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목회자의 딸, 유럽 짊어졌다 / 교인수 늘리기 위한 전도는 이제 그만 2016-07-15 15:15:19 read : 782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두 목회자의 딸, 유럽 미래 짊어졌다
‘성공회 목사의 딸과 루터교 목사의 딸이 유럽의 미래를 짊어졌다.’
13일(현지시간) 영국 총리로 취임한 테레사 메이(59)와 앙겔라 메르켈(61) 독일 총리가 짊어진 역사적 과업과 그들의 신앙적 배경을 요약한 표현이다. 이들 총리는 이른바 ‘PK(Pastor’s Kid)’, 목회자의 자녀로서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영국 언론 ‘가디언’은 “이들 여성 지도자는 모두 교회 성직자들의 딸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보도하고, “루터교 목회자의 아들이었으나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던 니체 같은 ‘반역 사례’도 있지만 목회자 자녀가 정치가일 때는 특별한 무늬가 있다. 세심하며 떠벌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특징을 갖는다. 메이 총리는 이러한 무늬를 비롯해, ‘브렉시트’라는 괴물을 정면으로 맞서 잘 조준된 기도까지 모든 것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메이 총리는 런던 남동쪽 이스트본 석세스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셔 주의 시골 마을인 위틀리에서 자랐다. 부친은 영국성공회의 휴버트 브레시어 목사로, 교구를 담당하면서 이스트본병원의 원목으로 활동했다. 메이 총리는 목회자의 딸로서 대중 앞에 항상 노출돼 있었다. 부친은 엄격한 분위기 속에 신앙교육을 시켰으며 도덕적 나침반으로서 청교도적 신앙을 가르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메이 총리의 지인들은 부친의 신앙적 영향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옥스퍼드대(지리학) 졸업 후 1977년 영국중앙은행, 85년부터 영국지급관리협회에 근무하면서 중산층으로 살았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25세 때인 81년, 부친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고 모친도 이듬해 다발성 경화증으로 사망했다.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없었다. 이러한 고난은 메이 총리를 내적으로 단단하게 만들었고 이전 총리와는 다른 정치가의 면모를 갖게 했다고 영국 언론들은 분석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문제를 놓고 메이 총리와 협상을 벌여야 하는 메르켈 총리의 부친은 루터교회 목회자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다. 함부르크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고향에서 목회하기 위해 옛 동독 브란덴부르크 주의 작은 마을인 템플린으로 이주했다.
카스너 목사는 템플린의 목회자 교육기관인 설교 아카데미 원장으로도 재직했는데, 목사관에는 유명 신학자들의 왕래가 잦았고 다양한 신학서적들이 있었다. 어린 메르켈은 이 같은 환경에서 성장하며 부친으로부터 신앙과 함께 이성적이며 냉철한 면을 많이 물려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메르켈은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기술고교에 진학했고, 라이프치히대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했다. 석박사 학위를 받고 연구원으로 지내다 독일 통일 후엔 기독교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 기독민주당 최초의 여성의장을 맡았고, 헬무트 콜 총리의 총애 속에 여성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을 지낸 뒤 2005년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다.
정치인으로서 메르켈 총리는 자신의 신앙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편이다. 이는 메이 총리도 비슷하다. 그러나 정책 수행에 있어서 둘 다 신중한 실용주의 노선을 구가했다. 이는 기독교적 신앙과 서민적 출신 배경이 빚어낸 경륜 덕일 수 있다. 메이 총리가 최장수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메르켈 총리는 현실주의자이며 검소하고 소탈하다. 공약도 묵묵히 추진하면서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다. 메이 총리는 이민문제와 안보에 대해선 강경한 편이지만, 인신매매 등에 대해선 지속적인 반대 캠페인을 벌여왔다.
메이 총리는 취임연설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소수 특권층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영국을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끄는 정부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함께 더 나은 영국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브렉시트 결정 직후인 지난달 24일 영국성공회 수장들이 주문한 통합의 요청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대한성공회 김근상 주교는 14일 “메이 총리의 신앙이 총리직 수행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라 기대한다”며 “유럽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브렉시트의 대안을 모색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중국 땅에 울려퍼진 찬양 영상…복음의 씨앗이 열매맺길
지난해 유튜브를 뜨겁게 달궜던 중국 어린이들의 오디션 영상이 새삼 SNS 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중국 '후난TV'에서 방영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중국 신성대'에서 이성우(당시 10세) 군과 담지윤(당시 7세) 양이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아직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이군이 먼저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을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자 객석의 관객들은 숨을 죽인 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어 담양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관객석에서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심사위원들은 말을 잊은 채 어린이들의 아름다운 하모니에 빠져들며 감격스러워했다.
현재 이 영상은 유튜브에 공개된 지 8개월 만에 3000만회에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하고 8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며 전 세계인에게 화제가 되고 있다.
영상을 본 크리스천 네티즌들은 "원더풀 원더풀 꼭 들어보세요. 중국땅에. 이 찬양이 울려퍼짐으로 복음의 씨앗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길 기도한다"란 반응을 보이며 꾸준히 공유되고 있다.
=============================================================
나이지리아 女목회자, 마을서 복음 전하다 목 잘린 채 숨져
▲유니스 올라왈리 목사. ⓒ뱅가드
나이지리아의 한 여성 목사가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다 살해당했다고 영국 크리스천투데이가 11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다.
나이지리아 리딤드크리스천교회(Redeemed Christian Church) 소속 목회자인 유니스 올라왈리 목사(41)는 이날 오전 6시경 수도 아부자에서 목이 잘린 채 발견됐다. 발견될 당시 그녀는 자신이 말씀을 전할 때마다 보던 성경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고 한다.
