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8.11
베드로전서4:1-7절
뉴욕의 한 병원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했던 ‘전설의 여배우’“그레타 가르보”가 젊은 시절에 쓴 편지가 스웨덴 스톡홀름 왕립 도서관에 의해 공개된 일이 있습니다. 스웨덴에서 태어난 ‘가르보’는 미영화사 MGM과 계약, 미국으로 건너와‘이바니에즈의 격류’등에 출연하여 일약 인기스타의 자리에 올랐는데 공개된 그의 편지는 바로 한참 인기를 누리던 해인1926년 친구인 여배우‘페라 슈미텔로프’양에게 보낸 것이였습니다.
‘가르보’는 이 편지 가운데 “나는 외톨이로 쓸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때때로 산책을 나가 하늘을 쳐다보고 물을 바라보며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이국에서의 외로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기 절정의 36세 때 은퇴를 단행, 컴백의 유혹을 계속 뿌리쳐 온 그녀의 젊은 날의 심정을 화려한 은막 뒤에서 늘 느껴온 고독감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지혜롭게 살려면 인생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살다가 갑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애를 가리켜 일생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일에는 실수하면 다시 시도해 볼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일생에는 연습이 없습니다. 인생 삶에는 실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삶은 그 자체가 끝이고 종말입니다. 단 한번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는 지금 살고 있는 이 모습이 처음이요, 순간순간 종말을 향해 마지막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차가 출발지 플렛홈을 떠나 중간 기착지를 지나 때가 되면 마지막 종착역에 도착 하듯이 말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쇼펜하우엘’이 한번은 공원 벤취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 어느새 어두워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 철학자는 일어설 줄 몰랐습니다. 그때 마침 공원 관리인이 문을 닫기 위하여 경내를 돌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늙수그레한 남자 한 분이 공원 벤취에 석고상처럼 앉아 있는 것입니다.
관리인은 말했습니다“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습니다, 관리인은 화가나서 소리쳤습니다“이 봐요, 당신 내 말이 안들리나요? 도대체 당신 어디서 왔어요? . 노철학자는 그때서야 꿈속에서 깨어난 것처럼 고개를 들고 눈을 치켜 떴습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내가 어디서 왔느냐구요? 아아,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는 인생을 알지 못해서 깊은 한숨을 쉬면서 큰 탄식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사는 날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사는 날들이 짧습니다.
우리의 생애를 돌아보면 허무하고 짧은 인생이구나 하는 사실들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을 돌아보면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느껴야 합니다. 물론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나그네의 일생으로만 살아가면 허무할 뿐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인생의 기원과 그 종말에 대하여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조건 하고 나그네 인생이라고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나그네 인생이지만 인생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창3:7. 신32:6).
둘째로-인생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롬3:23).
셋째로-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임을 말함.
(히9:27).
넷째로-모든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말합니다(계20:11-15).
여기에 인생이 가는 길은 오직 두 길 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예외없이 두 길 중 어느 한곳을 향하여 지금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그네’인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쫓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제 남은 여생은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남지 않은 인생을 더 이상 허탄한 일에 허비하여 비참하게 끝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그네 인생들입니다.‘나그네’라고 하는 말은 고향을 떠나온 사람을 말합니다. 집을 떠나 잠깐 타향에 거주하는 사람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타향살이 몇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가 막혀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그 언제인가는 모두가 다 고향으로 찾아가는 나그네 인생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여생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남은 여생이 얼마인지 모른다고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지혜롭게 의미있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에덤스’ 대통령이 지팡이를 짚고 언덕길을 오르다가 숨이차서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청년이“각하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인사를 드렸더니“지금 나는 안녕치 못하네. 내 장막 집이 무너지려고 해서 이사 갈 준비를 하고 있네.” 그때 청년은 어디로 이사가시렵니까?.‘자네가 알다시피 내가 살던 집이 70년 지나고 보니 지붕은 벗겨지고 창은 낡아서 찢어지고 기둥은 바람에 흔들리고 들보는 굽고 지팡이로 버티고 있는데 이것도 견딜 수 없으니 하늘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곧 돌아갈 것 같네’
인생을 알고 자신의 여생의 남을 때를 알고 사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인생의 지혜는 자신의 남은 여생이 얼마가 남았는가를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루가 지나가면 남은 때는 차츰 짧아지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천년만년 사는 것처럼, 긴 날만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나의 종말은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과거와 현재가 다르고, 또한 미래가 다릅니다. 그러면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할까를 생각해 보려면 과거는 어떻게 살았는가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1. 지난 과거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1) 과거는 이방인과 같이 행했습니다.
(1)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모두 우상 숭배한 자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비록 모태 신앙을 가졌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받기 전에는 여전히 옛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화되기 전에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고, 명예와 권세와 돈과 자신을 더 사랑했었습니다. 형체가 있는 우상은 숭배하지 않았을 뿐 모두는 우상을 숭배하고 사랑한 전력이 있는 자들입니다.
