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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하라- 잊지말라
    2002-11-13 14:36:20   read : 4199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년 10월 20일

    구약의 말씀: 미가서 6:6 ~ 8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서신서의 말씀: 요한1서 2:12 ~ 13
    어린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이신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태초로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18:21 ~ 35
    그 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에 비길 수 있다.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랬더니, 그 종이 엎드려서 무릎을 꿇어 애원하기를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였다.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 그를 놓아 주고, 빚을 삭쳐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기를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다 삭쳐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넘겨 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



    오늘은 교회절기로 보면 창조절 여덟 번째 주일입니다. 창조절에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창조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하나님이시라는 점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생명을 위해서 살고 생명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창조질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반드시 하늘이 만든 질서대로만 유지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의 전통적인 문화가 있으면, 그 문화에 저항하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소위 문화가 있으면 반문화도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조질서가 있으면, 창조질서에 역행하려는 또다른 질서가 있습니다. 그 중 한 예가 요즘에 “게놈”이라고 이름 붙인 유전자에 관한 기술 같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창조의 질서, 게놈의 질서대로 움직여 갑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 속에 있는 게놈을, 그 위치도 바꾸고 배열도 바꾸어서 인간이 원하는 대로의 인간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다른 예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착한 일 하고 좋은 일 한 사람한테 상을 줍니다만, 그 반대쪽의 사람한테 상을 주는 데도 있습니다. 그런 상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상은 진화론을 만들고, 자연도태설을 주창한 찰스 다윈의 이름을 따서 “다윈상”이라고 부릅니다. 그 상은 인생을 살되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방법으로 사는 사람, 보편적인 창조질서를 깨뜨리고 극단적으로 역행하면서 그 질서에서 벗어나서 저항하고, 그래서 또다른 유전자가 생겨나게끔 노력한 사람에게 주는 상입니다. 괜히 어려운 말 같은데요,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살을 하되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자살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 다윈상이라는 상입니다.
    그런데 이 상을 작년에 수상한 사람이 남미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25살 난 노동자였습니다. 그 얘기 잠깐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은 노동자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25살 난 남편하고 20살 난 부인간에 불화가 심했습니다. 심하게 싸우다가 8층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남편이 아내를 들어서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워낙 낙후된 노동자 아파트이다 보니까, 전깃줄이 하도 얼키설키 엉겨 있어서, 아내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전깃줄에 딱 걸려 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남편이 그냥 숨돌릴 틈도 없이 창문에서 아내를 향해 뛰어 내렸습니다. 그렇게 뛰어 내렸는데, 남편은 전깃줄에 안 걸리고 바로 땅바닥에 떨어져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상을 준 심사위원들의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혹 그 남자가 아내를 죽이려고 내던졌는데 전깃줄에 걸려서 목숨을 건졌으므로, 전깃줄에 걸린 부인이 땅바닥에 떨어지게 하기 위해, 말하자면 소위 살인을 완수하기 위해서 뛰어내렸을까요? 그랬다면 그것도 특이합니다. 아니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냥 스스로 죽기 위해 뛰어 내렸을까요? 그랬다면 그것은 완전한 자살입니다. 그 어느 경우든 특별한 방법으로 생명을 끊었으므로, 다윈상을 수여합니다.”
