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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안 믿어? 너 지옥가! / 마지막 금기: ‘어머니 됨에 대한 후회
    2016-07-22 12:12:27   read : 70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이런 사람도 있다. (구글 이미지 갈무리)

    예수 안 믿어? 너 지옥가!

    [책 소개] 서성광 <불신 지옥을 넘어서>(홍성사)
    구권효 기자



    ▲ 실제 상황이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자기 키보다 큰 현수막을 이고 다니는 사람을 보았는가. 어깨띠를 두르고 지하철 칸을 옮겨 다니며 쉬지 않고 떠드는 사람을 보았는가. 군복을 입고 한 손에는 팻말,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았는가.

    '저건 좀 아니다' 싶지만 이 명제 자체를 틀렸다고 말하는 기독교인은 드물 것이다. 얼마나 잘 풀어서 설명하느냐의 문제이지,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결국 지옥에 간다는 명제는 기독교인의 머릿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명쾌하지만 단순하지는 않다. 명제가 아니라 인생의 문제로 다가올 때는 차마 이 말을 하기가 어렵다. 먼저 죽은 가족 중에 믿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사랑했던 사람이 국가의 무능으로, 권력자의 폭력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면? "안타깝지만 당신의 아버지는 지옥에 갔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정신병원에 가 봐야 할 것이다.

    <불신 지옥을 넘어서>(홍성사) 저자 서성광 목사는 "어쨌든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간다"는 명제를 '교조적 불신 지옥'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 교조적 불신 지옥을 파고들어가 보면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 도출된다고 말한다.

    "'핵전쟁에 의한 인류 멸망이 다수 인류에게는 좋다. 기독교가 소수파인 곳에서 낙태는 권장되어야 하고 유아 살해자는 칭송받아야 한다. 불신자들이 대다수인 인종이나 민족은 집단 개종을 하지 않으면 차라리 세상에서 멸절시키는 것이 그들 종족의 미래를 위해서 유익하다'는 말을 들으면 미친 소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명제가 참이라면 그 헛소리가 개연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간다.
    2. 그 지옥은 영원히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곳이다.
    3. 2~3세 이전에 죽은 불신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성경이 말하지 않지만 지옥에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위의 세 명제는 대다수 복음주의자들이 믿는다. 1, 2번은 공식적인 신학이고 3번은 막연하게나마 다수가 믿고 있는 믿음이다. 교조화된 불신 지옥의 논리를 일관되게 따라갈 때 제기되는 앞서의 문제에 대해 복음주의는 아직까지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사실 복음주의 윤리의 근간이 무너질 수 있는 질문임에도 회피만 해 왔다." (40~41쪽)



    ▲ <불신 지옥을 넘어서> / 서성광 지음 / 홍성사 펴냄 / 176쪽 / 1만 원

    저자 서성광 목사는 흔히 말하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모태신앙으로 중학교 때 목사가 될 것을 서원한 사람이다. 고신대를 나와 전통 교회에서 목회를 해 왔다. 전형적인 복음주의자, 개혁주의자다. 그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갈 때도 자유주의자가 아닌 저명한 개혁주의자들의 저서를 참고한다.

    성경과 전통적인 개혁주의적 해석을 따라가도 교조적 불신 지옥은 문제가 있다는 게 서성광 목사의 설명이다. 지옥이 없다거나 결국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옥은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옥(게헨나)'은 보통의 한국 크리스천들이 알고 있는 그런 지옥이 아니다.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 같지만, 그의 논리는 전통적인 그리스도인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다. 책은 160페이지로 분량도 짧고 지나치게 학술적이지도 않다. 지옥에 대한 논의는 결국 천국과 부활, 구원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한다. 나아가 기독교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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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벗어나니 자유롭고 행복해

    20년 넘게 지속한 신앙생활, "담임목사 비리 보니 허무해졌다"
    최유리 기자

    "교회를 고민하는 젊은 청년들, 중고등부를 거쳐 대학부에 온 청년들이 교회에 발길을 끊는다. 교회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전부인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오지 않는다."

    [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한국교회 문제점을 짚는 포럼 '새 시대를 위한 한국교회의 회개와 소망'에서 이성호 목사(포항을사랑하는교회)가 한 말이다. 그의 말처럼, 최근 교회에 나가지 않는 청년들, 교회는 안 다니지만 예수는 믿는 '가나안' 청년 교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교회를 다니다 이제는 떠난 청년들 이야기가 궁금했다. 누군가에게는 '믿음 없어 실족한 사람', '하나님 대신 세상에 마음을 쏟아 교회 떠난 사람'으로 치부되는 그들 이야기가 궁금했다. 한지훈 씨(32). 그는 지금까지 교회 3곳을 다녔다. 5년 전부터는 더 이상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

    한 씨는 책과 관련된 방송 콘텐츠를 만든다. '북파인더'에서는 동영상으로 신간을 소개하고, 팟캐스트 '책 읽는 라디오'에서는 책을 추천한다. 그에겐 무슨 사연이 있을까. 홍대 모처에서 한 씨를 만나 20년 넘게 한 신앙생활 이야기를 들었다.



