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홍, 하나님께 대한 최소한 예의/ 죽음의 질(Well dying) 중요 2016-10-13 23:30:46 read : 40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5년째 선행’ 박수홍 “봉사 활동, 기도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최소한 예의”
▲개그맨 박수홍. 국민일보DB
개그맨 박수홍이 15년째 선행을 펼치고 있다.
박수홍 측 한 관계자는 6일 “박수홍이 15년째 애신보육원을 후원하고 있다”며 “얼마 전 소아암 환아를 위해 후원금을 내는 등 따뜻한 마음씨로 아이들을 도왔다”고 밝혔다.
박수홍은 2001년 자신이 출연한 프로그램을 통해 의정부 동두촌에 위치한 애신보육원을 방문한 후 꾸준히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한 스키캠프의 MC를 맡았던 그는 보육원 아이들 50여 명이 스키캠프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출연료를 받지 않기도 했다. 뮤지션이 되길 꿈꾸는 원생을 위해 드럼 세트를 기증하고, 보육원 합창대회 사회를 보기도 했다.
1991년 제1회 KBS 대학개그 콘테스트에 입상하며 데뷔한 뒤 TV와 라디오 등에 출연, 인기를 얻었다. 2003∼2004년 MBC 방송연예대상 쇼 버라이어티부문 최우수상과 PD들이 뽑은 스타상을 탔다. 2006년 기독 NGO ‘선한사람들’ 홍보대사 등으로 여러 재난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펼친 공로로 행정자치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박수홍은 과거 서울 송파동 샘이깊은교회 간증에서 “개그콘테스트 합격 자체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면서 “지금의 봉사 활동은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말했다.
“진한 아픔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부인했을 것이고 축복도 없었을 것”이라며 “힘들고 두려울 때, 방송 출연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모든 걸 주관해 달라는 기도를 잊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SBS ‘미운 우리새끼’에 출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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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질(Well being) 못지않게 죽음의 질(Well dying) 중요”
김장대 목사(시드니호스피스(SICA) 대표)
제1기 한·호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 수료 후기
ⓒ김장대 목사
시드니호스피스회(SICA)에서는 지난 9월 26일~10월 6일까지 본회 사무실이 있는 Eastwood Anglican Church에서 제1기 한.호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을 시작하여 10월 10일 수료식을 가졌다. 교육생을 20명으로 한정하여 받았으나 4명의 청강생이 추가되어 24명이 교육에 임하였다.
시드니 호스피스(SICA)는 최초로 호주정부지원 무료 First Aid 교육에 많은 사람이 지원하였으나 모두 수용하지 못하고 18명으로 한정하였으며, 나머지 교육생들은 First Aid 교육은 내년으로 넘기고 자원봉사자 교육만 수료하게 되었다.
한국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호스피스회와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제1기 한?호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은 그 의미가 새롭다. 호주를 방문하여 강의를 맡으신 두 분 강사, 전재규 교수님(의사, 한국호스피스 협회 설립자, 대신대학교 명예총장, AACCI/SICA 고문)와 김경환 장로님(동산의료원 자원봉사자, 15년 경력)의 이론과 현장사역에 대한 강의는 교육생 모두에게 깊은 존경과 감명을 주었다. 그 동안 시드니 호스피스회(SICA)에서는 자체적으로 자원봉사자교육을 시작하여 10기생까지 배출하였다.
그러나 세계는 지금 글로벌 시대를 넘어 지구촌 시대에 직면하여 모든 것이 일일 생활권에 접어들고 있고, 전 세계가 모든 의료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때문에 국가 간 인력 및 지식 교류를 하여야 동시대에 사는 환우들이 전세계 복지 수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한?호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은 암환우들과 그들의 가족 및 봉사자에게 "삶의 질(Well being) 못지않게 죽음의 질(Well dying)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였다. 모든 수료자들이 각기 자신의 자원봉사영역을 결정하고, 교육소감을 발표하였지만, 그 중 몇 명만 소개한다.
