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9:41-44절
여자를 가리켜 눈물의 여왕이라고 하던가?. 아내는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혼자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실컷 울고 나온다. 그러면 속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어쨋든 흔한 것이 여자의 눈물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에 해결사와도 같은 것이다.
웃음에 겨워 흘러 내리는 딸 아이의 눈물이나. 괴로움을 못이겨 울부짓는 누이의 눈물이나,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칠 수 없는 연인의 눈물이나, 너무 사랑하기에 울 수밖에 없는 아내의 눈물 또 내가 힘들 때면 옆에서 지켜 보시면서 같이 흘러 주시는 어머니의 눈물은 내 삶의 방향을 가늠할만한 노와도 같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오점을 발견했을 때 어느덧 나의 눈은 눈물로 가득하게 차게된다.
'그레이스 놀 크로웰'의 "슬픔에 찬 사람에게"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친구여, 그대가 울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그대 손을 잡게 해주오
그대의 슬픔과 같은 슬픔을 쥐었기에
나는 이해할 수 있다오
들어가게 해주오
슬퍼하는 그대 곁에 조용히
앉아 있고 싶소
찬구여, 눈물을 그치라고 하지는 않겠소
들어가게 해주오
한마디 기도하고
그대의 손을 잡고 싶을 뿐이요
나는 이해한다오.
모두들 남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같이 울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현대는 눈물이 메마른 시대입니다. 인정이 없는 시대입니다. 점점 사람들의 마음은 돌같이 굳어져 가고 정서는 마비되고 무관심과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슬픔은 있으나 위로가 없고, 비판과 비난은 많으나 격려라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슬퍼도 눈물이 없고 기쁜 일이 있어도 그만 도무지 함께 할 줄을 모릅니다.
2천 년 전 우리 예수님은 그 시대를 보시고 어린아이가 피리를 불어도 사람들은 춤을 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슬퍼하지 않는다고 비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2천 년이 지난 오늘은 어떻습니까?.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는 현실을 보시고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으며 눈물을 흘리셨고 끝내는 자신이 피흘리시며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주님의 눈물 속에서 참 인간성을 볼 수 있으며 그 눈물 앞에 감화와 감동을 받으며 그의 사랑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주님께서 그의 백성과 민족을 위하여 우신 말씀입니다. 에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여러 번 우셨습니다. 한 친구의 죽음을 보시고 우셨으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서도 한없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누가 흘린 눈물이든지 눈물 그 자체는 참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물은 사람에게 크나큰 감화를 주기도 합니다. 하물며 만왕의 왕이시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주님의 눈물이야말로 무한한 감동과 교훈을 준다고 믿습니다.
눈물을 흘리실 필요도 없으신 주님께서 우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눈물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벌레의 울움소리에도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고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도 굳은 마음이 설레거든 하물며 주님의 울음이야말로 감퍅한 심장이라도 녹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일랜드 속담에-'흐르는 눈물은 괴로우나 그보다 더욱 과로운 것은 흐르지 않는 눈물이다' 라고 했으며, 서양 속담에'눈물은 인생을 살리고 땀은 가난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흘려야 할 눈물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친구를 위해 우신 주님의 눈물을 배우셔야 합니다.
베다니에 사는 예수님의 친구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되는 나사로가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거기 게시지 않았고 장사한지 나흘이 되어서야 연락을 받고 찾아가게 됩니다.
부모처럼 믿고 의지하던 오라비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심히 울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도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울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얼마나 많이 사랑했으면 저렇게도 슬피 울고 계실까라며 서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경의 눈을 떠주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셨던 저가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는가?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는 눈물 속에는 절망에서 나오는 슬픈 눈물이 담겨 있었으나 주님의 눈물은 그를 사랑하셔서 우신 눈물이었습니다.
주님은 두 자매의 인도를 따라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썩어 냄새나는 시체를 향하여"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셨으며 말씀이 선포되자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 나온 것입니다.
오늘 저는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찬양하며 말씀드리고저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한마디로 죽은 자도 살리시는 주님께서 왜 우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냥'나사로야 일어나 나오나'는 말씀 한 마디면 끝나는데 왜 주님이 우셨을까? 그것은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참 인간이시기에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슬픔을 당할 때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슬퍼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친구로 삼아주셨습니다.