지역 경찰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6명의 용의자를 체포했다고 밝혔다.
그녀의 딸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죄가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다. 다만 확성기를 이용해 성경을 읽고 복음을 전했을 뿐”이라며 슬퍼했다. 또 “살인범들은 마치 닭을 잡듯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곳에 두었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이자 교회 담임인 엘리샤 올라왈리 목사는 “내 아내는 항상 아침 일찍 기도하러 나갔다. 어느 날 기도하고 돌아 온 그녀가 ‘교회 뒤편에 모스크가 생겼다’고 했다. 그곳의 무슬림들은 그녀의 복음 증거에 대해 언급했고, 나는 아내에게 조심하라고 일렀다”고 했다.
그는 “오늘 아침에도 아내는 새벽 5시에 일어났고, 난 여전히 침대에 있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두 아들은 들판으로 나갔다”면서 “아이들이 돌아와서 ‘불량배들이 이른 아침 복음을 전하던 한 여성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에 엘리샤 목사는 두 아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으나, 그의 아내는 이미 죽어 있었고 지역 경찰서로 옮겨졌다고 한다.
나이지리아 경찰은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경찰 대변인은 이번 사건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연루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
교인 수 늘리기 위한 전도는 이제 그만
[인터뷰] CCC 학원사역연구소 윤용호 소장이 말하는 캠퍼스 현실
최유리 기자
[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캠퍼스 안에는 결이 다른 다양한 선교 단체가 공존한다. 이름이 다르듯 주요 관심사와 강점도 다르다. 어떤 단체는 성경, 어떤 단체는 성령 운동, 어떤 단체는 사회문제를 주요 이슈로 삼는다.
<뉴스앤조이>는 급변하는 캠퍼스 환경에서 분투하는 선교 단체를 연속 인터뷰한다. IVF에 이어 캠퍼스·민족·세계 복음화를 모토로 삼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학원사역연구소 윤용호 소장을 만났다.
캠퍼스에서 활동하는 선교 단체 회원 수가 2000년대 들어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추세 속에서, CCC는 다른 선교 단체와는 다르게 회원 수가 유지·증가하는 모양새다. 기사는 윤 소장과 나눈 이야기를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 CCC 학원사역연구소 윤용호 소장을 만나 캠퍼스 현실을 들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 CCC를 소개해 달라.
CCC는 1951년 미국에서 처음 시작했다. 한국에는 1958년에 들어왔다. CCC는 주님의 지상 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존재한다. 캠퍼스 운동으로 시작해 1960년대 말부터는 민족과 세계 복음화에 집중했다. 학생 자발성(SLM·Student Leading Movement)을 중시하고 캠퍼스 전도를 사명으로 여긴다.
- 학원사역연구소 소장이다. 무슨 일을 하는가.
모두 알다시피 대학교에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 학원사역연구소는 변하는 캠퍼스, 학생들 특징, 트렌드를 읽고 전략을 세우는 일을 한다. 주로 설문 조사를 한다. 신입생들에게는 종교에 관한 내용을, C맨(CCC를 하는 학생을 부르는 말 – 기자 주)에게는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팀 안에서 본인의 역할 등을 질문한다. 설문에 참여한 C맨이 질문지를 통해 본인의 약점과 강점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게 돕는다.
- 학생 자발성을 말하지만 간사들의 개입도 많다는 지적이 있다.
경험과 노하우, 역사를 배제하고 현재를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캠퍼스 사역을 오래 한 사람들에게 그런 힘이 있다. 지금까지 그 기반 위에 사역이 세워져 왔다. 기득권 남용을 피하고 학생들과 연계를 이뤄야 한다. 경험과 연륜 있는 사람들의 지혜를 무시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무시하면 양쪽 다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균형 있게 가야 한다.
그래서 학생과 간사가 하나로 팀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 상하 구조를 지양할 일이지만 좋은 팀으로 모이면 역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 대학가 상황이 좋지 않다고들 한다. 신입생 수도 줄고 점차 공대, 특성화 중심 대학으로 변할 거라고 한다. CCC 사역도 영향을 받고 있나.
지난 10년간 전체 인원 지표를 보면 소폭 상승하고 있다. 2014년 이후로는 소폭 감소를 보인다. 2015년에는 메르스도 있었고, 대학 구조조정이나 신입생 감소 등 교육정책이 변하고 있는 것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래도 큰 틀에서 보면 유지 및 상승 곡선을 그린다. 최근 3년 신입생 비율만 보면 '유지'하고 있다. 2015년 전체 수가 1만 2,000명가량 된다. 여름마다 전국 수련회를 진행하는데, 이때 1학년이 수련회 참가자의 약 35%를 차지한다.
변화될 대학 상황을 예측해 보면 이제 대도시, 특히 서울 수도권을 중심으로 재개편될 거라고 생각한다. 캠퍼스 사역 간사들은 이 문제를 연구해야 한다. 변하는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다가갈까 생각한다.
현재 CCC에서 의료·교육·예술·체육계 학생들은 따로 모이고 있다. 각자 자신의 분야를 살릴 수 있는 활동을 한다. 의료봉사를 가거나, MK(선교사 자녀)를 위한 자비량 교육 선교를 나간다. CCC 안에 있는 사역팀과도 만나 디자인 활동을 하는 등 연계 활동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점을 더욱 강화하면 될 것 같다.
그래도 중요한 건 변화 상황에 대처하되 우리가 왜 학생 사역을 하느냐, 우리 사명이 무엇이냐는 분명히 해야 하는 것 같다. 사명을 명확하게 확실히 알 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 CCC는 전도법으로 사영리를 사용한다. 최근에는 사영리를 활용한 사영리 큐브, 사영리 샌드 아트 등으로 전도한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 내국인 자리를 외국인 유학생이 많이 채우고 있다. 특화된 사역이 있나.