교육생 박00
"이번 호스피스 봉사자 교육을 통해 호스피스에 대한 이해와 감동이 있었다. 말기 환우의 죽음의 질에 대한 것도 배웠다. 어떻게 하면 'Well dying'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나 자신의 문제이다. 질병의 시작부터 Well dying까지 죽음의 질이 세계 2위를 차지하는 호주에도 'Blind Spot'(맹점, 사각지대)이 있다. 환우의 정신적·사회적·영적인 면까지 호주 정부가 돌보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호스피스 자원봉사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특히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는 내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나의 어머님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었던 50여 년 전 일이 떠 올랐다. 치료과정에서 남동생의 반대가 문제였다. 재산 상속 문제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가 있었다면 가족간의 갈등은 없었을 텐데... 나는 꼭 이 의향서를 작성하고 싶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한 문제라 본다."
교육생 김00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 삶이 있다는 것은 죽음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삶은 죽음을 향한 치열한 여정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와 같이 죽을 때도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이 세상의 허무함을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삶의 고귀함을 겸허히 새기며 생명의 존귀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공학과 의술의 눈부신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연장시켰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된 치료 목적이 아닌 생명연장의 목적으로서의 의료행위 또한 만연된 상태이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생의 마지막을 사랑하는 가족?친구와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고통을 덜 느끼면서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보다 더 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생과 사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누구나 찾아오는 이 죽음을 끝이 아닌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옮겨가는 통로라고 인식한다면 슬픔과 두려움보다 아름다움으로 바라보며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잘 죽는 것이 결국 잘 사는 길이기에...."
교육생 윤00
"아버님을 하늘 나라에 보내드리면서, 연명의료에 대해 궁금한 점과 의문점이 많았었는데 이번 교육을 통해 그것들이 다 풀렸다. 나도 기꺼이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환자가 직접 자기 임종에 대한 의료행위, 즉 연명치료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순간을 대비해 미리 자신의 의사를 서류로 남김으로써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에 사인을 했다.... 천국 환송식을 가족들이 기쁨으로 준비하고 환송식 조문객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장례문화를 만들어 가고 싶다."
9월 28일 수요일, 아침에 눈을 뜨니 어느새 맑고 영롱한 아침햇살이 이웃집에서 넘어온 뽕나무 가지를 지나 배시시 얼굴을 내민다. 호스피스 교육기간 중에 시드니 호스피스가 섬기는 너싱홈에서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다. 늘 그러하듯이 너싱홈에 계시는 우리 환우 중에서 음대를 나오신 한 할머니는 음악을 좋아하셔서 콘서트가 열릴 날짜가 확정되면 그 때부터 달력에 표시를 해두고 손꼽아 기다리신다.
몇 달 전부터 기도로 준비해 온 이번 콘서트는 순탄하지 않았다. 9월 23일 금요일 오후에 갑자기 FLU로 인하여 너싱홈마다 출입금지가 되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공연 준비를 마친 상태인데 갑자기 연락을 받아 안타까워했다. 정부에서 너싱홈으로 공문이 내려와서 어쩔 수 없단다.
너싱홈에 가보니 출입구에는 STOP FLU라는 경고판이 붙어있었다. 매점도 문이 닫혀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인적이 드문 그곳에 더욱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제 병원 응급실에 입원하신 환우를 뵈러 갈 때 본 그 경고판이 너싱홈에도 붙어있어 FLU의 심각성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콘서트는 환우들과의 약속인데...
우리는 발 빠르게 다른 동(Building)에 알아보았다. 마침 같은 Macquarie Park Baptist Care 소속 다른 동인 DHL에서 우리를 환영하며 콘서트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우리는 콘서트 당일 4대의 차에 나눠 타고 대구 동산병원에서 오신 강사님들과 봉사자들이 너싱홈 공연장에 도착하니 Worker들이 벌써 환우들을 콘서트 장에 모셔놓았다. 하프팀과 기타팀은 일찍 그곳으로 바로 와서 함께 준비하고 계셨다.
