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정치의 개혁과 교회 부흥 2002-12-06 18:56:12 read : 1620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한때 한국의 복음화를 이끌었던 한국의 개신교회가 쇠퇴 일로에 있다. 개신교의 각 교파들이 정부 당국에 보고한 바 한국의 개신교인 수는 1995년의 1,450만 명에서 2001년의 1,282만 명으로 5년 동안 약 11.6%가 감소했다. 더 자세한 사항은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대체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침체 혹은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의 쇠퇴에 대한 우려는 이미 여러 차원에서 제기된 바 있다. 1993년에 출범한 <한국기독교개혁추진협의회>나, 1996년 10월에 나타난 <교회개혁열린포럼>, 1999년 10월 한국기독청년협의회/ 한국기독학생총연맹 교회 청장년연대모임의 “교회개혁을위한평신도선언”, 혹은 각 교단의 개혁 모임을 하나로 모은 <교회갱신협의회>의 출범을 예로 들 수 있다. 1998년 10월에는 <한국교회개혁선언위원회>가 “한국교회개혁을위한98선언문(이하 <교회개혁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세상의 소금이어야 할 한국 교회의 상당수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길에 버려져서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2년 11월에는 마침내 <교회개혁실천연대>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운동을 추진하려는 단체까지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개 교회 수준의 개혁운동도 과거와는 달리 보다 적극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나고 있었다. 과거에도 개 교회 차원의 비리 시정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개 부패와 비리에 관련된 사람들의 인적 청산 위주였으며 이 조차도 성공하는 예가 드물었다. 그러나, 대형교회들의 비리와 관련하여 소위 “교회를사랑하는모임(이하 교사모)”들이 조직되면서 평신도들의 교회 개혁 활동은 보다 체계적이고 연대적인 운동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들이 제기하는 주제들은 주로 담임목사의 세습 중지나 교회 재정의 투명성 보장, 목회자의 윤리성 회복 등 매우 상식적이면서 그러나 한국 교회 내에서는 구조적인 문제들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의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는 원인 중 하나로 한국 교회 정치의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성직자 중심의 세속적 권위주의가 한국 교회 특유의 근본주의 신앙과 결합하면서 한국의 교회 정치는 매우 낙후되고 비민주적인 구조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 자주 지적되고 있다. 최근 들어 감독정치나 교황정치를 표방하는 교회들에서조차 교인들의 참여와 민주화가 당연한 조류로 나타나고 있는 바 도리어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에서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교회 정치―민주주의인가, 독재주의인가?
한국의 교회 정치를 다룬 문헌들 사이에는 바벨탑 수준의 개념 혼란이 목격되고 있다. 이러한 바벨탑 수준의 개념 혼란을 정리하려면 먼저 정리의 원칙을 천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의 교회 정치를 다루는 문헌들 사이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혼란은 ‘민주주의’라는 용어에 관한 것이다. 임택진 목사는 “장로교회의 정치는 주권이 교황이나 감독에게 있지 않고 교인에게 있는 민주정치다. 다만 그 주권 행사는 주권자인 교인에 의해 선출된 장로들을 통해 조직되는 치리회에 의해 다스리는 대의정치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박병진 목사는 민주정치와 공화정치를 대조적으로 사용하면서 민주정치를 “즉 진리보다도 다수를 절대시하는 헛점을 그대로 간직하게 되며 숫자이면 진리도 비진리로 바꾸어 놓는다고 하는 다수의 횡포를 배제하기 어려운 정치체제”로 정의하면서 장로회정치는 공화정치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민주정치를 이해하려면 이미 언급한 세 종류의 교회 정치 체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정치체제 분류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에 따르면 지배자의 수에 따라 왕정과 귀족정 및 민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왕정은 한 명, 귀족정은 약간 명, 민주정은 다수 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체제들이 타락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럴 경우에 왕정은 폭군정으로, 귀족정은 과두정으로, 민주정은 중우정(衆愚政)으로 악화된다고 보았다. ‘민주정’에 대한 박병진 목사의 오해는 이 민주정치가 타락하였을 경우에 나타나는 ‘중우정(衆愚政)’과 개념을 혼동한 데서 출발한다.
입헌군주정과 주권의 개념이 발달함에 따라 민주정은 국민에게 주권을 부여한 모든 체제를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만일 “교회의 주권은 교인에게 있다”는 주장이 정당하다면 이 기초 위에 세운 모든 교회 정치 체제는 민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이 주권을 부정하거나 이를 실질적으로 찬탈한 체제가 있을 경우에 우리는 그 정도에 따라 독재정치(dictatorship) 혹은 권위주의적(權威主義的: authoritarian) 체제라고 부르고 있다.
