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병풍 완성한 서예가 염영석 /사랑의교회, 예배당' 기네스북 올라 2016-08-19 15:52:00 read : 59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서예가 염영석 “붓을 쥐어주신 이유는 글씨로 복음 전하라는 것”
가로 18m70㎝×세로 2m66㎝ 26폭 ‘로마서 병풍’ 완성한 서예가 염영석
▲서예가 염영석이 로마서 1장부터 16장까지 담은 ‘로마서 병풍’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의 한 자 한 자에는 기도가 깔렸다.
26폭, 가로 18m70㎝, 세로 2m66㎝. 전시관 한쪽 벽면을 꽉 채운 ‘로마서 병풍’은 웅장했다. 서예가 진곡 염영석(53·파주 주안장로교회)이 한글판본체로 완성한 성경말씀으로 채운 병풍이다. 로마서 1장부터 16장까지 말씀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서울시 종로구 서울시립경희궁미술관에서 동양서예협회 주최로 ‘대상작가초대전’이 7월 26일부터 8일 1일까지 열렸다. 전시회 관람자들은 로마서 병풍 앞에서 기도하거나 매료됐다. 크리스천은 기도했고, 일반 관객은 감탄했다.
‘로마서 병풍’에 담긴 글자는 1만8537자. 글을 쓰는 데 3개월이 소요됐다. 표구를 하는 가격만 2700만원. 하루에 3∼4시간씩 자며 방대한 작업을 소화하느라 몸무게가 4㎏이 빠지는 등 체력적으로도 힘든 과정이었다. 전시회 마지막 날 만난 염영석은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하나님) 아버지는 위대하시다”고 고백했다.
“은혜도 컸지만 고통스럽기도 했어요. 밤에 잠을 자도, 새벽에 글을 쓰고 낮에 잠시 산에 오를 때도 로마서 말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말씀과 함께 산 3개월이었습니다.”
그가 작업 당시의 사진을 보여줬다. 소매가 거추장스럽지 않게 흰색 민소매 상의를 입고 오로지 종이와 붓, 먹과 함께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성경책.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작업실의 뜨거운 공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고 했다.
그는 성경말씀을 쓰는 신실한 서예가로 유명하다. 성경 말씀으로 써내려간 한국지도와 세계지도를 5년 전 완성했다. 이번엔 병풍. 병풍으로 써야겠다는 결심은 스승인 성곡 임현기(동양서예협회장) 선생의 영향이 컸다. 스승이 8년 전 ‘관동별곡’ 대작 병풍을 썼다. 이를 보고 성경말씀으로 병풍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많은 말씀 중 로마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서는 그의 삶을 뒤흔든 말씀이었다. 젊은 시절 주먹을 쓰고 돈을 탐하며 욕망을 쫓던 그가 일생을 하나님께 바쳐야겠다고 회심하게 된 계기였다.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롬 16:26)
그는 “10년 전 이 말씀을 우연히 적다가 죄성 가득한 내 인생을 절절히 회개하게 됐다”며 “하나님이 오른손을 여태껏 붙여주신 이유는 말씀으로 글을 써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붓을 잡은 지 23년, 회심한 지 10년 만에 ‘로마서 병풍’을 완성한 것이다.
표구비용 등 금전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병풍을 작업하던 중 한국지도 몇 점이 팔렸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는데 로마서를 쓰기로 결단하니 하나님이 표구값을 정확히 채워주셨어요.”
지인들의 뜨거운 중보기도도 있었다. 파주 주안장로교회 김태호 목사와 의정부 예화장로교회 노병란 목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하나님의 복음이 글에 순결하게 담겨지기를 아침저녁으로 기도해주셨습니다.”
전시회를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릴 법도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 작품 구상으로 분주했다. ‘마태복음’을 쓸 예정이다. “로마서 병풍을 통해 알았잖아요. 결단하고 믿음대로 행하면 하나님이 이뤄주신다는 것을. 마태복음 1장부터 28장까지 대략 4만자, 42m 정도 예상됩니다.”
그는 남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말씀을 쓰겠다고 했다. 오른손을 감싸며 “이 팔만 성하면, 믿지 않는 분들에게 성경말씀 한 자라도 더 써서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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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들만의 찬양 들으면 더 큰 은혜 받는대요
창단 20주년 맞은 한국목사합창단 이야기
▲지난 5월 19일 서울 명성교회에서 열린 한국목사합창단 창단 20주년 기념 공연에서 단원들이 한복을 입고 합창하고 있다. 최고령 88세부터 최연소 41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목회자들이 화음을 맞추고 있다. 한국목사합창단 제공
최고령은 88세, 최연소는 41세. 75명으로 구성된 한국목사합창단. 이 합창단은 창단 이후 줄곧 매달 둘째 주 목요일이면 안양 동은교회 등지에 모여 호흡을 맞춘다. 낮 12시까지 교회에 도착해 식사를 하고 월례회를 가진 뒤 2∼3시간 합창 연습을 한다. 연습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나 대구 등지에서 KTX나 승용차를 타고 상경하는 이도 적지 않다.
지난 1996년 창단된 이 합창단은 지난 5월 19일 서울 명성교회 월드글로리아센터에서 창단 2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사도신경’을 시작으로 ‘거룩한 주’ ‘선하신 목자’ ‘주의 사랑 안에서’ ‘천국의 주님’ 등을 노래했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객석에서는 큰 박수와 함께 환호가 터져 나왔다.
단원들이 목회 때문에 바빠서 연습할 시간이 부족한 게 한계다. 20주년 공연도 원래는 모든 곡을 암송하려고 했는데 가사를 다 외울 수가 없었다. 결국 악보를 보며 노래해야 했다.
목사들의 합창 20년…세계 곳곳에서 펼친 찬양 무대
합창단이 20년간 펼친 활동 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해외 공연이다. 합창단은 2000년 태국에서 음악회를 연 것을 시작으로 그간 독일 중국 싱가포르 캄보디아 대만 필리핀 등지에서 공연을 개최했다. 합창단이 지금까지 공연을 열었던 해외 국가는 11개국에 달한다. 국내에서도 수많은 콘서트를 열었다. 합창단 이름을 내건 음반도 2장이나 발표했다.
“목사들끼리 모여 합창단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목회 하느라 바빠서 연습할 시간도 별로 없거든요. 그런 만큼 목사 합창단이 20년간 유지된 건 대단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해요. 각 교단마다 목사 합창단을 만들어 운영한다면 목회자에게 큰 ‘힐링’이 될 겁니다. 아쉽긴 했지만 20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합니다.”
최근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제일교회에서 만난 설삼용(75) 목사는 이같이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안양제일교회 원로목사인 그는 이 합창단 창단을 주도했고 초대 단장을 맡았다. 2대와 3대 단장은 다른 목회자가 맡았지만 주변의 강권으로 99년부터 다시 단장을 맡아 지금까지 합창단 운영을 총괄하고 있다. 그는 “처음엔 합창단을 3년 유지하기도 힘들 거라는 얘길 많이 들었다”며 “합창을 통해 하나님 뜻을 세상에 전하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라고 거듭 말했다.
설 목사는 계명대(교육학과),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나와 6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서울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남대 교목실장을 거쳐 80년 안양제일교회에 부임했다. 그가 합창단 창단에 나선 건 장신대 총동문회장을 맡았던 96년 초였다.
“찬양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목사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목사 합창단이 드물어요. 어릴 때부터 찬양하는 걸 좋아했기에 제가 직접 나서서 합창단을 만들어보자고 결심했죠. 그해 5월 14일에 창립총회를 열었습니다. 목회자 50명 정도가 모여 시작했습니다.”