    ▲ 한지훈 씨는 20년 넘게 신앙생활했다. 청소년부, 청년부 임원도 맡았다. 그런 그가 5년 전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청소년부 회장 도맡아 하던 학생

    한 씨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부모님이 다니던 건 아니었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목사 아들인 동네 형이 자신을 교회로 데려갔다. 동네 교회에서 자랐다. 부모님 반대는 없었다. 부모님은 신앙이 없었지만 교회에서 나쁜 걸 가르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릴 땐 꿈이 목사였다. 학교에서 되고 싶은 걸 그리라는 숙제에 목사가 된 자신을 그렸다. 그림을 자기 방 벽에 붙여 놓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 따라 교회를 옮겼다. 교회는 놀이터와 같았다. 그는 학창 시절 추억으로, 청소년부 행사에서 종종 사회 본 일, 친구들과 랩으로 성가를 만들어 선보인 것, 성탄절에 동네를 돌며 새벽송 하던 일을 회상했다. 어머니는 새벽송 때 몇 가지 주전부리를 그의 가방에 넣어 주기도 했다.

    즐겁게 생활했지만, 점차 불신자였던 부모님과 갈등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어머니는 몇 구역이시니?"라고 묻는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친구들이 부모님과 함께 예배 오는 게 부러웠다. 그래서 일부러 권사들이 모여 있는 주방 근처는 잘 가지 않으려 했다.

    주변에서는 "지훈이가 더 기도하면서 부모님 전도해야지"라고 말했다. 기도는 열심히 했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교회에서는 사단이 약한 부분을 공격한다고 설교했다. 부모님께 같이 교회 가면 안 되냐고 몇 차례 말했지만, 주 6일 일하고 일요일 하루 쉬는 부모님이 교회에 가기는 어려웠다.

    대학에 들어갔다. 1학년 때는 술 먹고 선배들이랑 어울려 다니느라 교회 간 날짜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러다 군 입대를 앞두고 회심의 순간을 맞았다. 입대 전 드린 예배에서 들은 말씀이 그를 새롭게 했다. 군대에 가면 성경 1독을 해야겠다 다짐했다. 옆에서 다른 병사가 토익 공부할 때 성경을 읽었다. 인생의 큰 시련으로 생각되는 일이 군대에서 일어났을 때도 성경을 읽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신앙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다.



    ▲ 그는 교회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고 다 참여했다. 새벽 예배에도 참석했고, 주일에는 하루에 3번씩 예배를 드렸다. 성수주일하겠다고 학교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사진 제공 한지훈)

    교회밖에 모르던 교회 오빠

    제대하고 믿음 좋은 형제, 교회 오빠로 거듭났다. 금주를 시작으로 새벽 예배를 빼먹지 않고 참석했다. 파트 전도사보다 더 많이 교회에 갔다. 지금 하라면 고개를 가로저을 만한 일들에 빠지지 않고 다 참여했다.

    주일에는 청소년부 교사는 물론 주일예배도 아침 2번, 오후 1번 총 3번을 드렸다. 매 예배마다 노트에 빽빽하게 설교 내용을 적었다. 회심 후 주일 성수를 한다고 학교 행사나 MT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해가 바뀔 때면 기다렸다가 목사에게 축복 안수기도를 받았다. 대학교 1학년 때 모습을 기억하던 친구들은 달라진 그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당시 자신의 모습을 세상과 철저히 분리된 '열심당원'으로 기억했다. 지금이라면 그다지 고민하지 않을 일도 그때는 고민이 됐다. 과외를 하며 30만 원을 벌었다. 생활비로 29만 원이 필요했다. 십일조를 내려면 2만 원이 부족했다. 그는 2만 원을 낼 거냐 말 거냐로 목사와 상담했다. 결국 십일조를 내고 하루 3,000원으로 생활했다. 버스 탈 거 걸어 다니고 먹을 거 줄이며 지냈다.

    이쯤 부모님과 갈등도 최고조로 치달았다. 새벽에 나가 밤 늦게 들어오니 같이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교회 다니지 않는 부모님이 미웠다. 가족 회의에서 교회 다니는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한 번 가보자고 말했지만 새벽송 갈 때 주전부리 챙겨 주던 어머니는 아들 태도에 거부감이 있었는지 한사코 가지 않겠다고 했다.



    ▲ 군대에서 회심했다. 성경 1독을 했다. 교회를 떠나기 전까지는 예배 때마다 노트에 설교 말씀을 빼곡히 적었다. 아직도 그 노트들은 집 한구석에 쌓여 있다.

