베버(40세) 멘델스존(38세) 쇼팽(39세) 등 이름만 들어도 선율이 느껴지는 이들은 하나같이 40을 넘기지 못했다. 너무 일찍 완성된 천재들이다.
반면 바흐(65세) 헨델(74세) 하이든(77세) 등 세 음악가는 당시 평균수명으로 보아 장수했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베르디는 거의 90세까지 살면서 왕성한 창작 의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이들 모두의 음악은 한사코 고통속에서 잉태됐다.
베토벤은 위대한 창조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1822년 11월3일 ‘피델리오’의 재공연으로 마지막 리허설에 지휘를 해달라고 요청받은 그는 맹렬한 몸짓으로 지휘봉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 때 슈레더는 이렇게 회상했다.
“…귀가 먹은 거장은 가수들과 오케스트라를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나중에 사태를 알아차린 베토벤은 절망속에서 극장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청력의 상실은 그의 창작 열정을 빼앗아가지 못했다. 베토벤의 9개 교향곡은 이미 그가 귓병에 걸린 30세 이후의 작품이었고 특히 제7번,제8번,제9번 교향곡은 귓병이 심한 상태에서 작곡됐다. 가난하고 눈먼 한 소녀를 위해 달빛을 주제로 ‘월광곡’을 작곡했던 베토벤은 극기와 초탈의 정신으로 찬란함을 노래했다.
25세 되던 해에 타인에게조차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려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으면서도 감동을 안겨준 슈베르트 역시 중병의 시기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1823년 5월 그는 ‘나의 기도’란 시를 통해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의 생명,나의 육신,나의 피/그 모두를 ‘레테’의 강물속에 던져 넣어/보다 순결하고 보다 강력한 경지로/나를 옮겨 놓아 주소서.위대한 분이시여”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항없이 받아들이면서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창조한 모든 것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나 자신의 슬픔에서 탄생한 것이다. 오직 슬픔에 의해서 태어난 것만이 세계를 즐겁게 해주는 것 같다”
천재적인 음악가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괴롭히는 질병을 앓았으나 그것이 창작 열기를 오히려 고취시켰음을 볼 수 있다. 성서는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고후 12:7)가 사도로 있게 했음을 역설했듯이 천재적인 음악가들에게 있어서 질병 또한 가시로 작용했음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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