“해외 공연을 다니면서 정말 큰 보람을 느꼈어요. 현지 동포들이 우리들의 찬양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희들 역시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해외 동포들이 그러더군요. 목사들로만 이뤄진 합창단 찬양을 들으니 큰 은혜를 받는 것 같다고요.”
합창단 거쳐 간 목회자만 200여명…“올해까지만 단장직 맡을 것”
설 목사는 한국목사합창단이 ‘비커 코럴(Vicar Choral)’의 전통을 잇는 단체라고 강조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종교개혁(1517년) 이전까지 합창은 사실상 훈련받은 사제, 즉 목사들의 전유물이었다. 비커 코럴은 ‘목사 합창’을 가리키는 용어다.
“목사들 중에는 음악적 재능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노래를 잘하면서 악기도 잘 다루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런 목회자들이 실력을 썩히지 말고 한자리에 모여 합창을 했으면 좋겠어요. 합창을 하면 서로 연합하고 화합하는 게 얼마나 뜻깊은 일인지 실감하게 되거든요.”
그동안 합창단을 거쳐 간 목회자는 200명이 넘는다.
설 목사는 2006년 합창단의 10년 역사를 정리한 ‘한국목사합창단 10년사’를 발간한 적이 있다. 그의 계획 중 하나는 올해 안에 합창단 20년사를 정리한 책자를 내놓는 것이다. 그는 “20년간 합창단을 위해 전력투구했다”며 “20년사를 발간한 뒤에는 단장직을 내려놓을 생각”이라고 전했다.
“저는 단장이면서 동시에 베이스 파트를 맡은 단원이기도 합니다. 단장직에서는 내려오지만 단원으로서의 활동은 계속할 거예요. 오는 11월에는 태국에서 공연을 열 건데, 기대가 큽니다. 저희들이 처음 해외 공연을 펼친 국가가 태국이었잖아요? 다시 태국 가서 찬양을 하면 정말 많은 생각이 들 거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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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둔 김유복 형제 앞에서 ...김마리네의 ‘영생의 문’과 탈동성애
▲여장 남자 가수 시절 김유복 형제. 본명이 '김유복자'이다.
▲응급처치를 받고 있는 김유복 형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지난 화요일 효드림요양원 원장님으로부터 요양 중인 김유복 형제가 위독하다는 전화가 왔다. 미국을 다녀온 후 일처리에 밀려 병문안을 하지 못해, 얼굴을 본지 한 달 반을 훌쩍 넘은 터라 가슴이 덜컥했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 요양원을 방문할 겨를도 없이 순천향병원 응급실로 모시게 하고, 교회 형제들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만약 그 사이에라도 소천한다면 죄인이 될 것 같은 마음이 앞섰다.
병원 응급실은 위급환자들로 가득했다. 김유복 형제는 내가 도착하기 전 응급 처치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보호자가 없는 상황이라 생명에 위급 상황이 올지도 모르는 다음 단계는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보자, 그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애처러운 눈초리로 고통을 호소했다. 응급처치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담당의사는 유복 형제의 현재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미 폐혈증이 한참 진행된 상황이라 기도를 확보하고 가래를 빼내기 위해 호스를 삽입하는 수술을 해야 하고, 소변이 나오지 않아 이대로 방치하면 오늘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이것이 마지막 여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복 형제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중환자실에서 얼굴을 마주한 유복 형제는 생명을 위한 긴급처치로 만신창이가 된 채 호흡보조기 틈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잠든 얼굴은 내가 지켜본 십여 년의 병상 중 가장 편안했다.
참으로 기구한 인연이다. 충무로에서 의상실을 운영하던 시절, 게이 절친들과 '콩자반'이라고 불리는 선배가 운영하는 금호동 게이 선술집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런 술자리를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마침 대구의 대안 형제가 올라와 선후배 지인들을 초청한 자리였기에 함께 갔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방문이 열리며, 붉은 집시옷을 걸친 남장 여인이 작은 손부채를 들고 현란한 몸짓과 낭낭한 목소리로 '키사스 키사스'를 부르며 등장했다. 마루바닥을 굴러대는 그의 폼이 상당히 요염했다. 당시 밤마다 명동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여장 남자가 있었지만, 술집에서 여장을 하고 노래와 춤을 추는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비록 선술집이지만 대중가요에서부터 엔카(일본 대중가요), 라틴, 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게이들만이 할 수 있는 특유한 눈짓과 제스춰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유복 형제의 본명은 김유복자이다. 어머니가 유복 형제를 임신한 상태에서 아버지께서 작고하셨기 때문에, 이름을 유복자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가 없는 균형을 상실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찍 가장을 잃은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긴 채 밤낮으로 일을 해야 했다.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외딴 집 마루바닥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채, 그는 어려서부터 혼자 말하고 노래하며 스스로 자기 만족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처음 만난 유복 형제의 웃음 속에서는 무서운 냉정함이 엿보였다. 어쩌면 애정을 상실한 성장과정 속에서 그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도 천연덕스럽게 여장 남자로서의 노래와 춤로 인생을 즐겨야 했을지도 모른다.
유복 형제는 경남상고를 나왔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번듯했던 유복 형제는 학교에서 상당한 인기 있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이미 은밀한 곳에서 남자와의 욕정을 즐기고 있었다.
▲김유복 형제를 찾은 이요나 목사 등이 그를 위로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유일한 재산은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MBC 방송국 전속가수로 입사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할만한 이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젊은 욕정은 보수 사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퇴사를 당해야 했다. 이것이 그가 게이들이 모이는 선술집에서 노래를 하게 된 동기이다.
서른 살이 되던 해, 나는 이태원에 들어와 15평 남짓한 카페를 열었다. 그것이 '열애클럽'의 시작이다. 처음은 게이들이 드나드는 카페로 시작했지만, 과거 의상실을 경영할 때 알던 연극인들과 방송인들이 드나들면서 일본에서 유행하던 가라오케를 설치하고 카페 안에 작은 무대를 만들었다. 그때 생각난 사람이 김유복 형제이다.
당시 김유복 형제는 지인 자매가 운영하는 카페 휘가로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나자 쾌히 열애클럽으로 왔다. 그는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김유복 형제에게 특별한 무대 드레스를 지어 주고, 연극학교에서 배운 솜씨로 특유한 분장을 시켜 무대에 세웠다. 그때부터 그는 김마리네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비록 작은 술집이었지만 말이다.
당시 열애클럽은 비록 여장 남자 게이클럽(트랜스젠더 클럽)이었지만, 여장을 한 게이들의 노래와 춤과 재담을 곁들인 패키지 쇼를 볼 수 있었기에 일본인 관광 잡지에까지 소개된 명소 중 하나였다. 연예인들을 비롯해 사업가, 정치인, 방송인, 작가 등 한국의 명사들이라면 한 번은 찾았던 특별한 유흥업소였다.
김유복 형제는 열애클럽의 메인 싱어로서 패키지 쇼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며, 후일 열애클럽 동경지점 벨라미 클럽에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 이 때가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황금기였다.
그 당시 지인들과 열애를 방문한 가수 패티 킴, 현미, 임희숙 씨 같은 중견 가수들도 김마리네의 노래를 들으며 '절대음감 소유자'라고 극찬을 했다. 그러나 동성애자의 밤은 피지 못하고 지는 꽃과 같다. 밤에만 펴야 하는 어둠의 자식들이다. 풀어내지 못하는 욕정을 밤거리에 쏟아낼 뿐이다.
