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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식과 씨
    2002-10-16 11:02:30   read : 2905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 9. 29 // 창세기 12:1-18

    (복의 근원-④)

    I. 양식과 씨

    오래전 청교도들이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을 찾아 떠났습니다. 항해는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이 걸렸고 넉넉하리라고 생각했던 양식은 동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얼마동안은 바다에서 날고기를 잡아 허기진 배들을 채워 보지만 노약자들은 하나 둘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죽어갔습니다. 밥 달라 애원하다 죽은 어린아이 하나를 바다에 던지며 몇몇 사람들은 “육지에 내렸을 때 종자로 쓰기 위해 남겨둔 옥수수, 밀, 보리 등 씨앗들을 죽어 가는 아이들을 위해 삶아 먹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한 지도자는 울며 호소했습니다. “내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죽은 아이를 바다에 던지면서 여러분만큼 나도 아팠습니다. 그러나 이 종자는 배고픈 누구 하나가 한번 먹고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씨를 뿌려 그 열매를 먹고 자자손손 우리의 후손들이 먹어야 할 씨앗입니다.” 이것이 양식과 씨앗의 차이입니다.

    양식만을 찾는 것은 동물적 본능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씨앗을 찾습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종자를 삶아 먹지는 않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양식이 있고 씨앗이 있습니다. 양식은 지금을 위한 것이라면 씨는 내일을 위한 것입니다. 양식은 나를 위한 것이라면 씨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양식이 순간을 위한 것이라면 씨는 영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양식과 씨」 입니다.



    II. 사건의 흐름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화려한 대화보다는 배경과 분위기를 통해 청중의 깊은 감정을 건드리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22장은 많은 대화보다는 배경에 깔려 흐르는 분위기를 통해 한편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 셋 사이에 비정함과 또 한편 주인공들의 종교적 순박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펼쳐지는 드라마를 따라갈 때 긴장감을 풀 수 없을 만큼 사건이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때로는 말없이 화면만 지나가기도 하고 간혹 해설자가 사건의 전개를 일러주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생명처럼 소중한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지만 어느덧 하나님보다 아들이 더 소중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토록 사랑스런 아들을 모리아 땅 어느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불살라 제물로 드리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아침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갑니다.

    사건은 말없이 이렇게 사흘이 진행됩니다. 네 사람 사이의 침묵과 아브라함의 부끄러웠던 심정을 4절은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그리고는 두 종을 산 아래 남겨두고 아들 이삭에게 나무장작을 지우고 자신은 칼과 불을 손을 들고 산에 오릅니다. 또 말없이 한참이나 등산이 계속됩니다.

    오랜만에 이삭이 아버지에게 입을 열었습니다. “불과 나무는 준비되어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 한 마디는 지금까지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든 결단과 인내를 일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당황한 아브라함이 대답을 합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부자간에 주고 받은 짧은 한 마디는 읽은 이들의 가슴을 사무치게 할 만큼 찌릿한 아픔을 남깁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두 구절 즉,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에 칼을 들고 아들을 잡으려는 순간까지는 한 동작 한 동작 어떤 일이 있었을까? 독자들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는 여유를 줍니다. 그 절박했던 일들이 황급히 이루어진 일인지? 많은 갈등과 설득과 다툼이 있었던 것인지? 무거운 침묵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들을 생략한 것인지? 상상의 나래를 펴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들고 아들 이삭을 찌르려는 순간 아브라함을 부르는 다급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2절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네 사랑하는 네 아들, 네 독자 - 네 것, 네 것이라고 주장했던 하나님이 이제는 내가 받았다 “그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그” 라는 단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본 동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을 되돌려 주시며 이 사건의 결말을 축복으로 맺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열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2:17-18).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내용과 흐름입니다.



    III. 씨를 통한 축복

    본문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어떻게 자식을 죽일 결심을 할 수 있었는가? 아브라함이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아브라함의 믿음은 도대체 어떤 믿음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둘째, 이와 함께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100세에 낳을 수 없는 자식을 낳게 하시다니 이제 그 아들을 바치라니? 우리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고 전적인 신뢰를 해야 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어떤 복을 주시려고 그토록 엄청난 시험을 하신단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해 봅니다.

    창세기 12장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축복이 나오며 오늘 본문 이 엄청난 시험을 통과한 다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살펴보면, 오늘 본문의 축복과 창세기 12장의 축복과는 분명한 한 가지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12장에는 축복에는 “씨”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씨”란 말이 17절 18절에 세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12장은 아브라함을 향한 원론적인 축복입니다. 15장 3절에 보면 “주께서 내게 씨를 주시지 아니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22장 오늘 본문에 와서 씨에 관한 축복을 하십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22:18) 지금까지 약속했던 모든 축복이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참된 복의 성격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을 받아 나 혼자 누리고 나 혼자 먹고 즐기면 양식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면 그 복이 씨가 됩니다. 씨는 또 다른 많은 복의 열매를 맺습니다. 양식은 일시적으로 내게 기쁨이 되지만 씨는 영원히 내게 기쁨이 되고 만민의 복이 됩니다. 받은 복을 내것이라 주장하면 양식이 되고 하나님께 드리고 되돌려 받으면 씨가 됩니다.

