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오직 나의 신으로만 가능합니다 2002-09-04 16:27:02 read : 1758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 6. 31
스가랴4:1-10
윌리암 J, 록이라는 소설가의 책에 보면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반 평생을 여행과 오락으로 그 많은 돈은 낭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그 생활에 실증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는 몸은 지칠때로 지쳐 버렸습니다. 그런 중에 한 불란서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세상의 물질같은 것은 거의 지니지 않았지만 박식할 뿐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서 그 여자는 깨닫고 그에게 말하기를“나는 무엇이 좋은 것인지 지금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군요, 선생님이 내게 인생을 보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실 때 인생은 전혀 달리지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에게 허락하신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상황을 어느정도 알아야 하겠기에 몇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선지 스가랴는 다리오왕 2년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예언한 잇도의 손자요, 베레갸의 아들입니다(슥1:1). 그는 선지자 학개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동시대의 인물입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태어났으나 본래 레위지파였기 때문에 선지자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정복한 후에 유대인 포로들을 석방할 것을 선포하고 총독 스룹바벨로 하여금 제1차 포로의 귀국을 주선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포로들 중에서도 잘 살고 부유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바벨론에 그냥 남아 있엇고, 스룹바벨을 따라 귀국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무력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귀국한 후의 생활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경작할만한 농토도 없었고, 땅은 황폐하고, 농사를 지어보았자 소출도 적었으며. 원수들은 밤낮없이 그들을 약탈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오직 걱정없이 먹고 살 수 있는 생활의 안전 보장이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생활가운데 있는데 이제는 새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을 쌓아야 하는 이중삼중의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워만 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 실망하고 낙심하는 자들이 속출했습니다.
본문의 스가랴 선지의 예언은, 귀국한 백성들 중에 이와같이 실망하고 낙심한 자들과,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자들에게 전해진 말씀입니다.
첫째는- 성전을 재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을
강하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축복스런 장래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스가랴 선지는 이와 같은 축복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일어설 때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스가랴 전지의 이런 격려는 당시 저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그들의 의무를 시행하는데 해이해 있었고, 백성들은 삶에 시달리고 지친 나머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무감각해지고 있었으며, 모세의 율법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스가랴선지는 이와 같이 지쳐버린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눈멸겨운 회개와 죄로부터의 성결을 강조하면서 이길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임을 깨우쳐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스가랴선지가 증거한 다섯 번째의 환상입니다. 일곱 등잔이 달린 등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등대는 두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이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이 등대는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일곱 등잔은 하나님의 눈들이고, 두 감람나무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말합니다. 스룹바벨은 다윗계보에 속한 유다의 왕위를 계승할 자입니다. 그는 다윗왕조를 대표했고(학2:20-23). 예수님의 조상이 된 자입니다(마1;12-13).
그는 파괴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함께 성전회복을 위하여 일할 사람으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여주는 환상은 성전재건이나 백성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일을 스룹바벨이 시작했지만 그가 수행해야 할 사역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스룹바벨은 최선을 다하여 제2성전 재건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2의 성전을 스룹바벨의 성전이라고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방해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제거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1.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베워야 합 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나, 오직 하나님만으로 가능하기”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신앙은 이 우주와 역사안에서 그것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분밖에 계시지 않는 절대자이십니다.
그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광대한 우주와 인간의 역사와 생사화복까지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처음이요 나중이며 또한 모두입니다. 그런즉 인간과 우주와 만물은 그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림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섬기며 경외하는 것이 당연한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불신앙에서 비롯된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행각은 결국 하나님 대신 인간의 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결과 하나님 중심의 우주를 인간 중심의 우주로 대치해 버렸습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과학문명이 종교를 대신하게 되었고, 과학자는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권위있는 예언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윈번’같은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인간에게 영광이 있을지니, 이는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인간이 우주의 주인입니까? 인간이 영광을 받아야 합니까?.물론 사람들도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바다 밑을 다니는 잠수함도 만들 수 있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도 만들었습니다. 나아가 달나라까지 갔다 오고 있습니다. 신기한 위약품을 개발하여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켜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심장마저 바꿔 낄 수있습니다. 암도 잘라내고 치료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개발한 컴퓨터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보면 인간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어리석은 인간들은 우주질서의 지배권이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피조물인 인간에게로 넘어간 것으로 착각하고 큰 소리치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큰소리쳐도 인간은 역시 인간일 뿐입니다.
인간도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며 지구덩이에 붙어 사는 인간일 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기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무엇입니까? 더러운 것이 인간입니다(전9:3). 세상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전7:20. 롬3:9-12). 한숨 쉬며 살기 마련입니다(시38:5). 그것마저도 너무나 짧은 것이 인생입니다, 하루 살이라 하였습니다(욥4;19). 그림자 같은 것이며, 초로 인생이라 하였습니다.(욥14;2. 시103:15).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 아닙니다. 만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의 수례바퀴를 조종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의하여 좌우됩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어야 사는 길이 열리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떳떳하게 살아가기를 힘 써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험하여 살기가 고단하고 힘들어도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떳떳하게 살아가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 살이가 힘들다고 하여 포기하며 살 수가 없습니다. 피해가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든지 살아가야 합니다.
