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 12일 로마서 1:14-17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001-08-19 22:20:35 read : 10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금 미국에는 고부간 난리가 났습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고어라는 사람과 부시라는 사람이 치열한 선거를 치루는데 계표
결과를 놓고 고어와 부시 줄여서 고부간에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두명 다 기독교 신자입니다.
미국의 대통령 43명중 오직 케네디 1명만이 천주교 신자요 나머지 모두 42명이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미국은 국교로 선포되지 않았을 뿐 기독교 국가입니다. 미국 돈인 달라에는 "우리는 하
나님을 믿는다"라고 씌어저 있습니다.
부시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요 고어는 신학 대학을 다닌적이 있는 침례교 신자입니다.
부시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먼저 성경을 읽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시의 신앙도 우연곡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젊은 시절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면서 한때 술을 먹고 방황하고 있을 때에 어느
목사님을 만나 둘이서 해변가를 걸을 때에 부시에게 질문을 햇습니다.
요즘 하나님과 잘 지내고 있습니까?
그 질문에 당황한 부시는 뉘우치고 그 뒤로 술을 끊고 성경공부에 열심하면서 지금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다고 신문기자들에게 자랑하였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무척 원했습니다. 로마에 아는 사람이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열정을 끊을 길이 없
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는 길이 자꾸 막히니까 "내가 너희에게 가기를 원하노라."고 외치면서
본 로마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은 죄인의 몸이 되자 "나는 로마 시민이므로 로마에 가서 황제의 재판을 받겠다" 면
서 결국 죄인의 몸으로 로마를 가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바울은 무엇 때문에 죄인의 몸이 되어서조차 까지 로마로 가려고 하였을까?"
그 해답은 1장 14절에 "나는 너희에게 복음에 빚진자라." 라는 것이 이유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빚 진자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빚을 갚아야 합니다.
어떤 회사 사장이 다 망했습니다, 그래서 회사도 집도 다 뺏기고 망막했습니다. 남은 것
이라곤 타고 다니는 자동차 한 대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차를 타고 이제 세상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차를 몰고 가면서 이제
"나는 무엇으로 살까" 외첬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설교말씀이 생각나면서 들려왔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 목사님이 앉아있다고 생각하
고 모든 애로 사항을 이야기하면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렇다 이제부터 "나는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고 차를 돌려서 다시 사업을 시작하여서
크게 성공하엿 답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빚진 자가 첫 번째 할 일은 "나는 빚진 자다" 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이 빚진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평생가도 빚진 것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 사람들에게 금전적인 빚이 아니라 복음에 빚진 것을 말하고
그러므로 할수 있는 데로 로마 너희에게 가고자 원한 다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누구나 복음에 빚진자 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누군가가 전도를 해서 교회에 나왔다면 이제 여러분 또한
빚진자로서 누군가 여러분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음으로 그들을 향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
다. 우리는 매일의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은혜의 빚진 자인 것을 깨닫아야 합니다.
바울은 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이란 이름으로 예수님을 대단히 미워했고 예수님의 제자들
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고 혈안이 되어서 좇아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까지 가서 제자들을 잡으려고 가는 길에서 홀연히 빛을 만나서 쓰러졌을
때에 누군가 눈앞에 희미한 사람이 서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물었습니다. "뉘시오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네가 내 제자들을 핍박함은 곧 나를 핍박한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때 바울은 후다닥 깨달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만나고 있구나'
바울의 삶이 뒤집어지는 순간입니다.
바울이 질문합니다. "주여 내가 무슨 일을 하리이까?"
때
바그때 비로서 바울이 빚진 자의 심정을 깨달았을 때에 바울의 모든 삶이 변하여 빚진 자
의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자식은 누구나 부모에게 빚 진자입니다.
