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제일 가기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병원에 가는 것입니다. 의사 앞에 가서 "내가 어디가 안좋으니 좀 봐주십시오." 하며 진찰 받고 사진찍고 피 빼고 하는 것을 정말로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싫어하면서도 몸에 이상이 있고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갑니다. 살기 위해서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인들이 남 앞에 자기 몸 내놓기를 그렇게 부끄러워 하면서도 살기 위해서는 의사 앞에 가서 "마음대로 하시오." 하며 내놓는 것을 봅니다. 부인들도 살기 위해서는 염치고 뭐고 부끄러움이고 내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산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고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신뢰할 만한 의사를 찾아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마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찾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 진단 받는 것을 죽어도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안고 일어섬을 아시고 머리털 하나까지 다 세신 바 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내가 누군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받게 되고 또한 처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하신 성경 말씀을 펴서 보면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진단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어떤 목적을 두고 지어주셨나?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들을 다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알고 있으나 나는 나를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맹목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나를 아시는 하나님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멀리서도 나를 통촉하시고 나의 안고 일어섬을 아시고 나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신 바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피할 수 없고,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정확하게 보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 분이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900년 초반기에 자동차가 갓 나왔을 때 자동차를 산 어떤 돈 많은 사람이 미시간의 한 벌판에서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그만 고장이 나버렸습니다. 아무리 살펴보고 뜯어보고 해도 어디가 고장이 났는지 도대체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으니까 차가 한 대 오더니 고장난 차가 있는 곳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려서는 고장 난 차를 고치는 모습을 한참 쳐다보더니 "젊은이, 조금 기다려요. 내가 봐줄게." 하고는 뭘 하나 살짝 만지니까 엔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가 너무 신기해서 그분에게 "선생님, 언제 그런 기술을 익혔습니까? 감사합니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하는 말이 "내가 이 자동차를 만든 헨리 포드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것이니 얼마나 정확하게 알겠습니까? 어디가 문제인지 금방 알아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이십니다. 모든 인간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의 내부를 깊이 알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만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나는 죄인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진단하는 것입니까? 시편51편 5절을 보시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합니다. 넌센스입니다.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누가 한 것입니까? 다윗이 한 이야기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이 사람 약간 정신이 돌았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왕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이 다윗의 의견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윗의 표현으로 전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주 원색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니"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듣기가 싫지만 우리 하나님의 진단은 그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저는 선하게 살았는데요. 음주 측정한 번 걸리지 않았고요. 신호위반한번 하지 않았는데요? 다른 사람 돈 한번 떼먹지 않았고요, 사기 친 적 한번도 없고요, 경찰서나 감옥에 들어간 적 한 번도 없는데요? 그래서 죄가 없다고요?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마음속에 나타나는 생각들을 종이 위에 한번 적어 보세요. 밑에서 올라오는 감정들, 악한 생각들, 여러분 한번 테스트 해보세요. 선한 것이 몇 개나 나오는가? 자신에게 조금만 불평해도 불평이 나오고 미움이 나옵니다. 자기에게 조금만 손해가 간다고 생각하면 참지 못하는 분노가 속에서 모락 모락 나옵니다. 무엇인가 질이 나쁜 것입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미워하는 것도 시간 문제이고, 자기와 함께 일생동안 피를 섞어 사는 부부도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원수가 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이런 본능을 두고 인간이 선하다고 죄가 없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단순히 감옥에 안간 것만으로 선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의 바탕은 악합니다. 나빠요. 10평 짜리 아파트에 살 때면 내가 28평 아파트에 살았으면 모든 소원이 다 풀리겠다고 해놓고 정작 28평 짜리 아파트에 살면 또 다른 욕심이 생깁니다. 자동차가 없을 때는 자동차 한 대만 있으면 좋겠다고 해 놓고 자동차를 소유하게 되면 한 두 달은 싱글벙글 타다가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시무룩해집니다. 인간은 별개아입니다. 잘살면 잘 살수록 악은 더 발달하고 생각은 더 간교해집니다. 욕심은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더 입을 크게 벌립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는 죄 속에서 태어났다. 모태에서부터 죄악가운데 태어났다' 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죄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죄의 원인
로마서 2장에 보면 성경은 그 원인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함으로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졌나니" 그랬습니다.
