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기쁨에 사는 자 2002-07-22 15:28:42 read : 2374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3:22-30 // 2002/06/23
'당신은 어떤 마음이 가장 행복한 마음이라고 정의하십니까?'-언젠가 런던 타임스에서 독
자를 대상으로 이런 설문을 낸 일이 있습니다. 응답을 통계낸 결과 1위에서 4위까지가 퍽
상징적이고 애교스러운 데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모래성을 막 완성하고 난 어린이의 마음
이 행복한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아기를 목욕시키고 난 어머니의 마음이요, 세
번째는 공예품을 완성하고 난 장인의 마음이요, 네 번째는 어려운 수술을 성공하여 한 생명
을 구해낸 의사의 마음이 행복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그의 육체적인 여건이나 지식이나 지위나 소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
다. 그 속 사람이 어떠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에게는 다 욕구가 있습니다. 소위 기본적 욕구가 있습니다. 우선 먹어야 되겠
죠? 왜 먹는 욕구가 있겠습니까? 두 가지 때문에 먹는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생명
을 보전하기 위해서 먹는 욕구가 있고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생명을 퍼트리기 위해서 먹
는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이 세 가지 욕구를 우리들이 가지고 살아가는 것
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구에 대하서 조금 더 고상하게 연구해서 얘기하는 것이 소위 '심리
학'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또는 무슨 정신분석학, 또 상담학 이런 얘길 하게 됩니다. 정신
분석학을 얘기하면 프로이드를 얘기하게 되는데, 프로이드는 이러한 인간의 기본욕구를 기
본적으로 뭐라고 얘기 하냐 하면은 성욕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둘러 같은
심리학자는 사회학자는 권력욕이다. 인간이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칼 융 같은 심리
학자는 말하기를 그런게 아니고 일반적인 관계에서 갖는 일반적 애욕이라고 하는 욕구다 이
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본적인 욕구가 억압될 때 문제는 생긴다는 것입니다. 근
본적인 욕구를 억압하고 거기 분열이 생기는데, 특별히 정신적으로 분열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정신분열증, 그냥 우리끼리 하는 쉬운 얘기로 하면 "미쳤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욕구가 억압될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욕구를 어떻게 만족시켜
줄 수 없을까? 그것을 조금 더 인위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념들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칼 맑스가 얘기한 것입니다. 그것
은 먹을 걸 먼저 주라. 빵을 먼저 해결하라. 물질적 욕구를 들어주면 만족을 가질 수 있다.
물질적인 욕구가 선결조건이라고 하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공산주의를 유물
사관이라고 그래서 상당히 비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공산주의
의 유물사관이나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배금사상이나 같은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돈을 가
지고 만족시켜보자. 돈 가지면 다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욕구충족을 하려고 합니다. 그랬
더니 니체 같은 사람은 "아니다, 권력의 의지를 행사할 때 인간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
래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폼 재길 좋아합니다. 군대가 척척 맞춰서 행진하는 걸 좋아하고,
탱크가 나오는 걸 좋아하고 한번 명령하면 일사분란 하게 척척 움직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권력에 의해서 자기의 욕구를 만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인간이 각가지 욕구를 가
지고 있습니다. 그 욕구의 만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일까? 우리가 그렇게 얘기하기
어려운 것, 그것이 또 인간의 연약함이요, 비참 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욕구를 만족하고자 할 때 내 욕구는 다른 사람의 욕구와 충돌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구만족 그 제일주의는 결국에 가서는 무엇을 만들어 내겠습니까?
싸움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웁니다. 죽입니다. 짓밟습니다. 피를 흘리게 만
듭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구를 채웠을 때 그 밑에는 밟힌 사람이 있었습니다. 눈물 흘린 사
람이 있습니다. 피 흘린 사람이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온갖 치사한 욕구 때문에 인간이 인간답지 못한 추악한 상태가 있음을 우리는 많이 봅
니다. 오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겉으로는 제법 번
드르르 한 것 같은데, 우리의 욕구 충족과 함께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크고 충격적
이고 엄청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 모든 것보다 더 높은, 아주 높은 차원의 성경
적 행복 지름길이 있어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요한이 말합니다.