외국인 유학생은 꾸준히 늘어날 것이라고 본다. 미국 대학도 학생이 줄면서 적극적으로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했다. 한국 대학도 살아남기 위한 전략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이쪽에 집중할 것 같다.
CCC에는 외국인 유학생팀이 따로 있다. 서울 수도권에 가장 많이 몰려 있다 보니 이곳을 중심으로 주로 모인다. 영어, 중국어를 하는 간사들이 모임을 진행한다. 자료가 필요하면 해외 CCC와 연결해 각 언어로 된 자료를 받을 수 있다.
- 캠퍼스, 외국인 유학생, 전문 사역팀이 많아서 간사가 많이 필요할 것 같다. 간사 현황은 어떤가.
2014년 기준으로 캠퍼스, 선교, 커뮤니티 등에서 간사 1,400여 명이 일하고 있다. CCC 재정 정책은 자비량이다. 간사들이 사역비, 생활비를 후원으로 충당한다. 간사가 될 때 1순위 장애 요소가 재정 문제다. 신입 간사들은 후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취업 준비생인 경우가 많아 이중고를 겪는다.
이 때문에 CCC에서는 마중물 역할로 신입 간사부터 3년 차 간사까지 정착을 돕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챌런지 2020'은 CCC 사역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후원을 받아 2020년까지 매년 간사 100명을 세우자는 프로젝트다. 신입 간사 30만 원, 2년 차 20만 원, 3년 차 10만 원을 제공하고 있다. 재정 문제에 어려움을 겪는 간사들이 후원에 힘쓸 수 있도록 시간을 배려하고, 훈련 코스도 제공한다.
- CCC하면 사영리 전도가 떠오른다. 사영리가 도입된 1970년대와는 많은 게 변했다. 불신자를 전도하는 데 겪는 어려움은 없나.
현재 CCC는 2, 3, 4년제를 포함해 전국 300여 개 대학교에서 활동한다. 내부 조사에 따르면, 26% 정도가 대학에 들어와서 전도, 여름 수련회를 통해 예수를 영접했다고 한다. 일단 불신자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 고민이 된다.
조사해 보면 현재 무종교, 타 종교라고 답한 사람 중에 50%는 교회를 다녀 본 경험이 있다. 복음에 노출되어 있다라기 보다 교회 문화에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거 같다. 자신의 종교를 기독교라고 응답한 경우도 30%는 현재 교회를 안 다니고 있고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만 생각한다. 이런 경우도 새 친구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방법론적으로는 1970년부터 현재까지 사영리를 기본 포맷으로 삼는다. 복음을 소개하기에 사영리만큼 잘 정리된 소책자가 없기 때문이다. 전달 방식은 달라졌다. 예전처럼 (관계없이 노방전도 식으로) 직접적으로 복음을 제시하는 건 어렵다. 사람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전에는 10명 중 4명이 복음을 듣겠다고 했다면, 이제는 1명 정도 관심을 보인다.
불신자들에게 전도에 대한 이미지를 물어 보면 '종교 권유' 정도로 생각한다. 아마 불신자들의 삶에 관심 없이 그저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한 전도를 하니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이런 방식이 반복되다 보니 대학생들이 복음 자체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 전국 여름 수련회에서 신입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을 C맨에게 알리는 학원사역연구소. (사진 제공 윤용호)
-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도 취업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쏟기 어려운, 관태기를 겪는 학생들에게 사영리가 얼마나 어필이 될지는 모르겠다.
동의한다. CCC도 변하는 대학가를 느낀다. 지난번 기사에서 (학생들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설명한 것을 봤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설문 조사를 해 보면, 늘 '관계'가 관심 분야에 링크돼 있다. 취업, 연애, 여행과 함께 톱 10에 든다. 사람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런 학생도 있겠지만, 우리가 만나는 학생들은 관계를 필요로 하고 목말라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점을 고려해 우리는 멤버십을 늘리기 위한 전도를 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려 한다. 사영리를 기본으로 샌드 아트 사영리, 사영리 큐브, 단편영화를 매개로 한 SF(Short Film) 프로젝트, 캠퍼스 내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는 '고민을 들어줍니다' 등 여러 방식으로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고민을 들어줍니다'에서 학생들의 고민을 듣고 내면의 깊은 대화를 나눈다.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대화가 깊어지면 비어 있는 내면을 복음으로 채운다. 이 방식은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이 있다. 복음을 제시하기까지가 힘들지만 제시하면 20~25%는 받아들인다. 20~30년 전에도 비율은 유사했다. 한 불신자 학생은 예수를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들어 주고 관심 가져 주니 고마웠다고 말했다.
- 사회문제는 등지고 전도만 강조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사회참여를 활발히 하는 사람들과 기조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우리가 사회적 아픔에 어떻게 반응할 건가를 생각해 보면, 접근 방식이 다른 거 같다.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주신 계명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여러 방법론에 있을 것이고 그 부분에 강조점이 다르다. CCC 모토가 "한 손에 사랑 한 손에 복음"이다. 한 영혼을 사랑하고 필요와 아픔을 민감하게 반응하려는 마음에서 시작했다면 방법만 다를 뿐이지 그들과 함께 간다고 본다.
- 마지막으로 CCC가 캠퍼스를 넘어 민족 복음화를 생각하면서, 한국교회와 함께 간다는 모토도 있다. 지역 교회와 연계하는 사역은 무엇이 있는가.