(2) 정욕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 우리는 진리의 판단에 의해서 생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 본능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삶의 목적이 없었고, 잡혀 죽기 위하여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과도 같았습니다(벧후2:12).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하게 자기 정욕을 제어함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내 집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날 동안 내가 잠깐 머물다가 가야할 여관과 같습니다. 영원히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는 집도 별거 아니고 재물도 별것 아닙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너무 욕심을 부려서는 더구나 안됩니다.
(3) 방탕했습니다.
지난 날 우리의 삶은 세상에서 안식과 즐거움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것도 곤비한 내 영혼에 안식을 주거나 즐거움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세상의 쾌락에 자신의 몸을 내어던졌고 술취함과 방탕함으로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마비시켜 버리기가 일쑤였습니다. 한 마디로 영혼의 안식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는 여섯 가지의 죄목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앞의 셋은 개인적인 죄목이요, 뒤의 셋은 사회적인 죄악입니다. 이들 죄는 모두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 가운데 술취함도 무서운 일입니다.
음주와 패가 망신, 가정 파탄은 같은 형제들입니다. 술집 주인은 술꾼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정뱅이를 사위로 삼으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술로 죽은 사람은 만명이고, 미친 개에 물려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역사상 최대의 범죄자는 술입니다. 술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지 못합니다. 무죄한 자를 함정에 빠지게 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을 멸망의 나락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행복한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가정의 평화를 깨뜨려 버립니다.
마귀가 어떤 술꾼에게 꿈에 나타나서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질겁을 한 주정뱅이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때 마귀는“다음 셋 중에 하나를 택하면 살려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 아내를 죽이든지 때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술을 잔뜩 마셔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아내에게 술을 줄 것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술에 만취된 그가 집으로 돌아오자 잔소리하는 아내와 말다툼을 시작했고, 싸움이 폭행으로 번졌습니다. 격하게 싸우다가 결국은 부인을 때려 죽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술이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모든 범죄의 60%는 술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술은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흔히들 성경에 술을 먹지 말라는 말씀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술을 먹지 말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23:31절“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시지 말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보지도 말라고했습니다. 어떤 청년이 말하기를 그러면 성경에는 술을 보지도 말라고 하였으니 눈을 딱 감고 마시면 되지 않습니까? 하더랍니다. 지난 우리의 과거를 돌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서근석씨가 쓴 ‘재미있는 중용(中庸)’에 보면
‘술잔치의 즐거움이 잦은 집은 좋은 사람의 집이 아니며 명성을 좋아하고 미련한 것을 즐기는 이는 훌륭한 사람이 못된다. 높은 지위를 생각하고 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참된 사람이 아니다’.
봄의 행진 속
꽃이 눈부시다.
꽃에 취한 의자왕, 제일의 사치왕
꽃의 향기 속에 깊이 잠든 백제왕
타래실처럼 엉퀴고 설켜서 갑니다.
한 알의 과실 속에도
농부의 땀과 정성이 있거늘
의자왕 당신은 꽃 속의 세월이어라.
---생략--
서근석의 서사시“의자왕”의 한 소절입니다.
노력하지 않는 한 왕의 생애를, 비참한 말로를 그렸습니다. 우리에게 땀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호화스럽고 사치한 인생은 자멸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훌륭한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지위나 명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릇 훌륭한 사람이란 지위와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하루 하루 노력하면서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명성은 여기에 붙고 금시 저기에로 옮겨가는 속성이 있다. 한 자락의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명성에 대한 단테의 말입니다.
‘벤자민 프랭크린’도“유리와 도자기와 명성은 쉽게 깨진다”고 하였습니다. 명성이란 하나의 바람, 물거품! 그런데도 인간들은 왜 그토록 명성을 사랑하는 것일까?.
본문에서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 때에 성도들이 어떤 마음의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말세”는 시작되었습니다(막1:15).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경험하면서 제자들은 말세의 임박을 가르쳤습니다. 본문도 그 가르침의 일부분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만물의 마직은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롬13:11,12. 고전7:29). 그러면 말세를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며 성도로서 바른 삶일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2. 자신의 여생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헤아려 봅시다.
인생의 종착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차피 가야 할 인생들입니다. 인생의 시작이 내 뜻대로 된 것이 아니기에 끝나는 날도 내 마음대로 안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코오스에서 달리다가 끝내라는 명령이 있으면 그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요, 이유는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여생이 얼마나 남은 것 같습니까?.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여기 계시는 분 가운데 20-30년 지나면 많은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임.
당나라 ‘유정지’가 지었다는 다음 시구는 인생의 무상함을 더해 주는 것 같습니다. “年年歲歲 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해마다 해마다 피는 꽃은 같으나, 해마다 해마다 인생은 달라진다”.
시편 기자는 시편89편47절에서 ‘나의 때가 단촉하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는“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 가나이다”(시90:10)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갗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벧전1:24).