고객들이 던져 준 몇 푼의 팁이 모이면 욕정을 불태워줄 남자를 찾아 나서야 하는 그들은 스스로 비굴한 성노예가 된다! 이렇게 그들의 인생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비참하게 이어져 갔다. 이렇게 화려한 조명 속에서 아름답지 못한 욕정의 밤들이 그의 인생을 좀먹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시간에 예수의 이름이 그에게 찾아 왔다는 것이다. 그가 열애클럽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예수를 믿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진 이요나 목사와의 끈질긴 인연이다.
88올림픽 이후 난잡해진 이태원 유흥가는 정부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위기가 찾아왔고, 화려한 조명 속에 밤의 여왕처럼 군림해도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게이의 삶에 염증을 느낀 나는 이태원을 떠나 동경으로 건너가 복음의 생수를 마시며 더러움을 씻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적 지주를 잃은 유복 형제는 거리의 낭인이 되어 구원의 믿음을 상실한 채, 퇴기(退妓)처럼 트랜스젠더 클럽의 뒷방마마로 전전하고 있었다.
그 후 1995년 5월 내가 탈동성애 목사가 되어 돌아와 그를 찾았을 때, 쪽방에 누워 흡사 귀신의 몰골을 한 채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예수를 믿었고, 교회에서 찬양을 부르며 믿음을 회복했다. 그러나 교회가 개척한지 2년만에 문을 닫게 되자, 유복 형제는 미안하다는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 갔다. 다시 옛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7년 후 다시 만난 유복 형제는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어 신음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보호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후원금을 모아 재수술을 하였지만 결국 더 악화되어, 간병인의 도움으로 연명하다 지난 겨울 더욱 심해져 지인이 운영하는 효드림요양원에 입원했고, 이제는 중환자실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오늘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제 길고 고달픈 인생을 정리하려는 순간이다. 어쩌면 그에게는 살아 있는 세월이 지옥일 것이다. 그것은 하늘 저편에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 때문이다.
사탄에 사로잡힌 한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온전히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환란과 애통의 세월을 살아야 하는지.... 죽음의 문턱을 헤매고 있는 유복 형제를 지켜보는 내 마음은 더욱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나보다 주님을 먼저 만난 자가 될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그를 만날 것이며 평안과 자유의 은혜 속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참으로 긴 인생 여정이었다. 주님 저의 영혼은 평안케 하소서. 아멘, 아멘.
/이요나 목사(홀리라이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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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농구 전해준 선교사 아시나요?
리우 올림픽 계기로 본 한국 근대 스포츠의 뿌리
▲서울 경신학교 학생들이 1916년 짚신을 신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위). 1910년 황성YMCA 회원들과 한성학교 학생들이 야구경기를 하고 있다(맨 왼쪽). 한국 스포츠 발전의 선구자 역할을 한 필립 질레트 선교사. 국민일보DB
한국 근대 스포츠의 역사는 한국교회 선교역사와 시작을 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근대문화 도입을 도왔던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세계 스포츠 10대 강국의 신화를 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영어학교 운동회로 확산된 스포츠 문화 = 선교사들에 의해 근대 스포츠의 개념이 도입되기 전 한국에서 스포츠는 무사들의 무술훈련이나 농한기 때 놀이로 존재하던 신체활동에 불과했다. 그러다 1891년 언더우드 학당에 체조가 정규 교육과정으로 개설된다.
근대 스포츠가 조선 땅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896년부터다. 영국의 허치슨 목사가 그해 5월 서울 삼선교 부근에서 화류회(花柳會)라는 영어학교 운동회를 개최했다. 다음해 영어학교의 두 번째 운동회가 훈련원에서 개최됐는데 이때 달리기, 공 던지기, 투포환, 멀리뛰기, 높이뛰기, 동아줄 끌기 등의 종목이 열렸다.
이때부터 매년 각급학교에서 운동회가 시작됐으며, 1907년에는 관·공·사립학교가 동시에 참여하는 대규모 학교 운동회가 열렸다. 1906년엔 영어학교 졸업생 30여명이 축구 동호인들의 친목단체인 대한체육구락부를 설립했다.
스포츠 불모지였던 조선은 1906년부터 1910년까지 10개의 스포츠 단체가 결성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이는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박명수 서울신대 교수는 “선교사들에 의해 전수된 스포츠는 실용주의적 교육을 지향했던 개화파에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표현행위로 다가왔을 것”이라며 “서양의 근대 체육과 스포츠는 개화파 및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개화기 한국사회의 근대화 방편으로 인식됐다”고 말했다. 이어 “개화기 때부터 정부차원에서 스포츠를 적극 지원했는데, 한국이 스포츠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질레트 선교사, YMCA로 스포츠 발전에 기여 =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는 YMCA(기독교청년회)와 떼려야 뗄 수 없다. 1903년 발족한 YMCA는 지·덕·체의 교육목표를 세우고 그리스도 정신인 자유와 평등, 인애 정신을 함양하고 체육운동을 통해 그 정신과 목표를 완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YMCA의 체육이념은 이처럼 체육을 통해 기독교적 생활을 실천하는 데 있었다. YMCA는 야구 농구 배구 실내운동 등 각종 운동경기를 소개하면서 한국 스포츠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다. 그 중추적 역할을 한 사람이 미국 선교사 필립 질레트다. 그는 1901년부터 1913년까지 12년 간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기독청년회의 조직 등 기초를 확립하고 야구, 스케이트, 농구 등을 소개했다.
질레트 선교사는 1904년 야구와 농구를 전수했다.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 CA의 전신) 청년들에게 야구를 지도했는데, 1906년 이들과 독일어학교팀 간 시합을 벌일 정도로 숙달됐다. 1909년에는 동경유학생야구단과 외국인선교사야구팀이 시합을 했는데 유학생팀이 19대 9로 대승을 거둬 장안의 화제가 됐다. 같은 해 유도와 검도, 덤블링, 곤봉이 전수됐다. 1912년엔 한국 청년들로 야구단을 조직, 일본에 가서 원정경기를 했다. 1916년엔 권투가 전수됐다.
이상규 고신대 교수는 “서구사회에 통용되던 스포츠가 초기 선교사들과 YMCA를 통해 자연스럽게 한국에 전수됐다”면서 “당시 사회체육의 하나였던 스포츠는 서구문명을 한국사회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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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화한 그곳의 낯선 풍경… ‘예수천국 불신지옥’
‘노방전도’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명동에서 만난 한 전도자.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그는 “가끔 ‘수고한다’며 음료수 등을 건네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서울의 번화가인 명동.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한 이 거리에 매우 낯설고도 이질적인 풍경이 하나 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뜨거웠던 8월의 어느 날, 인파(人波) 사이를 가르는 한 중년 남성의 등에는 이렇게 쓰인 작은 현수막이 붙어 있다. 찬송이 흐르는 낡은 카세트플레이어를 목에 건채, 그는 지나는 이들과 눈을 맞추며 이렇게 외친다. "예수 믿으세요!" 그저 이 한 마디만.
다가가 물었다. 어떤 교회를 다니며, 왜 이런 일을 하고, 얼마나 오래 했는지. 그는 명동 근처 작은 순복음교회를 다닌다고 했다. 여기서 매일 오전 예배를 드린 뒤 점심을 먹고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이렇게 명동을 거닌다고. 그런지 6개월 정도 됐다고 했는데, 10년 혹은 그 이상 자기처럼 전도하는 이들이 3~4명은 더 있다고 했다.
"다 나그네 인생 아닙니까. 이 세상의 삶은 짧고 예수는 영원하니까.... 사실 여기(명동) 지나다니는 사람들, 알고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는 이들 아니에요?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가 이곳에서 나온 이유였다.