요한복음15장15절에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친구로 정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친히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려고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나의 친구가 되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중용(中庸)에보면-옛친구를 만나면 의기를 더욱 새롭게 하고 비밀스런 일에 처하면 마음을 더욱 분명하게 하라.
노쇠하고 불운한 사람을 대함에는 더욱 은혜를 베풀고 융숭하게 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친구는 오래 될수록 좋으며 새로운 친구를 위하여 옛 친구를 버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새로 사람을 사귀면 가급적 서로 장점만 내세우고 단점은 모르게 되어 매우 신선하고 그 인간성에 빠지기가 쉽다. 허나 이는 잘못된 일로 곧 단점은 나타나게 마련이며 이로 인하여 실망하는 경우가 많으니 역시 친구는 우정과 미움이 많았던 옛 친구가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옛 친구를 만나면 더욱 따뜻하고 친밀하게 대하여 우정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구약성서에는"새 친구는 새 술과 같으니 묵은 술이어야 제 맛이 만다"고 했으며, 애라스무스도"새로운 친구를 위하여 옛 친구를 멀리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J. 반네스는 '현대 휴머니스트의 고백'에서'친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벗 없는 인생은 곤란하고 위험하니 님에게 벗을 달라고 기원하여라, 친구들은 인생의 희기한 보물의 하나이다. 너희들은 신뢰해 줄 벗이 친구들 사이에서 속히 발견되면 그 만남을 님께 감사하라, 그 벗을 알기 위해 배우고 그 벗이 무엇에 흥미있는지 알아보고 그 벗이 자기 부모나 형제자매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보고 그 벗과 함께 공부하고 더불어 점차 앞서 나가라, 그 벗의 조언을 귀담아 들을 것이며 그 벗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로 조언해 주어라, 그 벗에게 언제까지나 충실하여라, 그리고 그 벗과 헤어지지 않도록 하여라, 그 벗과 똑같은 제2의 벗은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서양 속담에"세상의 친구는 칠면조와 같다'고 했습니다.
내가 건강하고, 돈 있고 잘 해주고 나를 필요로 할 때 친구가 되려고 하지만 내가 병들고 가난하고 필요 없게 되면 다 떠나 버리고 맙니다.
로마 황제 '줄리어스 시이저'는 그의 친구'부르더스'에게 27곳이나 칼에 찔림을 받고 죽으면서"세상에 친구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친구는 시기와 질투가 많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자기 장례식에 와서 진정 울어 줄 친구가 있다면 그는 참 좋은 친구를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친구가 되시는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힘든 일이 있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를 도와줄지언정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변하지도 않습니다.
* 454장 찬송 *
2. 주님은 민족의 운명을 아셨기에 울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적의 공격을 받아 완전히 망해버릴 것을 아셨던 주님이셨기에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후 70년 로마장군'티투스'가 예루살렘 성을 함락하여 페허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같은 광경을 미리 내다보셨던 주님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면 울어야 합니다. 모세도 민족을 위해 울었고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쳤습니다.
예례미야도 민족의 국운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세례 요한도 회개치 않고 더욱 강퍅해 지는 백성들의 마음을 보고 울었던 애국자였습니다.
우리도 이 나라와 민족을 가슴에 품고 울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작게는 내 가정을 가슴에 품고 울어야 하며 내 직장을 가슴에 품고 울어야 합니다. 나아가 옥포교회와 옥포 땅을 가슴에 부여안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서로 반목하고 시기하고 헛듣는, 진흙탕 처럼 비비고 싸우는 정치적인 싸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서로 미워하고 투기하는 싸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기도로 눈물을 흘리고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내가 살고 가정이 살며, 교회가 살고 이 지역과 직장 우리 나라가 사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정과 부패 비리에 적지 않게 끼여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 예수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 하므로 나를 깨끗하게 하고 나라와 민족을 깨끗하게 만드는 역군들이 되어야 이 민족에게 소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 나라 사랑하는 길이 밖에 길에 나가 데모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자기 반성을 하며 자기부터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사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남을 나무라고 남을 탓하고 욕하기 전에 자기부터 반성하고 자기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모두 사는 길이 열리것입니다.