관심 갖는 부분이다. 매년 여름 수련회 끝나고 순례 전도를 간다. 도시를 정하면 미리 갈 교회를 컨텍한다. 가서 복음을 전한다. 교회를 정하면 정기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거나 농활을 하는 등 한 손에는 사랑, 한 손에는 복음을 실천하고 있다. 광주에서는 작은 교회 돕기 운동을 한다. 함께하기 원하는 교회의 신청을 받고 한 학기에 한 번씩 전도할 수 있는 학생들을 보낸다. 교회와 같이 전도하면서 지역 교회와의 연합을 하고 있다.
===========================================================
조용기 목사 "오래 참고 기다리니 하나님이 풀어 주셔"
600억 횡령 무혐의에 '사필귀정' 소감…"조그만한 교회였으면 소문도 없었을 것"
▲ 조용기 원로목사가 활짝 웃었다. 600억 횡령 혐의로 고발당한 조 목사는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7월 8일 <국민일보>는 조 목사와 대담을 진행했다. 사진은 11일 자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뉴스앤조이 이용필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는 지난해 10월 특별 선교비 600억 횡령 및 퇴직금 200억 부당 수령 혐의로 고발당했다. 사건을 수사한 서울서부지검은 7월 6일 조 목사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지난 3월 서울지방국세청까지 나서서 조사했지만, 범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이번 고발과 관련해 조용기 목사가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심경을 밝혔다. 7월 11일 자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26면에 활짝 웃는 조 목사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조 목사는 "사필귀정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과거를 드러나게 하시니 마음이 굉장히 가볍고 기쁘다. 나는 결코 물질적으로 교회에 손해 끼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십일조와 헌금을 교회에 드려 왔다"고 말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조 목사가 1991부터 2012년까지 200억 원 넘게 헌금했다고 밝힌 바 있다.
교회 돈을 횡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 목사는 마음이 굉장히 답답했다고 했다.
"이번에 그 모든 것이 확실히 드러나 내가 헛되게 살지 않았음을 확인받는 것 같아 기쁘기 한량없다. 내가 고발당하니까 사람들은 조용기가 아니라 기독교가 썩었다고 한다. 조그마한 교회를 맡았으면 이름도 없고, 소문도 없었을 텐데 우리 교회가 크고 예수님의 영광을 걸머지고 있어서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기독교계가 갈등을 치유하고 화합을 이뤄 발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
논란이 된 특별 선교비 증빙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조 목사는 제자 목사들과 소외 계층 등을 도와주면서 일일이 회계장부에 적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대부분 개인적으로 메모를 해 놓았다고 했다.
조 목사를 고발한 주체는 여의도순복음교회장로기도모임(장로기도모임)이다. 장로기도모임은 2011년 조 목사를 배임‧탈세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조 목사가 아들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이 소유한 회사 주식을 사들이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100억 원대 손실을 입혔다고 주장했다. 조 목사는 이 건과 관련해 1‧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조 목사는 자신을 고발한 장로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사람들이 나를 고발한 장로들의 말만 믿고 내 인생을 누더기로 취급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기도했다. 나를 미워하는 장로들과 사람들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고,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렸다. (중략) 이번에 검찰에서 나에 대한 의혹들이 혐의가 없다고 나와 마음이 가볍다. 오래 참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풀어 주신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조 목사는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사명을 주셨기에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 사명을 완수한다는 생각으로 달려왔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장로기도모임 "항고 예정"…조용기 목사 측 "징계 추진"
▲ 횡령 사건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조 목사를 고발한 장로들은 항고 의지를 밝혔다. 검찰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반면 조 목사 측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고발 장로들을 징계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장로기도모임은 항고 의사를 밝혔다. 모임 소속 한 장로는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명백한 부실 수사다. 조 목사를 불러 조사하지도 않고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항고해 진실을 밝혀 낼 것"이라고 말했다.
조용기 목사 측도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조 목사 측은 "검찰 수사로 진실이 드러났다. (장로기도모임) 관련자들 징계를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
지금은 정말 교회를 떠나야 할 때
천대받는 이들이 사람대접받는 교회를 고대하며
최태선 tschoi45@hanmail.net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전도사로 일하던 교회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입니다.
주일이면 찾아오는 걸인분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런 분들에게 오백 원짜리 동전을 하나씩 주었습니다. 그 사실이 소문 나자 점점 더 많은 걸인분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많아지자 교인들은 그분들을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돈을 주는 일은 당시 전도사인 제 몫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동전을 주는 일이 제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천 원짜리 지폐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뒤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도 오백 원을 주시는데 전도사가 천 원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전도사가 좀 잘 산다고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말까지 들려왔습니다. 저는 늦게 신학교를 갔고, 당시 저는 분당에서 48평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늘 마음에 찔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그분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천 원짜리 한 장 드리면서 대화를 나누자는 것이 마음 상하지 않으시다면 여기 앉으셔서 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까요?" 그렇게 그분들과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천 원짜리 한 장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구걸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구걸을 하더라도 한 달에 한 번만 오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점점 더 많은 걸인분들이 찾아오자 교회 사모님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구걸하러 오시는 분들이 예배에 참석해야 돈도 드리고 식사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돈을 주지 않게 되자 한동안 걸인분들의 발걸음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걸인분들 가운데 한 분이 정말로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늘 그렇듯이 예배를 준비하던 저는 그분을 교회 중앙에 앉으시도록 안내하였습니다.