    목사의 비리, 그게 문제였다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다니던 교회에서 목사 돈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한 주 헌금이 1,500만 원 정도 들어오는 교회였다. 청년들에게는 쉬쉬했지만 장년층에서는 이미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 교회에 오래 출석하던 집사가 목사 비리를 지적했다. 이를 동의한 장로가 옆에서 집사를 도왔다. 언젠가부터 그 장로는 장로석에 앉지 않고 대표 기도를 하지 않았다. 한 씨는 이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제대로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월례 회의 때 이 문제가 안건으로 상정됐고 청년부 부장을 맡은 집사는 "이제 너도 알아야 한다"며 그를 데리고 회의에 참석했다. 청년부 임원을 맡고 있을 때였다. 회의 자리에 청년은 그 혼자였다.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하는 등 형식적인 예배가 진행됐다. 그러곤 안건 이야기가 나오자 담임목사가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쥐를 몰듯, 집사에게 "증거가 있냐"며 몰아붙였다. 준비해 온 서면을 읽고 있는 집사를 향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주변에서 고성이 쏟아졌다. "집사를 내쫓아라", "목사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고함이 터져 나왔다. 서 있는 집사에게 목사의 두 아들이 달려들었다.

    20년 넘게 신앙생활했지만 교회에서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일단 두 아들을 말리고 자리에 앉았다. 자신을 데려온 집사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믿고 따르던 목사의 이면을 보니 충격이 컸다. 허무해졌다.

    3만 원을 십일조로 내느냐 마느냐 고민하며 3,000원으로 생활했는데, 이게 모두 목사 배 불려 준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배 나온 목사, 멋진 차와 큰 집을 보유했던 목사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됐다. 목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강단에 섰다.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담임목사가 집도하지 않는 예배만 참석했다. 그가 교회에서 나올 즈음 청년부 예배에 5~6명만 남았다. 점차 교회와 멀어져 갔다.

    청소년부 교사 임기가 끝나자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말씀은 들어야겠다 생각했다. 대형 교회에 갔다. 교회에 가도 내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곳이 편했다. 다른 사람들이 와서 새로운 사람이냐고 접근하는 게 싫어 이어폰을 꽂고 들어갔다. 늘 끝나기 5분 전 미리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 생활도 오래가진 않았다. 2달 뒤 그는 교회를 아예 떠났다.



    ▲ 목사의 비리를 보았다. 마음이 허무해졌다. 더 이상 그 목사가 집도하는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후 대형 교회에서 예배드렸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교회를 떠나니 관계가 좋아졌다

    교회 나가지 않은 지 5년째. 지금은 어떤지 궁금했다.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가족과의 관계를 가장 먼저 꺼냈다. 주일에도 집에 있자 아버지는 "교회 안 가느냐"고 물었다. 교회에 가지 않자 가족과 함께 밥 먹을 시간이 생겼다.

    가족과의 관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집에 있으니 가족과 함께 이야기할 시간도 생겼다. 집에서 종교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니 갈등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다. 교회 가지 않겠다는 어머니와 더 이상 감정 소모할 필요가 없어졌다.

    개인적으로는 내면의 자유를 느꼈다. 교회 테두리 안에서 생활할 때는 좋은 교회 오빠로 살아야 했다. 힘들거나 어려운 점이 있어도 잘 드러낼 수 없었다. 교회를 떠나며 진짜 '한지훈'을 찾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 사람을 만나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지인들은 교회 오빠에서 자유인으로 탈바꿈한 그에게 "너무 달라져서 적응이 잘 안된다"고 말했다. 한 씨도 과거의 자신을 보면 "내가 이랬었나" 싶을 정도라고.

    단순히 금지된 행동을 할 수 있어서 자유로워진 건 아니었다. 교회가 늘 주장하는 이야기, 테두리를 벗어나니 편안해졌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쉴 수 있고 버거우면 잠시 멈출 수 있었다.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니 주일이 진정한 안식이 되었다. 삶에서 즐거움을 찾아가니 만족이 높아졌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5년 전 사건이 없었으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머리를 만지며 짧게 말했다. 눈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조금 싱거운 답이 돌아왔다.
    "아마 지금까지 다니고 있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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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와 교역자의 생활 양극화, 공교회성 회복으로 극복해야
    허원배


    교회와 교역자의 생활 양극화,

    공교회성 회복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거룩한 공교회”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사도신경을 통해 감리교회가 “거룩한 공교회”임을 고백합니다. 감리교회가 공교회임을 우리가 고백한다는 말은 바울이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0)고 하셨듯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 된 교회를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모든 역사적 교회와 지역적 교회는 우주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형제교회와 연합해야 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도 베드로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벧전1:15)하신 것처럼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사도들의 가르침에 기반하여 존재하는 공동체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해 ‘거룩한 공교회’를 믿고 고백한다는 말은 교회가 사도적 가르침을 따라 통일성과 보편성, 그리고 거룩성과 사도성을 유지되어야 함을 고백하며, 이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한다는 말입니다.

