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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병이어의 기적
    2002-10-15 14:35:26   read : 249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6:1-13절 // 02/09/29

    지난주일 밤, 반강제적으로 3남전도회 회원들에게 이끌려 밤 낚시를 가게 되었습니다. 반강제적이라 함은 제 의사가 별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실 저는 낚시를 해 본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장비를 갖추고 낚시를 떠나보긴 난생처음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장비를 갖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고, 그것도 밤낚시라는 것을 하기 위해 떠나보긴 처음이었습니다. 떠나는 저에게 아내가 다가와서 하는 말이 "이번에 가서 확실하게 노는 것을 좀 배워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도 노는 것엔 익숙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아뭏튼 갈치낚시를 위해 목표지점인 목포까지 가서 낚시를 드리웠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낚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경험 많은 집사님들이 가르쳐 주는대로 힘차게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몇 번씩이나 다른 사람이 드리우고 있는 쪽으로 낚시 바늘이 '휭'하고 날아가더니 계속해서 옆 사람의 낚시대를 건드리며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안한 생각도 들고 그만두려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함께 갔던 다른 다섯 분보다 제가 먼저 갈치 한 마리를 낚아 올린 것이 아닙니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어찌나 신이 나고 재미가 있든지 그때부터 몇 시간을 더 던졌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단 한 마리도 낚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새벽4시쯤, 더 이상 낚시하기를 포기하고 차에 들어가서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6시쯤 되었을 때,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 보았더니 다른 분들이 갈치를 잡기는 잡았는데 그 날 제가 잡은 것 포함해서 다섯 마리를 낚아 올렸습니다. 여섯명이 밤새 낚아 올린 것이 고작 다섯 마리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낚시경험으로 따지자면 저와 별로 차이가 없는 김준철집사님이 낚아 올린 것입니다. 그래도 갈치회는 먹고 가야 한다고 해 그 자리에서 잡은 갈치 중 한 마리를 회로 먹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너무도 지루했습니다. 추석연휴를 보내고 마지막 귀경 차량이 몰리면서 약10시간 가량 걸려서 안산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짐을 정리하면서 그 날 잡은 네 마리의 갈치를 몽땅 저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날 저는 수지 맞았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분들은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마 집으로 돌아가셔서 "왜 갈치를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한마디씩 들으셨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밝히겠습니다. "그 갈치 제가 가져갔습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낚시가 취미생활에 해당되어집니다. 물론 그 취미가 지나쳐서 생업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도 가끔은 있지만 그래도 여가를 선용하기 위해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낚시나 혹은 고기잡는 일이 생업에 해당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의 필사적으로 그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취미생활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은 하룻밤 꼬박 낚시를 해서 잡은 고기라 할지라도 그것을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업인 사람인 경우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주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먹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거의 필사적으로 매 달립니다. 사실 먹는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기본적이고도 기초적인 욕구입니다. 물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나 양식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공통된 과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은 신앙이나 믿음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현실문제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영혼에 관한 문제이지 먹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세상에 속한 것이며, 세상사람들이 논할 문제이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신앙은 오직 영혼과 미래세계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듣고 싶은 말씀이 어떤 것입니까?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아닙니까? 특히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현실적인 대안을 찾고 싶은 생각들이 많지 않습니까? 가령 예를 들어 주일날 출근하지 않으면 안되는 직장에 다니고 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 혹은 주일날 가게문을 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인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속 시원한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으면 한결같이 "주일날 출근하면 안된다, 그것은 주일성수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지 않습니까?