    창조 질서라는 측면에서 보면, 사람이 살려고 애쓰는 것이 당연한데, 그와 반대로 주어진 삶을 내던져 버립니다. 반문화적, 반창조적 선택을 합니다. 게다가 이런 상이 있다니, 참 희한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노동자의 경우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에 세계에는 테러라 이름하는 자살 특공대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네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서 상대를 무차별 폭격하는 국가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창조질서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반문화적, 반창조적 행위가 우리 세계에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다윈상은 지금 누구한테 주어져야 합니까? 누가 다윈상의 수상자가 될 수 있습니까? 그 대상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남자만이 아닐 겁니다. 우리 사회 자체, 부당하고 일그러지고 찢겨진 우리 사회 전체가 혹시 이 상을 수상 받아야 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성서 말씀을 통해서 보면, 자기 몸을 죽음으로 내던진 이 사람에게는, 분명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해 주시고 수많은 죄악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주셔서 지금까지 살게 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감사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도 용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불화를 빚은 아내도 용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그 용서에 감사하여 이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빚진 자를 탕감해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감사에 대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을 살펴봅시다. 어떤 왕이 자기에게 1만 달란트를 빚진 신하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1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자기 동료가 100데나리온 빚진 것을 갚지 않는다고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 일을 보고받은 왕은 화가 나서 그 신하를 감옥에 집어넣는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결론으로, 이웃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한테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의 생활과, 감사할 줄 모르는, 아니 감사하지 않는 사람의 생활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1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 얘기가 나왔습니다. 돈 계산 좀 해봐야 되겠는데요, 예수님 당시에 1데나리온은 하루치 임금입니다. 그러니까 100데나리온을 빚진 이 종은 100일 치 임금만큼의 돈을 빚진 것입니다. 1만 달란트는 100데나리온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1달란트는 얼마냐 하면 6,000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 1달란트는 6,000일 동안의 임금 총액에 해당하는 큰 돈입니다. 성서에 하나님께서 달란트라는 복을 주셨으니, 한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다섯 달란트를 주셨으니, 그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지 말고 장사하여 이윤을 많이 남기라고 합니다. 그때의 달란트는 엄청난 액수의 돈입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고 그것은 6,000일 분의 임금이라고 했습니다. 6,000일을 햇수로 따지면 15년입니다. 1달란트는 15년 치 임금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액수입니다. 혹시 다섯 달란트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75년 치 임금을 일시에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신하가 탕감받았던 액수, 1만 달란트는 데나리온으로 치면 6,000만 데나리온입니다. 6,000만 일 분의 임금, 햇수로 따지면 15만 년 동안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15만 년 동안의 임금 총액에 해당되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단 100일 동안의 임금만큼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작은 아량도 베풀지 못하는 건 당시만 아니라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돈 이야기를 자꾸 해서 뭣합니다만, 당시의 유대 땅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시절에, 그래도 경제형편이 낫고 부유하다고 일컬어지던 곳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역과 그 위쪽에 있던 사마리아였고, 그 다음으로는 이두매였습니다. 이 세 지역이 비교적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1년 동안 로마제국에 바치던 세금 총액이 600달란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선교활동을 펴시던 갈릴리 지역과, 변경인 뵈레아 지역은 아주 가난한 지역이어서,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과 인구가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 로마제국에 바친 세금 총액은 200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600달란트, 하나는 200데나리온! 그 차이가 얼마냐 하면, 1만 8,000배입니다. 말하자면 세금액수로 따지면, 팔레스타인의 부유한 지역과 가난한 지역 사이에는 1만 8,000배의 빈부격차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갈릴리의 가난한 자들에게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타난 비유의 말씀을,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로의 복음을 전했을 때, 갈릴리 사람들은 뭐라고 응답했겠습니까? 그야말로 절대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에다, 하나님의 은혜까지 주신다고 감격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1만 8,000배나 더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은 아마도 도전장으로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남과 북 사이에도 빈부격차가 심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심한지를, 통계 수치마다 달라서 비교하기가 간단치는 않습니다만, 수출입 무역량을 비교하면 된다는 견해가 있어서 그 방식으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우리 남쪽은 수출과 수입 합친 무역고가 연간 3,700억 달러가 된다고 하고, 북쪽은 한 40억 달러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것만 따진다면 남쪽이 북쪽보다 180배 부자입니다. 우연입니까? 갈릴리와 유대 지역의 차이는 1만 8,000배, 남과 북의 차이는 180배! 어느 경우든지 엄청난 격차가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는 나눔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나눔이 없었습니다. 우리 남과 북 사이에도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근자에 약간의 나눔이 있습니다. 그러나 논란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누는 것입니까? 우리 남쪽은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말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한다면, 그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북의 사람들을 품을 수 있고 그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복 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감사를 잊고 남을 용서하지 않는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제가 카뮈의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알베르 카뮈라는 사람은 실존주의적 소설로 유명하지만, 재미난 얘기를 쓰기도 했는데 제가 읽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자꾸 먹고, 나이를 먹어 가면서 심리적, 정신적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 변화를 카뮈는 이렇게 말합니다. “젊을 때, 나에게는 강한 열정이 있었다. 말하자면 패션(passion), 패션이 있는 것이 젊음입니다. 누구나 정열적인 사랑과 정열적인 힘을 가지고 열심히 삽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청년시절에 가졌던 패션만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웃이 가진 패션도 보고, 옆 사람이 가진 정열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일방적인 열정이 아니라 상대방의 열정과 나의 열정이 만나서 이루는 묘한 합일된 열정, 곧 컴패션(compassion)입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용서해주시고 새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런 관계를 성립합니다. 그런 관계를 성립하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긍휼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긍휼과 자비, 그 긍휼과 자비라는 히브리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 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주시지만, 당신 자신을 위해서 홀로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일방적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의 일방적 사랑도 하나님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되, 인간과 더불어 사랑하십니다. 인간이 좌절에 빠질 때는 함께 좌절하고, 인간이 기뻐 찬송할 때는 함께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정열, 부정적 정열, 긍정적 정열을 인간과 함께 나누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때 끌어안고 같이 슬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함께 나누고 함께 합치고 무언가를 같이 만드는 컴패션, 긍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일방적인 사랑을 하지 않으십니다.