    ● 지금, 감리교회의 공교회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감리교회의 공교회성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2014년 목회사학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전체 목회자의 66.7%는 정부가 정한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급여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37%는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교회사역 이외에 다른 경제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 목회자의 73.9%는 가정과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목회자의 이중직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습니다. 실천신학대학원 조성돈 교수는 "직업이 두 개인 목회자가 적지 않은 현실에서 교단들이 묵인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 목회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십일조를 바치지 않아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자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고 꾸짖고,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우고,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드렸던 느헤미야의 개혁을 구현해야 합니다.(느13장)

    모든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고, 보편적이며, 하나라고 고백하는 상황에서 교회 사이의 심각한 양극화는 우리의 신앙고백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감리교회가 통일성, 보편성, 거룩성, 사도성을 지닌 ‘거룩한 공교회’임을 우리가 믿는다면 개체교회를 개인이나 신자들의 소유로 인식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감리교회 내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교회의 양극화를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특히 기독교대한감리회는 미국연합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감독교회로서 본래 감독이 담임목사를 파송하는 등 연회를 중심으로 하는 교구 목회자의 생활은 감독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리교회에서 교회의 규모에 따른 교역자의 심각한 생활 양극화를 방치하는 것은 감리교회답지 않습니다. 때문에 감리회교회 내에 존재하는 심각한 교회 양극화와 목회자들의 생활 양극화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합니다.

    ● 감리교회의 정체성 회복이 바로 교회의 공교회성 회복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든 것은 마태복음25장에 나오는 소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며 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28파운드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이웃을 위해 사용했으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옷을 또 노예소녀를 돕기 위하여 값비싼 그림을 팔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요한 웨슬리가 죽은 후 남겨진 그의 재산은 오직 은수저 한 벌과 몇 페니의 동전뿐이었습니다. 또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종교라며 기독교를 사회와 격리된 고독한 종교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의 감리교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 요한 웨슬리가 심고 힘써 가꾸었던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 웨슬리의 감리교회에서 어떤 교회는 너무도 가난해서 교회를 유지하기조차 힘들고, 어떤 교회는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교회를 외면하는 일은 발생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목회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목회하는 반면, 어떤 목회자는 수억 원의 연봉을 받으며 귀족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또 감리교회에서 교회의 양극화 혹은 목회자의 생활 양극화를 외면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감리교회의 공교회성 회복은 감리교회 정체성 회복으로부터, 감리교회의 정체성 회복은 교회의 양극화와 목회자 생활의 양극화 회복을 위한 노력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 감리교회의 정체성과 공교회성 회복을 위해 제안합니다.

    ① 감리회에서 정상적으로 목회하는 목회자의 최저생활은 감리회가 보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감리회는 목회자의 사역 상황을 철저히 점검하여 재도가 악용되는 사례를 방지하는 것을 전제로 <목회자생활보장법>을 제정하여 정상적으로 사역하는 목회자의 최저생활은 감리회가 책임져야 합니다.

    ② 목회자 급여호봉제 도입을 통하여 감리회 목회자의 급여를 표준화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환경과 부양가족 등을 감안하여 감리회 차원의 목회자 급여를 표준화 하고, 호봉제를 도입하므로 개체교회에서 목회자 급여책정과 관련한 시비를 없애되 이는 제도화를 통해 모든 개체교회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합니다.

    ③ 목회자가 은퇴 후 생활에 대한 걱정 없이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은급제도를 제도운영을 위해 사용하는 비용은 줄이고 보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획기적인 개혁을 추진하되 그 과정에서 현재 가장 안정적이고 보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는 국민연금과의 연계를 적극 고려해야 합니다.

    ④ 자녀의 부모 부양의무가 점점 흐려지는 상황에서 은퇴 목회자의 주거문제를 감리회 본부차원에서 해결하지 않는 한 소위 교회매매와 세습, 후임자에게 은퇴비를 요구하는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감리회가 소유하고 있는 유휴재산을 활용하여 <은퇴교역자마을(clergy silver village)>을 설립하여 은퇴 목회자의 주거문제 해결에 감리회 적극 나서야 합니다.

    ● 감리교회의 정체성과 공교회성 회복, 더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질병의 치료시기를 놓치면 치유할 수 없듯이 병든 감리교회를 치유하는 데도 일종의 골든타임(golden time)이 있는 법입니다. 시간은 감리회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를 외치며 시간을 허비하다보면 감리회를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감리회의 정체성과 공교회성 회복이 그렇습니다.

    매년 신자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위기의 상황을 막고, 희망 있는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서 감리회는 지금, 여기서 감리회의 정체성과 공교회성 회복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목회자가 병들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며, 그 조치는 목회자가 돈 때문에 목회에 전념하지 못하는 현실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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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복음주의자 80%는 ‘트럼프’ 무신론자 67%는 ‘힐러리’



    ▲힐러리 클린턴(왼쪽)과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크리스천포스트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공화당의 사실상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크리스천포스트가 13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최근 퓨리서치센터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유명 복음주의 지도자들 중 상당수가 트럼프에 대한 경계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왔으나, 정작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정서는 다른 상황이다.

    복음주의권 유권자들 중 80%는 “만약 대선을 오늘 치른다면 트럼프 후보를 선택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들 중 2/3 가량은 트럼프의 대선 캠페인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이는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미트 롬니 전 주지사 받았던 것보다 더 높은 지지도다.

