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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정의
    2002-10-16 10:01:34   read : 234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10-06 // 마26:26-29

    오늘은 예수님의 성찬을 우리가 나누면서 은혜받는 성찬주일입니다.
    저는 오늘 성찬주일에 성찬식을 통해서 `정의`, 그 중에 `예수님의 정의` 우리 믿는 성도들이 이루어야 할 그 정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 `정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에 보면 `정의`라고 하는 것은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라 했습니다.

    오늘 이 사회를 위하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인 우리 자신을 위해서 `옳고 바른 도리`, 그것이 정의라는 것입니다. 그 옳고 바른 도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은 이 사회 전체가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고 구성원인 모든 사람 한사람 한사람이 기회나 권리를 공평하게 보장받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땅에 법과 질서를 세우고, 우리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기회와 권리를 공평하게 보장받는 정의로운 평화와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두 집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여러분이 이 속에서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충청도, 조그마한 산골 마을에 환경이 서로 비슷한 두 집이 위 아래로 나란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윗집에서는 항상 웃음과 행복의 향기가 넘쳐흐르는 가 하면, 아랫집에서는 이틀이 멀다 하고 서로 싸우며 쪽박 깨지는 소리가 담 너머로 울려 퍼지곤 했습니다.

    두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얼마 전에 장가든 아들 내외가 살고 있는데, 어제 아침에 위 아랫집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시어머니가 가마솥에 밥을 앉히고 새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일렀습니다. 갓 시집온 며느리는 밥 짓는 경험이 없는 터라 밥물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계속 불을 때다가 밥은 타고 솥은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놀란 며느리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을 보시던 시어머니는 "아가, 미안하다. 내가 그만 깜박 잊고 물을 너무 적게 부어서 그렇게 됐구나"하면서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어깨를 감싸고 위로했습니다.

    그러자, 세수하러 나오시다가 그 광경을 보신 시아버지는
    "아니다. 아니다. 내가 어제 밤, 부엌에 땔감을 너무 많이 들여 놓아서 그랬구나!" 라고 하며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그때 마침 일거리를 마치고 논에서 돌아온 아들은
    "아닙니다. 아버지! 아침에 제가 너무 물을 적게 길어 와서 그렇게 됐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밥은 타고 솥은 금이 갔지만 온 식구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이 참으로 흐뭇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바로 똑같은 상황이 아랫집에서도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도 시어머니가 밥을 앉히고 새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했습니다. 이 며느리 역시 밥은 타고 솥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욕설을 퍼붓고 구박을 하면서 하는 말이
    "밥 하나 못하는 것이 시집와서 남의 솥 단지까지 깨먹었으니, 이 집은 너 때문에 망했다 망했어!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면서 가슴을 치며 한탄했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는
    "아니, 내가 일부러 그랬어요?" 하며 시어머니한테 대들었고, 이 광경을 보시던 시아버지는 "요것이, 시방 어디다 대고 말대꾸하느냐!" 하며 며느리에게 소리소리 지르며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신랑은 드디어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게 되었고 며느리는
    "야, 죽여라! 죽여!" 고래 고래 고함을 치자 아랫집은 그 날도 아침부터 난리가 나서 온통 동네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사건이 두 집에서 발생했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 우리의 교회, 그리고 이 사회가 어떠한 사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토인비`는 "미래를 산다"라고 하는 그의 책에서 많은 역사 연구 끝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 죄가 없었던 때는 없다. 죄가 없는 나라, 죄가 없는 민족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죄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죄가 반복되면 안 된다. 그럼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뻔히 알면서도 죄가 되풀이될까?
    왜 반복되고 계속 죄악에서 헤어나질 못할까? 간단하게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역사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태도가 없기 때문이다.
    책임, 이 나라 경제, 정치, 모든 문제에서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책임을 인정해야 되고 책임을 질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책임, 부정해 버리고 맙니다. 그 어느 것도 책임을 밝혀 본 일이 없습니다. 밝혀지지도 않습니다. 바로 책임소재가 분명치 아니하므로 죄는 시정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둘째, 집단행동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집단행동은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집단행동은 그대로 `의`라고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장한다고 옳은 것이 아닙니다. 집단행동화 됐다고 해서 그게 선으로 지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악이 집단화 될 때, 그 악 자체가 정당화되고 합리화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힘, 집단화 되는 힘을 정의로 기초로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멸망의 징조라는 것입니다.

