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길에서 내가 만나야 할 사람 2002-09-04 16:20:52 read : 1910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4. 21
누가복음10:30-37절
어느분의 수필집에 있던 한 대목입니다“오래 전 나는 명동에 있는 성바오로 서원에 들렀다가 아주 인상 깊은 액자 하나를 발견했다. 벌써 오랜 세월이 지난 일이나 정확하게 회상할 수는 없지만 나의 기억을 정히해 보면 연두빛이 주조를 이룬 초롱꽃 사진 위에 두 줄의 하얀 글씨가 새겨진 액자였다. 사진의 내용은 커다란 두 개의 잎사귀가 수평구도로 배치되어 있는 사이에 꽃이 피어있고 밝은 햇살을 받은 잎사귀와 꽃송이가 아래 잎사귀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사진의 하단에‘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을 닮는다’는 내용의 글이 씌어 있었다. 나는 그 사진 앞에 멈추어 섰다. 그 순간 내가 살아 오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생생하게 내 안에 살아 있고, 그 모습들을 나의 안팎과 구별해 낼 수 없는가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날 나는 오랫동안 그 액자 앞에서 서 있다가 끝내는 사들고 집으로 왔던 기억이 난다.”
사람은 만남으로 길이 열려진다. 어떤한 사람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의 삶의 습관, 심지어 성격까지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그 만남은 소비적인 것이 아닌 생산적인 것이요 창조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인생이란 너와 나의 만남의 관계입니다.
그 만남의 관계에서 사람을 잘 만나서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사람을 잘못 만나서 실패를 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만남이란 우리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의 말씀에 “인복”(人福)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사람을 잘만나는 것이 복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십 평생 동안 네 번의 만남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만남은 십대 시절에 오는 부모와의 만남입니다. 부모와 충분하고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만남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 두 번째 만남은 스승과의 만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생을 좌우할 가르침을 받을 스승을 만나야 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고 스승이 인도하는 길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승이 없는 배움이란 지식의 암기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만남은 인생의 길을 함게 걸어갈 친구 혹은 동반자를 만나냐 합니다. 한 사람의 진실된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어떠한 일을 이루는 것보다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대문호‘토스트에프스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인생에서 단 한 사람의 진실한 친구를 갖지 못한 사람은 죽은 삶과 같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자기의 입지를 모아 성숙으로 들어가는 입문으로 들어가 신과 만나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태어나 부모를 알고 스승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그리고 신에 귀의하는 것. 이 네 단계의 만남이 거꾸로 갈 수도 있고 두 단계로 건너 뛸 수도 있고 아예 생략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사람이‘유아독존’이 아닌‘사회적 동물’임에 틀림없다면“만남’이란 바로 인간의 삶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말하기를 인생을 행복하게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3가지 만남을 잘 만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1)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하고
2) 친구를 잘 만나야 하고
3) 부모를 잘 만나야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만남이 잘된 사람은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데 만일 이 만남이 잘못되고 불협화음이 생기면 불행해지고 갈등을 하면서 인생을 비참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를 잘못만나서 날마다 탄식과 한숨으로 긴긴밤을 지새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어떤 사람은 배우자를 잘 만나서 호강하며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다가 사람을 잘못 만나서 손해를 입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서 사업에 큰 도움을 받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른 사람을 잘 만나기를 원하며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면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 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야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안병욱 수상집‘빛과 생명(生命)의 안식처(安息處)’에 보면, 인생은 만남이다, 너와 나와의 만남에서 인생이 시작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너를 만나고 네가 나를 만나는 것이다. 나와 너와의 조우(漕遇), 자아와 타아의 해우가 인생이다.
역사도 만남이다. 민족과 민족이 만나고 문화와 문화가 서로 조우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다. 만남이 없이는 역사가 성립할 수 없다. 자연도 만남이다. 하늘과 땅이 만나고 산과 바다가 만나고 초목과 물이 만나고 꽃과 벌이 만난다. 종교도 만남이다, 종교야말로 인생의 가장 깊은 조우다. 인생은 서로가 서로를 만나는 것이다.
인생의 만남에는 여러 가지의 형태와 의미가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만남은 비극적인 사람의 만남이다. 그들은 뜨거운 사랑의 정열로 젊은 생명을 태워버리고 말았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의 만남은 선과 악마의 만남이다. 그것은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대결이다. ‘카인’과 ‘아벨의’ 만남은 질투와 살해의 만남이다. 질투의 노예가 된 카인은 분노 때문에 자기의 혈육의 동생인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그것은 인생의 저주스러운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와 ‘유다’의 만남은 배신(背信)과 가책의 만남이다. 유다는 은(銀)30냥에 눈이 어두워서 자기의 스승을 로마의 관헌에게 팔고 양심의 가책 때문에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공자’(孔子)와 ‘안연’(顔淵)의 만남은 깊은 교육적 만남이다. 두 인격의 조우에서 정신의 높은 향상이 있었고 진리의 대화가 꽃피었다. 그것은 가장 바람직한 만남 중의 하나다.