    반면 자신의 종교에 대해 ‘무신론’이나 ‘영지주의’, 또는 ‘없다’고 밝힌 이들은 대부분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 이는 2012년 당시 버락 오바마를 지지층과 비슷하다. 특히 종교가 없다는 응답자의 2/3 가량은 클린턴에게 투표하겠다고 했다.

    보고서는 “백인 복음주의 개신교인들과 무신론자들의 투표는 2016년 대선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두 그룹은 전체 유권자 중 각각 1/5 가량씩을 차지하고 있다. 보고서는 또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트럼프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그에 대한 기독교계의 지지는 매우 견고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백인 복음주의권 유권자들 중 절반 이상은 대선 후보 선택에 만족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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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찬의 관행과 의미에 대하여

    개혁주의적 해석으로 보는 성찬
    최성수 sscc1963@hanmail.net

    성찬에 대해 두 번에 걸쳐 연재하려 합니다.

    1회
    1) 성찬과 성찬 경험 - 하나님의 행위가 일어나는 시간과 장소
    2) 성찬 집례자의 자격과 성찬 참여 자격

    2회
    3) 성찬의 관행
    4) 성찬의 의미
    5) 성찬 경험이 있는가

    이번 글은 2회입니다. - 필자 주

    3) 성찬의 몇 가지 관행들에 관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한 성찬 관행(고전11:17-34)은 애찬과 성찬이 특별한 구별 없이 행해지던 시기에 일어났다. 고린도교회의 성찬 관행과 관련해 바울은 성찬의 의미를 재차 환기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먼저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정리하면 이렇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원래 유월절 식사이고, 성찬은 이것을 기반으로 제정된 것이다. 당시에는 예수님이 베푸신 모범에 따라 애찬을 나누면서 성찬을 행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부자와 가난한 자의 애찬이 서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애찬에서는 각자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포도주도 일상처럼 마셨다. 부자라서 일을 할 필요가 없거나 일찍 일이 끝난 사람은 먼저 애찬을 마칠 수 있었고, 저녁 늦게까지 일해야만 하는 사람은 늦은 시간에 와서 겨우 애찬을 나눌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은 가지고 온 음식이 없어서 먼저 애찬을 시작한 사람들이 음식을 남겨 놓지 않고 다 먹어 버렸다면 굶어야 했다. 애찬을 일찍 마친 사람 중에는 포도주를 많이 마셔 취해 있는 사람도 있었다.

    간단히 말해, 고린도교회 애찬은 일상의 거룩함을 경험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서로 함께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이에 대한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바울 사도가 주목하여 지적한 것은 바로 이런 현실이다.

    바울은 다시 한 번 성찬의 의미를 되새겨 줄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였다. 이 내용은 복음서에 나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울은 마지막 만찬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주께 받은 것"(고전11:23)이라고 하면서 성찬의 진정성과 권위를 강조하였다. 성찬과 관련한 전통이 당시에 교회 전통으로 굳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의 편지에서 핵심은 성찬의 의미를 되새기고, 성찬 행위를 바로잡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서 성찬이 비록 애찬 형태로 이뤄지더라도 함부로 참여하거나 남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 또한 성찬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혹은 자기 멋대로 행해서는 안 된다. 성찬의 공동체적인 의미가 회복되어야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고린도교회 성도 중 아픈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울이 그 원인을 애찬의 남용에서 찾은 점이다. 바울이 이런 사실을 언급한 것은 성찬이 비록 의식으로 거행되는 저녁 식사지만, 하나님의 행위를 염두에 두고 경건하게 지켜져야 하며, 그 효력이 우리 일상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강조하기 위함이다.

    다음으로 분병과 분잔 관행에 대해 생각해 보자. 관행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비교적 규모가 큰 교회는 먼저 집례자의 기도와 분병·분잔 후 장로가 회중석을 돌아다니면서 성도들에게 나누어 준다. 일어서서 받든 앉아서 받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다른 하나는 중소 규모 교회에서 행해지는 방식이다. 집례자가 서 있는 곳으로 나와서 받는 것이다.

    굳이 무엇이 옳은 방식인지를 물을 수 없지만, 개혁교회 전통에 근거한 예식에 따르면 앞으로 나와서 받는 것을 권고하고 있다. 다만 사람이 많기에 시간 관계상 장로들이 회중석을 순회하며 나눠 줄 뿐이다.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일어난 부작용이다. 할 수 있는 한 분병과 분잔은 앞으로 나와서 받으면 좋을 것 같다. 숫자가 많아 어렵다면 할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의 온전성을 판단할 때 전통적으로 성찬이 바르게 집행되고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는 것을 중요한 기준으로 본다. 성찬을 온전히 거행하기 위해서라면 교회 규모를 과감하게 줄이는 결단도 생각해 볼 만하다. 전통을 중시하여 집례자와 참여 자격을 제한하는 것은 마다하면서, 분병과 분잔 전통을 편의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정당할까? 교회 행위가 일관되지 못하면 성도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다.