확실히 우리 모두는 초로인생입니다. 새벽에 내린 이슬이 해가 나면 사라지듯이 우리의 인생살이가 잠깐 보이다가 없지는 이슬과 같고 안개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여생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이 시간 혹시 나이가 젊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가운데“우리의 여생은 아직도 많다”고 생각하고 혹시 뽐내는 자가 있다면 어리석은 생각일랑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젊다는 것이 공동묘지에서 멀다는 보장은 결코 되지 못하게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많이 늘었습니다. 한때 50을 조금 넘더니 이제는 78세 정도 됩니다. 중년을 넘어선 성도님들께서도“우리의 남은 날이 많지 못하다”면서 서글퍼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는 백발은 염색해서 검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더해 가는 나이는 속일 수 없습니다.
마음만은 아직도 청춘인데 돋아나는 흰머리는 막을 길이 없고, 빠진 손과 다리의 힘은 찾을 길이 없고, 희미해 가는 시력을 회복할 길도 없고, 그렇게도 치렁치렁하던 목소리는 모기 소리마냥 기어 들어가고, 귀는 들리지 않아 답답하고, 구부러지는 새우 등은 바로 잡을 길이 었습니다.
어쩌다가 죽는 다면 남의 눈이 있으니 자녀들은 하루 이틀 정도는 울어 줄 것이고, 영구차에 실어 공동묘지에 안장하고는 제갈길로 돌아갈 것입니다. 생각할 수록 서글퍼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떤 짖궂은 사람은, 인생은 오무(五無)라고 정의했습니다.“인생은 없고, 없고, 없고, 없다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어릴 때는 철없고, 젊어서는 정신이 없고, 중년이 되면 틈이 없고, 늙어지면 형편 없다가 죽거 나면 죽어 없어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너무나 서글픈 일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헛되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남을 괴롭게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미워하다가 귀한 시간들을 다 허비해서야 되겠습니까?.
왜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질 없는 일들입니다.
‘디즈데일리’의 말에 유의하여 봅시다.
“인생은, 너무나 짧기 때문에 비굴하게 살 수 없다”
어떻습니까?.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가시렵니까?. 우리의 여생이 그렇게 많이 남지는 않았습니다. 곧 석양이 지듯이 죽의 그림자가 우리를 드리우게 될 것이며, 나를 부르는 주님의 손짓이 머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값 있게 살아 봅시다.
3. 그러면 우리의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신차린 사람은 근신합니다. 근신한다는 말은 조심한다는 뜻입니다. 섰다 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인생 광야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매사에 조심해야 합니다.
2)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완전케 하는 것이 기도라면, 수평적으로 완전케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뜨거운 것입니다. 냉냉한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순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러기에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풍성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뜨겁게 사랑하는데서 사랑은 능력이 있고 생산적이요, 창조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3) 선한 청지기로 헌신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를 따라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봉사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든지 주어진 축복을 탕진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은 시간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잃어버리면 회복할 수 있는 시간들이 그리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시간도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신 전세기한이요, 생명도 하나님께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산도, 자녀도, 직장도, 사업도 모두 다 내 것이 아니요 주님의 심판에 따라서 언제인가는 결산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로 낭비했다는 책망을 듣지 않도록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4)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 봅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철저하게 그의 삶이 나그네 인생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태어날 때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뉘어져 있었습니다. 세상에 살 때는 어느 곳 하나 머리 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아무것도 입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남의 무덤을 사흘 동안 빌려서 누웠다가 일어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 티끌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일어서면 부활의 생명으로 영생할 것인데 그대 어찌 땅에 무덤을 넓게 깔고 누워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나그네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해인 수녀 시입니다.
‘주여, 당신의 생애는
그렇게도 철저한 나눔의 생애로 부서졌건만
우리의 나날은 어찌 이리 소유를 위해 숨이 차게 바쁜지
시시로 당신 앞에 성찰하게 하소서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것이 없는 이승의 순례객인 우리가
이기와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당신께 빌려받은 것임을
항상 기억하게 하소서’.
5)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고 세조에게 고문을 당한 후 형틀에 매여 사형장으로 끌려가 죽음을 당했던 사육신 성삼문의 시조가 있습니다.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잠시 쉬는 시간에 기왓장 한 장을 들어 거기에 이런 시를 썼습니다.
‘북소리는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 서산을 넘어가는구나
아, 황천길에는 주막이 없다는데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쉬어야 하나’.
그는 위대한 충신이었으나 그에게는 아쉽게도 내세가 없었습니다“황천길에는 주막집이 없는데 내가 어디에서 쉬어가나?”하면서 탄식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신령한 교회가 있기에 쉬어 갈 수 있습니다. 이 집에서는 안식을 얻으며 고향 소식이 있기에 새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인도의 시성 타골이“나는 나이가 점점 많아지므로 내가 젖는 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돛을 높이 달고 바람을 의지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의 젊음을 의지하면서 마구 달려왔습니다. 조금 알고 있던 인생의 경험을 자랑하면서 숨가쁘게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지식도. 젊음에도 경험도 인간의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돈을 의지하고 살았으나 공허할 뿐입니다. 사람을 의지했으나 실망했을 뿐입니다.
이제 믿음의 닻을 높이 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바람따라 그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남은 시간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제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대로 선한 청지기로 살다가 주님께서 부르시는날 주께로 돌아가기에 주저 함이 없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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