그런데 처음간 그곳에서 나는 멀리 뒤에서 보고도 익숙한 분이 내 눈에 들어왔다. 왜냐하면 그분은 머리를 흔드시기 때문에 얼른 앞에 가서 자세히 보니 전에 다른 너싱홈에서 뵌 한국 분이 여기 와 계셨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좁은지... 이역만리 호주로 이민을 와서 이 너싱홈에서... 하프 연주자로 오신 분 중에도 이 분을 아시고 여기서 만남이 반가워 함께 사진도 찍곤 하셨다.
봉사자들이 속속 도착하자 공연이 시작 되었다. 이번에 처음 합류한 플루트 연주의 'A wonderful Savior is Jesus my Lord'를 비롯해서 듀엣 찬양, 열정적인 기타 연주로 말미암아 즉석에서 청중으로 계시던 외국인 한 분이 자원해서 연주를 해 주셨다.
무엇보다도 이 너싱홈에 환우로 계신 박 에스더 권사님은 곱게 우리 고유의 한복을 입고 출연하셔서 하나님을 찬양하셨다. 사실 DHL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거기 있는 메니저에게 다른 동에 있는 우리 한국 환우들을 모셔와도 되는지 물어 보았지만 환우가 오고 가는 것은 FLU 때문에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동에 계시는 한인 환우들과 또 이번 콘서트에 찬양을 하실 박 에스더 권사님은 출연하지 못하겠거니 하고 있는데, 갑자가 한복을 입고 나타나셨다.
그러자 그 매니저도 박 에스더 권사님의 한복을 보고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자신의 카메라에 사진을 담기 시작했다. 목회자 가정이신 박 에스더 권사님은 찬양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셨다. 83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한국어로, 또 외국 환우들을 위해 영어로 얼마나 아름답게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시던지... 그분의 삶의 감사가 찬양을 통해 우리들의 가슴에 전해졌다. 매니저는 박 에스더 권사님의 찬양이 끝날 때까지 연거푸 카메라에 그 아름다운 모습을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다음에, 여섯 명으로 구성된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분들이 연주하는 크로마 하프의 'You are my sunshine' 연주의 흥겨움으로 DHL 목사님과 사회자의 권유에 우리 모두 박수를 치며 함께 흥이 고조되었다. 음악이 이렇게 온 세계인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 있는 줄이야....
콘서트를 마치고 다과를 나누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오늘 콘서트에 대한 소감을 나누었다. 출연자나 봉사자나 환우들이나 모두 기뻐했다. 개최하기까지 여러 생각지 않은 장벽을 뛰어 넘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이 될 줄이야!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은 경하지만 그보다 중한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있다는 고린도후서 4장 17절 말씀이 생각이 났다. 이 아름다운 콘서트가 열릴 수 있게 준비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준비하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 다음 콘서트 계획이 줄을 섰다 출연자도 공연 장소도...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 할렐루야!(www.sydneyhospice.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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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드 아브디니 목사와 아내, 페이스북으로 이혼 소식 전해
▲사에드 목사와 가족들의 모습. ⓒACLJ 제공
“이 새로운 자유가 나를 아프게 했다. 아주 나쁘게.”
올해 1월 이란 교도소에서 석방되어 많은 이들의 축하와 격려를 받은 이란계 미국인 사에드 아브디니 목사가 아내 나흐메와 12년 간의 결혼 생활을 청산한다는 소식을 전해 안타까움을 주었다.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 따르면, 지난 5일(현지시간) 아브디니 목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아내와 이혼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아내 나흐메와 이혼한다는 소식을 알리게 되어 매우 슬프다. 그녀는 12년 동안 나의 아내로 지냈으며 귀한 아이들에게 항상 놀라운 엄마가 되어줄 것”이라고 남겼다.
또 “나의 수감 이후에도 지속된 트라우마 때문에 나와 가족들이 경험한 고통들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전했다.
전날 오후 6시경 아브디니 목사보다 먼저 이혼 소식을 알린 나흐메는 “지난 2년 동안 우리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며 함께 울고 울었던 여러분들에게, 사에드 목사가 분노·학대와 관련된 상담을 거부하고 이혼 소송을 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 너무 마음이 무겁고 아프다. 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때가 오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여러분의 기도에 감사드릴 뿐”이라는 글을 올렸다.