기다리던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 시간이 되어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가운데 앉아 있는 그분의 몸에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대부분의 교인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악취가 풍겨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창문을 열었지만 모든 교인들이 고개를 창쪽으로 돌려야 했습니다. 그날 예배는 가장 긴 예배가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식사 시간이 되었지만 아무도 식사를 하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에게 식사를 가져다 드리자 그분은 혼자 말없이 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받아들고 교회를 나갔습니다. 조용했던 교회가 그제야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교인들은 그분이 앉았던 곳들을 매우 여러 번 걸레로 닦고 그분이 사용했던 식기들을 평소보다 공을 들여 세척하였습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을 환기를 한 후에야 교인들이 식사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날의 식사는 가장 꺼림칙한 식사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모님의 묘책은 그렇게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결코 걸인분들을 예배에 초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나타나기 무섭게 오백 원짜리 동전을 서둘러 전달하고 그분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래도 그런 분들과 대화나누기를 시도했던 저 자신에 대해 조금은 우쭐한 마음을 지닌 채 오랜 시간을 살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득실대는 교회"
그런데 어느 날 다시 그 사건이 떠오르며 아무런 역할도 못한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죄를 깨닫고 보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은혜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제가 바로 가장 큰 죄인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했던 걸인분을 돕고, 아직 그런 분들을 맞을 준비가 되지 못했던 교인들을 보호해야 할 적임자는 바로 저였습니다.
그분을 모시고 나가 샤워를 하게하고 옷을 갈아입혀야 했습니다. 전도사는 나서서 그런 일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해야 했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속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귀찮아 예배에 참석해야 돈을 주고, 식사를 제공하겠다는 말을 한 사모님과 고개를 모로 돌리던 교인들을 빈정대기까지 하였습니다. 죄인과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바로 그런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만일 그때 제가 그분을 모시고 나가 샤워를 하게 하고 옷을 갈아입힌 후에 그분을 모시고 왔다면 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그분이 다음 주에도 예배에 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그렇게 했다면 또 다시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전도사가 주제넘은 짓을 하며 혼자 잘난 척 한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교회가 그분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천대받는 무리들이 사람대접을 분에 넘치게 받아 누리는 곳이 교회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누구나 하는 생각이지만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난한 사람이 득실거리는 교회를 다니고 싶어 하는 교인들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 교인,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오면 기뻐하고, 동네방네 자랑을 해대지만 가난한 교인이 왔다고 좋아라 하는 교회는 본적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감추어진 재능이 발휘되고, 그런 사람들이 교회 때문에 삶의 의미를 되찾은 경우도 본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남편과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겨 힘들게 살아가는 미망인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소원은 돈을 많이 벌어 남부럽지 않게 헌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 말에 '떵떵거리며'라는 수식어를 달았습니다. 그 교회는 주보에 헌금한 사람의 이름이 실리는데 그 순서가 헌금액수 많은 순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헌금을 할 때 십만 원을 하지 않고 십만 천 원을 합니다. 자기 이름이 앞에 나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십만 원을 헌금 한 다른 사람은 자신보다 앞에 나온 사람이 한 이십만 원쯤 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런 일이 그 교회 안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성직자들에게 권력을 위탁한 신자들"
오늘날 교회처럼 서열이 분명한 곳도 없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와 안수집사, 그냥 집사,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형제와 자매까지. 며칠 전에도 어떤 남자분이 주일마다 설거지를 도맡아한다는 말을 듣고 즉각적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룩한 장로님이 되시려는 것이겠지요.
추운 날 눈에 띠는 곳에서 차량안내를 도맡아 하는 일도, 가장 늦게 뒷정리를 하는 것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담임목사의 눈도장을 받으려는 '호시탐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현실의 문제점을 보는 이들이 없습니다. 그러려니 하며 경쟁에 참여하는 이들은 많아도, 그런 현실이 복음으로부터 동떨어진 잘못된 모습임을 자각하고 지적하는 이들은 보기 어렵습니다. 대세가 기울었습니다. 만일 누군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이의를 제기한 그 사람만 그 교회에서 잘려나가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어떤 분의 글에서 이런 대화내용을 보았습니다.
"형, 요즘 같은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젊은 날 내내 교회 안에서 일해 왔던 선배의 대답이다.
"그건 교회를 떠나는 것이지."
무 자르듯 던져진 말에 당황한 나는 다시 물었다.
"그건 왜죠?"
"지금, 교회는 권력이기 때문이지. 예수는 권력과 아무 상관없거든."
"그건 성직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게 아닌가요? 우리 평신도들도 그렇다는 건가요?"
"당연하지. 신자들은 단지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위탁했을 뿐이야."
선배의 대답에 수긍이 됩니다. 지금은 정말 교회를 떠나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무작정 떠나는 것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떠나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권력이 되었다는 선배의 말은 사실 그리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폭력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권력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약육강식은 단순히 정글의 법칙이 아닙니다. 인간 사회는 정글보다 더 엄격하고, 더 처절한 권력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권력과 아무 상관없는 분이 아니라 그러한 권력의 실체를 드러내고 무력화시키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교회가 그분의 몸이 분명하다면 권력은 교회에 발붙일 자리가 없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부자가 대접을 받고, 세상에서 성공한 사회적인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인정을 받는 것은 교회가 권력이 되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부자들도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자와 성공한 사람들은 결정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일도 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와 성공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천대받는 무리들이 사람대접을 분에 넘치게 받아 누리는 곳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회가 권력이 되었기 때문에 부자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주도하고, 결과적으로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권력화 된 것은 권력을 당연시하고 권력을 추구하고 뒷받침하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진지하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그리스도인들은 따라서 권력이 된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기존의 교회를 떠나 자신이 권력지향적인 존재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따라 사랑으로 힘과 권력을 무력화시키는 길을 걷는 사람들이 모여 성령공동체를 이룬다면 틀림없이 그곳에서는 세상에서 천대받는 무리들이 분에 넘치는 사람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개인의 깨달음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 훨씬 더 어려운 것은 그렇게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권력이 된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다시금 모여 교회를 이루지 않는다면 그들은 단지 사단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오늘날 '가나안 성도'들의 출현은 귀중한 영적인 흐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성도들이 모여 권력이 발붙이지 못하는 예수공동체, 성령공동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천대받는 무리들이 사람대접을 분에 넘치게 받아 누리는 교회를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가나안 성도들 앞에 더 어려운 선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냄새나는 걸인분들도, 천대받는 무리들도 분에 넘치는 사람대접을 받는 진정한 교회를 정말 보고 싶습니다.