    씨로 말미암아 - 여기서 “말미암아”라는 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구원을 얻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복을 받아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양식을 먹고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 것이 아님을 깨닫고 하나님의 것임을 선포하고 깨끗이 불살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사는 사람은 씨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사십니까?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은 양식입니까? 씨입니까? 여러분의 자식은 여러분의 기쁨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양식입니까? 아니면 천하 만민의 복이 되는 씨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부여해 주신 은사는 양식입니까? 씨입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의 비전은 양식입니까? 씨입니까?



    IV. 내 것, 하나님의 것

    우리는 본문을 읽을 때 아브라함은 너무 큰 믿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시니까 아무런 갈등도 없이 그냥 쉽게 아들을 바쳤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본문의 결론을 잘 알고 있고 늘 익숙하게 듣던 말씀이기 때문에 즉, 익숙성 때문에 그 깊은 맛을 놓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의 이 요구는 너무나 순종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우선 본문의 명령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과 일치하지가 않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수 차례 네 몸에서 나온 자식을 통하여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여 번제로 바치라니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둘째로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도 일치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적어도 자식을 죽여 제사하기를 원하실 만큼 잔인하신 분도, 무분별하신 분도, 비인격적이신 분도 아니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런 명령을 하시는 것일까? 작은 믿음을 가지고는 납득도 이해도 되지가 않습니다.

    셋째 그렇다고 하면 왜 이런 명령을 하시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조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아 어차피 그 아들은 네가 얻을만해서 얻은 아들이 아니다. 그 아들은 내 것이다. 내 곁에 두고 싶다”고 한다든지.

    “아브라함아 인간의 죄가 너무 커 짐승의 피만 가지고는 안되겠다. 너희 시대에 죄악이 관용해졌으니 너희 시대 사람들을 대표해 네 자식을 바쳐라” 한다든지.

    “아브라함아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네가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너의 결정적인 희생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일이다”라고 말씀을 하셨다면 이해 못할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이유나 논리적 설명이나 설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냅니다. 절대 순종, 절대 신앙, 절대 충성을 보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삭은 단순한 아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요 이스라엘의 미래요 수많은 민족의 구원의 약속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다는 얘기는 모든 것을 드렸다는 말입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삭의 번제 사건을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있었던 한 에피소드로 전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삭의 번제 사건은 야훼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갈등 앞에서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긴장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무조건 용납하십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무조건 순종하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마음도 원하고 몸도 원하십니다. 재능도 원하고 재물도 원하십니다. 우리의 전존재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도 여전히 모든 것이 자신의 것입니다. 모두 내가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없는 하나님도 나 없는 세상도 아무런 가지가 없다.’ 이것이 이기적인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이지요. 재산도 내 것, 돈도 내 것, 권력도 내 것, 사업도 내 것, 신앙도 내 것, 천당도 내 것, 예수님도 내 것, 하나님도 내 것, 성령의 능력도 내 것...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것들이 나의 만족을 위해 쓰여진다면 그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그러나 이삭이 하나님께 바쳐질 때 “하나님께 드립니다” 결단할 때, 하나님은 어린양, 양식과 재물을 준비해 주시고 이삭을 아브라함 품에 되돌려 주십니다. 씨를 주십니다.



    V.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토록 엄청난 순종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해도 안되고, 납득도 안되고, 모순 투성이라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이삭을 통하여 복을 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삭을 죽이고 바치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이 두 말씀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순이 될 수 없다. 나는 두 말씀을 다 믿기로 한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결단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 그러나 이삭은 결코 죽지 않는다. 죽어도 산다. 어떻게 살 수 있을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이것조차 가능하다. 부활이 뭔지도 모르고 부활의 개념도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 “돌아오리라”는 동사의 주어가 히브리 원문에 복수 we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둘”이 올라가 “하나”를 죽이고 다시 돌아올 때 복수 즉, “둘”이 오리라고 말합니다. 비록 내 아들 이삭이 각이 떠져서 불에 타 죽고 없어진다 해도 하나님은 내 아들을 되돌려 주신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굉장한 믿음이지요.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억지 추측이라고 느끼시는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역사가 흐른 어느날 신약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8-19).

    내가 죽여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다. 이 놀라운 확신이 아들 이삭을 드리는 결단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위기에 부딪혀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문제에 부딪혀 봐야 그 높낮이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막다른 골목에서 부활신앙을 고백하고 승리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순종만 하고 사는 사람, 계산 가능한 헌신만 하고 사는 사람은 오늘 본문을 이해할 수도 없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사람들에겐 이해 가능한 축복만 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이란, 언제나 믿음의 그릇만큼 주어집니다. 100만원 주었을 때 겸손하던 사람이 일억을 주었을 때 교만하다면 그 사람의 그릇은 100만원 밖에 안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신앙은 자신의 이성, 경험, 이해,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이 있었습니다. 왜요?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씨 신앙입니다. 씨는 땅에 묻히고 썩어질 때 열매가 맺혀집니다.