"이 기쁨에 충만하다. 이 같은 기쁨, 이러한 기쁨으로 나는 충만하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
니다. 이 같은 기쁨이라는 게 뭐냐? 요한의 마음속에 있었던 절대 적인 기쁨, 넘치는 기쁨,
기본자세 기본 존재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기쁨이 있었어요. 그는 이 기쁨으로 모든 것을
소화합니다.
그게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냐, 먼저는 질투가 없는 마음에서 왔어요. 여러분 질투하는 마
음은 사람을 썩게 해요. 잠언에 보면 시기는 사람의 피를 마르게, 골수를 마르게 합니다.
어떤 일로든지 간에 기도하고 회개하고 질투 없이 살아야 됩니다. 질투하는 마음을 속에서
완전히 빼버려야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 이거 참 무서운 병입니다. 사람에게는 기본적으
로 생리적 욕구가 있고, 안전 하려는 욕구가 있고, 소속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고, 인정받으
려는 욕구도 있고. 인간적인 가장 높은 차원의 욕구는 자기 실현의 욕구입니다. 자기를 실현
하고자 하는 자기 존재를 확실하게 하고자 하는 정신적 욕구가 있는데, 이 욕구가 어떤 일
로 인하여 방해받을 때, 침해될 때 이게 질투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걸 극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자유경쟁이다. 이 나라에서 이런 말
을 합니다, 또 우리가 무한 경쟁의 시대다 뭐 경쟁에서 강한 자만 살아 남는다, 하도 이런
얘기를 해서 못쓰게 만들었어요. 사람 다 병신 만들어 놨어요. 공부 잘해야 하고, 일류 대학
에 가야하고, 결국 머리 좋은 사람, 강한 사람, 똑똑한 사람 그 몇 사람만 살아 남는다, 생존
경쟁이다! 생존경쟁이라는 말은 칼 막스의 이론입니다. 공산주의 마음입니다. 경쟁에서 몇
사람만 살아 남고 약육강식이라는 말은 무서운 철학입니다. 아니요. 물론 강한 자가 살아요,
그러나 강한 자가 하나가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일등이 살아요, 그러나 일등은 하
나가 아니에요. 경쟁 할 때는 일등은 하나지만 무경쟁으로 갈 때는 모두가 일등이요. 한사람
은 운동을 잘 해 일등이요, 한사람은 음악을 잘 해 일등이요, 한사람은 얼굴이 예뻐 일등이
요, 한사람은 말을 잘 해 일등이요, 다 일등 할 수 있게 만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누구는
일등하고 누구는 패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이 성경적 진리요, 그런고로 우리는 무한경
쟁이 아니라 무경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 나름으로의 나
만의 세계에서 나는 늘 이기고, 승리하는 것이예요. 결코 누구와 경쟁해서 하는 게 아닙니
다. 남을 살려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저를 살려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만 사는
경쟁, 이건 공산주의 이론이라는 거예요, 결국은 다 망하게 되는 거예요. 이 경쟁하는 마음
시기, 질투하는 마음, 이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
자 이제 세례요한을 보세요. 어떻게 해서 이로부터 구원받았는가? 그는 신앙적으로 해석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받을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다 주신 거다. 내게 주었고 그에게 주었고. 내게 주신 것처럼 그에게 주었어요.
하나님이 다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산을 많이, 어떤 사람에게는 재주를 많이
주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도 주었고, 모두에게 하나님이 적당하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
이 주셔서 받은 것이다. 그런고로 나는 이 문제에 대 해서 아무 이의가 없어요. 내게 왔던
사람이 몽땅 가도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하나님이 주신 분복 안에서 그
는 만족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적인 거예요, 그래서 나는 광야의 소리와 같다. 이것으로 내
사명을 다 한 것이다. 나는 그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내 기능, 내 책임은 다 하는 것이
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거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
라." 이해가 되겠습니까? 이 말씀의 상황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보다 6개월 늦
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깐 세례요한이 형이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친척관계로도 형입니다.