=======================================================
논란 많은 영화 '아가씨', 우리는 이렇게 봤다
교회 언니들이 본 수위 높은 섹스 신, 동성애·여성주의 묘사
이은혜 기자
이 기사에는 영화 '아가씨'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특정 장면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성적인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적인 묘사가 불편하신 분들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주세요. - 기자 주
▲ 영화 '아가씨'에는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왼쪽부터 백작(하정우), 숙희(김태리), 히데코(김민희), 이모부(조진웅)이다. 백작은 귀족 가문 아가씨 히데코와 결혼해 그의 재산을 가로챌 계획을 세운다. ⓒCJ E&M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아가씨'가 관객 400만 명을 돌파했다. '곡성'만큼은 아니지만 해외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만으로도 많은 영화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네이버에 소개된 아가씨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후견인 이모부(조진웅)의 엄격한 보호 아래 살아가는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그녀에게 백작(하정우)이 추천한 새로운 하녀 숙희(김태리)가 찾아온다. 매일 이모부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의 전부인 외로운 아가씨는 순박해 보이는 하녀에게 조금씩 의지하기 시작한다.
간략한 줄거리만으로는 영화 '아가씨'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다. 영화에서 히데코와 숙희는 사랑에 빠진다. 어린시절부터 자신을 억압하고 많은 남성들 앞에서 야한 소설을 낭독하는 성 노리개로 삼았던 이모부, 자신과 결혼해 재산을 가로채려는 가짜 백작 사이에서 히데코 아가씨는 숙희를 만나 자신을 발견하고 주체적으로 성장한다.
억압된 삶을 살던 여성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자신에 대해 눈을 뜨는 영화. '동성애 코드'가 포함돼 있다. 두 여성의 정사 장면이 적나라하게 등장하는 등 수위도 높다. 그런데 한국 교계는 이상하리만큼 반응이 없다. 과거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나 '커피 프린스'에 보였던 반응에 비하면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평범한 30대 여성, 게다가 모태 신앙 기독교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6월 30일 명동 롯데시네마에서 노랑조아, 프시(SNS 활동명)를 만나 영화 '아가씨'를 봤다. 노랑조아는 기독교 단체 간사로 일하다 현재 한 신학대학교를 다니고 있다. 프시는 목회자 자녀로 심리학을 전공하고 대학교에서 인지과학을 연구 중이다.
▲ 프시(왼쪽)과 노랑조아가 만나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눴다. 꾹꾹 억눌렸던 두 여성이 들판을 달리면서 해방감을 느끼는 장면, 남성 중심적으로 묘사됐다는 평을 받고 있는 수위 높은 섹스 신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영화를 본 후 조용한 카페로 옮겨 영화 이야기로 수다 꽃을 피웠다. 특히 논란 많은 장면인 히데코와 숙희의 섹스 신,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 '동성애 코드'가 담긴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을 가감 없이 나눴다.
아가씨... 어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타고나셨나 봐요...
프시 / 섹스 신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영화 보기 전에 두 사람의 섹스 신이 남성 시선으로 묘사된다는 지적을 읽었다. 나는 영화를 두 번 봤는데 처음 봤을 때는 그 장면에서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장면은 굉장히 야한데 역설적으로 아무 느낌이 없었다. 왜 그랬는지 처음 봤을 때는 몰랐는데 두 번 보니까 왜 이걸 남성이 엿보는 듯한, 관음적인 시선이라고 하는지 알겠더라. 두 사람의 감정선은 빠져 있고 미적인 부분, 시각적인 부분, 대칭만 신경을 쓴 것 같다. 박찬욱 감독이 변태처럼 대칭을 묘사하는데 굉장히 신경 썼다. 마지막 섹스 신도 굉장히 대칭적이고 두 사람이 섹스하는 장면도 사실 다 대칭이다. 시각적 미에 신경을 많이 썼더라.
노랑조아 / 나는 그 장면들이 좀 억지로 만든 것처럼 느껴졌다. 꼭 감독이 "이것 봐. 예쁘지? 예쁘지. 이게 얼마나 예쁘냐. 이렇게 몸매 좋은 두 여자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데 너도 와서 봐라" 이런 걸 강요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내 눈에도 두 사람이 참 아름다웠다. 풍경도 너무 아름답고 좋았다.
두 여성이 사랑에 빠지는 또 다른 영화 '캐롤'에도 섹스 신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좀 절제된 느낌으로 표현된다. 섹스는 서로 감정을 나누고 사랑한다는 걸 표현하고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들의 몸을 전체 앵글에 담지 않고 윗부분만 잡아 주거나, 화면을 흐리게 하는 방식으로. 절제된 표현이 들어가도 "아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구나"라고 느낄 수 있었는데 여기는 그게 아니라 멀찌감치 서서 "살아 숨쉬는 이 육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프시 / 맞다. 두 번 보니까 섹스 신에서 서로의 감정선이 쏙 빠져 있어 별로 야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 같다.