    신앙인 가운데도 양식으로만 사는 사람이 있고, 씨를 받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식만 먹고 사는 사람이 있고, 기적을 먹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땀으로만 사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단했습니다. 나는 드린다. 그러면 하나님이 되돌려 주신다. 나는 포기한다. 하나님이 세우신다. 나는 죽인다. 하나님이 살리신다. 나는 바친다. 하나님이 갚아주신다. 이것이 부활신앙, 씨 신앙입니다.



    VI. 꿈땅비전

    드디어 아브라함과 이삭 - 두 사람은 모리아 땅 어느 산에 올랐습니다. 실제로 이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고대 히브리어 번역본에는 “모리아”란 말이 없습니다. 시리아 번역본에는 “아모리 사람의 산”으로 되어 있고 70인역에는 “높은 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후대에 많이 연구하고 번역한 라틴어 번역본 우르가다에서는 꿈의 산, 환상의 산, 비전의 산 즉 “꿈의 동산” - 꿈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황급히 하나님은 만류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진정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알았노라”(22:12).

    여기 “이제야”란 말이 참 중요합니다. 이제야 이전에는 이삭이 양식이었습니다. 이제야 이후에는 그 이삭이 씨가 되는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의 전환점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뒤를 돌아다보니 수양 한 마리가 제물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했던 말이 예언처럼 되었습니다. 14절 보니까 아브라함은 그때부터 그 산을 여호와 이레 -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고 불렀습니다.

    라틴어 번역본을 지지했던 E.A. 스파이저 같은 구약학자는 모리아산 보다는 「꿈땅 - 비전의 산」이라고 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말보다는 「주의 산에는 비전이 있다」- “꿈땅비전”이라는 번역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꿈땅비전”이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비전을 가져다 준 사건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삭이 죽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업, 은사, 가족 - 가장 소중한 것들로부터 씨를 발견한 것입니다. 영원한 비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향한 사명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양을 잡으면서 아브라함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지금까지도 수없이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심정이 다릅니다. 의미가 다릅니다. 지금 죽어 가는 양은 바로 아들 이삭입니다. 자기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삭은 피를 펑펑 쏟으며 내내 소리지르며 죽어 가는 양을 볼 때 어떤 감격이 있었을까요? 그 양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가슴에 밀려오는 고동소리가 있었습니다. 커다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아, 지금까지 제사를 드리면서 이 깊은 의미를 몰랐구나.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 엄청난 의미를 몰랐구나. 이것이 예배요 신앙생활입니다.

    예배는 내가 죽는 사건입니다. 신앙은 가장 소중한 것을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입니다.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을 대신해서 죽는 한 마리 양은 짐승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이 소중하고 귀하지. 죽이려 하니까 많이 아팠지. 난 너를 위하여 내 아들을 죽일 것이다. 진정한 재물이나 축복의 씨앗은 양이나 소가 아니다. 네 독자 네 아들, 내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한 시간 예배를 위해 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얼마나 큰 희생을 하셨습니까? 독생자를 죽였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헌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영광스러운 교제는 무엇입니까?

    ♪ 내게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거예요. 눈으로 사랑을 그리지 말아요.
    입술로 사랑을 말하지 말아요. 내게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거예요.

    거기에 비로소 비전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이레입니다. 비전의 산이 됩니다. 우리는 예배시간마다 가장 귀한 것을 꺼내놓고 그것을 칼로 찌르고 불사르고 죽이는 것입니다.



    VII. 맺으며

    묻습니다. 여러분 각자의 이삭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돈은 드리는데 마음과 몸을 드리지 못합니다. 늘 시간의 우선순위가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마음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돈 문제만 나오면 가슴이 쪼그라들고 왜소해지다 못해 시험에 듭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하지만 사업체는 내 것 인 줄 압니다. 또 어떤 이는 다른 것은 다 하나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자식문제 만큼은 내 생각이 조금 있습니다. 자식이 우상입니다. 자신의 나쁜 습관을 죽이지 못합니다. 자신의 야망, 자존심이 너무 강합니다.

    예배나 신앙생활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이삭을 발견하고 그 이삭을 죽이고 바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소망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양식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양식에 생명을 걸고 살지 마십시오.

    축복의 씨가 되십시오. 씨를 위해 사십시오. 당신의 모든 환경이 영원한 축복의 씨가 되게 하십시오. 사업도, 자식도, 자기 자신도, 영원한 씨가 되어질 때에 하나님의 진정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배가 고파도 종자를 먹지는 않습니다. 그 씨는 자손 만대 천하 만민이 함께 먹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양식은 한순간 내게 기쁨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 땅의 배설물로 썩어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씨는 내가 주님의 영광스러운 존전에 섰을 때에 두 팔 벌려 쌓인 씨들이 나를 반겨주게 될 것이고, 그것은 내가 영원히 먹고 살게 될 것이며 이 땅에서도 자자 손손 그들이 내 자손들이 먹고 살아야 할 소중한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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