날 기르시려고 밤잠을 설처가며 기른 수고를 깨달을 때에 비로서 우리는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부모의 고마움을 모르면 효자가 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본문에
"할례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로다" 라고 고
백합니다. 이 빚진자의 심정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빚진자요
주님께로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고마움의 빚진 것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공기가 많을 때는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다가
공기가 희박해 젔을 때에 공기의 고마움을 알 듯이
평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삶이 절망에 빠지거나 어려워 젔을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것이로구
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세상의 헛된 허영과 사치와 유행에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탈
렌트나 가수나 아나운서등 메스컴의 스타가 되는 것이 청소년들의 꿈이 되었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세명의 자녀들에게 장래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답니다.
첫재는 "스타"가 되고 싶다고 했답니다. 둘째는 왕 즉 "킹"이 되고 싶다고 했답니다.
셋째는 욕심이 많아서 둘다 되고 싶다고 하였답니다.
셋째가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스타하고 킹하고 합하면 무엇이 됩니까? 스타킹입니다.
그래서 셋쩨는 소원대로 스타킹이 되었답니다.
이렇게 향방없이 오늘을 사는 젊은이 들에게 링컨의 이야기는 큰 좌우명이 될 것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라함 링컨은 가난한 삶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후 어머니가 읽던 성경을 끼고 도시에 나가 서점에 취직을 했는데
그날 밤 링컨은 잠들기 전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오늘부터 이 서점 주인에게 빚 갚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게 하소서]
링컨이 빚진 자의 심정으로 일하니 불평할 수 있나? 늦잠 잘 수 있나? 링컨은 빚진 자이
기에 손님들에게 더 친절하고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결국 이런 링컨의 빚진자의 심정은 일생동안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그 뒤 우체국장이 되었고 법원 서기가 되었고 변호사가 되었고 대통령이 되었
습니다.
그는 언제나 어려운 일이 닥칠적 마다 "나는 모든 미국 국민에게 빚진 자이기에 더 열심
히 일해야 한다"고 말 했습니다.
반대로 슈바이처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 낳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고통이었습니
다. 그는 자서전에서
"학창시절에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가나하게 사는데 나만 행복한 생활을 보낸다
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물질적 부요한 환경에 대하여 빚진마음을 느끼고 아프리카로 출발한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 받았음으로 누구나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알지 못한 자에게 빚을 갚아야 합니다.
빚 진자는 지금까지 잘못을 회개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2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사는 것이
라.' 이 얼마나 겸손한 표현입니까?
그런데 우리의 겸손을 빼앗아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교만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빚진 자의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겠습니다. ]
겸손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내 얼굴에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내 삶에 말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나뿐만 아니라 남도 이해하게 되고 압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서 "나는 빚진 자라" 하는 이 겸손의 태도가 우리의 삶에 기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어떻게 갚습니까?
빚을 갚는 것은 딱 한가지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큰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
희도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빚을 갚아 드리는 것입니다.
서양문화는 죄의식 문화라 한다면 동양 문화는 수치 문화(shame culture) 부끄러움의 문
화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내면에 죄 의식을 중요시하는 반면
동양사람들은“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하는 타인의 기준을 갖고
체면을 중요시하는 문화입니다.
뉴스를 보면 범인들이 잡혀서 끌려오는 장면을 보면 그들은 옷을 거꾸로 뒤집어쓰고 얼
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얼굴을 가린다고 그 수치가 가려지는 것은 결코 아닌데도 체면을
중요시 여기는 문화이므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보면 부끄러워 해야될 사람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복음 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은 16절에서“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그랬습
니다.
이말은 두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적극적인 의미로 나는 복음을 자랑한다”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바울은 16절에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이란 말은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이란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도 부끄러워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옛날 로마처럼 박해가 있는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
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알까봐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부끄러워야 할 것은 더러운 것과 탐욕과 우상숭배와 호색과 술수와
분쟁과 시기와 당짖는 것과 방탕한 것을 부끄러워해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랑하지 말 것과 자랑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자랑하지 말 것은 자기 자랑하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랑해야 될 것이 있으니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해야 합니다.