노랑조아 / 마지막 섹스 신은 정말 남성의 시각으로 묘사한 것 같다. 히데코가 남녀의 성관계를 묘사하는 부분을 낭독할 때는 굉장히 차분하다. 다른 낭독에서는 굉장히 차분한데 유독 여성끼리 성관계를 묘사하는 부분 즉 방울 소리 나는 부분을 읽을 때 혼자 흥분하는 게 보였다. 심지어 정전이 돼서 글이 보이지 않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불이 켜진 후 얼굴이 빨개지고 식은땀을 닦는 모습은 낭독하면서 정말 숙희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날 밤에 아가씨가 숙희를 유혹했다. 책 내용에 나오는 것들을 두 여성이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장면을 굉장히 관음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불편했다. 여성주의 영화였으면 앵글을 그렇게 안 했을 것 같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은유적이고 절제된 앵글로 담았으면 훨씬 더 자극적이지 않았을까.
프시 / 마지막 섹스 신에서 두 여성이 정물처럼 느껴졌다. 해방감을 맛본 여성들이 마지막에 다시 정물이 됐다.
노랑조아 / 두 사람이 사랑하고 잔디밭을 뛰어가면서 해방감을 느꼈는데 다시 마지막 섹스 신으로 정물이 됐다. 남성 시선 안에서 남성을 만족시키는 섹스를 하는, 이건 남성을 위한 섹스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 히데코와 숙희는 이 장면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다. 히데코는 분명 자신과 사랑을 나눴음에도 '백작님과 결혼하게 되실 것'이라고 말하는 숙희에게 배신감을 느껴 뺨을 때리고 방에서 내쫓는다. 이후 자살을 결심하고 밧줄을 가지고 마당에 나가 나무에 목을 맨다. ⓒCJ E&M
그동안 이런 책을 읽었던 거예요?
프시 / 섹스 신은 마음에 안 들었는데 전체적으로 해방감을 느끼는 장면도 많았다. 숙희와 히데코 두 여성은 완전 다른 캐릭터다. 히데코는 오랫동안 남성에게 훈육돼 무기력하고 나른하다. 성 노리개로 자라 왔기 때문에 행동 반경도 좁고 굉장히 절제돼 있다. 반면 숙희는 야생적이고 강하고 직설적이다. 대비되는 둘의 캐릭터가 오히려 합을 좋게 만든 것 같다.
나는 서책을 찢는 장면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히데코는 숙희가 울부짖으면서 책을 찢는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후 들판으로 뛰어가는 장면이 나오기 전, 히데코는 낮은 담벼락인데도 넘지 못한다. 숙희가 가방을 포개서 발판을 만들어 준 후에야 그 낮은 담벼락을 넘는다.
숙희라는 캐릭터가 히데코의 성장과 해방을 대리만족시켜 주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자기가 느끼고 싶었던 걸 숙희가 대신 실현시켜 주면서 주체성을 조금씩 찾아가게 하는 히데코 성장 영화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들어서 서책 찢는 장면은 정말 좋았다. 사실 이 영화가 여성주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장면만큼은 여성주의적이라고 생각했다.
노랑조아 / 여성주의라기 보다는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여성주의 '풍'이 아닐까. 나도 책 찢는 장면에서 정말 해방감을 느꼈다. 숙희가 울분에 차서 "여태까지 이런 것 읽었던 거야" 이러니까 히데코가 눈물을 또르륵 흘린다. 그 모습을 본 숙희는 열 받아 온갖 욕을 하며 이모부가 보물처럼 여기는 야한 소설을 찢는다.
나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히데코는 이모부가 시키는 대로 서책을 읽어야만 하는 노리개가 된 여성이다. 이모부의 원래 부인 사사키도 각본을 위해서 삶을 농락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어마어마한 세계를 숙희가 진짜 분노에 차서 찢어발기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서화에 잉크를 뿌리고 발로 밟고 이러는 장면은 이전으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그 장면이 제일 후련했다.
▲ 프시는 학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현재 인지과학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숙희가 서책을 찢는 장면을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로 꼽았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프시 / 이 영화를 여성주의로 봐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순간순간 여성주의가 담긴 장면이 있다고 생각하긴 한다. 초야(첫날밤) 장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초야 때 히데코가 백작과 잠자리를 거부하고 자위를 한다. 하기 전에 은장도를 뽑는다. 한국 전통문화에서 은장도는 순결의 상징이다. 그 순결이 숙희를 위한 순결 상징이었다.
영화를 두 번째 보니까 은장도를 뺀 다음에 이불 안으로 집어넣더라. 그걸로 자위를 한 게 아닐까 하고 상상했다. 영화에서 구슬이 처음에는 훈육과 억압의 상징이었는데 나중에는 쾌락의 도구로 쓰인다. 이것처럼 은장도로 남성 없이도 충분히 쾌락을 느낄 수 있다는 주체성이 엿보여서 좋았다.
히데코가 혼자 자위하는 장면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쾌락을 득하는 장면처럼 느껴져서. 그런데 백작은 그 장면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 그동안 남자들이 히데코를 지켜볼 때는 히데코가 낭독회에서 성 노리개로 활용당하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히데코는 시키는 대로만 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처음으로 주체적으로 쾌락을 느끼는 모습을 지켜봤다. 절정에 이르고 나서 다시 절도 있게 기모노를 입고 칼을 탁 닫았던 장면이 되게 멋있었다.
노랑조아 / 그 모든 장면이 내가 즐겁기 위해 너는 딱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사회에서 가장 큰 편견 중 하나가 여성은 남성이 있어야만 혹은 남성에게 사랑받아야만 즐거울 수 있고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걸 깨는 장면이어서 정말 좋았다.