    또 "주일날 가게문을 열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먹을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지 않았느냐?"라는 말을 듣지 않습니까? 내가 처해있는 상황은 그렇게 할 수 없는데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활과 전혀 동떨어진 말씀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 생각할 때 '신앙은 현실문제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앙은 우리의 영혼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며 깊은 내면의 세계에 대한 것이지 먹고사는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 때문에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주님은 우리의 일상생활 특히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를 안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처럼 뭔가 걱정과 근심이 가득 찬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저 현실문제는 세상에서 해결하고 오직 교회에서는 영적인 문제, 영혼에 관한 문제만 해결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건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루실 때 영혼에 관한 문제, 영적인 문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만나는 문제들도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이런 문제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우리들에게 설명을 하거나 알려주시지 않은 것일까요? 만약 주님께서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이런 문제에 대해 알려주셨다면 현실문제에 대해 방황하지 않고, 현실문제에 대해 갈등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대개 사람들은 먹는 문제를 하나 해결하고 나면 그 다음엔 '어떻게 좀 더 잘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어지면 그 다음엔 잘 먹는 것에서 벗어나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방금 제가 드린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사실 우리의 본성은 언제나 우리자신에게 필요한 것에 얽매여 있게 만들고자 합니다. 주께서 한가지를 해결해 주시면 그것으로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우리의 본성은 자꾸만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을 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런 욕구에 매이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더욱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현실문제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 주님을 모습을 발견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려주시는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내용입니다. 아마 신앙생활하시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온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알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바르게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내용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주님은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막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물론 그들의 관심은 병을 낫게 하고, 새로운 기적을 보고자 함이었겠지만 주님이 보시기엔 그저 길을 잃고 방황하는 불쌍한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옥같은 하늘나라의 비밀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오랜 시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말씀이 너무도 꿀과 같이 달았고,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말씀이었기에 그 말씀 속에 빨려들어 갔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말씀이 주옥같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배가 고픈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곳에 모인 큰 무리들은 배가 고파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 중에 한 사람인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5절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배고픈 그들의 현실을 해결해 주시고자 빌립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그때 빌립은 당황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데나리온은 족히 들 것이며 그 많은 양의 떡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빌립은 주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주님은 그들을 먹이기 위해 '어디서 떡을 사서 먹일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는데 그가 200데나리온으로도 부족하다고 말한 그 밑바닥에는 어떤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일까요? 빌립의 생각에는 먹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각 사람에게 돈을 걷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설령 돈을 조금씩 거두어서 200데나리온을 마련했다할지라도 현실적으로 한꺼번에 그 많은 양의 떡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배고픈 문제를 각자가 해결할 수 있도록 빨리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쪽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그 많은 양의 떡을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돌려보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빌립의 계산적인 태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200데나리온이라는 수치가 즉석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는 상당히 계산이 뛰어난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그의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들을 먹일 수 없으니 내심 빨리 돌려보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는 분명 문제해결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해 책임을 지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필요한 경우 타인을 대신해서 심부름은 할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나서서 남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대해 책임져야 하겠다는 그런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있었지만 실제로 주님을 의지해서 무엇인가? 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자신의 합리적인 계산에 따른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심부름 정도는 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희생해야겠다는 생각이나 어떤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빌립에 대해 적용을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저께 금요기도회때 연말이면 공동의회를 통해 장로님을 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부탁드리고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교회가 장로님을 처음 세우는 일인만큼 정말 신중해야 하고 기도를 많이 하면서 준비해야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읽을 수 있는 판단을 달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교회의 장로님은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분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어려움이나 힘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굳은 의지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의 일에 거룩한 부담감을 가질 수 있는 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배에 잘 출석하고, 중직을 맡아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정말 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느냐? 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책임있는 자세로 앞장서서 희생도 하고, 헌신도 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세워져야 합니다. 계산은 하고, 심부름은 하는데 책임은 지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목회자로서도 그렇고, 장로로서도 합당한 자세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빌립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시험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를 드러나게 하시는 주님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계산도 잘 하고, 합리적인 생각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일을 위해 자신이 조금이라도 희생하려거나 책임을 지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안드레가 한 소년이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내 놓았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그것을 주께 드렸습니다. 소년이 가져온 보리떡과 물고기를 주께 드릴 때 그것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드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치 갈치 다섯 마리로 여러 명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모두 준 것처럼 그것을 가지고 그곳에 모인 큰 무리를 만족시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보고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많은 군중들을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 자리에 앉게 하신 후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 앉은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저희가 실컷 먹고도 열 두광주리가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2절과 13절을 보면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주린 배를, 그들의 필요를 모두 채워주시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전에 살펴보았던 빌립과 대조해서 안드레의 모습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그 많은 사람에 비해 자신이 내어 놓은 것은 너무도 형편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면 식사량이 많은 사람의 경우로 따지면 한 사람의 몫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안드레 자신도 그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아마 그것을 내놓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저런 것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한 소년이 가져온 것이기에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서 주께 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빌립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안드레의 보리떡과 물고기를 받아서 엄청난 일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아마 안드레가 보리떡과 물고기를 내 놓았을 때 가장 비웃었던 사람이 빌립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빌립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빌립의 합리적인 계산방식에 의하면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빌립의 제안을 거절하시고 안드레의 작은 것을 받아들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떡에 대한 문제를 물으실 때 주님은 나름대로 방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시는 이유는 그 일에 제자들을 동참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어떠했습니까? 