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4년 타의에 의해서 우리 곁을 떠났던 조지 오글(오명걸)목사가 한국인권협회가 선정한 제5회 인권상을 수상하기 위해서 다시 한국을 찾았다. 6~70년대 한국산업선교의 산증인이기도 한 그의 근황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 그가 한국을 방문하여 인권상을 수상하고 난 다음 감리회 본부를 찾았다. 오글목사를 본사에서 만나 지난 74년 추방을 당한 이후 미국에서의 생활과 근황에 대해서 들어 보았다. 이 자리에는 평생을 반려해온 도로시 오글 사모도 함께 동행했다.
“긍휼은 고된 작업이다. 긍휼은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부르짖는 것이다. 긍휼은 가난한자들의 상처를 보살펴주고 그들의 삶을 돌보아 주는 것이다. 긍휼은 약한자를 옹호하고 그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자들을 강력하게 고발하는 것이다.
긍휼은 압제받는 자들이 정의를 위해 투쟁할 때 거기에 합류하는 것이다. 긍휼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들을 귀가 있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긍휼은 우리의 친구들을 위해 우리의 삶을 내려 놓는 것이다.”<헨리 나우웬의 긍휼 중에서>
(복음주의 영성신학자 헨리 나우헨은 하버드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다가 말년에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정신지체장애인들을 섬기다 지난 96년 64세의 일기로 돌아갔다.)
● 조지 오글과 오명걸
오명걸목사, 칠순을 훌쩍 넘긴 노(老)목사는 한국사람이 아니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서른살의 나이로 한국선교사로 왔다. 막 전쟁을 끝낸 한국은 지금의 아프카니스탄처럼 미래가 보이지 않는 그런 땅이었을 것이다. 그때 한국으로 온 그는 대전에서 생활하였다. 당시 대전 인근 신탄진교회에는 손명걸전도사가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 손명걸전도사와 한방에서 생활하면서 조지 오글이라는 이름대신 오명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3년동안 대전과 공주에서 중고등학생들의 영어교사로 3년을 지내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두 번째 한국을 찾은 것은 1960년이었다. 다시 한국을 찾기까지, 그는 57년 미국으로 돌아가 그 길로 시카고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목회그룹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시카고목회그룹은 10명의 전문가들이 주택, 건강, 정치, 경제, 신앙 등 다양한 부문에서 힘을 모아 함께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일을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목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그 운동은 가톨릭 사제들에게서 영향를 받았다.
독일 나치스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세운 강제노동집단에는 가톨릭신부가 여러명 있었다. 신부들은 이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함께 노동하며 고통을 나누고 치유했다. “이들은 나치의 눈을 피해 몰래 들어갔기 때문에 때론 이로 인해 사형을 당한 신부도 수십명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그들의 그 정신과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고 한국에 돌아 왔습니다. 저는 교회가 잘 사는 사람을 그 중심에 두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거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거리를 없애기 위해 산업선교 실무자들이 직접 공장에 들어가 그들의 마음, 소명, 사회에 대한 생각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런 신학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60년 한국에 다시 돌아온 그는 김종필감독에게 산업선교에 대한 자신의 뜻을 설명하였다. 그의 생각과 뜻을 읽은 김종필감독은 61년 그를 인천으로 파송한다. 여기서 그는 조화순목사를 만났고, 또 조승혁목사와 함께 일했다. 그 이후 74년 12월 14일 한국에서 추방을 당하기까지 그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오명걸목사로 살았다.
한국교회의 산업선교회는 오명걸목사가 효시이다.
●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
올해 다시 한국을 찾은 오명걸목사는 새끼 손가락에는 금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가 한국에서 추방을 당할 때 인혁당 관련자들의 부인들이 그에게 끼워준 반지이다. 추방을 당하던 날 혹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반지를 팔아서 도움이 되라고 건너준 반지였다. 그리고 그 부인들은
조지 오글 목사의 부인 도로시 오글
“우리 남편들이 살아 나올 때까지 계속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무작정 추방을 당하면서 혹시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어려움을 위해서 끼워준 반지였다. 그 반지를 낀 채 공안원들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면서 그는 울부짖었다.
