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말씀하신 인간과 나 2002-10-16 11:42:32 read : 3330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10.06 // 누가복음 15:11-24
이 세상에서 사람과 하나님께 대하여 참된 지식을 가지고 권위있게 말할 수 있는 분이 누구겠습니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고 계시며 그 진리를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 주실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이시며(히 1:12) 예수님은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시며(요 1:10)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요 1:18)고. 성경을 보세요. 히 4:13에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고 마 11:27에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그 존재와 상태, 그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진리를 비유로 알기 쉽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몇가지 요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인간은 아들이고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까 사랑은 전체를 하나로 묶는 종말론적인 진술입니다.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 서로에게 있어 모든 것이고 제일 귀한 것이며 최후 최상의 것입니다. 사랑은 한없이 주는 것이고(요 3:16) 사랑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고전 13:13). 영원한 것은 영적이고 신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이 관계는 원래 영원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한없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관계요 연하디 연하여 아린 관계며 꿈과 소망이 영그는 관계입니다. 그것은 영락없는 에덴 동산이요 기쁨의 동산이며 낙원이요 천국입니다. 성경은 이 사랑의 나라, 그 생명의 질을 영생이라고 표현합니다(요 17:3).
둘째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은혜와 사랑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시적인 것,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것을 중심해서 살지 않고,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세계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질 수 없는 실재인 하나님을 등지고 스스로 만져서 알 수 있는 세계의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말합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날로부터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질되었습니다. 신뢰와 복종 대신에 지배와 이기로 가득찼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공리적 관계로 바꾸어지고 영적인 관계는 싸늘한 물질의 관계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때로부터 인간은 가능한 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먼 나라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떠나가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마음대로 살아보자. 우리에게 있는 이성과 능력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가, 아닌가? 에 대해서는 관념치 말자. 이 세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인지 우연히 유출된 것인지도 묻지 말자. 우리는 다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인간의 나라, 우리들만의 천국을 건설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정신, 곧 세속정신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상당한 진보를 보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인간에게 위대한 재능과 놀라운 자연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제 분깃을 가지고 이룬 결과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역사가 마침내 성취한 열매는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지상천국이 만들어졌습니까? 하나님처럼 영생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인간이 쟁취하려고한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지은 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여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대신에 서로를 의지하며 살기 위해 부단히 도시로 몰려 왔습니다. 시집, 장가가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행사였고 그들은 힘을 합쳐 거대한 도시 문명을 이룩하였습니다. 도시는 마천루로 뒤덮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상하게도 더 왜소화 되어갔습니다. 인간은 군중 속의 고독을 되씹어야 했고 기계문명 속에서 뼈저린 자기소외를 겪어야 했습니다. 인간들은 지상천국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생산활동을 했습니다. 그 결과 유한한 지구의 자원은 고갈되고 공해 문제는 가중되었습니다. 그것은 열역학 제2법칙의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로서 인간의 탐욕은 숙명적으로 제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에서 오는 정신적 허탈을 느껴야 했습니다. 춤추고 노래 부르는 인간의 문화로 메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을 술로 달래며 잊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인간이 만든 크고 위대한 것들 가운데서 정작 그것을 만들고 자랑하던 인간은 여전히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향수 속에 모든 것을 움켜잡고 살려든 인간은, 아무것도 영구히 소유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모든 것을 내어놓고 비참하게 쪼그라져 어디론가 버려져야 했습니다. "인간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할 짐승과 같도다"(시 49:12)는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떠난지 며칠이 못되어 제 분깃을 다 허비하고 궁핍하게 되어 돼지와 같은 처지에 빠졌다는 것은 그대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참담한 운명을 예언한 것입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더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자신을 행복스럽게 해 줄 것으로 믿었던 세상, 곧 인간과 물질은 도리어 인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서로 지배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서로 한없이 괴롭히고 아프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의 애환과 가슴앓이 속에서 인간은 영락없이 병들고 죽어갔던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자기를 떠난 아들을 아버지는 항상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을 전과 똑같이 사랑했습니다. 