세례요한은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제자를 키웠습니다. 그리고 세례 베푸는 일을 했습
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에
게 세례 받은 예수님이 강 건너편에서 세례를 주시고 계십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불안했습니다. 와서 선생님에게 말을 합니다.
"선생님, 다 그리로 갑니다. 선생님이 증언한 그 사람에게로 사람들이 지금 가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세례요한이 어떤 반응을 해야 되겠습니까? "아니, 그래? 그럴 수가 있나. 내가
세례를 준 사람인데 이럴 수가 있나? 못 가게 해. 누구누구 갔어? 이름 적어내." 뭐 이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세례요한은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
리라. 그분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한다. 그는 갈수록 위대해져야 하
고, 나는 갈수록 오히려 적어져야 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이
'흥'이라고 하는 말과 '쇠'한다고 하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는 '흥'은 숫자가 더하리라. '쇠'한
다고 하는 것은 숫자가 줄어든다. 그러니깐 예수님에게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고
내게서는 사람들이 점점, 점점 떠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안과 원망과 걱정하는 제자 앞에
서 세례요한이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자신이 쇠하여야 한다는 것을 자
청하고 있습니다. 욕구의 충족과 만족을 위해서 애쓰고 경쟁하고 나아가야 되는데 오히려
그는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자청하고 있습니다. 이게 혹시 패배자의 소리가 아닙니까? 그러
나 우리는 여기서 신앙인은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인간은 이렇게 함으로 하
나님을 아는 자로서의 삶의 관계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과
서적인 교훈을 이 말씀 속에서 보게 됩니다. "나는 쇠하여야 한다." 이렇게 자청하는 이 세
례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
시의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요
한은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는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영광 받
을 사람이 아니라, 영광을 위해서 길을 내는 사람이요, 길을 내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면서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잃어버리지 않았습
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증거자요, 예비자요, 영광은 그리스도가 받아야 함을 잘 알고 있었습
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역할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러분 위치를 알면 뭘 알아야 됩니까? 역할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삶의 모순과 훈련은 무엇입니까? 위치를 모르고 역할을 모르는
데 기인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역할을 혼돈하고 있습니다. 위치를 모르면서도
큰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역할을 모르면서도 남의 자
리만 넘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세례요한이 말합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나
는 내 위치와 역할을 안다. 나는 내가 하는 것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 이상의 것을
넘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왜 낙심을 합니까? 왜 실망을
합니까? 왜 실족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가 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그 이상의 것을 넘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위치와 역할을 혼돈하고 있
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요즘은 다 기계가 자동적으로 합니다만, 옛날에는 이제 방직공장
이나 이런 곳에서 기계를 돌릴 때 물론 발전기의 힘을 빌려서 돌리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한 직원이 새로 왔습니다. 감독관이 그 사람을 한 모퉁이에 앉혔습니
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여기 실이 나가지 않냐? 예! 그 실이 지금 나가고 있
는데 만일 끊어진 게 모이거들랑 즉시 나한테 보고해라. 알았습니다." 기계가 돌아갑니다.
잘 돌아갑니다. 한참 돌아가다가 끊어진 게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순간적으로 생각했습
니다. '에이 머 이 정도를 가지고 감독관을 부르나, 그냥 내가 잇지 뭐. 그럼 아마 칭찬할거
야. 일 잘했다고, 그리고 좀 나도 일 잘 한다고 좀 본 대를 보여야 되지 않는가?'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거기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실을 이으려고 했습니다. 이어지겠습니까? 실
이 헝클어졌습니다. 기계가 서게 되었습니다. 공장이 가동이 중단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야
말로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야 네가 할 일은 실이 끊어졌을 때 나에게 보고하는 일
이다." 여러분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항상 자기의 위치와 역할을 잊어버립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위치와 역할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쇠하여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 속에는 자
기 분수를 알면서 동시에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겸손함이 깊이 자리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깊은 신앙입니다. 우리가 이 속에서 그가 그냥 자주 하고 있는 것
이 아니라, 우리에게 신앙의 깊이를 가르쳐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
일까요?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제자가 와서 말하죠 "다 그에게로 갑니다. 예수에게로 갑니
다." 그랬더니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한이 대답하
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다 갑니다.