3. 우리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 자신이 당할 고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기에 온 몸이 땀으로 핏방울로 터져 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로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갖은 제약과 고통을 친히 다 당하시면서도 결코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려 주시고 슬픈 자를 위로하시고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소자 하나도,가난하고 병든자 하나도. 부족하다고 가난하다고 모른다고 세상은 그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냉대하여도 주님은 한번도 그들을 버린일이 없으십니다.
외면하지도 않으시고 그들의 다정한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들과 함게 고통도 나누고 덜어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하며 부족하여 허덕이는 세상에 살지 않습니다. 모두가 풍요로움 속에서 오히려 나태하고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굶주리는 사람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옛날에는 보리고개가 되어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지구 한 곳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수가 수만명이 되고 있습니다.
소말리아, 에데오피아가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빵을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아프간 그 참혹한 현장을 다녀온 '국제기아대책기구 긴급구호'책임자'숀 월시'(Shaun Walsh)가 지난 10월23일-25일(2일간). 아프카니스탄 난민촌 현지조사를 하고 돌아와 보고한 내용을 보면. 갈등과 분쟁의 땅 아프카니스탄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아이들이 사라져 버린 난민촌의 현실은 참아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였다고 합니다.
전쟁의 상처로 신음하는 아프카니스탄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국제기아대책기구 긴급구호팀은 이틀간 현지 방문 조사를 했는데 '나비바드' 난민촌에는 탈레반 정권을 피해 피난온 난민 7천명이 엉성한 텐트 안에서 다가올 혹독한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특히 두살 이하의 어린아이들 대부분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고 없다는 보고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곰팡이 핀 빵을 씹고 있었고 그것도 없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5만원이면 아프칸 난민 5인 가족이 한 달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제공할 수 있고, 2만원이면 한 가족이 겨울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담요 3장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들 자녀 교육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있지만 먹고 입고 사는 문제로 괴로워 하며 가슴 아파하는 가족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얼굴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질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길이 바로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복음을 받지 않는 지역이 많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복음을 전해주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일찍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선택하셨고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지키시고 계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겨울이 왔습니다.
오늘도 실직하여 지하도에서 밤을 새우는 우리의 이웃인 실직 가장들이 있습니다. 부모을 일찍이 잃어버리고 홀로 된 어린이 가장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나름대로 이웃을 위한 사랑을 펼치고 있습니다만 이제라도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웃 사랑에 우리의 손길을 펼쳐야 합니다.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굶주리는 자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선교하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친구를 위해 친구의 불행을 슬퍼하며 구원하기 위해 흘리는 눈물은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정직하고 성실한 시민으로써 살고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흘리는 뜨거운 민족애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지구상의 불쌍한 민족을 위해서 먹을 빵을 주고 생명의 양식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도 흘리는 눈물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눈물이 있는 곳에 진실이 있고 눈물이 있는 곳에 하늘나라가 이루어 집니다. 눈물이 있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꽃피고 화해와 용서가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성을 보시고 통곡하시던 그 눈물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무엘처럼'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으려는'각오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존 녹스'처럼"하나님이여 스콧트랜드을 나에게 주소서, 그렇지 않으시면 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하는 진실되고 사명감이 넘치는 눈물의 간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백성들의 눈물을 보시고 이 백성을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왜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십니까?
그것은 새벽마다, 밤마다 철야하며 울부짖는 남녀 종들의 기도가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 여인처럼 주님 발 앞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는 사건을 통하여 죄사함과 평안의 복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형제들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바울의 눈물이 그로 하여금 대전도자가 되어 복음으로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지난날 자신의 불충을 회개하며 통회자복했던 베드로의 눈물이 그로 하여금 제자의 길을 가게 했습니다.
목자의 목을 껴안고 우는 성도의 눈물이 있어야 교회는 은혜스럽고 아름다운 양들이 될 것입니다. 자기 양들을 위해서 흘리는 목자의 따스한 눈물이 있을 때 교회는 살아날 것이고 자랑스런 목자가 되어질 것입니다.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했던'스펄젼 '목사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이제 주님의 눈물의 의미를 깨달아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한 뜨거운 눈물을 흘리므로 석고상처럼 매말라버린 우리의 가슴이 성령의 뜨거움으로 가득채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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