그 아들이 자기를 떠났기 때문에 죽었지만 그 아버지의 가슴 속에는 사랑 때문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그 집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잃어버렸지만 그 아버지의 마음 속에는 항상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눈 속에는 창조와 부활의 기적이 보이는가 봅니다. 아버지는 범죄한 아들, 자기를 떠난 아들을 그리워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모든 존재의 목적인가 하면 이유요 최고가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행위는 단순히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노와 심판 가운데서도 무한한 은혜의 행위가 무지개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하늘 보좌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자비롭고 은혜로운 빛으로 충만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당신 속에서 발생하는 그칠 줄 모르는 영원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위하여 몇 가지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됩니다. 첫째, 아버지는 자기를 떠난 아들을 위하여 제일 좋은 옷을 만들었습니다. 옷은 영광과 신분을 말해줍니다. 아버지가 만든 옷은 보통 옷이 아니라 왕자의 옷입니다. 이 옷은 아들이 돌아올 때 그 아들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또 이 옷은 아버지와 온 집안과 세상에서 아버지의 사랑받고 자랑스런 아들의 입장을 세워 주기 위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랑의 기초는 의에 있고(고후5:21) 하나님은 모든 의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세계질서를 송두리채 모욕한 아들을 법없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가슴 속에 심겨진 공의도 허락지 않는데 하물며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이 그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죄지은 인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행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세우고, 하나님 자신을 거부하지도 않고, 행할 수 있는 구원행위가 있어야 했습니다. 인간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가 결정한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속에 계신 독생자가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뒤집어 쓰고 죽는 일입니다. 그래서 독생자의 죽음은 법적으로 인간의 죄를 도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독생자의 부활은 법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외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만드신 제일 좋은 옷은 사죄와 칭의의 옷입니다. 이 옷은 하나님의 독생자요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옷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둘째, 아버지는 돌아올 아들을 위하여 가락지를 준비하였습니다. 가락지는 권세를 상징할 뿐 아니라 영원불변한 약속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금가락지를 끼워줌으로 불변하는 사랑을 확증하고 고백합니다. 아버지는 생각했습니다. "내 아들이 돌아오면 이 반지를 끼워주리라. 내 사랑이 영원불변하다는 증거로 은혜로운 약속을 주리라. 나의 영원한 성령을 주리라. 다시는 내 아들을 놓치지 아니하리라"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
셋째,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올 아들을 위하여 신발을 준비하였습니다. 신발은 돌아온 아들의 새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엡 6:5에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는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위해 그 아들에게 알맞은 삶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 아들을 어떻게 키울까? 어떻게 살게 할까?" 아버지의 가슴은 아들에게 대한 계획으로 부풀었습니다. 돌아온 아들이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삶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보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1-14).
넷째, 아버지는 자기를 믿고 돌아오는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준비하였습니다. "이 예쁘고 살진 송아지를 내 아들이 돌아올 때 잡으라" 이 아버지의 친절한 배려를 보세요. "내 아들이 얼마나 배고팠을까? 아팠을까? 고생했을까? 빚졌을까? 내가 내 아들을 먹이리라. 치료하리라. 그의 슬픔과 고독을 위로하리라. 빚을 갚아주리라" 아버지의 마음은 단순합니다. 아버지는 오직 당신의 마음만을 믿고 돌아와 준 아들이 거저 고마울 뿐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나님은 영혼을 구원한 당신 아들의 눈에 보이는 영역인 현실적인 문제까지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아프고 배고프고 슬픈 우리의 삶을 치료해 주시고 해결해 주시고 채워 주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원하노라"(요삼 1:2).
이제 마지막으로, 지금 사람과 하나님에 대해서 은혜로운 말씀을 하시고 계신 예수님을 주목해 봅시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현인이나 철학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유일하신 분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삶과 교훈, 죽으심과 부활, 승천 그 자체가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요 복음내용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돌아온 아들과 똑같은 우리 자신의 회개를 고백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죄함이고 의로우심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며 성령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살진 송아지를 우리의 현실적 필요를 따라 잡아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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