우리가 본래 누구든지, 믿음이 있는 사람이든지 없는 사람이든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었습니다. 라고 절규하며 부르짖었던 니이체도 죽을 때 "신이여 알 수 없는 신이여 피할 수 없는 신이여" 하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강하게 긍정하고 죽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는 믿는데 그 하나님 앞에 나와 감사하지 않고 영화롭게 하지 않는 고로 그의 생각이 허망하여 지고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생각을 하고 악한 마음을 품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렇습니다. 그런 생각과 마음 때문에 나도 모르게 악한 행위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권능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말입니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되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대신한 섬기지 말아야 할 어떤 존재를 섬깁니다.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리고 그 우상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고 그래서 결국은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은 그 지옥의 심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그 심판이 바로 지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육신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 반드시 이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잃어버린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듣는 여러분들에게 좀 원색적인 말씀이라 힘이 드실지 모릅니다. '죄, 죽음, 심판, 지옥, 영영한 불'과 같은 말씀이 여러분 마음에 부담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정확한 진단입니다. 우리는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올바른 처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즘에 잘못된 교회를 가보면 이렇게 원색적인 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바로 가르치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합니다. 현대인들이 좀더 좋아하는 용어를 쓸 수 없을까? 해서 '죽음' 이라는 말 대신에 '허무'라는 말을 사용하고 '죄'라는 말 대신에 '인간의 약점' 이라고 표현하고 이렇게 조금씩 돌려서 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옳거니 그것, 들을 만 하구나 하고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나중에 1년이 가고 2년이 지나도 영혼의 병은 고쳐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른 말을 안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사와 미국의사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한국인 의사는 암 환자에게 암이라고 바로 말을 못합니다. 환자에게는 "아 조금 안 좋은 부분이 있어서 안에 있는 것을 조금 떼어 냈습니다. 이제 회복될 테니 집에 가셔서 많이 잡수세요." 합니다. 그리고 가족을 불러서 속닥 속닥 합니다. 그러면 환자는 가족들 눈치만 슬금슬금 살피고, 가족들은 환자 앞에서는 "허허" 웃다가 나와서는 눈물을 흘립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잘못하면 환자는 자기가 왜 죽는지, 언제 죽는지 준비한번 제대로 못하고, 설마 하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한국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입니다.
그러나 미국 의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선의의 거짓도 그 순간에 잘못하면 소송에 걸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를 불러서 엑스레이를 보여주면서 "당신은 여기에 암이 퍼졌습니다. 이건 거의 피로가 불가능합니다. 생명을 걸고 한 번 수술을 해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견뎌보시겠습니까?" 하고 정확하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저 무슨 신앙을 가진 것이 있습니까? 종교가 있습니까? 하면서 영적으로 준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환자가 의사의 말을 듣고 털썩 주저 않습니다만은 한 삼십 분이나 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 아, 내가 죽음을 준비해야겠구나.' 하고 생각을 합니다.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처방-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진단을 받을 때 기분이 나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진단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반드시 처방을 하십니다. 진단하시는 이유는 처방을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 지옥을 향해서 걸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받아야 할 그 죄 짐을 다 그의 아들 예수님에게 지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의 죄를 전부 짊어지고 그 죄 값을 송두리째 있는 그대로 받은 고난의 동산입니다. 바로 그곳, 십자가의 자리가 지옥입니다. 내가 장차 지옥에 가서 받아야 할 모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그가 대신 십자가에서 받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열고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거기에만 무거운 죄 짐에서 해방을 받는 유일한 축복이 있습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어떤 아들이 학교에서 볼을 차다가 경비실 우리 창을 깨뜨렸습니다. 그 아들은 손에 돈 한 푼 없습니다. 유리창을 깼다고 하는 죄책감이 그를 두려움에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돈 한 푼 없는데 15만원이나 되는 돈을 물어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그런데 경비실 아저씨가 그 사실을 학생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런 책망을 하지 않으시고 15만원을 물어주고 깨끗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품에 안으며 '사랑하는 아들아 괜찮아! 다음에 조심해서 놀거라.' 이 아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마음속에 있는 모든 무거운 짐들이 다 벗어지고, 자유의 마음, 그리고 아버지께 고마운 마음으로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죄 값을 하나님은 친히 그의 아들 예수님에게 다 담당시켰습니다. 