우리는 이제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쇠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모든 사명과 모든 삶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풀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셨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만
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섬김과 봉사와 직분과 직업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
이면,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면 거기에는 질투나, 상한
마음이나 다른 인간적인 일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꾸
만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사람으로 계산합니다. 이런 것 때문에 시험이 드는 것입니
다. 초월이 없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째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전쟁을 맞이하
게 되었죠. 전쟁의 위험 가운데 있는데, 누가 등장하였습니까? 다윗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래
서 골리앗을 죽이고 큰 승리를 거뒀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다윗의 인기가 조금
올라갔습니다. 그랬더니, 사울은 생각했습니다. 저놈 때문에, 너 때문에 내 왕권이 흔들리고
있어. 너 때문에 내 기득권이 흔들리고 있어. 그리고 다윗을 죽이려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 때에 다윗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다윗이 인기가 높은 것을 보고 사울
이 생각할 때 '내가 왕이 된 거 내 뜻인가, 하나님의 뜻이지. 하나님이, 나를 세웠으니 하나
님이 허락하시는 동안, 왕 노릇 하다가 하나님이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두면 되지.' 그러면
될 것을 그는 오히려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신약에서 바울을 보십시다. 그는 세 번째로 예루
살렘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면 결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지도 모릅니
다.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다시는 여러분들의 얼굴을 못 볼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울고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슬
퍼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마세요. 주께 받은 사명, 내가 받은 사명은 주께 받은 것입니
다.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사람에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께 받은 사명, 이 사명, 나는
이 사명 때문에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길에 내 생명은 조금도 귀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맡겨 하나님이 허락한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흥망성쇠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높아지던지, 낮아지던지, 죽던지, 살던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 이것이 흥하고 이것이 성하면 나는 쇠하거나, 죽거나, 어찌되거
나 상관이 없다는, 믿음의 초월과 담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깊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성숙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깊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세례요한은 이
러한 믿음의 깊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한 가지를 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29절 말씀을 보십시오. "신부를 취하는 자
는 신랑이니,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
였노라." 그는 자신이 쇠하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삶에 충만한 기
쁨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삶에 충만한 기쁨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잘 돼서 있는 기쁨
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흥하기 때문에 갖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신부를 맞는 사람은 신랑
입니다. 그런데 그는 친구로서 훨씬 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결혼할 때 신랑입장.
그래서 신랑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 신랑 친구들이 이런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
습니까? "저 놈 어쩌다가 재수가 좋아서 장가가게 되었네." 그런 사람 한 사람도 없겠죠?
여러분 여자친구가 지금 신부입장을 하고 있는데, "가다가 다리나 걸려 넘어져라." 그럴 사
람 있겠습니까? 없겠죠? 다 기뻐하죠. 축하하죠. 바로 세례요한은 자기는 쇠하여 가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흥하여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해서 산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 늘 말하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 잘 되는 기쁨에 사는 사람 몇이나 있습니까?
남이 잘 되는 것 깍아내리죠. 좋은 쪽으로 말하기 어렵죠. 출세해서 지위가 올라가면 뭐라고
말합니까? 운이 좋았다고 말하죠. 그리고 뭐 아마 줄을 잘 섰을거야. 빽이 있다고 말하죠.