    한편, 성찬 경험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를 위해 먼저 성찬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성찬의 의미에 관해 생각해 보자.

    4) 성찬의 의미

    앞서 성찬의 제정과 관행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성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성찬은 원래 복음서에 기록된 것이다. 마 26:17-29, 막 14:12-26, 눅 22:7-23에 나와 있다. 바울도 복음서 전통에 근거해서 성찬에 대해 말했다. 복음서에서 전해지는 성찬과 의미는 그만큼 중요하다.

    첫째, 복음서 본문에서 성찬은 종말론적인 지평을 갖는다. 마 26:29(막 14:25, 눅 22:18)에 보면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라고 나온다.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면서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둘째, 성찬의 순간에 가룟 유다의 배반 행위가 드러났다. 이것은 성찬 전에 죄를 회개하는 일과 성찬 참여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말한다. 이 때문에 바울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화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단순히 포도주와 빵이 아니라, 그것이 거룩한 효과를 갖는다는 점을 환기한 것이다.

    성찬의 순간에 우리 죄는 하나님 앞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찬 전에 회개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주의 시기에 모양은 달라도 성찬 전 일주일 동안 매일 한 끼 혹은 3일이나 하루 정도를 금식으로 회개하면서 경건한 시간을 보냈다.

    셋째, 성찬은 예수님 죽음이 구원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선포한다. 그것은 단순히 먹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행위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선포라는 것인지, 아니면 성찬을 집례하면서 선포 행위를 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문맥상으로는 집례 행위가 아니라 성찬에 참여하여 먹고 마시는 행위 자체가 선포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행위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일 때마다 이것을 기념하여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의식을 행하는 것은 구원을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행위 자체로 구원을 선포하는 일이니 참으로 신비하다.

    참고로 이와 관련해 언급할 점은 성찬 집례자가 스스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으나, 가톨릭에서 사제적인 의미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더 이상 사제의 의미와 전통을 계승하지 않는 개신교 관점에서 볼 때는 옳은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타인이 건네주는 떡을 받고 잔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베푸는 자가 집례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고 성찬이 갖는 선포의 의미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스스로에게 선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넷째,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조하는 내용은 성찬의 공동체성이다. 사실 이것은 바울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다. 원래 유월절 음식 자체가 공동체적이다. 다시 말해 유월절 절기 음식을 먹을 때 가장은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한 후에 참여한 사람 모두에게 나눠 주었는데, 이것은 유월절 음식이 원래부터 공동체성을 갖고 있음을 말한다. 바울은 유월절 음식에서 이 점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구원을 위해 중심이 되어 있는 데 비해, 고린도전서에는 공동체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고, 모두가 함께하는 식사라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성찬을 단지 의식적인 행위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강조하였다. 특히 성찬이 의식 차원을 넘어 일상에 미치는 효과도 강조하였다.

    다섯째, 바울이 전하는 성찬 전통에서 중요한 것은 성찬 자체가 예수의 죽으심을 전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여 과거의 사건을 상기한다.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 곧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셨고, 그럼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다시 한 번 듣고 또 확인하게 된다.

    성찬 참여 자체는 과거 종말을 선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현재화하는 것이며, 우리가 회개한 죄가 용서받았음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우리 형제자매가 지은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성경의 의미에 따르면, 성찬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마태복음 18장 '용서가 철회된 종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하나님의 죄 용서를 스스로 철회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화해하는 의식을 행하는 게 좋겠다.

    5) 성찬 경험

    성찬 경험이란 복음서와 고린도전서에서 나타난 의미를 바로 알고 성찬에 참여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사건, 곧 신앙 경험이며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성찬을 행하는 것으로만 의미를 두는 성도가 많다. 성찬의 신학적인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이고, 성찬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찬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단지 주술적인 종교 행위로 여기게 만드는 요인이다.

    성찬 경험은 종말을 선취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상기하여 현재화하는 것이다. 죄인으로서 경험임과 동시에 죄 용서에 대한 경험이고, 함께함 곧 성도의 공동체성에 대한 경험이며, 구원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경험이고, 종말론적인 기대감을 갖는 경험이다. 이에 대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갖고 성찬에 참여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일어나는 일을 경험하게 된다.

    성찬 경험의 대표적인 사례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성찬은 자신들과 동행한 사람이 바로 부활의 예수님임을 알아보는 계기로 작용한다. 성찬만이 아니라 말씀을 풀어 주는 일도 있었지만, 이것을 바탕으로 함께 나눈 성찬의 순간에 그들은 눈이 밝아져 예수님임을 알아보게 되었다.