자기는 그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신이 희생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 일에 동참하려는 생각이 분명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비웃어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는 주님의 일에 어떻게 해서라도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소년이 가져온 작은 것을 주님 앞에 들고 나갔고, 주님은 안드레의 작은 정성을 받아 놀라운 일을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오병이어의 사건 속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책임질 일이나 감당해야 할 일에 대해 그저 팔짱만 끼고 구경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미리 따져보고 계산해 보아서 나에게 유익이 될 것 같으면 뛰어들고 그렇지 않으면 한 발짝 물러나서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분명한 유익이 있지 않는 한, 책임있게 어떤 일을 수행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이 냉소적이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드레는 작은 것이라도 주께 드리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문제 해결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었습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남의 문제인 것처럼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은 절대로 뛰어들지 않습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그런 모습이 없는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적어도 우리 온유한교회 모든 성도들은 빌립과 같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워지게 될 장로님은 더더욱 그런 분이 아니길 소원합니다. 주님은 안드레의 작은 정성과 헌신을 기뻐하셨습니다. 아니 주의 일에 직접 동참해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안드레의 모습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교회의 장로는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발 벗고 나서는 사람입니다. 책임을 져야 할 일에 앞장서서 책임을 지고, 헌신해야 할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문제에 직접 동참을 해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해결해보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도 함께 나타내 보여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때 작은 정성을 통해, 책임지고 참여하고자 하는 모습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 수 많은 군중들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주님을 따라온 것은 병자가 고침을 받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동안 주님은 병자를 고치신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어떤 이들도 자리를 뜨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지금 그들은 말씀에 너무도 갈급해 있습니다. 왜 말씀에 갈급해 있습니까? 너무나 오랫동안 목자없는 양처럼 방황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오랫동안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들은 것이라곤 유대지도자들로부터 율법을 들었고 그 율법으로 인해 자신들의 목이 점점 조여져 가는 고통만 느끼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 주는 은혜의 말씀은 너무도 들어본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말씀으로 은혜 받고 기쁨이 충만해도 배가 고파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배 고픈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서 은혜 받았다고 여러분들의 먹는 문제가 해결되어집니까? 예배시간에 '아멘'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면 먹을 것이 저절로 생깁니까? 아무리 눈감고 오래 기도해도 눈 뜨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 쌀이라도 한 가마 갖다 줄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비꼬아 하는 말이 '교회가면 밥을 줘, 아니면 떡을 줘'하며 비아냥거립니다.

    그것이 우리가 만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교회가서 은혜받는 것은 은혜 받는 것이고 먹는 문제만큼은 나의 노력과 힘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는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고 생각해야지 먹는 문제는 신앙이나 믿음과는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 앞에서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의 육체적 필요에 관심을 갖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은혜만 받고 끝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의 필요에 대해서도 해결해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두 가지를 함께 해결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문제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문제에만 관심이 있지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현실문제에 대해서는 안하무인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삶을 인도하시고 필요에 따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생활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먹는 것은 먹는 것이고, 말씀은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어져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필요를 채우시기에 앞서 영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육적인 일에 필요한 것을 먼저 채우는 사람들은 영적인 일에 등한히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님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참 이상한 것은 육적인 필요를 먼저 채운 사람들은 반드시 또 다른 육적인 필요를 위해 나아가지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영적인 일을 돌보는 일에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육적인 필요를 먼저 채우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영적인 필요를 먼저 채우는 분이십니까? 주님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가볍게 취급하거나 무시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입니다. 영적인 필요를 채우지 않고, 육적인 필요를 채우는 사람들은 신앙의 깊은 체험과 의미들을 깨닫기도 전에 지리멸렬(支離滅裂)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안드레의 작은 정성과 헌신을 통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먹고 나면 그것으로 될터인데 왜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을까요? 어떤 분들은 '12' 이라는 단어에 굉장한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건데 여기서 '12'라는 숫자에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먹고도 남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합당할 줄로 압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도 고백하기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먹고도 남을 만큼 주셨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순전히 우리의 입장을 고려한 주님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5천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유대인들은 숫자를 헤아릴 때 여자나 아이들은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보리떡과 생선을 나누었을텐데 그렇다면 뒤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아무리 축사하고 떡을 떼시지만 언제 없어질는지 어떻게 압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강냉이빵을 무료로 배급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닌 학교는 하루에 한 개씩 주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몇 개가 모자라서 그 다음날 받지 못한 학생부터 다시 나눠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빵의 숫자가 일정한 것이 아니라 꼭 한두개 차이가 났습니다. 어떤 날은 한 개가 더 많고, 어떤 날은 한 개가 적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빵을 나눠주실 때 반대쪽부터 나눠주면 제일 끝자리에 앉은 몇 몇 학생들은 불안합니다. 왜 불안합니까?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봐서 그렇습니다. 원래 계산대로라면 자기도 받을 수 있는데 한 두개가 모자라기 때문에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빵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많으면 안심이 되어도 적으면 불안합니다. 왜 그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 두광주리나 되었을까요? 아마 뒤에서 배급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배려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생각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현실문제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까? 신앙은 영적인 문제에 국한 된 것이며 영혼에 대한 문제를 다룰 뿐 먹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의 노력으로 열심히 사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먹는 문제를 모른 척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를 영적인 문제에 둘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계산을 하면 빌립과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로 돌아가서 그 문제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작은 정성을 주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보잘것없습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한사람도 배불리 먹기엔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참여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결국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일을 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오병이어의 현장으로 초대받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곳은 우리의 영적인 필요와 육적인 필요가 동시에 채워진 장소입니다. 빌립과 같이 뒷짐지고 쳐다보지 않기를 원합니다. 안드레처럼 적극적인 동참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러분의 삶이 풍성하게 채워지고도 열두 바구니 넉넉하게 남은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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