오늘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쁨이 자신의 흥함 속에 있습니까? 나의
성공 속에 있습니까? 나의 충만 속에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잘 됨, 그 기쁨, 그것으로 기뻐
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의 구원,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믿음의 축복을 받
았을 때, 형통을 받았을 때, 그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성도들 가운데 은근
히 다른 사람들의 기쁨 때문에 시기하는 사람이 심심치않게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집사
님이 잘 되셔야죠. 집사님이 잘 되시는 것 때문에, 집사님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 때문에, 그
대가 믿음이 좋아지는 것 때문에 나는 기쁩니다. 그대의 봉사 때문에 나는 기쁩니다.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왜 나서?" 이게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여
러분 이 말씀은 매우 자신 있는 태도입니다. 시기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삶의 기쁨과 행
복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자의 당당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 욕구에
바둥거리고, 욕구불만으로 살아가고, 욕구충족에만 행복이 있는 것으로 바둥거리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참으로 참 기쁨과 행복이 어디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 스팬서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이 목사님의 교회가
좀 부흥이 되었는데, 그런데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왜 교회가 줄어드나? 그 앞에 아주 젊
은 목사가 와서 목회를 너무나 패기 있게 잘 해서 교인들이 그리고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걱정을 하면서 얘기했습니다. 목사님 교인들이 다 저쪽으로 가네요. 목사님이 "어
느 집사가 갔오? 누구누구 갔오?" 이런 걸 물어보시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
요? 그럼 우리도 다 그리로 갑시다." 우리가 생각할 때 그 목사님은 패기 없는 목사이기 때
문에 그랬을까요? 우리는 많은 시간 겸손을 말합니다. 사랑은 시기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
나 정작 내가 쇠하여질 때, 내 몸이 쇠하여질 때, 내가 약하여 질 때 우리는 잘 되는 사람들
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내 물질이 쇠하여질 때 다른 사람이 돈 많이 번 것을 보
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봉사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의 봉사를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새 일을 할 때, 새 직분을 가질 때 그것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바
라볼 수 있겠습니까? 나의 뜻이 쇠하여질 때 다른 사람의 뜻을 존경하면서 기뻐할 수 있겠
습니까? '이제는 나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구만, 나는 이제 퇴물이 되었구만.' 그럴 때, 새롭
게 알아주는 사람, 새롭게 튀는 사람, 그런 사람을 위해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직장
에서 퇴출을 당할 때, 남아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흥하여
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말씀은 이런 결론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라
져라. 없어져라. 보이지 마라." 세례요한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광야의 소리"입니다. "빈들
의 소리" 그는 소리만 있었을 뿐이지 모습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기적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자랑이 없습니다. 그가 주님 앞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정말
나는 이제는 사라져야 하리라. 나는 사라져야 하리라. 녹아져야 하리라. 여러분 우리가 음식
을 만들 때 소금을 뿌리죠. 소금이 음식 위에 그냥 덜그덕, 덜그덕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
까? 음식이 추해지죠? 그러나 소금이 녹아져야 음식이 맛이 있죠? 바로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는 말씀은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흥함을 위해서 너의 기쁨을 위해서 나는 사라
지리라. 없어지리라. 모습 또 나타내지 않으리라. 영광도 자랑도 포기하리라.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새로운 증언이 되고, 새로운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이 어렵고, 풍파 많고,
경쟁적이고, 살벌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보다 넓고, 보다 깊고, 보다 높은
믿음의 이상을 가지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 프랜시스가 임종시에 많은 교인들이 모
여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숨을 거둘 시간이 가까이 왔을 때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한 수도사가 옆에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신부님 지금은 창밖에 많은 사람이 와 있습니다. 이 엄숙 시간에 신중하게 처신하시는 것
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럴 때에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미안하네, 내가 주책을 떨어서. 하지만 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네, 가슴깊이 솟구치는 기
쁨을 어떻게 감추겠나. 내가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주님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네"
세상을 떠나면서 이렇게 기뻐하는 마음, 그것이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할 것입니다. 이 속에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다. 이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것을
오늘 주님은 세례요한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여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큰 기쁨이 있습니다. 행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승리하는 복 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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