12시간 이후인 5일 자정, 아브디니 목사 역시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혼 소식을 알리는 긴 글을 올렸다.
그는 “우리가 힘든 과정을 겪고 있지만, 내가 이란 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동안 가족들이 나의 석방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주었기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은 나의 영웅”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의 개인적인 고통과 가족의 문제가 그리스도께 대한 나의 헌신이나 이란 사람들과 전 세계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나의 결심을 약화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사에드 아브디니 목사는 지난 2012년 9월 체포된 이후 약 3년 이상 이란의 교도소에 수감됐었다. 그는 2000년 초반 자택에서 기독교인들과 사적인 모임을 가지며 국가의 안보를 위협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란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무슬림과 신앙을 나누는 것은 불법이며,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로 여겨진다.
2013년 1월 징역 8년을 선고받은 아브디니 목사는 교도소에서 신체적·정신적 학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나흐메는 그의 석방을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해왔으며, 의회 연설을 통해 미국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다.
사에드 목사는 결국 올해 1월 다른 3명의 미국인들과 함께 이란 교도소에서 석방됐다.
그러나 그의 귀향은 달콤하지만 쓴 것이었다. 그가 석방되기 몇 달 전 나흐메는 친구들과 지지자들에게 그들의 결혼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이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을 ‘학대’ 혐의로 가정법원에 고소했다. 심지어 그가 교도소에 갇히기 전에도 자신을 학대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녀가 작년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한 내용은 이러했다.
“여러분들에게 결혼 생활 내내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숨긴 사실을 깊이 후회하며, 이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 저는 사에드가 겪어야 했던 끔찍한 상황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했던 영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어서 우리 결혼 생활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3개월 전 사에드는 자신의 석방을 위해 내가 대중들 앞에서 반드시 해야할 일들을 요구했다. 그러나 내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는 내가 따르지 않을 경우, 결혼은 끝날 것이고, 아이들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한 때 동성애자였다가 ‘탈동성애인권운동가’ 활동을 한 김유복(본명 김유복자·사진)씨가 11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76세.
서울 용산구 대사관로 순천향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탈동성애자 시민단체 인사들의 조문이 잇따랐다. 조문객들은 슬픔에 잠겨 그를 추억하며 안타까워했다.
고인의 임종을 함께 한 홀리라이프 대표 이요나(갈보리채플서울교회) 목사는 “고인은 17년간 투병생활 중 예수사랑을 체험하며 동성애자의 삶을 회개하고 천국백성이 됐다. 사망원인은 패혈증”이라고 밝혔다.
이 목사는 “고인은 이 땅의 모든 동성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기를 소망하며 눈을 감았다”고 말했다.
고인은 회개 전까지 ‘여장남자’로 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유 없이 남학생이 좋았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술집과 트랜스젠더바 등에서 일했다.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았고 눈썹에 문신을 한 뒤 가슴확대 수술까지 받았다. 한때 모 방송국의 전속가수로 활동했다. 뮤지컬에 출연했고 일본시장에도 진출했다.
인생이 술술 잘 풀리는 듯했지만 한 순간이었다. 바라던 행복은 찾아오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허무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역시 동성애자로 살다가 ‘탈동성애 인권운동가’로 변신한 이 목사의 인도로 30대 후반에 교회를 다니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후 많은 동성애자들이 고인의 손에 이끌려 죄성을 고백하고 크리스천이 됐다. 그는 평소 “동성애는 죄악이 분명하며 그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발인예배는 13일 오전 10시 서울 순천향병원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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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잠자는 존재로 지으셨는가?
ⓒPexels
영국 크리스천투데이 칼럼니스트 패트릭 마빌로그(Patrick Mabilog) 목사는 최근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잠자는 존재로 지으셨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마빌로그 목사는 칼럼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왜 인생의 3분의 1 가량을 잠을 자게 하셨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잠을 최대한 자는 것을 가치롭게 생각하는 문화에서 자라면서, 이 질문을 굉장히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수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역을 위해 쉬지 않고 계속 전진할 수 있도록 창조하시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고 말했다.