"더운데 힘들지는 않느냐" 했더니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셨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다른 한편에서 작은 천막을 치고 마이크를 들어 성경을 읽고 있는 할머니도 만났다. 60대 중반이라고 했는데, 약 10년 동안 일주일에 3~4번, 하루 2시간씩 이곳에 나와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있다고 했다. 그저 전하는 것은 예수님과 성경뿐이라고. 자신이 가고 나면 다른 사람이 또 나와 그것을 전한다고 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언제나 그랬단다.
왜 하느냐 했더니 "10여 년 전 지하철에서 본 한 전도자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이단으로 알던 곳의 소위 '교주'를 전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도전을 받았다고 했다. "이단도 저렇게 열심인데..." 그 때부터 '예수를 전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고.
재밌는 얘기도 들려줬다. 그가 있는 천막은 벌써 20년 가까이나 됐는데 얼마 전 법적 정당성을 인정받았다고 했다. 갑자기 무슨 소린가 했더니, 구청 직원과 경찰이 명동에 천막을 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고, 이 때문에 법원에까지 갔지만 결국 이겼다는 의미였다. "우리나라엔 종교의 자유, 선교의 자유가 있잖아요." 그의 목소가 커졌다.
또 이곳에 자신들 말고도 전도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 중에는 이단들도 있는데, 자신들이 떠나면 그들이 더 활개 칠 것 같다고도 했다.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중국과 일본인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그 중에는 평생 예수라는 말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이들도 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이 와서 (예수에 대해) 물어본다"며 "또 가끔 울면서 찾아와 '정말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가느냐'고 묻는 이도 있다. 당연히 '그렇다'고 답해준다. 그리고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말도 덧붙인다"고 했다.
▲또 다른 전도자. 그는 ‘할렐루야’라 적힌 띠를 두르고 거리의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했다. ⓒ김진영 기자
정말 '구시대적'인가?
이미 많은 소통이 SNS와 같은 온라인으로 옮겨간 시대, 이런 전도를 어떻게 봐야 할까? 흔히 '노방전도'(路傍傳道)나 '축호전도'(逐戶傳道)라 부르는 것들 말이다. 물론 이와 같은 전도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처럼 극히 단순하고 오해의 소지도 있는 메시지만을 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본적인 형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주로 이단들이 한다며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도, '구령'(救靈)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구시대적'이라는 견해다.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교회사)는 "전도의 열기가 사라진 이 시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그 열정 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며 "그러나 그것도 결국 상대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방식이라면 소용이 없을 수 있다. 시대에 맞고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이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김재호 목사(예장 합동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도 "최근에는 관계전도가 더 각광받고 있다. 시대마다 그에 맞는 전도의 방식이 있는 것 같다"며 "우리나라도 과거 그랬지만 최근 해외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효과적인 수단은, 노방전도와 같은 것들보다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등"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구시대적'이라 부르는 이런 전도의 방법들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소위 '신시대적'이라는 방법을 써서 과연 한국교회가 얼마나 성장했느냐 하는 점 때문이다. 현실은 오히려 쇠퇴하고 있고, 그나마 성장했다는 교회들도 알고 보면 '수평이동'에 의한 것이라고 이들은 지적한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직접 만나셨듯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렇게 한 영혼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보다는 먼저 삶으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의견에도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행위, 그 자체가 곧 그리스도인들이 삶"이라고 맞선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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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복음병원 의료진, 리베이트 혐의로 소환
특정 의약품 처방, 환자 개인 정보 전달…교단 "수사 결과 지켜보자"
박요셉 기자 josef@newsnjoy.or.kr | 2016.08.16 20:10:54
▲ 고신대학교복음병원은 최근 리베이트 혐의로 의사 10여 명이 검찰에 소환 조사를 받고 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고신대학교복음병원(복음병원) 의사 10여 명이 리베이트 혐의로 검찰 소환 조사를 받고 있다.
이달 3일 부산지방검찰청특별수사부(부산지검)는 검찰 인력 44명을 대동해 복음병원을 압수 수색했다. 혈액종양내과, 유방외과, 흉부외과, 산부인과, 위장관외과, 신경과 등이 대상이다. 검찰은 4일부터 혐의를 받고 있는 의료진 10여 명을 소환해 조사 중이다.
부산지검은 최근 복음병원에 의약품을 납품하는 'A'사를 조사하면서 '비자금 로비 장부'를 확보했다. 장부에는 복음병원 의사 10여 명의 이름, 리베이트 금액, 제공 일시, 전달 방법, 처방 내역 등이 담겨 있는 걸로 알려졌다.
복음병원 소속 의사들은 환자에게 특정 의약품을 처방하고 환자 개인 정보가 담긴 처방 내역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A'사에게 뇌물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고신대학교복음병원장 임학 장로는 "검찰 소환 조사를 받은 의사들을 만났다. 수사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며 혐의를 부인하는 이가 많았다"고 전했다. 임 장로는 압수 수색 직후 사건 경위를 고려학원이사회(강영안 이사장)에 보고했다. 이사회는 아직 수사 초기 단계니 일단 향후 과정을 지켜보자는 입장이다. 복음병원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신상현 총회장) 산하에 있는 고신대학교(전광식 총장) 부속기관이다.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은 과거에도 리베이트 혐의에 시달렸다. 2005년 고신대학교 정현기 당시 총장은 고가의 암 진단기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4억 원을 받았다는 혐의를, 복음병원 전병찬 전 원장은 비리 의혹을 받았다. 하지만 검찰 수사 결과 모두 무혐의로 밝혀졌다. 2011년에는 동아대학교병원 리베이트 사건에 연루된 의약품 도매업체가 복음병원과도 거래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검찰 수사 선상에 올랐다.
부산지검이 리베이트 혐의로 의료진을 소환 조사한 건 이번만이 아니다. 올해 5월 말 인제대학교부산백병원을 시작으로 6월에는 양산부산대학교병원이 수사 대상에 올랐다. 인제대학교부산백병원은 백낙환 인제병원 전 이사장 등 12명이 횡령, 리베이트, 비자금 혐의 등으로 기소됐고, 양산부산대학교병원은 교수 1명이 억대 리베이트 혐의로 기소됐다. 이번 복음병원 수사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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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 '가장 큰 지하 예배당' 기네스북 올라
면적 8,418㎡, 9,380석…"가톨릭 성당까지 통틀어 1위"
구권효 기자
▲ 2013년 12월, 사랑의교회가 서초 예배당 입당 감사 예배를 하는 모습. ⓒ뉴스앤조이 구권효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 서초 예배당이 '가장 큰 지하 예배당(Largest underground church)' 기네스북에 오른 것으로 확인됐다. 사랑의교회 지하 본당은 2015년 12월 8일 기준, 총 면적 8,418㎡, 수용 가능 좌석 9,380석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지하 예배당으로 선정됐다.
교회 관계자는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한 교인의 추천으로 기네스북에 도전했다. 기네스북에서는 가톨릭 성당까지 통틀어 선정한다고 해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등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예배당 규모를 자랑하려는 것으로 보이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는 "그래서 교회 차원에서 홍보하지 않았다. 오정현 목사가 예배 중에 잠깐 언급한 것으로 그쳤다"고 말했다.
▲ 조용기 목사를 검찰에 고발한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기도모임 소속 장로 16명이 출교·제명 처분을 받았다. 장로들은 절차에 문제가 있다며 적극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여의도순복음교회(이영훈 목사)에는 '장로기도모임'이 있다. 개혁 세력으로 분류되는 이 모임에 장로 3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비공식 모임이지만, 영향력은 작지 않다.
장로기도모임은 2011년부터 조용기 목사와 일가의 비리 의혹을 제기해 왔다. 조 목사와 큰아들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을 배임·탈세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고, 법정에 세웠다.