    셋째, 궁극적 원인은 자기중심이다.
    내 생각, 내 주의, 내 철학, 내 지식, 자기 중심, 그리고 나를 위하는 생각, 내 명예, 내 장래, 내 욕심, 이것 때문에 망조가 드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 앞에 겸손히 무릎 꿇어야 합니다. 객관적인 의를 수용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의, 그의 의,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뜻, 이것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성찬식을 거행하시는 주님의 사건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성찬식이 유월절 만찬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월절 잔치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구원
    받고, 해방 받은 것을 기념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새 삶을 살게 된 것을 감사하
    고 찬양하는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양고기를 먹습니다. 양고기의 피를 바르고, 양고기를 먹음으로, 주님이 양을 대신해 살려주신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유월절 음식을 나누시면서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양이 죽어 피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죽어 너희를 구원한다고 하십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을 때는 양이지만, 온 인류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죄를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죄인은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벌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신 죽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의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하기 때문에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보내신 예수님, 그 분은 언제나 조건없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요, 너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주는 내 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돌아보면 얼마나 우리를 사랑했는지, 얼마나 그 자신을 내어 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 품군의 비유를 보십시오. 아침에 일찍 와서 일한 사람과 오후5시에 와서 일한 일군에게 똑같은 품삯을 줍니다. 우리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항상 서열을 나눕니다. 누가 높은가? 누가 능력이 있는가?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세상이 다 버린 사람이라 할 지라도 한 생명 한 생명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기준으로 보면 다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죄 지은 자를 그냥 돌려 보냅니까?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 앞에서는 이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을 왜 고쳐 주시고, 왜 살려주십니까?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냥 주는 사랑입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줄 뿐 아니라 그 허물을 대신 갚아 주는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요, 주님의 정의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참된 평화, 참된 행복, 그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성찬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이신 주님의 피 이신 그 떡과 잔을 마시면서 나는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 주님과 나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안에, 주님이 내 안에, `주는 포도나무요, 나는 그의 가지`입니다.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줄기가 주는 양식을 먹으면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어떤 열매겠습니까? 감나무는 감을 맺습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붙어있는 그 가지는 역시 주님의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입니다.

    어떤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까? 부자? 권력자? 출세? 출세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남의 부족과 허물과 죄를 대신 갚아주는 일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되는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정의, 주님의 사랑을 이 땅에 실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을 보면서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많이 받았지만, 아볼로파, 바울파, 게바, 그리스도파, 저마다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주간동안 이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이 교회에 가서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만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주간동안
    내 생각만 옳고, 내 의가 옳고, 자기 주장하고, 이것만 생각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 생각 밖에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 주님의 형상을 닮는 자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 예수님의 정의를 이루어 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우리 신앙인의 참된 목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하루 24시간, 늘 주님의 사랑을 위해 살기 위해서, 늘 기도하고, 고민하고, 이 일에 마땅히 은혜를 받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사람의 지혜가 무엇이냐?`,`사람의 강함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서,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 못하고, 사람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함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물을 덮어주고, 갚아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 지고,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정죄하고 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정의를 위하여 나를 희생하고 헌신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사랑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고, 죄인을 위해서 대신 갚아주는 그런 희생의 헌신을 통한 사랑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이 제일이 되는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소망의 원천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 소망의 원천은 나의 잘난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고, 나를 사랑하는 긍휼의 사랑으로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땅의 예수님의 정의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뉴욕 시장 가운데 세 번 선임되어 역임한 다음, 4선이 되었으나 거절한 `작은 꽃`이라는 뜻을 가진 라 과디아(Fiorello La Guardia, 1882-1947)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뉴욕 시민의 사랑을 얼마나 받았던지, 뉴욕에는 `라 과디어`의 이름을 딴 비행장이 있습니다. 그는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와 국회의원을 하다가 뉴욕시장이 된 사람입니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재판부 판사 일을 할 때의 일입니다.
    한번은 가게에서 빵을 훔친 한 노인을 재판하게 되었습니다. "왜, 남의 가게에서 빵을 훔쳤습니까?" 노인은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너무 배가 고플 때 가게 앞을 지나다가 나도 모르게 빵을 집었습니다." 설명을 듣고 난 판사는 "당신의 죄는 10달러 벌금형에 해당됩니다."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리고 라 과디아 판사는 지갑에서 10불을 꺼내어 자기 모자 속에 넣으며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의 거리에서 헤매는 동안, 나는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것에 대한 벌금을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나 같은 죄를 지었기에 벌금을 내실 분은 이 모자에 넣기 바랍니다." 하고 모자를 돌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걷힌 벌금이 47불이었습니다. 그 돈을 받은 노인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갔습니다. 적어도 그 노인은 굶어 죽을 정도로 굶주려도 다시는 빵을 훔치지 않으리라 기대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영적 권위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영적 권위를 가졌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가진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마땅히 주님의 정의를 이 땅에 세울 수 있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금요일 월드 비젼 행사에 참석했었습니다. `한비야`라고 하는 소설가가 남부 아프리카에 가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곳의 기근이 너무 심해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병든 사람들이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어제 결혼식장에 갔다 오면서, 대학로에서 젊은이들이 까만 상복을 입고 데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 `글리백`이라고 하는 이름이 쓰여져 있는데, 그것은 백혈병 치료제입니다. `글리백 한달 약값이 300만원` 하고 데모를 합니다. 왜 그런 데모를 하겠습니까?