정치체제에 대한 박병진 목사의 오해는 민주정과 공화정을 대치시키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가 밝히는 바처럼 민주정은 공화정과 대조되는 정체가 아니다. 공화정의 경쟁자는 왕정이다. 공화정은 왕을 두지 않고 시민들끼리 의논하여 체제를 운영한다는 뜻인 바 민주적 공화정이 있을 수도 있고 귀족적 공화정이 있을 수도 있다. 흥미있게도 박병진 목사는 민주정치를 거부하는 같은 책에서 “이 정치(장로회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케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한국의 교회 정치를 다루는 학자들의 혼란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교회 정치를 다루는 글들에서 나타나는 두 번째의 기초적 혼란은 신정정치(神政政治: theocracy)에 관한 것이다. 김삼환 목사는 그의 칼럼에서 교회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신정주의(神政主義)”라고 주장하고 있다. 손병호 목사는 이보다 훨씬 노골적이어서 “교회는 공화적으로 통치자를 뽑는 곳이 아니며, 모든 것을 민주적으로 대의정치를 하는 곳도 아니다. 교회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다. 만일 교회가 민주적으로 나가기 시작하면 성경도 다시 쓰게 되고 하나님도 다시 뽑게 된다. 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다시 만들기 좋아하는 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손 목사의 주장은 교양의 수준을 훨씬 벗어난 것이다.
신정정치(神政政治)는 세속정치(世俗政治)의 대조어로서 신의 대리인을 통한 신의 직접적인 통치를 의미한다. 물론 신의 대리인을 주장하는 자나 계층이 있다고 해서 신정정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럴 경우에는 중세의 모든 정치체제와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유럽의 절대왕정은 모두 신정정치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정정치의 특징은 신의 직접적인 계시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 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의 경우에 이러한 신정(神政)의 기간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출애굽기나 사사기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사장 혹은 선지자가 매사에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백성들은 이대로 행하든지 거부하든지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기준으로 본다면 신의 직접적인 계시와 이를 중보할 수 있는 제사장의 존재가 신정정치의 두 가지 전제라고 할 수 있다.
만일 한국 교회가 신정정치를 주장하려면 이 두 가지 전제를 충족해야 한다. 먼저 교회의 모든 정치적 행위―직원의 선출, 재정의 출납, 회의의 소집과 권징 등―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다음으로 이러한 계시를 담임목사가 직접 중계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 두 개의 주장은 개혁교회 내에서 모두 거부되는 것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1항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을 이제는 중단하셨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일반계시를 제외하면 성경만이 신약시대의 유일한 특별계시이다. 또한 개혁교회는 목사만이 성경 해석의 유일한 권위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 주장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시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시대에 있었던 실례들을 통하여 경고받는 바, 즉 그것은 진리는 언제나 목회자들의 품안에서 양육되는 것은 아니며, 교회의 완전은 그들의 상태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회를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에 교회정치는 신정정치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하나님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신다. 특히 칼빈주의적 세계관은 이 점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세속정치도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다면 세속정치도 신정정치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교회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고 주장할 것인가? 루터주의의 하나님 통치가 교회 내에 한정되어 있는 데 반하여 칼빈주의는 교회 안팎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경배를 추구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주의는 성과 속, 교회와 세상을 나누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단호히 거절하고 있다. 만일 교회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고 주장하면 더 이상 칼빈주의자가 아니다.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한국의 개혁교회들은 이 점에 주의해야 한다.
교회 부흥의 기초로서 교회 정치 개혁
한국 교회 중 다수가 종교개혁자들의 의도와 달리 구태여 교회 정치를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데는 세속화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1948년 대한민국이 성립된 이래로 민주주의는 독재를 추구하는 지배층에게 부패와 무능과 분열의 상징으로 왜곡되거나 오용되고 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체계적으로 거부되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나타난 전반적 몰이해는 한국 교회의 정치를 다루는 많은 문헌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고 있다. 특히, 박정희가 ‘한국적 민주주의’ 혹은 ‘유신’ 등의 용어로 혼란을 야기시켰듯이 ‘신정정치’ 혹은 ‘신주주의’ 등의 용어가 역사적 맥락과는 상관없이 사용되고 있었다.
한국 교회가 부흥하려면 우선 교회 정치의 이러한 오류와 모순부터 개혁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사실상 성직자들의 독재를 합리화하려는 노력은 한국 개신교들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역사상 모든 종교들에서도 나타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생을 구제하려는 초심을 버리고 점차 성직자의 종교로 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주기적으로 심각한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음을 잘 알 수 있다. 한국의 교회가 부흥하려면 교회를 성직자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로 복원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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