2013년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조 목사의 △특별 선교비 600억 횡령 △퇴직금 200억 유용 △ 불륜 의혹을 제기했다. 2015년 3월, 300억 빚을 안고 있는 강남교회 인수를 반대하고,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굵직한 사안을 교회 안팎에 알려 왔지만, 교회 내부에서 장로기도모임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다. 무분별한 의혹 제기로 교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명예를 실추한다는 이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장로기도모임을 해체하고, 관련자들을 징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결과만 놓고 따졌을 때, 장로기도모임이 무분별하게 의혹을 제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11년 장로기도모임이 조 목사 부자를 배임·탈세로 고소해 혐의가 입증됐다. 2013년 장로기도모임의 기자회견 이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체 조사를 실시했다.
자체 조사 결과, 특별 선교비 사용 내역을 입증할 증빙 자료가 불명확하고, 퇴직금 지급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장로기도모임은 2015년 10월, 조 목사를 특별 선교비 600억 횡령 및 퇴직금 200억 유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올해 6월 말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리자 교회는 태도를 바꿨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재판 기구인 당기위원회는 "징계 대상자들이 교회 명예를 실추시키고 불이익을 초래했다"며 8월 14일 장로 11명을 출교하고 5명을 제명했다. 교회 진상조사특별위원회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사안임에도, 검찰의 무혐의 처분이 나오자 징계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 장로기도모임은 여의도순복음교회 개혁 세력으로 분류된다. 장로기도모임은 2013년에도 징계를 받은 적 있다. 조용기 목사 부자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지 않자, 교회는 제명·정직 징계를 내렸다. ⓒ뉴스앤조이 강동석
장로기도모임 징계는 조용기 목사 측이 주도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용기 목사 비서실장 이원군 장로는 8월 16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무고죄로 고발하는 대신 교회 내 징계를 추진한 것이라 말했다.
"우리가 그 사람들을 무고죄로 고발 안 하는 대신 당연히 교회를 나가야 한다. 교회를 망신시켰으니 징계를 해야 한다. 목사님을 해코지하기 위해 고소·고발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조용기) 목사님은 징계와 관련해 이래라저래라, 잘했다 못했다 말씀하시지 않았다."
장로기도모임은 교회의 징계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모양새다. 한 관계자는 교회 징계에 강경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검찰 부실 수사를 규탄하며 고등검찰에 항고했다. 무혐의 한번 나왔다고 호들갑 떨 일은 아니라고 본다. 교회 징계는 절차상 하자가 있다. 장로 징계는 지방회에서 해야 한다. 당기위 징계는 안수집사나 권사를 대상으로 한다. (당기위로부터) 출석 통보를 받았지만, 이런 이유로 못 간다고 했다. 그런데도 자기들끼리 뚝딱 징계하고 <국민일보>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우리도 가만있지 않고, 적극 대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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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현 목사 피해자 A에게 드리는 편지
뉴스앤조이
A의 편지에 대한 J의 답신입니다. J는 영성심리 상담가,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 목회자의 배우자입니다. - 편집자 주
A에게.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 있고, 오늘도 어딘가에서 그 익숙한 이름으로 불리며 무더운 일상을 살아갈 A. 당신의 이름을 잠시 상상해 봅니다. 생김새와 성품에 걸맞은 이름을 가졌겠지요. 이름 대신 A라 불리고, A라는 이름으로 기사를 올렸던 당신을 생각하며 저도 제 이름 대신 J라 소개하겠습니다.
이동현 목사 관련 기사에서 A 님 당사자로 시작해 주변인이 I까지 등장했더군요. 그렇다면 저는 그 다음의 반경에 있는 사람 J, 특히 여성입니다. A로부터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 J가 있습니다. 심정적인 방어를 풀면 A의 자리에 가 앉을 수도, 모르쇠로 외면하자면 Z에 갈 수도 있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자 사람입니다. '이동현 목사 피해자 A가 드리는 편지'의 수신자 중 한 사람이고, 이 글은 그 편지에 대한 답장입니다.
'유명 청소년 단체 목사의 두 얼굴'로 시작하는 기사엔 처음부터 관심을 두지도 않았습니다. '목회자의 성범죄 하루 이틀 일인가?' 싶었고, 이어지는 기사의 사건 분석과 방향 제시, 성찰, 회개, 회개의 촉구 등은 안 읽어도 알 것 같았습니다. 미안하지만 피로감이었습니다. 피로감. 이 얼마나 객관적이며, 거리감 있고, 연루되지 않아도 되는 속 편한 말입니까. 반응하지 않을 자유를 득하는 합리화의 근거입니까. 그러나 뉴스 목록에 있는 '이동현 목사 피해자 A가 드리는 편지'라는 제목은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A 님의 글을 읽은 다음 날 <뉴스앤조이>로부터 글을 하나 쓰면 어떻겠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기사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고, 이런 일에 객관적일 수 없어서 쓸 수 없다"는 말이 툭 하고 나왔습니다. '피로감'이라며 강 건너 불구경할 때는 언제고, 객관적일 수 없어서 쓸 수 없다니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전화를 끊고 자꾸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A 님 편지의 시작과 끝입니다.
"보복 의도 없이 2007년 있었던 유럽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저와 같이 외로움 속에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아이가 있는 것 같아 용기를 내어 인터뷰 요청에 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혹시라도 과거에 성직자와 성관계를 한 후 '주의 종을 죄에 빠지게 한 내가 죄인'이라는 수치심과 죄책감과 괴로움에 혼자 고문당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지금 혹시라도 목사 이름과 명예에 해를 끼치면 하나님나라에, 하나님의 이름에 누가 될까 두려워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있는 분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알아주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외롭더라도 포기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긴 세월 외로움 속에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웠던 A의 시간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자기 고통에 매몰되어 더 깊은 외로움에 갇히지 않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마음의 힘을 길렀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아픔이 없어서가 아니라, 외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보다 더 아프고 더 외로울 '아이'를 위해 두렵지만 용기를 냈구나 싶었습니다.
아프지만 더 아픈 사람을 위해 손 내미는 사람을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부릅니다. 참된 치유와 정화는 더 약한 자의 손을 잡는 연약한 손의 연대에 있다고 믿기에 A의 용기가 고맙습니다. 마음을 담아 지지와 격려를 보내고 싶습니다. 글에서 여러 해결책을 제안하셨습니다. 그것들이 어떻게든 교회와 선교 단체 사역 일선에 실질적으로 녹아들기 바랍니다.
그러나 용기 내어 인터뷰에 응하고, 글로 생각을 밝힌 용기 있는 발설 그 자체가 이미 큰 해결을 위한 행동입니다. 저는 여자라서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를요.
늦은 밤 골목길에서 혼자 걷는 여자를 따라 걸어야 했던 남자의 얘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앞선 여자를 안심시키려 빨리 걸어 앞지르려 했답니다. 빨리 걸을수록 여자의 걸음도 빨라지더니 급기야 가방을 안고 뛰더라고요.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기분 나쁘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계단을 오를 때도 앞에 여성이 불편할까 시간만 된다면 기다렸다 오른다고요. 지하철에서 여성 옆에 앉으면 '쩍벌'이 되지 않도록 더욱 신경을 쓴다면서 이런 남자의 심정도 알아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름대로 여자 편인데, 심정적으로 페미니스트인데 싸잡아 늑대로 치부되는 심정을 아느냐면서요. 여자들의 과도한 태도는 같은 편이 되고자 하는 남자까지 잃게 만든다고도 했습니다.