    성찬은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한다. 이에 비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성찬 경험에서의 부정적인 사례를 전해 준다. 곧 바울은 성도 가운데 일부가 성찬에 참여하기 전 회개하지 않고 성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심으로 몸에 병을 얻었음을 환기한다. 성찬은 은혜의 시간이면서 심판의 시간이다. 예수께서 심판자로 성찬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는 말씀을 마지막 만찬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으로 본다면, 성찬은 회개하는 자에게 베푸는 은혜를 의미한다. 회개할 것이 많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토록 우리와 만찬을 나누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회개하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심판이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이것은 이미 첫 만찬에서 드러난 사실인데, 가룟 유다의 악한 생각은 만찬 중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성찬 경험은 성찬에 관한 이론에 좌우된다. 가톨릭이 주장하는 화체설(사제의 축사에 의해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뀐다는 이론)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더 이상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루터는 공재설, 곧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의 빵과 포도주에 함께 임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원화시킨다 하여 루터의 생각을 비판하면서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다만 상징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성찬 예식은 상징 행위일 뿐이다. 칼뱅은 루터의 공재설과 츠빙글리의 상징 및 기념설을 종합하여 성령임재설과 기념설을 주장하였다. 곧 빵과 포도주에 성령이 임재하며, 성찬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라 하였다. 오늘날 루터파 외 대부분 개신교는 성령임재설을 바탕으로 성찬 예식을 거행한다.

    성례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가 가시화된 형태라고 이해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보이지 않지만, 이 보이지 않는 은혜를 가시화한 것을 가리켜 성례라고 했다. 또한 듣는 말씀에 비해서 성찬을 보는 말씀으로도 이해한다. 보고 감각적으로 경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사건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세례는 하나님의 죄 용서를 가시화시키는 예식이고, 성찬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과 성도의 유기적인 공동체성을 가시화시키는 예식이다.

    최성수 / 하늘땅사람교회 담임목사. 서강대 철학과, 독일 Bonn대학교 신학석사·신학박사, 영화 및 문화평론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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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금기: ‘어머니 됨에 대한 후회’



    그들은 물론 자신들의 아이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머니가 된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사회학자 오르나 도나스(Orna Donath)가 분석한 내용입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은 다시 어머니가 되시겠습니까?” 그녀들은 대부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조사 대상에 포함되었던 25~75세 여성 23명은 다시는 어머니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답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자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를 인지하였으며,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지금은 할머니가 된 56세의 트리스챠(Tirtza)는 아이를 가진다는 일이 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건 제 인생의 악몽이었다고 생각해요. 또 그건 여러 어려움과 걱정 이외에는 제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어요.” 세 아이를 기르고 있는 45세의 아탈랴(Atalya)는 둘째 아이가 생긴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회학적 연구로서 “어머니 됨을 후회하는 이들에 대한 연구”는 지난 2015년 겨울에 출판되어 스위스에서 브라질까지 많은 이들에 의해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각국의 문화적 상황 하에서 나름의 모성애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뉘앙스를 가지지 않습니다.

    오르나 도나츠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카자흐스탄, 덴마크, 잉글랜드, 스위스, 인도 등 각국의 모성을 종합하여 연구하였습니다. 독일에서 도나츠의 작업은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논쟁의 와중에 여러 종류의 서적이 출판되었으며, 다양한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학회, 출판물 등에서 “어머니됨을 후회하는 현상”을 언급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상대적으로 이 작업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프랑스는 더욱 많은 수의 아이들, 더욱 높은 출산율을 원할 뿐, 사회적으로 어머니됨의 후회라는 개념을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40여 년 동안 노동 시장과 관련된 모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던 사회학자 마리-테레즈 르타빌리에(Marie-Therese Letablier)는 자신의 의견을 대변한 듯한 연구 내용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대 제가 아는 한, 우리는 후회라는 개념에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러한 각도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을까요?”

    욕망의 몸짓

    모성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스라엘에서 이 주제는 발표되기 전부터 이슈가 되었습니다. 젠더 사회학 전문가인 콜린느 카르디(Coline Cardi)는 모성애에 대한 명령이 대중적이라면 그럴수록 이에 대한 반발 – 즉 어머니됨에 대한 후회 역시도 더욱 쉽게 인지된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독일에서는 여성들이 그들의 자녀를 기르기 위해서 일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두 지점에서 거시경제적 측면과 개인적인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마리-테리즈는 설명합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상당히 높은 출산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반면 라인강 저편의 독일은 그렇지 않습니다(2014년 프랑스 출산율은 여성 1명 당 2.01명, 독일은 1.47명). 독일은 아이들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 됨에 대한 후회”는 사회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오랫동안 독일의 가족 정책은 전통적인 가족 체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격이 없는 어머니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독일 여성들은 노동과 모성의 발현을 병행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대학 학위를 가진 이들의 1/3 정도의 여성이 아이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럽연합 차원의 양성평등 원칙에 따라 독일은 2007년부터 가족 정책을 개혁하였습니다. 이는 주거비용이 자녀의 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정책의 방향이 출산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맞춰져 있는 프랑스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입니다.