마빌로그 목사는 "신체적인 시간은 뒤로 하고, 잠을 잘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심오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특별히 더 많은 생산성과 일, 결과 등등을 외치는 이들에게 그러하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무시할 때가 있다. 우리가 일, 파티, 교제 등으로 밤을 지새우지만 이에 대한 대가는 매우 비싸다"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잠자는 존재로 지으신 3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우리가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잠은 궁극적으로 지구상에서 우리의 시간을 제한시킨다. 이에 대해 생각해보라. 우리 삶의 약 3분의 1을 잠으로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으로 한계를 지닌 존재이며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만큼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경계를 두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고린도후서 2장 9절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거의 모든 시간에 우리는 더욱 약해지고,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능력이 적어질 수 있다. 늦게까지 안 잘 수 있기를 바라고, 날고 싶고, 기적을 행하고 싶지만, 이 모든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2. 하나님께서 한계가 없으신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의 제한된 능력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여러분이 잠자고 있는 때에도 이 세상과 주변의 모든 것들이 지속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해보라. 이것이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겠는가?
우리는 너무 자주 주변의 모든 것이 내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 관계성, 목표를 비롯한 많은 것들을 순서대로 해내기 위해 밤을 지세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코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다. 항상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
3.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신뢰하게 한다.
난 시편 4장 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말씀을 좋아한다. 이는 쉼의 진정한 정수이다. 하나님을 떠나있을 때, 우리의 안전을 위해 이 말씀을 품도록 연습하라.
이는 출애굽기 20장 8~9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명하신 이유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쉼은 잠깐 멈추는 것일 뿐 아니라, 당신의 계획을 따라 모든 것을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때, 실제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쉴 수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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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콜럼바인 총격사건서 생긴 일
▲사진=위키피디아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한 'I'm Not Ashamed(나는 부끄럽지 않습니다)'가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4일 유튜브 fingerofthomas란 채널에 2분9초 분량의 짧은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영상은 '나는 부끄럽지 않습니다(I'm Not Ashamed)-콜럼바인 총격사건에서 일어난 실화'란 제목으로 게재됐습니다.
▲유튜브 캡처
영상의 내용은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1999년 4월 20일 미국은 콜로라도주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건으로 충격에 빠집니다. 이 사건으로 자살한 가해자 두 명을 포함, 총 15명이 숨지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의 첫번째 피해자가 독실한 크리스천인 레이첼 조이 스캇입니다.
가해자들은 그녀의 다리, 팔 등에 여러 발의 총을 쏘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넌 아직도 하나님을 믿니?"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렇다는건 네가 더 잘 알잖아(You know I do)"라고 대답했고, 그들은 "그래, 그럼 니 하나님이랑 같이 있어!"라는 말과 함께 그녀의 머리를 향해 총을 발사해 살해했습니다.
▲유튜브 캡처
레이첼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신앙을 당당히 고백하고 17세의 나이에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영화는 레이첼의 믿음과 고민이 진솔하게 담긴 일기장, 그녀의 가족, 사건 당시의 목격자, 친구들의 증언을 토대로 제작됐습니다. 이 영화의 홍보영상은 11개월 동안이나 아무 이유없이 유튜브로부터 차단됐으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비난이 일자 홍보 영상의 게재를 승인했습니다.
수많은 방해를 이겨내고 이 영화는 오는 21일 드디어 미국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유튜브 캡처
이 제목처럼 레이첼은 부끄럽지 않겠지만, 부끄러워질 크리스천들이 많을 겁니다. 기회가 된다면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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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드리는 살아 있는 예배
우리 신앙고백은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김진규
오늘날 기독교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삶의 문제가 아닐까? 도덕성은 곧 우리의 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교회는 기도 생활, 말씀 묵상, 성령 충만한 삶, 전도와 제자 훈련, 예배를 얼마나 강조하는가? 우리의 문제는 이런 영성이 우리의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행위 문제라고 하면 누가 온전하다고 하겠는가? 다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다. 정도의 문제이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그들보다 낫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이 그들보다 떨어질 때가 많다. 우리의 행위가 그들보다 떨어질 때, 사람들은 실망하고 신뢰하지 않게 된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도 결국 행위가 문제가 되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점
이사야 1장 11-13절에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들린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다.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렇다.