‘예수’와 ‘베드로’, ‘석가’와 ‘아난(阿難)’의 만남은 인생의 희귀한 만남에 속한다. 두 혼(魂)과 혼의 조우에서 깊은 대화가 이루어졌고 영원한 생명을 희구하는 신앙의 문이 열렸다.‘간디’와 ‘네루’의 만남에서 인도 해방의 대업이 이루어졌다.‘단종’(端宗)과‘삼문’(三問)의 만남은 신(信)과 의(義)를 일으켜 세우는 충성(忠誠)의 조우이다. 이런 만남에서 인간은 의의 빛을 보는 것이다.
세상의 만남에는 운명적인 만남이 있고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만남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어떤 상인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갑자기 강도를 만나 습격을 당하게 되고 있는 물건까지 다 빼앗기고 죽도록 매를 맞고 큰 상처를 입은채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에 이곳을 지나가던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 위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를 싸매어 주막으로 데리고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두 렙돈을 주면서 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다고 주인에게 부탁을 하며 길을 떠났습니다.
본문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고 했습니다. 강도를 만나매 있는 것을 다 털리고 옷마저 빼앗길 뿐 아니라 거의 죽으리만큼 얻어맞고 쓰러져 있던 사람“그 어떤 사람이” 곧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어떤 사람이” 곧 자신인 것을 깨닫게 될 때 은혜가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본문에 세 종류의 등장 인물이 나오고 있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 만나서는 안될 사람이 있고, 만나나 마나한 사람이 있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1. 인생 길에서 강도는 만나서는 안됩니다.
강도란 원래 남의 것을 빼앗고 훔치는 자를 말합니다.
강도가 한 번 들어닥치는 날이면 모든 것을 사정없이 빼앗아 가버립니다. 강도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손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은혜를 받아 은혜생활 잘 했는데 오늘 그 은혜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벌써 은혜의 강도를 만난 증거인 것입니다.
지난 날에는 새벽기도만 빠져도 죽을 것만 같고, 교회 봉사나. 섬기는 일도, 주일를 빼먹으면 어딘지 이상하게 여겨져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없어지고 무슨 핑계나 대고, 어떤 이유가 붙는다면 그것도 벌써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또한 주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 아멘 하는 소리가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 나오던 심령이 지금은 은혜스러운 말씀을 들어도 졸음만 오고 아멘을 아무리 해보려고 할지라도 되지 않는 성도가 있다면 이것도 역시 강도만난 것입니다.
2. 만나나 마나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이들의 생활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그렇다고 남에게 유익도 주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너는 너고 나는 나의 평범한 만남입니다.
3. 우리가 만나야할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가 우리의 참된 이웃이고 이 시대가 요청하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이고 옥포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여기 상인이 왜 강도를 만났으며 오늘 우리는 과연 누구를 만나야 하겠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면서 잠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강도만난 이유는
1. 여리고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여리고는 어떤 곳입니까? 사막지대로써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아니하는 황막한 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오늘날 세상 길은 마치 여리고 길과 같아서 우리가 걷는 길이 얼마나 위태롭고 무시무시한 길인지 알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 세상의 하루하루의 삶이란게 아침 먹고 문을 나서면 험한 교통량 속에서 허우적 거리다가 저녁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조차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서는 장담할 수 없는 위태롭고 절박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영적으로 보면 사탄의 모형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며 거기에는 말씀이 있고 기도처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것은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강도를 만난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났기 때문에 --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품을 떠났다는 것이고, 예배 시간도 잊어버리고, 기도하는 시간도 잃어버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의 구심점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며 세상으로 나아갔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너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성령을 받기 위하여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 때문에 예배시간도 잃어버리고 여리고로 자꾸만 내려가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신령한 떡집인 베들레헴,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내려갔다가 큰 불행을 당하였습니다. 남편도 잃어버리고, 두 자녀도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면 강도를 만납니다. 사기꾼을 만나 있는 것까지 다 빼앗깁니다. 질병도 만나 병원에 입원하여 탄식합니다
다 빼앗기고 탄식하며 울지말고 예루살렘에 거하여야 합니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예루살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참된 안식과 평안을 원하십니까?
마음에 참된 안식을 원하시고 편안을 원하신다면 먼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십시요. 나의 위치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나 자신의 영적상태를 엄밀하게 진단해 보십시요. 내 영이 아버지 집을 떠나 탕자와 같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아니한가를 확실하게 돌아보십시요.
오늘날 세상에는 적어도 다섯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인구의 팽창으로 사람의 가치가 없어졌습니다.
둘째는-인종분쟁이 심합니다.
셋째는-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넷째는-과학 만능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다섯째는-어느 나라이건 모두가 정치적인 딜렘마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볼 때에 이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조차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섯가지 문제가 있는 위태로운 때에 어찌하여 예루살렘에 가많리 있지 못하고 여리고로 냐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그런 봉변을 당하게 되었는냐 그말입니다.