여성을 조수석에 태우지 않는 배려, 사진 찍으며 여자의 어깨를 터치하지 않는 매너 손, 단둘이 있게 되면 문을 살짝 열어 두는 센스. 고맙습니다. 여성의 불리한 입장을 헤아리는 것 자체가 남성으로서 기득권을 일정 정도 포기해야 하는 것임을 압니다. 그러니 더욱 고맙습니다.
헌데 자기편이 되어 주는 사람조차 믿지 못하는 오래된, 아주 오래된 피해자와 약자로서의 여자의 삶이 있습니다. 그 맥락에서 A가 뒤늦게 이 일을 폭로하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직접 목소리를 낸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 짚어 보고 싶습니다. A와 저, 그리고 우리 편이 되어 주는 남자들에게 확인시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골목길을 앞서 걸어가는 여성이 단지 여자 사람의 몸을 가졌기에 어떤 경험을 끌어안고 평생 살아가는지, 그 여자는 길에서 만난 어떤 여자가 아니라 아내이며 누나이며 여동생이며 엄마일 수 있음을요.
여성의 몸을 가졌다는 것은 그대로 아주 취약한 조건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성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광고의 배경과 소재가 잘빠진 여성의 몸인 이 시대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옛날과 지금, 상류계급 여인과 신분이 낮은 여인, 많이 배우고 똑똑한 여자와 그렇지 못한 여자, 나이 많은 여자와 젊은 여자를 막론합니다.
남자들이 사춘기가 되어 남자로서의 자기 몸을 인식하는 것과 달리 많은 여성이 어릴 적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기 몸을 인식합니다. 친척 오빠, 동네 오빠, 교회 오빠. 가까이 있는 친절하며 나쁘지 않은 남자 어른들의 못된 손으로 여자인 자기 몸을 인식합니다. 어리기 때문에 세상을 총체적으로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힘이 없고, 쉽게 도움을 구할 수 없어서 이 폭력적인 경험은 묻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들에게 어린 시절 '성추행의 기억'은 흔한 일입니다. 발설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애써 발설한다 해도 도움을 받아야 할 어른에 의해서 다시 묻히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 못된 짓이 왜 발설되지 못하는지, 더 큰 어른에 의해 묻히고야 마는지. 이 지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A를 두 번 울리며 올가미에 가둔 가해자의 말, 이 바로 이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이런 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네 인생은 망한다."
"너 나랑 이래 놓고 이제 시집 어떻게 갈래."
"네가 입을 뻥긋하면 사탄이 그 말을 이용해서 우리 사역을 망친다. 그러니 고통스러운 걸 참아라. 너 한 명만 참고 견디면 성령을 훼방하지 않게 된다."
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릴 적 교회 전도사님의 못된 손에 걸려든 일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재밌는 설교를 해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담임목사의 딸이어서 우리 아버지와 전도사님의 관계, 은근한 갑을 관계를 충분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엄마에게 알려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습니다. 엄마가 알면 아버지가 알 것이고 아버지가 알면 이 (천하에 못된 손을 가졌으나) 착한 전도사님이 쫓겨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이분의 (생계) 목숨 줄이 우리 아버지 손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후의 모든 상황이 두려웠지만 엄마에게 발설했습니다. 온 집안과 교회가 발칵 뒤집히고 난리가 날 줄 알았던 제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발설은 제게서 끝나고 엄마는 아버지에게조차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 지금 쓰다 보니 제가 모르는 방식의 은밀한 발설과 조처가 있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습니다. 어쨌든 인간의 상처라는 것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대한 기억입니다.
저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엄마가 내게 일어난 이 어마어마한 일을 듣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 이 기억은 제게 무언의 메시지를 심어 주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여자아이들이 이런 방식으로 일그러진 여자의 몸이 되어 갑니다.
'전도사님이 한 일이 큰 잘못은 아닐지 몰라. 원래 남자는 여자아이를 마음대로 만져도 되는 건가 봐. 그게 잘못이라면 내가 화를 내거나 거절했어야지. 내 잘못이네.'
이후로도 동네 오빠, 교회 오빠에게 몇 차례 더 추행을 경험했지만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의 저편에 묻어 버렸습니다. 여자의 몸에 대한 내면화된 목소리만 남았습니다.
어른이 되고 관련 공부를 하던 중에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왜 내 말을 듣고도 못 들을 것처럼 가만히 있었느냐고요. 엄마는 별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뜬금없는 고백을 했습니다. "부흥강사 ○○○ 목사 알지?" 하면서요.
예전에는 일 년에 한두 번씩 꼭 부흥회를 했습니다. 부흥회 기간 강사 목사님은 우리 집에서 숙식했고, 우리 집 부엌은 끼니마다 온갖 요리를 만드는 집사님, 권사님들로 북적였습니다. 귀빈 대접이었지요. 저녁 집회를 마친 후 엄마는 저녁 간식을 가지고 강사 ○○○ 목사가 기거하던 방에 들어갔고, 그 (신령한) 목사의 (더러운) 손이 엄마의 몸을 더듬었답니다. 아버지에게 얘기하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답니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나 하나 참고 견디면 모처럼 은혜로운 부흥회를, 교회를, 가정을, 부흥강사의 사역을 지켜 내게 된다. 그렇게 참고 덮어 둔 '나 하나'인 여성이 얼마나 많을까요? 이때의 고백 이후로 엄마는 밑도 끝도 없이, 앞뒤 설명도 없이 이 얘기를 꺼내곤 합니다. 연세가 많아 기억력과 인지능력이 많이 떨어져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 또 하는 요즘에도 반복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유명한 부흥강사 ○○○ 목사의 못된 손 이야기입니다.
제게는 무력한 아이를 돕지 않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엄마가 분명한데, 이 엄마 역시 도움받지 못한 무력한 여자였으니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여자들은 언제 어디서든 잠재적인 성적 피해자일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한 증언조차 할 수 없도록 길들여집니다. 교회의 여자라면 거기에 성령 훼방죄, 사역자를 시험에 들게 한 죄까지 뒤집어쓰게 되니 이중 삼중의 올가미입니다.
부모에게 학대나 폭력을 당하는 아이는 가해하는 어른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 때문에 가해자의 힘과 권력에 철저하게 굴복하여 자신이 당하는 학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심지어 자기를 학대하는 부모를 좋은 부모로 각색하고 부모의 죄를 자신이 뒤집어쓴다고 합니다. 종교 권력을 가진 목회자나 사역자에게 지속적인 성폭력을 당한 청소년이나 청년들도 비슷합니다. 영적인 권위를 가진, 존경하는 지도자는 부모 그 이상, 하나님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목사님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옷매무시를 고치고, 가장 좋은 과일을 대접하고, 심방 감사 봉투를 챙기는 저희 엄마가 신령한 부흥강사의 범죄를 범죄로 보지 못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이것은 수천 년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살아온 여성의 몸에 새겨진 흔적이고, 거기에 가부장적인 종교의 굴레까지 뒤집어쓴 여자의 자기 인식입니다.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대상과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아니오'라고 당당히 말하라고 합니다. 수천 년 새겨진 대상으로서의 몸을 지닌 여성이며, 거기에 아담을 유혹하여 실낙원을 유발한 하와의 후예로서 종교적인 굴레까지 뒤집어쓴 교회 여자가 어떻게 주체로 설 수 있겠습니까.