이런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 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알 수 있다. 하나님께 부지런히 제물을 바쳤다.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들을 열심히 지켰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열심히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고 주일, 수요일, 새벽 기도 등 모든 집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하나님께 부담만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14절). 너희가 드리는 예배와 헌물이 내가 지기에 너무나 힘들다. 그러니 그만 가져오라고 말씀하신다.
이들이 드리는 분향을 '가증히' 여긴다고 하신다. '가증스러운 것'(토에바)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자나 동성애자와 같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인들에게 사용된 단어이다(레 18:22; 20:13; 신 7:26). 무엇이 이들의 종교 생활을 하나님께 무거운 짐, 가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렸는가?
하나님은 이들에게 더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너희가 손을 펴서 도움을 요청해도 눈을 가리고 응답하지 않겠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15절)고 말씀하신다. 이들의 기도에 대해 전혀 응답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귀를 닫아 버리는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과 예배 행위를 지긋지긋하게 여기시는지 그 이유를 중간중간 말씀하신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3절)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17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점은 곧 행위의 문제였다. '악한 행실'이 문제였다. 하나님은 이들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악행 대신 선행과 정의를 행하라고 요청하신다. 정의란 17절에 나오듯이 사회적인 약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와 과부와 같은 힘없는 자들의 소송을 공정하게 하라는 말이다.
예루살렘은 한때 정의와 공의의 도성이었으나 이 당시에는 악을 행하는 살인자들이 우글거리는 도성이 되었고, 예루살렘 권력자들은 도둑들이었고 뇌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소송이 공정하게 행해지지 않았다(21절). 이들의 행위가 바로 문제였다.
잘못된 행위는 우리의 종교 생활 자체를 무효화한다는 사실을 이사야 1장은 분명하게 가르친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부패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제물과 절기 준수가 의미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행위가 부패한 상태에서는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나 예배도 하나님께 무거운 짐만 지워 드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일부 종교개혁 후예들의 오해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타락한 로마 가톨릭의 행위구원론을 깨뜨리기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면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개신교에서는 귀가 따갑도록 가르친다. 이를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에 많은 개신교인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이지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오해한다. 이런 오해에 큰 함정이 숨어 있다.
이런 오해는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루터가 종교개혁 할 당시에도 나타났던 문제이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행위는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이런 오해가 오늘날 구원파 이단이 갖고 있는 구원관과 일치하는 견해이다. 루터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나중에 깨닫고 성도의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여전히 루터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던 오해를 종종 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이니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믿음과 행위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으면 언제라도 이런 오해에 빠지기 쉽다. 이런 오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항상 야고보서를 함께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교리는 항상 "율법의 행위"와 대조를 이룬다(롬 3:20-22, 28; 갈 2:16; 3:2, 5). 많은 본문에서 "믿음"과 "행위"를 대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을 대조하고 있다(롬 3:27; 9:32; 11:6).
바울 당시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율법의 행위, 즉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점이다. 이것이 이들의 함정이었다. 십계명을 온전히 지킴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 이들의 문제점이었다.1) 이들은 십계명을 주신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십계명을 주신 목적은 이를 지켜서 구원을 얻도록 주신 것이 아니다. 십계명은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성경은 미워하는 것을 살인이라고 한다(요일 3:15). 지금까지 살면서 전혀 미워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과연 십계명을 이런 관점에서 완벽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십계명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주신 것이다. 여기서 율법의 제2, 3의 용도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십계명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십자가로 달려가 죄 용서 받도록 주신 것이다. 그리고 십계명에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주신 것이다.
그런데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율법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이룬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게 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이 이들에게 필요 없게 된다.