세상에 활개치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고 뻔뻔스러운 사람들
이 많이 있습니다.
어저께 신문에 보니까 청화대 청소원이 무슨 청소원이 자랑이라고 벤처 투기군에게 자기
가 청와대 실세라면서 무려 8억을 뇌물로 받았답니다.
형무소에 가면 내가 죄인입니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없고 재수가 없어서, 빽이 없어서
형무소에 들어와있다”고 뻔뻔스럽게 핑계를 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랑하지 말고 진정 자랑해야 될 복음을 자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6절 하반부에 복음은 능력이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연세대 총장이었던 백낙준 박사는 한국 교회사에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점쟁이었습니다. 길거리에 앉아서 지가는 사람들 관상을 봐주고
돈을 벌었습니다.
어느날 길을 지나가던 한 집사가 백낙준의 아버지를 보고 한마디를 했습니다. "여보시
오. 그런짓 하다가 당신도 망하고 자식들도 그짖 할텐데 빨리 그만두고 예수나 믿으시
오." 그때 그는 눈을 흘기면서 '너나 잘 믿어라. 재수없게 왜 떠들고 가' 하고 말했답니
다. 그런데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워있는데 그 집사가 던진 말이 계속 귀에서 맴돕니다.
'그런짓 하다가 당신도 망하고 자식들도 망해' 잠을 자도 그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그는 모든 것을 다 청산해버리고 예수를 믿었는데 그 아들이 연세대 총장이 되었
습니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의 복음이 그 가문을 바꾸어 놓아 길가 점쟁이 자식이 연세대학교 총
장이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 젔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고재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육군 중령 일가족 모두 죽인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 고재봉이 교도소에 들어가니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간수도, 형목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모든 죄수가 고재봉 앞에서 "형님"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소포 하나가 고재봉한테 왔습니다. 열어보니까 성경이 들어있었습니다. "
재수없다" 하고 성경을 던졌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화장실 휴지로 쓰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뜯어가지고 화장실에 가서 무슨 내용이 씌여있나 보다
가 복음의 능력이 고재봉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 믿고 그때부터 전도를 하는데 2천명의 죄수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중
에 무려 1800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도하는 내용을 똑같이 전하면 이렀습니다.
"이 앞길이 구만리 같은 놈들아 너희가 이렇게 살다가 갈거냐?
이 감방에서 다시 나같은 사람을 안만나려면 너희들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고재봉에게 예수 믿겠다고 손들고 "나같은 죄인" 찬송가를 불렀습
니다.
그가 죽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좀 더 일찍이 하나님을 알았다면 나에게 일찍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악한 자가 되지 않았을 텐데.." 그는 하나님을 찬
송하면서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고재봉과 같은 악한 사람에게 들어가니 그 인간이 변화되고 감옥을 변화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은 폭탄이 터지듯 인간의 심령에 떨어지면 심령의 죄악이 무너질
것이며, 가정에 떨어지면 가정이 변화될 것이며, 마을에 떨어지면 마을이 변할 것입니다.
이 위대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온전한 신앙의 길에 아직 들어서지
않았거나 체험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능력이라고 말 한 것은 '이 복음의 폭탄이 로마에 떨어지면 로마는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가슴속에 타올랐
던 마음의 소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겐 아무도 무서운 자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 능력을 가슴에 안고 '내가 로마에 들어가 복
음으로 로마제국은 무너뜨릴 것이다." 라는 확신을 가지고 로마로 갔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예언대로 로마는 전쟁도 없이 기독교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미국이 한국 땅에 많은 것을 원조했습니다. 6·25사
변 때 많은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을 살려낸 가장 큰 힘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전한 복음의 능력
이었습니다. 두 선교사의 복음의 능력이 이 민족을 오늘에 이르도록 축복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위대하고 무한한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무한한 복음의 능력은 내 가문을 살릴 수 있고 내 가정을 세울 수 있으며 내 사업장
을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복음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켄터키 후라이드치킨을 시작한 사람은 다 망한 퇴직자였으나
믿음으로 다시 망한 사업장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가나한 이웃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헐벗
은 자를 입혀야 됩니다. 또한 병든 자를 돌아보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계속 받아 먹고 도움을 받는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되냐 하면 "또 안주나" 하고 거지 근
성을 갖게 됩니다.