    남녀가 사랑할 때, 한쪽의 반응 없이 한쪽에서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그 사랑, 그 패션은 짝사랑에 불과합니다. 짝사랑은 자유이겠습니다만, 그것은 결실이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쌍방향이어야, 소중한 만남, 행복한 결혼이라는 결실을 낳고는 생산적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혼자만의 사랑으로는 결실할 수 없습니다. 패션이 중요하지만 패션들이 만나야 합니다. 사랑은 만나야 합니다. 사랑이 만나면 감사가 있습니다. 만남이 없는 곳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떼어지고 갈라집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홀로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인간과 함께, 인간을 위하여 사랑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걸 가리켜서 “임마누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어 컴패션하는 긍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일방적 사랑, 일방적 관심이 아니라 쌍방적 관심 속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왕이 1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면서 그를 용서할 때, 기대한 것이 있었습니다. “나한테 받은 그 큰 용서에 감사한다면, 그 용서를 이웃에게도 베풀어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하는 하나님이 주신 컴패션, 그 긍휼의 신앙을 잊어버리고,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습니다.
    오늘 이 세계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안보라는 이름으로, 평화의 이름으로 상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미국식 자유를, 미국식 평화를 세계에 강요합니다. 일방적 평화와 자유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숴버립니다. 그것에 반발해서 아랍의 테러범들은 또 일방적 테러 공격을 감행합니다. 일방적 평화와 일방적 자유, 일방적 문화는 이 세계의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힘 센 자와 힘이 약한 사람이 서로를 합쳐서 크고도 조화로운 패션을 이루어 낼 수는 없습니까? 서로 고통을 나누고 기쁨을 나눌 수는 없습니까?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세계는 평화가 아닌 저주의 세계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외쳤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하고 복을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뭘 바칠까요? 짐승의 피를 바칠까요? 아들을 바칠까요? 제 자신을 바칠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와 내가 함께 이루었던 공의의 열매, 너와 나누었던 그 사랑의 열매를 가지고 오너라. 내가 너희와 함께 베풀었던 그 인자함의 얼굴을 가지고 오너라. 이것이 참된 예물이니라. 그러면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 이 사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정의를 추구한답시고 국민을 업신여기면, 이 사회는 불의한 사회가 됩니다. 지도자와 백성은 서로의 생각과 사랑과 정열을 나누어서 함께 가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부모 자식간에 패션을 공유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가 존속하는 한 사랑은 일방적이 아니고 나누는 사랑, 합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다움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용서의 위대함에 감사하며, 그 용서에 감사하기 때문에 나도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에 대한 감사를 망각한 신앙은 우리 자신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창조의 질서에도 역행하게 됩니다. 사랑을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나누시려 합니다. 갈등이 있고 힘들지만 나누는 곳에 하나님의 복과 은총이 있습니다. 일방적 사랑이 아니고 함께 어우러지는 사랑, 그것이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고통에든, 기쁨에든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우리 세계와 함께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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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껏 살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때
    하나님 나라의 교회
    용서하라- 잊지말라
    악마와 싸우려면
    향기로운 제단
    눈뜬 소경
    고난의 혼을 제거하라
    베델의 감격
    겸허한 자에게 은혜가
    오염된 성전은 허물라
    보물은 값지게 쓰라
    빛의 열매
    일용할 양식
    항존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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