    여러분, 사람이 약을 만드는 것은 병든 사람을 고쳐서 건강하게 하고, 이 땅의 사람들이 보다 잘살게 하기 위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약값이 한 달에 300만원이랍니다. 하루에 10만원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잘 산다 해도, 그 약 사먹기가 아주 힘이 듭니다.

    여러분, 의사의 직분이 무엇입니까? 병든 사람 고쳐서 건강하게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원에 한번 갈 때마다 돈이 얼마나 듭니까?

    그런데, 월드비젼에서 남부 아프리카의 어려운 이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는데, 한 가족이 두달치 먹을 식량을 받아 들고는 그렇게 좋아하고 갑니다. 맨트가 나오는데, 이들의 두달치 먹을 식량 값이 얼마인줄 아십니까? `이만원`이랍니다. 한쪽에선 `이만원`이 없어서 한 달에 이만원이 없어서 온 가족이 굶어 가고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약을 먹는다는 것은 사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약을 만듭니까? 왜 의사가 됐습니까? 여러분, 왜 부자가 되었습니까? 다 부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주님의 정의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한비야`씨는 "한국에도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이 있는데 당신은 왜 이 사람들을 돕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이니까요."

    사람이면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생명 귀하듯, 남의 생명 귀하게 여길줄 알아야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내 버려 두는 것이 사람입니까? 거기에 무슨 사상이 있고, 논쟁이 있고, 무슨 원칙이 있겠습니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에 대해 무슨 원칙이 있겠습니까?

    주님이 조건 따지셨습니까? 너는 사마리아 사람이니까, 안 된다. 너는 유대인이니까, 된다. 너는 돈 있으니까 되고, 너는 돈 없으니까 안 된다. 주님이 언제 그러셨습니까?

    너의 죄를 위하여 흘리는 바, 네 희생의 피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죄인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요, 주님의 정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나라가 이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참으로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를 이 땅에 이루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 교육열이 얼마나 대단한지, 미국 LA에서도 우리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위장 전입을 하는 것이 사회에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위장 전입이라고 하는 것은 더 살기 좋은 동네에 가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좋아서 미국 가서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 곳에 가서도 또 옮겨갑니다. 더 좋은 곳이 있으면 더 좋은 곳으로 옮겨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곳 찾아서 다니는 것, 언제까지 찾아서 다니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 이 곳을 남들이 위장 전입 올 정도로 좋은 동네로 만들면 안되겠습니까? 내가 이 사람하고 헤어지고 다른 사람하고 살면 더 잘 살 것 같습니까? 내가 살고 있는 이 가정이 지옥같은 가정이라고 할 지라도, 이 가정을 내가 천국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까?

    우리 교회는 이 지역, 이 곳에 세워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장소를 옮기자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마는 이 자리를 지키자고 했습니다. 더 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강남을 가던지, 신도시를 가던지, 우리가 이 재산 팔아서 새로 짓는다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엄청난 대가가 필요합니다.

    전 항상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 때문에 이 지역사회가 변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교회 때문에 이 동네에 사는 곳이 좋아지고, 이 교회 때문에 이 동네의 땅 값이 올라가고 말입니다. 남들 못하면, 우리가 이 곳에 학교라도 세워서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정말 좋은 학교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누가 저한테 "목사님, 목회 어떻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저는 늘 "선교적 목회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무원, 직장, 군인들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선 높은 직급에 있으면 큰 소리 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교장 쯤 되면 큰 소리 칠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도 별이라도 있으면 큰 소리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직장, 학교, 군대에서만큼 사회에서도 영향력이 있을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 사회에 나와서도 그렇게 인정받고 존귀함 받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 아닙니까? 목사도 교회 안에서는 큰 소리 칩니다. 그러나, 사회에 나가면 그 목사 아무도 알아 주지 않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큰 소리 칩니다. 그러나, 나가서도 큰 소리 치고 영향력 있게 행할 수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목사, 장로, 장로, 권사, 집사, 성도들 마찬가지입니다. 누구 하나 이 안에서는 큰 소리 치지만, 밖에 나가서도 영향력 있게 일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뿐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도 목회하는 심정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선교적 목회`라고 이름을 정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를 만들어야만 이 시대에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물건을 하나 팔더라도, 여러분 마음속에 주님의 정의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 물건을 파는 것은 저 사람의 돈 때문이 아니라, 저 사람의 필요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들이 개교회주의적으로 되어 갑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가 연합해서, 더불어 이 땅에 `예수님의 정의`를 이루어 가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이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남을 도와 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복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잘 믿어서 부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정의를 이루어 나가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향력 있는 권력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대통령도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의를 이 땅에 세워 나가야 합니다. 많이 배우십시오. 그래서, 학생들에게 그런 예수의 정신을 이루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정의`, `예수님의 사랑` 그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일터, 우리 지역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기를 원할 때에 주님의 성찬의 참된 의미로 참여하게 될 줄로 우리는 믿습니다.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에게 이런 성도의 다짐과 이런 성도의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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