맹목적으로 추앙하던 지도자들에게 이양했던 우리의 힘을 되찾아 올 일입니다. '주의 종'이라 우러르며 이양하고 포기한 우리의 힘을 되돌려 받는 것은 자아 팽창으로 상식적인 판단력마저 잃은 지도자들을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추앙이 후광이 되고 후광이 과도한 권력이 되어 교회와 세상을 더럽히는 지도자가 난무하는 시대. '나 하나 참고 덮어 주자'가 아니라 '나 하나라도 내 발로 서자'할 때, 맹목적인 추앙과 허황된 후광 사이 악순환의 고리에 작은 충격이라도 가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강해지고 온전히 치유되는 날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아직 두렵고 여전히 아프지만 그것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른이며,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무력한 피해자로 남아 있지 않고 치유하고 힘을 기른 A가 되어 다행입니다. '일상을 건강하게 사는' 어른이 되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러도록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강 건너 Z로 살아서 미안합니다.
A가 내민 손을 비슷한 고통으로 외로워하고 있는 교회 동생들이 잡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꽃뱀, 마귀 사탄이라 불리며 흘린 눈물 위에 연거푸 피눈물 흘리는 자매들이 힘을 얻을 것입니다. 발설하고 도움을 구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손 내밀어 주어 고맙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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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권리 누리는 여성의 마지막 파티와 안락사 논쟁
지난 7월, 미국 캘리포니아 벤투라카운티 오하이 마을에서는 조금 특색 있는 파티가 열렸다. 파티를 연 사람은 벳시 데이비스, 행위예술가로 활동한 여성이다. 벳시는 친구들과 친지 30여 명을 집으로 초대했고, 1박 2일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파티의 규칙은 단 하나였다. 자신 앞에서 ‘절대 울지 않는 것’. 이 특별한 규칙을 제외하고는 파티 복장, 대화 주제, 즐기고 싶은 음악과 춤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규칙을 지키며 음악을 연주하고, 피자도 함께 먹고, 맛좋은 칵테일을 마시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파티가 끝날 무렵, 벳시는 파티에 참석한 이들과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하고 키스하며 인사를 나눴다. 인사를 마치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네 시간 뒤, 그는 친구들과 마지막 시간을 뒤로 하고 숨을 거뒀다.
이날 파티는 ‘죽을 권리’를 누리는 벳시가 준비한 이별 파티였다. 벳시는 지난 2013년 루게릭 병에 걸렸다. 점차 몸은 마비되어 갔고, 전동 휠체어에 앉아 다른 이가 돌봐주지 않으면 무엇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벳시는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죽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의사의 도움을 받는 안락사를 선택했다.
죽을 권리를 누리는 이별 파티를 연 벳시 데이비스
뉴욕에 사는 벳시의 친구 사진작가 닐스 앨퍼트도 캘리포니아까지 날아갔다. 닐스는 친구의 초대에 응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초대받은 모든 사람들은 데이비스를 위해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고 말하며, 벳시의 마지막 파티를 이렇게 기억했다.
"화가이자 행위예술가로서 벳시가 준비한 마지막 예술 연출이었다. 자신에게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선물하면서 지금과는 다른 예술의 세계로 떠났다고 생각한다.”
죽을 권리, 논쟁이 되다
벳시가 안락사를 선택한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 여섯 번째로 허용한 주다. 안락사 허용 이후, 존엄한 죽음, 죽을 권리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벳시의 경우, 자신의 마지막을 웃음으로 함께하기 위해 친구들과 친척들을 모아 함께하는 시간을 보낸 특별한 경우다.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회는 지난해 9월, 10년 한시 법안으로 가결했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회복이 불가능한 말기환자에게 안락사를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은 오리건, 원싱턴, 몬태나, 버몬트, 뉴멕시코 주 순으로 안락사를 허가했다. 이 외에도 현재 20개 주 이상이 안락사 관련 법안을 논의하고 있다.
안락사 규정은 보통 이렇다. 약을 먹을 수 있는 환자가 의사에게 여러 차례 서면으로 안락사 허가를 요청해야 한다. 이후 의사 2명 이상이 안락사를 승인해야 하고, 안락사 전 과정을 증인 2명 이상이 지켜보아야 한다. 안락사를 위해 약을 먹을 때 그 누구도 옆에서 도와서는 안 된다. 의사도 옆에서 아무 역할을 할 수 없다.
현재 안락사를 선택하기 위해 거주지를 이전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13년 기준으로 오리건 주 안락사를 선택한 사람은 750여 명에 이른다. 안락사를 지지하는 여론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갤럽이 한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인 70%가 말기 환자에게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는 2014년 조사보다 10%가량 증가한 수치다.
미국 전역에 안락사 입법화 논쟁은 죄종양으로 죽음을 앞둔 브리타니 메이나드가 안락사가 불법인 캘리포니아 주를 떠나 합법적으로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오리건 주로 이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촉발됐다. 캘리포니아 주는 지난해 10년간 한시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했다.
실제 안락사 인정은 많은 논쟁 속에서 논의됐고, 허용 이후에도 많은 논쟁을 낳았다. 캘리포니아에서 안락사가 논의된 건 지난 2013년, 뇌종양으로 투쟁하던 여성이 안락사를 위해 오리건 주로 이주해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작됐다. 자살, 자살방조 등을 두고 많은 논의가 오갔고,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자기 몸에 관한 권리로까지 논의가 이어졌다.
여론은 안락사 인정이 다수를 점했지만, 의사들과 정치권에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강했다. 캘리포니아 의사협회는 의사가 환자의 죽음을 돕는 일이 ‘환자를 해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치인들은 의료비용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죽음을 강요받을 수 있다며, 안락사 허용을 반대했다. 더불어 안락사 법안을 이용한 살인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의사들도 생각이 많이 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유럽 의사 2만 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 54%가 안락사 허용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약물에 취한 상태로 죽는 날을 기다리기 보다는 사랑하는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누며 자기를 지키며 죽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 많았다. 정치권에서도 환자의 죽을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늘어가는 안락사 인정
안락사 논쟁은 미국의 병리의사 잭 케보키언(Jack Kervokian)으로 불거졌다. 그는 130여 명의 불치병 환자들이 존엄한 죽음(안락사)을 선택하도록 도왔다. 루게릭 병 환자의 안락사 과정을 모두 촬영해 미국 CBS에 공개해 논란을 낳았다. 미시건 주는 케보키언이 안락사(당시 자살 조력으로 불렸다)를 돕지 못하도록 자살 조력을 할 경우 징역형이 가능하도록 법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는 안락사를 돕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캐보키언은 1999년 재판에서 2급 살인죄 명목으로 25년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에서도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돕는 일이 자신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유죄를 선고받고 감옥에서 지낸 그는 계속된 가석방 신청 끝에 2007년 모범수로 8년 2개월 만에 출소한다.
죽음의 의사로 불린 잭 케보키언을 다룬 타임지 표지. 케보키언은 130여 명의 중증 환자 안락사를 도왔다.
감옥에서 그는 MSNBC 방송과 인터뷰를 통해 가석방 되면 자살 조력이 아닌 법 개정 캠패인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가석방 후 강연 활동을 통해 약속을 실천했지만, 기독교 단체는 그를 악마라고 비방하며 그의 캠패인에 반대했다. 캐보키언의 안락사 도움 사건은 북미에서 논의되는 안락사 논쟁의 단면을 보여 준다. 여전히 자살과 조력 자살 등으로 부르는 반대 세력과 논쟁이 일고 있다.
많은 논란 속에서도 극심한 고통으로 죽음이 합리적으로 예견되는 환자에게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 개정은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 캐나다도 지난 2016년 1월 안락사를 합법화 했다. 스위스의 경우는 1942년 합법화 했고, 전문병원은 4곳에 이른다. 이중 1곳은 외국인 환자도 받고 있어 매년 200명 이상이 안락사를 위해 이곳을 찾는다. 네덜란드는 2000년, 독일은 2009년에 안락사를 합법화 했다.