이와 똑같은 함정에 빠졌던 종교가 중세의 가톨릭이었다. 이들은 믿음 외에 행위도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행위가 온전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여기에 답을 할 수 없다. 이 고민이 중세의 루터가 했던 고민이다. 자신의 행위를 생각할 때 도저히 구원 얻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날마다 회개 기도하고 고행을 했던 것이다. 나중에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필자가 종종 행위구원론의 오류를 막기 위해서 드는 실례가 있다. 자신의 행위를 의지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자신의 피를 조금 더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과 똑같다.
나의 죄를 씻는 것은 100%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은 것이지 만약 내 피가 1%라도 들어 있다면 내 핏속에 들어간 원죄 때문에 나의 죄는 씻을 수 없다. 오직 100%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는 것이 곧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와 같은 것이다. 내 행위를 1%라도 의지하게 되면 구원의 실격자가 된다. 그 행위는 나의 구원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는 중요하지 않은가? 이에 대한 답은 야고보서에서 가르쳐준다. 먼저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는 것)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점을 오해하지 말라.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행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선행'을 의미한다. 야고보서의 '선행'은 믿는 자이면 반드시 나타나야 할 열매이다. 이 열매가 없으면 그 믿음은 가짜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여기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율법의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선행이 없다면 그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는 역설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진정한 믿음의 증거임을 알 수 있다.
註1) 샌더스(E. P. Sanders)가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를 주장한 이후에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다고 주장하지만 필자의 생각에 이는 편향된 주장이라고 본다. 샌더스가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행위구원론과 관련된 자료들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면 쿰란공동체에서 하박국 2장 4절을 주석하면서 "의인"을 "율법을 행하는 자"(doer of the Law)라고 해석하고 있다. 샌더스는 왜 이런 자료는 보지 못하는가?
선행은 진정한 믿음의 증표
야고보서와 로마서가 아브라함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상당히 충격적이다. 언뜻 보면 어떻게 성경에서 이렇게 대조된 주장을 하고 있는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먼저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말씀을 함께 보자.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1-3)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으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약 2:21-24)
로마서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친숙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상당히 낯설다. 분명코 바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친 행위를 믿음의 관점에서 이해했을 것이다. 그가 죽은 자도 능히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독자 이삭을 제단을 바쳤을 것이라는 논리이다(참고, 롬 4:18-22).
그런데 야고보는 이삭을 바친 것을 행위의 관점에서 본다. 아브라함의 이 행동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진짜 믿음으로 입증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약 2:24).
이런 관점에서 믿음을 보게 되면 야고보가 주장하고 있듯이 이런 순종하는 행함 없이는 절대 그런 믿음은 진짜 믿음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순종의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절대 구원을 줄 수 없는 가짜 믿음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야고보서 2장 24절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쉽게 바울과 야고보의 믿음관을 요약하면, 바울이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항상 순종이 포함된 진짜 믿음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이런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는 순종의 행위가 포함된 믿음이 있고, 순종의 행위가 빠진 가짜 믿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야고보가 공격하는 믿음은 바로 두 번째의 가짜 믿음을 두고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라는 말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바울과 야고보를 대조해서 설명한 중요한 목적은 바로 이 대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이 바로 야고보가 공격하고 있는 가짜 믿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오늘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행위구원론자는 개신교인 중에는 극히 드물 것이다. 오늘날 문제점은 우리가 믿노라고 고백하지만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삶 때문에 세상의 지탄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는 선행이 우리 믿는 사람에게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선행은 진정한 믿음의 증표이다. 나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인가? 진정한 믿음이라면 분명히 선행의 열매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선행은 살아 있는 예배