강도를 한 번 만나는 날에는 강도가 시시한 물건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쓸모있고 쫄쫄하고 값이나가는 물건만을 골라서 빼앗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가 영적인 은혜의 보화를 소유하고 살고 있지마는 한 번만 실수하면 마귀에게 날강도 만나게 되고 강도 만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은혜도, 말씀도, 봉사도, 아멘도, 열심도, 찬송도 모조리 빼앗겨 버리고 마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니, 세상의 것은 혹시 빼앗겨도 신령한 은혜의 보화만은 빼앗기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강도를 만나 온 몸이 상처 투성이요 만신창이가 되신 분은 없습니까? 강도를 만나 다 빼앗기고, 눈물과 아픔과 탄식만을 할 수 밖에 없는 참혹한 자리에까지 내려간 사람은 없습니까?. 그리하여 실망과 배신과 고독 속에서 괴로워 하는 성도는 없습니까?
이 시간 주님을 찾아 오십시요.
그리하여 치료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삶의 형장에서 찢기고 상처를 입고 다 빼앗긴 자들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싸매주시고 치료해주시는 사랑의 주님이 계십니다.
2. 이 사람은 홀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마치 탕자와 같이 아버지의 교훈이 싫어지고, 사랑의 권고나 권면이 싫어져서 집을 떠난 탕자와도 같습니다.
이와같이 오늘도 성도의 심령이 내려가 신앙이 타락하게 되면 먼저는 주의 종의 설교가 싫어지고, 교회 출석이 싫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디모데야 말세가 되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 했는데, 오늘 이 시대가 꼭 그렇게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바른 말은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진실된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대신 거짓말과 유혹하는 달콤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바른 교훈을 듣지 않으려 합니다. 그저 자기의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자기를 맞추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의 기분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맞추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루를 살고, 하루를 믿어도 내 뜻대로 하지 말고 주의 뜻에 맞추어 그 말씀에 순종하며 본문의 주인공 같이 인생길을 혼자 걷지 마시고 주의 말씀과 동행하며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인생의 길에서 꼭 필요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현대인은 많은 모임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며 살아갑니다. 사귐과 만남은 인간관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사람을 잘 만나면 성공하지만 사람을 잘못 만나면 성공할 수 있는 일도 실패하게 됩니다. 매일 같이 서로 만나지만 깊이 사귀지 못하는 이유는 참된 만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친구도 만나야 하고. 좋은 아내, 남편도 만나야 합니다. 좋은 스승. 좋은 부모도 만나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만남에서 성공과 실패가 좌우됨을 압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동분서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친구, 배우자, 좋은 상사, 좋은 부하를 만났다 해도 내 생애에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만남은 바른 만남이 아닙니다.
어부 베드로가 예수를 만났기에 사도가 되지 않았습니까?
부랑자 어거스틴이 예수를 만나 성자가 되었고, 사울이 예수를 만나 바울이 되었습니다. 불화의 가정도 예수를 만남으로 화평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는 누구든지 다 만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남의 것을 착취하던 삭개오는 예수를 만남으로 봉사자가 되었고, 사마리안 여인은 전도자로 그 생활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려는 우리는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순종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면 사는 길이 열립니다. 예수를 만나면 새 길이 열립니다. 예수를 만나면 병도 고침받을 수 있습니다. 심령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생각도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찌 하든지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상처나고 찢겨진 쓸모없는 인생들을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찢어지고 아픈 상처들을 친히 어루만지면서 싸매어 주십니다. 마치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자를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상처를 싸매어 주듯이, 오늘도 주님께서는 삶에 지치고 넘어지고 찢겨진 우리들의 약한 상처와 아픔을 싸매어 주십니다.
세상의 죄 때문에 더러워지고 세상의 악한 일 때문에 상처를 입은 영혼, 미움과 시기와 질투 때문에 상처입은 나약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의 피로써 더럽고 추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싸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자를 나귀에 태워 나그네들이 쉬는 주막집으로 인도했듯이,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 살이에 피곤하고 지친 영혼들을 자신의 등에 업으시고 자신이 다시 올때까지 우리를 돌볼 수 있는 주막같은 교회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참된 위로와 안식과 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험한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여기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지 않으시렵니까?. 나의 인생 길에서 아무리 좋은 남편, 아내, 좋은 친구, 좋은 스승을 만났다 할지라도 아직도 여러분의 생애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지 못했다면 그 생애는 불행한 것입니다.
오늘 나의 인생 길에서의 고귀한 만남은 바로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 분을 만나면 나의 생애에 놀라운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부해지고, 병든자들이 고침받고, 외로운 자들이 인생길의 동반자를 얻게 되고, 슬픈자들이 기쁨을 얻게 되고, 실망한자들이 위로받아 새 소망의 인생길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꼭 만나야 할 사람,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시고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내 생애가 놀라웁게 변화되고 나의 삶이 새로워지며 풍성해 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시는 축복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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