내가 받아야할 형벌, 내가 받아야 할 죽음, 내가 받아야 할 지옥의 고통을 우리 주님은 홀로 담당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째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십자가의 모든 죽음이 나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불살라 내어 준 사람도 있습니다. 선인을 위하여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나의 죄를 대속한 죽음은 아닙니다. 왜? 그들도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고 죄인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은 죄가 없는 분이신데 그 죄 짐을 우리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죄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죽음이 나의 죄를 위한 대속 적인 죽음이 될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죄에서, 지옥에서, 심판에서 해방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적인 죽음인 이유는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죄인이 아닌,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한 죽음이었음을 어떻게 증거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바로 부활의 문제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고 부활이 없었다면 그저 주님의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에 불과한 평범한 죽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으셨으나 다시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결정적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주님의 죽음이 자신의 죄 값에 대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죄 값을 대속한 죽음임이 확실하게 증거가 된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주님의 죽음은 지금 우리에게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전혀 존재하지 못하였습니다.
부활의 증거들
다른 모든 종교의 교주들은 무덤이 있지만 주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그렇게 겁을 내며 달아났던 제자들이 다시 순교하기까지 증거한 그들의 메씨지는 한가지였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오늘 이 주일 아침에 세계의 1/3의 인구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주님을 예배하고 있는 이것이 지금 주님의 부활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지 이제 2000년 지났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지성인들이, 학자들이, 왕들이, 젊은이들이 여인들이 주님이 그리스도이시고, 주님이 복음이라고 외치다가 순교의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주님이 부활이 없다면 어찌 그 귀한 목숨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외쳤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주님이 죽으셨으나 다시 부활하신 또 하나의 확실한 증거는 주님을 믿는 성도들마다 부활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만 하면, 부활의 주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기만 하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절망이 소망이 되고, 어둠이 빛이 되어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안식 후 첫날 즉 예수님이 운명하신 지 사흘 후에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이 죽은 시신에게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그 어두운 미명에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무덤이 열려있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두려워 말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라고 증언하며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합니다. 보니까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속하시고 사흘 후에 부활하심으로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고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제 그 주님께서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들을 초청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주님은 우리에게 보내진 구원의 밧줄입니다.
항상 기회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혹시 여기 오신 분들 가운데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서 오신 분, 혹시 자녀 때문에 이 메씨지를 듣는 분, 이웃의 성도의 간청 때문에 오신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1974년 12월 25일 대연각 호텔 화재 때 호텔 속의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이브를 이용해 나쁜 짓을 하면서 밤새도록 지내다가 아침 늦게까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이 났으니 정신이 있겠습니까?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옥상까지 뛰어간 사람들은 헬리콥터가 오면 그 밧줄 하나를 잡으려고 난리가 났습니다.
기회입니다. 불이 났을 때 밧줄을 잡으면 살고 밧줄을 놓치면 사망입니다. 이 시간 구원의 밧줄을 잡는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시 세상에서 나쁜 죄를 범해서 항상 마음에 고통받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용서해주시기를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저하지 말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속하신 주님, 그리고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회, 주님의 이 밧줄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결단하십시오.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 영생의 축복이 있습니다. 심판이 없습니다. 그의 삶을 이제부터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고 보장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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