그렇다면 우리의 선행은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로마서 12장 1절은 우리의 몸으로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 앞에 "영적 예배"로 드려진다는 사실을 밝힌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를 드릴 때, 제물을 잡아서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제물의 몸을 각을 뜬 후에 번제단 위에서 살랐다. 바울은 바로 이 동일한 이미지를 우리 몸에 적용하고 있다. 번제물로 드려진 제물의 몸처럼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렇게 산 제물로 드려진 우리의 몸은 하나님 앞에 영적 예배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지는 삶을 분간할 수 있겠는가? 그 답이 이어서 나온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롬12:2)함을 통해서이다. 우리의 몸으로 하는 행위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드릴까 생각해 보면 우리의 행동 지침이 나온다. 성경은 우리가 성도로서 합당히 행해야 할 바를 이미 수없이 가르치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다음 덕성의 요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를 기대하는 분야를 뽑은 것이다. 사랑, 긍휼, 정의, 정직, 경건, 겸손, 온유, 섬김, 충성, 정절, 인내, 절제, 화목, 양선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덕성의 항목들이다. 이를 실천하면 선행의 기본 훈련이 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철저히 연구하면 우리의 선행의 지침이 나오지 않겠는가? 예를 들면 십계명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오늘날 성도의 행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십계명이 금지하고 있는 것을 행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닌가? 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는 성경이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정의 실천의 영역이다. 요즈음 외국인 노동자들과 새터민과 장애인들과 노숙자들이 우리가 관심을 갖고 선행을 실천해야 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예배당에 갇힌 신앙 중심에서 삶의 예배 중심으로
이사야 1장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 이들은 종교 생활에는 열심이었지만 그들의 일상의 행위가 문제였다. 오늘날 대한민국 교인들 문제점이 이들과 같이 예배당 안에 갇힌 신앙 중심이 아닌지 우려가 된다.
교회 집회는 주일, 수요일, 새벽 기도회, 철야 기도회도 부지런히 다니지만 세상 속에서는 맛을 잃은 소금이 아닌지 우려가 된다. 그렇다고 교인들의 신앙적 열정 자체를 비판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더 문제가 심각한 그룹은 교회에 다니지만 성경도 전혀 읽지 않고, 개인적인 기도 생활도 전혀 없고, 제자도에 대한 헌신도 전혀 없는 명목상의 신자들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귀중한 진리는 행위에 문제가 생기면 종교 생활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삶이 없는 신앙을 하나님은 우상숭배나 동성애와 같은 '가증한' 행위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이런 종교 생활이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겠는가? 오늘날도 이 진리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된다고 본다. 우리에게 말씀을 행하는 모습이 없다면 우리의 종교의식은 하나님 앞에 무의미한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부담스럽고 가증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예배에 앞서서 우리의 말씀 실천이 우선되어야 한다. 일상의 선행이 우선되어야 주일에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될 것이다. 예배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 6일간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리다가 주일에 우리의 삶을 함께 묶어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예배가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성도들이 정말 힘써야 할 분야는 이 글을 쓰는 필자 자신을 포함해서 삶의 개혁에 있다고 본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다. 다음 항목들을 점검하면서 자기 개혁을 위해 함께 힘써 보자.
* 주님의 큰 사랑을 받은 자로서 나는 정말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예수님이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은 자기희생을 통해 표현된다.
* 어려움에 처한 자를 볼 때 마음속으로부터 긍휼히 여기는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어떻게 삶에서 나타나는가?
* 나는 가까이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배려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가? 가족, 교인, 친구, 이웃, 직장 동료 등.
* 나의 생각은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나의 생각을 어떻게 하면 거룩한 생각으로 훈련할 수 있겠는가?
* 나는 어떤 사건을 접할 때 나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가, 아니면 일의 정의로운 해결을 먼저 생각하는가?
* 나는 금전 문제나 모든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정직한가?
* 나의 언행은 경건한가?
* 나에게 교만한 모습은 없는가? 나는 모든 사람을 겸손하게 대하는가? 겸손의 기본적인 개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다(빌2:3).
* 나의 거친 모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준 적은 없는가? 매사에 온유한가?
* 나에게 진정으로 섬김의 정신이 있는가? 아니면 군림하려는 교만한 마음은 없는가?
* 나는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가? 적당히 눈가림으로 때우려는 마음은 없는가?
* 나는 정절을 잘 지키고 있는가?
* 나에게 절제력과 인내심은 있는가?
*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는가?
* 매사에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 나는 십계명을 잘 지키는가? 혹시 잘 지켜지지 않는 계명이 있다면 어떻게 지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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