    불평등을 밝히는 것을 넘어서 오르나 도나츠는 어머니들의 노동 역시 그들의 모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적인 후회를 넘어선 신성화된 왕국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후회’가 범죄나 죄악을 저질렀을 때 발현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패배, 취약함의 증거로 감정적으로 부정적인 부분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괴로워하는 어머니가 언제나 나쁜 어머니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자녀를 위해 충분히 무엇인가를 하지 못한 것 같다는 데에서 오는 죄의식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후회는 상실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오르나에 따르면 후회의 평가 절하는 모성의 과대평가와 직결됩니다. 그리고 이는 한 여성이 어머니가 되기로 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합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이 후회는 다른 선택지가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즉 아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선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아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일이 가능했을까요? 물론 오늘날에는 임신 중절 등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기는 합니다. 이로서 여성은 자신의 생식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보부아르(Beauvoir)와 바당테르(Badinter)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로서 여성의 몸은 여성들 자신에 속합니다. 모성은 더 이상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근본주의적 페미니즘은 모성이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장애물이라고 봅니다. 이 당시, 즉 60~70년대 모성에 대한 경험 자체에 대해 내린 결론입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경향에 대한 내용” 이라고 콜린느 카르디는 말합니다. 어머니 됨에 대한 후회는 아마 피임 이전에는 합의될 수 있는 사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 이러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모라는 직업”

    오늘날 이러한 ‘후회’는 출산을 조절할 수 있는 권한과 관련하여 표현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피임 혹은 적어도 원치 않는 아이를 낙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아이를 원하지 않는 현상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사회학자 샤를로트 데베스트(Charlotte Debest)는 여성들이 이중으로 겪고 있는 문제를 강조합니다.


    “여성들은 책임의식과 죄의식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저는 당시에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아이를 선택한 것이며, 아이를 맞이할 준비가 된 상태에서 아이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성에게 그들의 생식능력을 통제할 권한을 주면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그 전에는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 일이 이렇게 합리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이는 우연에 의해 주어질 뿐이었고 부모는 그 상황에 적응할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부모라는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는 부모의 역할에 무엇인가 노하우가 있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즉 부모의 자격을 확인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가족은 행복의 원천이어야만 합니다. 모성애는 결국 여성성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여성들은 이를 인정해야만 하고, 이를 후회하거나 아쉬워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샤를로트 데베스트의 말입니다. 여기서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 진정한 여성은 행복한 어머니인 것입니다. “다만 이 여성들이 사람들이 그들에게 바라는 바에 순응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지금까지도 그다지 진보되지 못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인 명령과 여성들의 대표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미 너무도 작았던…

    그러나 이러한 후회의 표현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모성에 대한 사회적인 명령이 자기 자신에 대한 욕망은 물론, 모든 것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36세의 오데일라(Odelya)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한 반도 진지하게 이를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털어놓습니다. 아탈랴(Atalya)의 경우, 그녀는 그저 어쩌다보니 어머니가 되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다른 이는 인공수정을 통해 어머니가 되기도 했습니다.

    모성의 경험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 여성들은 모성을 통해 사회로부터 인정받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세상에 아이를 내보내었다는 자랑스러운 감정, 또 하나의 꿈을 실현시킨다는 감정. 그러나 이는 다른 이들의 꿈이었습니다. 아이를 바라는 욕망에는 근거가 있으며, “여성은 아이를 출산한다”는 그 근거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다고 샤를로트 데베스트는 말합니다. ‘어머니 됨에 대한 후회’와 같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욕구는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회적인 배제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좋은 어머니의 규범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부모들은 부모가 아닌 이들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요소들이 그들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 과연 부모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삶과 부부의 삶에 미칠 요소 하나하나를 충분히 고려한 상태에서 부모가 되었을까요? 샤를로트에 따르면 사람들은 부모가 됨을 그저 그들이 선택한 삶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하곤 한다고 합니다.

    양면성

    그러나 ‘어머니 됨에 대한 후회’를 발현하는 것은 이미 이 사실에 의해 스스로를 폐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현재에 의해 스스로를 재평가하는 것, 즉 자신의 후회를 후회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자 쥬네비에브 들래지(Genevieve Delaisi)는 양면성의 개념을 말합니다 : “후회는 정신분석학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회학적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사회학자의 조사는 이러한 개념을 곤란한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 “무의식은 완전히 무시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어머니들은 양면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혹 그들은 그들의 아이들을 거부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쥬느비에브는 대단히 희귀한 편집증적 정신착란을 보인 파비엔느 카부(Fabienne Kabou)의 극단적인 사례를 제시합니다. 그녀는 그녀의 아이를 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아이에게 모유수유를 하며 그녀의 아이를 익사시키는 방식으로 그녀의 광기를 발산하였습니다. 만일 파비엔느가 당시 이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나중에 언젠가는 했겠지요. 일반적인 여성들은 역시 양면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간혹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매우 대단한 일이라는 관념이 내재화된 이상 어머니들은 이를 자각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인 초자아는 이러한 후회를 표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쁜 어머니상은 여성들을 가두고 있습니다. 콜린 카르디는 말합니다. “이 조사는 사회의 불편한 부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논점을 바꿔야만 합니다. 대상을 경험에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성에서 아이를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리베라시옹)

    뉴스페퍼민트 newsm@news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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