물질적으로 도와 주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안됩니다.
가난하고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을 붙잡고 홀로 일어서서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올바른 이란 말은 말 뜻 그대로 옷감에 올이 바르다는 것입니다.
옷감에 올이 바르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올이 바른 옷감만 있으면 어떤 옷도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복음의 올바른 옷감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죄인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올바른 영광의 옷을 입도록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나그네와 같습니다.
나그네는 집없이 방황하는 자가 나그네입니다. 정처없이 헤매는 자가 나그네입니다.
인생의 목적도 없이 방향도 없이 헤매는 자들, 수많은 불신자들이 다 나그네입니다.
이들을 다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해서 인생에 올바른 목적을 가르처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병든 자가 누구입니까? 육체의 병은 고칠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과, 심령이 병들면 고칠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헛된 세상에 병든 자가 많습니다.
이들을 치유하는 능력이 복음에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하박국 2:4을 인용한 말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는 말의 뜻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죽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의롭게 된다 혹은 의롭다 함을 소위 以信得義 혹은 稱義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의로워진다는 말도 아니고, 의인이 된다는 말도 아니며, 의인으로 만든다는 말
도 아닙니다.
이 말은 죄인이지만 의인으로 간주하여 의인이라고 불러 준다 는 말입니다.
본래 무자격자였으나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의인으로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씨 성을 가진 처녀가 김씨네로 시집을 가면 사람은 그대로 인데 모든 가족관계가 변합
니다. 그래서 갑자기 전혀 몰랐던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고, 새로운 김씨 가문에
사람이 됩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아버지가 생겼고 우리는 모두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아버지는 나를 데려오기 위하여 그 집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내죄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에 이야기를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의인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온전한 믿음 생활인가
두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믿음 생활이란 버리는 것입니다.
신부가 시집을 가면 옛것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설령 사랑했던 사람이 있을 지라도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만약에 버리지를 못한 다면 그 신부는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버리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옛것을 버려야 합니다. 옛생각, 옛사상, 옛습관, 옛지식, 옛악행… 새로운 생활을 방해
하는 옛것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얼마나 철저히 미련없이 옛것을 버리느냐가 좋은 신앙에 관건입니다.
아브람이 복의 근원이 된 것은 그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갈곳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가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린 것입니다. 논밭을 버렸고
장막을 버렸고 친척과 이웃 사람들을 떠났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렇게 버렸기에 복된 아브라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버릴 줄 아는 사람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버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바로 버리는 삶이었습니다. 성
도 여러분! 버리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 믿음 생활이란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되 주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모두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예배가 상달되었고, 한 사람
은 상달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한 사람은 진정으로 드렸고 한사람은 형식적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몸을 드리는게 예배입니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헌신을 잘하는 사람이
믿음 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때로 믿음 생활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믿음생활이 거추장스럽고 귀찮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동물의 창조를 끝냈을 때 새들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짐승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안 주셨는데 왜 우리 새들에게만 양 옆에 짐을 지워서 힘들
게 하십니까?"라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때 용기 있는 독수리가 어깨에 붙은 그 무거운 날개를 움직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온몸이 갑자기 가벼워지면서 공중을 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날개란 짐이 아니라 높이 날고 먹이를 찾으며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
을 깨달았습니다. 때로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날개지만 하늘을 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
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때로 믿음은 우리에게 큰 짐으로 다가오는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짐으로 준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해 줍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이 땅의 험한 세파를 헤쳐나가게 됩니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는 생활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믿음 생활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복음의 능력을 믿음으로 여러분의 삶이 가정이 직장이 사업장이 변화되기를 진정으로 축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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