“하나님! 저 감옥속에 들어가 있는 저 사람들의 죄없음을 하나님께서 잘 아시잖아요! 하나님 저 사람들을 살려 주십시오. 저 사람들이 살아서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은 끝내 살아 나오지 못했다. 오글목사는 이제 그 반지를 죽을 때가지 새끼손가락에서 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74년 추방된 이후 근 30년동안 새끼손가락에서 그 반지를 빼지 못한 것은 국가공권력에 의해 죽지 말아야할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에 항의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너무도 억울하고 가슴의 억장이 무너지는 한을 품게 만든 그 권력에 대항하여 그 가슴에 분노와 한을 삭이고 있을 그 가족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는 반지를 뺄수가 없다. “그 가족들을 위해서 내가 기도하리라.”
“평생을 두고 기도하기를 멈추는 죄를 짓지 않게 하옵소서!” 반지를 끼고 있는 동안 그의 이 약속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그의 새끼손가락을 통해 계속되고 있다.
오명걸목사의 반지는 생떼같이 남편과 아버지를 먼저 보내야 했던 그 가족들을 위한 중보기도이다.
● 인혁당재건위 사건과의 만남
1974년 10월 여자들과 아이들이 울면서 오명걸목사를 찾아왔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끌려간 사람들의 부인 8명은 아이들을 데리고 오명걸목사를 찾아왔다. 그들은 울면서 도와 달라고 했다. 남편들을 군사법정이 아닌 일반법정에라도 설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은 그는 기도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오명걸목사가 용기를 내어 KNCC 목요기도회에서 이 부인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오명걸목사는 목요 기도회에서 부인들의 말을 들어본 결과 그 부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다는 자신의 판단도 함께 붙여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서 오명걸목사는 중앙정보부의 고문조작설을 제기했다. 그때문에 남산(중앙정보부 대공분실)으로 끌려가야했다.
그 남산에서 17시간이나 조사를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조사관들로 부터 오명걸목사에게 인혁당재건위 관련자들은 공산당이고 공산당을 돕는 너도 공산당이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퍽 다행스럽게도 미국인 선교사의 신분은 중앙정보부 조차도 그를 가혹하게 다루지 못하는 장치가 되었다. 오명걸 목사는 그 이후에도 인혁당재건위사건이 국가의 정보기관과 공안권력에 의해서 고문조작되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억울한 죽음 앞에 서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다녔다. 그리고 군사재판이 아닌 민간재판에서 처음부터 다시 재판을 받아야 함을 증언하고 다녔다. 그 결과 그는 두 번 더 남산에서 조사를 받았고 결국은 1974년 12월 14일 추방을 당하게 된다.
그가 추방당하던 날 경찰차 4대는 인천 그의 집을 에워쌌고 그의 부인 도로시 오글은 네 아이들과 집안에 구금되어 나올수가 없었다. 오명걸목사가 추방을 당한 이후 도로시 오글을 찾아 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전국에서 찾아온 많은 이들이 도로시를 위로하며 오명걸목사의 용기에 대해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당시 도로시는 그들 가족이 한국사람들로부터 너무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남편을 쫓아낸 권력이 있는 반면에 그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지는 못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권력의 편이 아닌 오명걸목사의 편에 서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남편이 추방당하고 2개월 후 그의 부인(도로시 오글)과 아이들이 일본으로가서 그를 만나 함께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오명걸목사는 다시 미국인 목사 조지 오글로 돌아갔다.
조지 오글목사, 불의한 권력에 의해 이 땅을 쫓겨났던 그는 추방당한 지 28년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권력이 바뀌고 난 다음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관광차 한국을 다녀간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에서 불러서 그가 왔다. 인권상 수상자로 한국은 다시 그를 불렀던 것이다.
● 에필로그
조지 오글목사를 보면서 최근 복음주의자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영성신학자인 헨리 나우휀의 말을 생각한다. 이 복음주의 영성신학자에 시각에 의한다면 조지 오글목사야 말로 긍휼의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