프랑스는 2004년 중증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을 위한 음식과 수분 공급을 중단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됐다. 우리나라는 2009년 프랑스와 같은 소극적 안락사를 위한 법률을 인정하면서, 무의미한 연명 치료 장치 제러를 엄격하게 제한해 허용하고 있다. 벨기에와 콜롬비아도 사회적으로 안락사를 용인하는 분위기다.
안락사를 합법화 하고 있는 곳에서는 자살과 자살로 위장한 살인을 막기 위해 까다로운 절차와 조건을 내걸었다. 통상적으로 ‘회복 가능성이 없는 말기 암환자’, ‘고통을 이겨낼 방법이 죽음 외에는 없는 중증 질환’ 등의 경우에만 의사에게 안락사 소견을 물을 수 있도록 한다.
유영 young2@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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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창조 6천 년설, 어떤 근거도 없다
창조과학 '젊은 지구론'은 보수 기독교도 받아들이지 않는 주장
심용환 lyanga@dreamwiz.com | 2016.08.16 16:18:36
문자 그대로 6천 년?
젊은 지구론이라는 말은 사치스럽다. 결국 '문자 그대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창조과학'이라는 주장을 할 뿐이다. 이는 기독교 내부에서도 심각한 반박에 봉착한 지 오래다.
젊은지구론을 주장했던 초기 창조과학자들은 이미 다중 격변설을 넘어 창조과학적 논변 자체를 포기하기 시작했고 지적 설계론 등 새로운 형식의 인식론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냉정히 따져 우리나라에 창조과학 연구자가 있기라도 한가. 어떤 연구서를 내놓고 있으며 과학계와 어떤 학문적 충돌을 경험하고 있는가.
개혁신학은 문자주의를 옹호하지 않았다
과학을 둘러싼 뻔한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그들은 과학이 아니라 그들의 '신념'을 강요하고 싶은 것이다. 그 신념이 무엇인가. 성경에 나온 '문자 그대로'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주장이며 '문자 그대로' 분석해 보니 지구가 창조된 지 대강 '6,000년'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도무지 상식적인 주장이 아니다. 과학적 견지에서, 역사학적 견지에서 비상식이라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그리고 개신교 신학의 견지에서 비상식적이라는 말이다.
네덜란드 태생 칼빈주의자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펼쳐 보라. 시작부터 창조에 관해서 논하고 있는데 6,000년설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창세기 1장 1절과 1장 2절을 구분하며 제1창조, 제2창조를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을 자세히 보면 약간 이상하다. 하나님이 이미 '혼돈' 가운데 존재하는 '물질'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무에서 무'가 아닌 '유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심각한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벌코프는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무에서 유'로의 1차 창조로 설명한 것이라고 본다. 제품을 만들려면 기초 자재가 필요하듯 '질료의 창조'를 먼저 하고 1장 2절부터 그 질료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형상들을 만들어 내었다는 주장이다.
여전히 한국교회에서 이런 식의 단계적 창조론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신학적으로는 사망 선고를 받은 지 오래다. 창세기 1장 1절과 1장 2절이 원문에서 따로 떼어져 있지도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1절과 2절을 나눌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무에서 유' 다시 '유에서 유'로 나아가야 하는 '합리적 설명'이 필요했다. 벌코프는 이 무모한 설명을 위해 조직신학적 논변을 차용할 뿐이었다. 과학적 혹은 역사학적 증거보다는 형식논리적으로 주장을 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조직신학적 사유 방식이 무엇인가? 철학적 사유로 성경을 재조직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식 사고다. 즉, 중세적 사고방식, 로마 가톨릭적 사고 방식에서 연유한다. 가톨릭 얘기까지 끌어들이지는 않겠다. 중요한 사실은 성경의 정통성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벌코프가 '서양 전통 철학'의 사유 방식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그게 중요하다. 그 어디에도 '문자 그대로'라는 방식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건 벌코프식 이야기라고? 심하게 말해서 벌코프가 누군지 모른다면 개혁주의 운운할 자격이 없다. 더구나 벌코프식 주장은 벌코프만의 주장이 아니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일반적 태도 중 하나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문자주의를 거부했다
하나 더. 아우구스티누스를 살펴보자. 루터가 아퀴나스적 전통을 벗어나 종교개혁의 신학적 기초를 마련하게 되는 근저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었다. 실제 한국교회에서는 초대교회부터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그리고 중세 천 년을 훌쩍 뛰어넘어 루터와 칼뱅 시대만을 정통 기독교 시대라고 주장하는 목사나 신학자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거짓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교회, 그러니까 로마 가톨릭이 가장 소중히 여긴 교부 중에 한 사람이며 중세 천 년 전통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이다. 동시에 동방정교회에는 전혀 영향을 못 준, 오히려 동방교회에 의해 다양한 비판을 받은 서방 교회 전통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계보임을 자처하는 것은 결국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 로마 가톨릭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자처하는 것밖에 안 된다.
"그건 후대의 일이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식의 논변을 받아들이자.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에 대해 어떤 인식을 보였는가. 그의 저서 <참된 종교>를 읽어 보면 명료해질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결국 성경은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는 '알레고리' 해석학을 제시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안 된다. 문자 이면에 새겨진 의미를 유추하고 분석해 종합적인 신학적 인식으로 발전해 가야만 한다. 이러한 태도는 칼뱅에게 고스란히 이어진다. 칼뱅 역시 문자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칼뱅 이전에 에라스뮈스는 히브리어-헬라어 완역본 성경을 완성시키며 라틴어 성경의 무수한 오류에 대해 공박했고, 이로부터 시작된 성경 비평적 태도는 칼뱅에게도 고스란히 내려온다. 소위 '그리스도 중심적'인 모형론적 성경 해석 같은 것들이 칼뱅에 의해 주창되는 것 아닌가. 조금 과격하게 설명한다면 알레고리 변형판에 불과한 해석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루터 역시 '이신칭의'라는 틀거리로 성경을 해석했고, 칼뱅 역시 '하나님의 주권', '예정설' 등으로 성경을 해석했다. 여기에 '문자 그대로'라는 발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마 가톨릭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성서 해석'이 제안된 것이다.
문자 그대로도 '해석'의 방편일 뿐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를 해 보자. 소위 '문자 그대로'를 주장하며 지구 창조 6,000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미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있다. 본인들도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6,000년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주장인가. 중세 시절 성경에 나온 족보 등을 단순하게 계산하여 나온 주장 아닌가. 이것이 중세 신학에서 의미 있게 활용된 적이 있던가. 아니면 개신교 신학에서 의미 있게 받아들여진 적이 있던가.
한국교회에서는 사도 베드로를 이야기하면서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을 하루 같이' 식으로 하나님의 때를 가늠할 수 없다는 식으로 편히 이야기하지 않는가. 더구나 벌코프식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기간을 고려하면 지구 나이는 6,000년보다 훨씬 길지 않겠는가.
참혹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인류 4대 문명이 기원전 3,500년경에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그 밖에 무수한 문명이 발굴되고 있는 시점이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문명이 어떻게 천 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무수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수렵과 채집에서 농경과 목축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그리 간단한 과정이라 생각하는가. 라스코 동굴벽화가 기원전 1만 5천 년의 일이며,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제작된 것이 2만 3천 년 전 일이다.
함부로 과학을 이야기하지 마라. 동시에 사탄 운운하거나 모든 것을 '진화론 대 반진화론' 식으로 단순화하지 마라. 지구 창조 6,000년설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신학적 소양도 없는 주장이다. 어떻게 이런 마구잡이식 주장이 교회의 정통 신조인 양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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