나아가“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룹바벨 앞에 전개된 그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였으며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너무나 벅찬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힘을 잃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애워싸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들은 너무나 비참하였기 때문입니다. 불신앙과 악의 세력은 도도한 물결처럼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과 타협한다면 평안하게 살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룹바벨은 잠시의 고난을 헤쳐가기 위해 비굴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외로운 싸움이지만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도록 보냄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죄악 속에서 저들과 함께 더럽고 추악한 모습으로 살도록 세움받은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할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피흘리까지 하면서 싸워야 할 사람들입니다.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사탄의 조종을 받는 거대한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죄와는 싸워야 하며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딤전6:12).
히브리 격언에 보면“죄는 처음에는 여자처럼 약하지만, 내버려두면 남자처럼 강해진다”“죄는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가늘다가, 나중에는 배를 묶는 밧줄처럼 강해진다”“죄는 처음에는 나그네이다, 그렇지만 그대로 놓아두면 나그네가 그 집의 주인이 되고 만다”고 했습니다.즉 죄라는 것은 절대로 과소평가할 것이 못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공의는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악의 세력이 득세하고, 때로는 불의가 지배하는 듯합니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으나 그는 가인의 칼에 죽었습니다. 엘리야는 악한 왕 아합과 이세벨의 칼을 피하여 도망다녔습니다.
스데반은 구원의 복음을 전했으나 어리석은 자들에 의하여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는 상관이 없는 그런 분이셨지만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오히려 죽어 마땅할 인간들이 오히려 활개를 키며 살았습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죽였으며 불을 질러 화형의 제물이 되게 하고 자신의 잘못을 뒤집어 씌우기도 하였습니다. 힛틀러, 스탈린 등 저들은 악의 추종자들로 오히려 온 세계를 흔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그 힘은, 저들의 세력은 저들의 영화는 잠시 뿐이였습니다. 훗날 저들은 잡초처럼 시들어 버렸습니다. 결국 저들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이 악을 이기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1:6절에“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잠언22:8절에“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말합니다, 데살로니간전서5:22“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왜 악은 버려야 합니까?.
역사의 마지막 장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쓰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부정한 권력이 정의 앞에 무릎을 끓을 것이며, 칼자루를 휘둘던 자들은 망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짓밟고, 정의를 박해하던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악의 세력이 잠시 동안은 진리를 묶어둘 수는 있습니다. 악한 자가 잠시는 잘되는 것 같이 보여집니다. 그러나 마지막을 알리는 종료 나팔이 부는 날 하나님의 공의가 승리하고 저들은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세상 살기가 힘들고 어려워도, 고난이 겹겹이 쌓여도 비굴하게 저들과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면서 떳떳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 한 세상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힘들고 어려워도, 머리를 들고 당당하게 깨끗하게 삽시다.“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고(요16:33).
“너는 내것이라, 내가 너희를 도우리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7절에“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 평지가 되리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험하고 우리는 약합니다. 그러기에 세상 사는 동안에 누구든지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화창한 아침이 갑자기 돌변하여 천둥번개 치듯이 캄캄한 밤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높은 꿈과 이상이 하룻사이에 산산조각이 나듯이 희망에 부풀어 있는 우리의 심령을 갈기갈기 찟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여름의 폭서와 겨울의 한파가 있듯이 인생 행로에도 모든 것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아침엔 개인 듯 하다가 정오에 갑자가 소나기가 퍼붓듯이 아침의 기쁨이 저녁에는 슬픔으로 되돌아 올 수도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행복의 순간이려니 했더니 그 어디엔가에 숨어 있던 불행이 우리를 여지 없이 덮치기도 합니다.
어느 외국 작가의 시에 보면.
“인생이란 양명고와 같아서/한편으로 두드리며 한편으로 걸어간다/부산히 울리는 북소리에/한 걸음 묘지를 향해 나아간다”
삶이란 괴로운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날 그날을 근심으로 보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로 시작해서 늘상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Paul Lorence Dumba 는“일분의 웃음에 한 시간의 울음이 있고, 잠깐의 즐거움에 태산같은 걱정이 따르고, 웃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도 울음은 갑절이니 이것이 인생인가 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런 고통과 시련과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의 종교입니다. 이 능력은 인간의 수단이나 지혜와 경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고후4:8-9).
바울은“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게 하려는 그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사를 초월한 바울의 믿음의 고백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고후6:8-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안한 이 세대를 우리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정권도,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생사화복을 한 손에 쥐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능력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깁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능력의 팔을 펴사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받지 않도록 지켜주시고,의로운 길로, 더 좋은 첩경으로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습니까?
이사야41장10절에“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된 우리 성도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의 약속을 믿으시고 오늘도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14:27).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능히 이기는 능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부는 주시지 않았으나 부요하게 하는 비젼을 주셨고, 그는 우리에게 행복의 열매를 직접 따서 주시지는 않았으나 행복하게 사는 능력은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주시지 않았으나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그 능력의 원천인 믿음을 주셨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는 말씀을 믿으시기를 부탁합니다(요한1서5:4-5).
바울은 이 엄청난 믿음을 받았기에 감옥에서 원망과 불평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도드렸습니다. 스데반도 이 믿음을 소유했기에 죽음의 순간에도 두려워 하지 않았으며 그는 승리의 면류관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 믿음을 받았기에 모리아 산에 올라가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 이삭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산다는 것 자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가도가도 끝이 없는 것 같이 보여도,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외치시던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인생을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가 받은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스룹바벨도 이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갈 수 있었습니다.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능력의 축복이 오늘 예배에 참여하신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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