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귀한 사람(2) 2002-11-22 09:56:41 read : 3895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살전 1:1-10 // 2002년 10월 20일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에게 쓴 편지 첫 부분입니다. 1절에 보면, 바울과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가 이 편지의 공동 책임을 지는 공동 발신인으로 되어있지만, 여기서 디모데와 실라는 공동 저자가 아니라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어찌됐건, 이 편지에는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의 모범적인 신앙을 칭찬하고, 또 그들에게 감사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을 존귀한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道)를 받아 [사도 일행과] 주를 본받는 자가(1:6) 되었고,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져 있었으며(8절),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9절) 살고있던 그들, 곧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이야말로 진정 존귀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처럼 존귀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지 살펴봅시다.
1. <믿음의 역사>가 있는 삶을 살면 됩니다.
3절에 보면,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역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선 이 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에는 '믿음의 활동'이라고 표현했고, 영어 성경 중에서 NIV는 'work produced by faith'로, KJV는 'work of faith'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역사>란 두 가지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즉, 복음전도 사역 타인을 위한 선행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칭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결단코 행위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믿음이 결여된 선행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선을 행하는 것이 산 믿음이요, 이런 믿음을 통해서 역사(役事)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에는 믿음의 행위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만의 믿음이 아닌, 믿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있었던 교회였기에 바울의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역사'라고 쓰여진 헬라어 원어는 '헛된 말'과 반대의 의미인데, 이것은 말로만 믿는 게 아니라 실제로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믿음을 얘기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다해 그 믿음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시대에 행동하는 믿음의 역사를 보여주는 분이 한 사람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미국 대통령에 당선시킨 것은 대통령직을 마친 다음 시키시고 싶은 일이 있어 그러신 것으로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봉사활동입니다"라고 말하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입니다. 그는 퇴임 후 비영리 조직인 카터 센터를 건립해 국내외의 정치적인 이슈와 관련한 갈등해소, 민주주의 확립과 인권신장, 질병과 고통퇴치 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전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은 해비타트 운동에 참여해서, 일주일 내내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벽돌을 쌓고 창문을 달고 페인트칠을 하는 카터는 '자원봉사자'라는 칭호 외에는 달리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일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얘기하고 땀 흘리는 세계 지도자 카터는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왕성한 이웃사랑의 원천은 늘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그의 깊은 신앙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작은 농촌마을 플레인스에서 시작된 지미 카터의 신앙이야기는 이미 세계 속으로 이어져 감동과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사랑 실천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의 역사'가 있는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터가 대통령을 지냈기 때문에 존귀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믿음의 역사가 있는 삶을 살기에 존귀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믿음의 역사가 있는 삶을 살 때, 존귀한 사람으로 인정될 것입니다.
2. <사랑의 수고>를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3절에는 <사랑의 수고>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정말 데살로니가 교회 교우들이 사랑의 수고를 철저하게 감당함으로 바울의 칭찬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랑의 수고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수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과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사랑의 수고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수고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봉사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16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 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랑의 수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살아있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정성으로, 온 몸을 다해서 사랑의 수고(봉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연세대 의대 출신 의사들이 아주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며칠 전 미국 융 분석가요, 유니온 신학교 교수인 율라노프(Dr. Ulanov)의 강의가 끝나고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정신과 의사들에게서 들은 얘기입니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재활의사로 잘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다 연세대 세브란스 출신이라고 합니다. "기독교교육의 영향이 그렇게도 크구나!" 하는 걸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대학생들이 믿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지만 몇 년 동안 억지로라도 채플에 참석하고, 기독교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점점 기독교적인 정신이 그 속에 깊이 들어 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인천간호보건전문대학 (현재 안산1대학) 교목을 할 때 그렇게도 말썽을 부리면서 채플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하던 학생들이 나중에 졸업한 후에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사회 각 방면에서 봉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즘은 살기가 살벌한 세상입니다. 미국 워싱턴 지역에서는 얼굴 없는 살인자가 계속해서 시민들을 공포 분위기로 빠뜨리고 있고, 얼마 전 발리에서 또 필리핀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극비리에 추진해온 사실이 새롭게 확인됨에 따라 화해 국면으로 치닫던 한반도 주변 정세에 파장이 일고 있는 상황을 우리는 맞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며 사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가장 존귀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우리는 폭탄이나 총을 사용하지 말고, 사랑과 자비심을 이용하자"는 마더 테레사의 말은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메시지입니다.
3.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3절에는 <소망의 인내>라는 말이 나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참는다"는 얘깁니다. 반면에,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아픔과 슬픔을 꿀꺽 참고 나갈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현재를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고난도 다 참아냅니다. 그것을 '소망의 인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관동대 교수요 강릉중앙교회 장로이신 엄창섭 시인의 "어머니의 교훈"이라는 시 일부를 소개합니다.
지혜로운 朝鮮의 어머니,
....
한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조국의 참담한 현상 앞에서
피멍든 손으로 영혼의 닻줄 당기는
어머니, 당신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도
억장은 내려 앉고
뜨거운 눈물이 울컥 솟아난다.
"아들아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환상을 보라"며 저토록 비통 속에서
세기의 강물을 깨우시는 눈부신 음성.
무한의 자유 공간을 향해
하얗게 비상을 시도하는 갈매기.
불끈 치솟는 장엄한 태양
건강한 이 땅의 아침은 밝아오고.
여기서 "아들아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환상(vision)을 보라"고 하는 어머니의 음성을, 저는 자애로운 주님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라. 미래를 향한 비전을 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이 시에서 시인(詩人)은 무한(無限)의 자유 공간을 향해 비상(飛上)을 시도하는 갈매기, 불끈 치솟는 장엄(莊嚴)한 태양(太陽)을 이 어두운 땅에 건강한 아침이 밝아오게 하는 표징으로 읽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소망의 징후입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비전입니다. 이런 비전이 있는 사람은 모든 걸 참아내는 것입니다. 다 견디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으로 인내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내가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을 믿고 참고 나가야지"라고 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심각한 병(암)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과연 어디까지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소망이 약속과 관련될 때 우리는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헨리 나웬은『희망의 씨앗』이라는 책에서 "소망은 아주 다른 특별한 것입니다. 우리의 바람과는 어긋난다 해도 약속에 따라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항상 개방적입니다. 나는 내 개인적 삶에서 욕구를 제거하고 소망하기를 시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기꺼이 욕구를 제거하고자 할 때, 기대하지 않는 정말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를 저는 '비전의 예언자'라 부릅니다. 그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남의 나라의 포로가 된 입장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는 매우 소망이 넘치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田園)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城邑)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렘 29:4-7)
계속해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災殃)이 아니라 곧 평안(平安)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所望)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9:10-14)
모든 것이 얼어붙는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하고 꽃피는 봄이 온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소망을 가지고 참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시험과 고통 이후에는 평안함과 기쁨을 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으로 인내하며 사는 사람이 진정 존귀한 사람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지어진 찬송이 535장입니다. 이 찬송 내용대로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어둠의 밤이 지나면, 소망의 새 아침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나가는 사람이 됩시다.
어두운 후에 빛이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연약한 후에 강건하며 애통한 후에 위로 받고
눈물난 후에 웃음 있고 씨뿌린 후에 추수하네
괴로운 후에 평안하며 슬퍼한 후에 기쁨 있고
멀어진 후에 가까우며 고독한 후에 친구 있네
고통 한 후에 기쁨 있고 십자가 후에 면류관과
숨이 진 후에 영생하니 이러한 도는 진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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