프시 / 백작 즉 남성은 어떻게 보면 병풍처럼 하는 일 없이 앉아서 히데코를 지켜본다. 히데코가 백작 없이도 절정에 이를 수 있고, 숙희와 달아나기 위해 연극을 하려고 손을 스스로 베어 피까지 낼 수도 있다는 점이 히데코가 그만큼 주체적으로 변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 백작은 히데코를 꼬셔 결혼할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그는 히데코에게 자유를 주고 그 댓가로 히데코가 상속받는 재산 일부를 나눠 갖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CJ E&M
네 이놈! 히데코는 내 아내야
노랑조아 / 감독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남자들은 다 뭘 잘 모르는 소위 '찌질이'로 그려진다. 여성에 대해 잘 모르는데 아는 척하고. 시종일관 찌질하고 못나고 멍청하게 그려진다. 물론 백작이 히데코를 꼬실 수 없겠다고 판단한 후 작전을 바꾸는 건 기민했다. 영화 속 두 남성에게 '이 여성의 내면을 어떻게 내가 가질 수 있을까' 혹은 '이 사람을 어떻게 배려해야 하나' 같은 질문은 없다.
"여자들은 억지로 할 때 희열을 느낀다"고 한 백작의 대사가 충격적이었다. 실제로 남자들은 억지로 성관계할 때 여자들이 즐거워한다고 믿는 건가? (프시 / 그런 판타지가 있다더라)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다. 마지막에 백작이 이모부의 지하실로 끌려가서 손가락이 잘리고 고문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조금 불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프시 / 난 그래서 더 좋았다. 고통스러워 하는 두 남자와 행복한 두 여자를 계속 대비시켜 보여 주지 않나. 손가락이 다 잘리고 죽어 가면서도 백작이 "그래도...자지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성기에 집착하는 것을 알려 주면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 와중에 이모부는 계속 백작과 히데코의 첫날밤이 어땠는지 자세하게 변태적으로 물어본다. 중간중간에 여성들은 자유분방하게 섹스하면서 행복하게 보내는 장면을 편집했다. 그 자체로 재밌었고 또 다른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일부러 장면을 그렇게 배치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 중에는 이 영화가 원작 소설을 각색하면서 원작과 다르게 남자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는 의견이 있더라.
노랑조아 / 나도 이걸 줄여야 한다면 마지막 두 남자의 지하실 신을 들어내면 좋겠다. 이모부가 백작에게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 끝냈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남성들의 변태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 대신 여성들이 얼마나 더 행복해지는지 다루면 좋지 않았을까.
▲ 이모부는 히데코에게 변태적인 내용이 담긴 소설을 낭독하게 했다. 히데코는 여러 귀족 앞에서 이모부가 소중하게 모은 서책을 한 권씩 낭독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숙희는 분노하며 모든 서책을 찢어 버린다. ⓒCJ E&M
뱀! 뱀! 뱀은 무지의 경계선이다
프시 / 영화에서 여러가지 상징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낭독회하는 장소까지 걸어 들어가는 긴 복도 바로 앞에 뱀 동상이 있다. 남자 성기 상징하는 거 아니겠나. 이모부와 히데코가 낭독을 연습하고 있는데 숙희가 낭독회 장소로 들어오려 하니 "뱀! 뱀! 뱀은 무지의 경계다"라고 외친다. 무지가 뭘까 생각하고 넘겼는데 이건 내 의견이다.
많은 남성은 여성들이 그냥 모르길 바란다. 성적으로도 그렇고 무지하고 수동적으로 내 말 듣고, 내가 모든 걸 리드하고 훈계하길 바라는 경향이 있지 않나. 그런 무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두 번째 볼 때 든 생각인데 그게 남성 성기 모양과 비슷한데 숙희가 칼로 확 잘라 버린다. 그런 상징도 깨알같이 재밌는 상징 아닌가.
노랑조아 / 나는 또 다른 상징에 대해 말하고 싶다. 3부에서 히데코와 숙희가 백작을 속이고 배를 타고 상해로 떠난다. 배 위에서 둘이 바라보고 행복해 하는 신이 있다. 거기 보면 히데코의 결혼 반지를 끼고 있던 장갑에 끼워서 버린다.
장갑은 영화 처음부터 등장했다. 히데코는 늘 장갑을 끼고 있었다. 바꿔 가면서 장갑을 끼거나. 숙희와 밤을 보내거나 백작과 초야를 치루는 척할 때만 잠깐 벗지 웬만해서는 벗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내 모습 그대로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 아니었을까.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은 진정한 히데코의 삶이 아니었고 강압에 의한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아가씨 처음 보고 리뷰를 찾아봤는데 누가 여성 동성애자는 손을 보호하는 게 중요하다고 썼더라. 누가 막 손 잡거나 키스하는 것도 싫어하고. 나는 모르는 영역이긴 한데, 어쨌든 영화에서 손이라는 게 내면적이고 마음이 담긴 것으로 나온다. 저택을 떠나 도망쳐 배를 타고 갈 때 카메라는 노 젓는 백작을 계속 아웃포커스로 잡고 숙희와 히데코가 깍지 낀 손을 클로즈업한다. 보통 우리 문화에서 연인들이나 깍지를 끼지 않나. 손이 마음을 내포한다. 배 위에서 장갑에 반지를 끼워 바다로 던지고 난 후에는 계속 맨손으로 간다. 그게 변화를 상징하는 거 아닌가.
▲ 노랑조아는 과거 기독교 선교 단체에서 간사로 일했다. 지금은 신학대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다. 노랑조아는 '아가씨'를 세 번 보고 대화에 임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퀴어 영화를 퀴어 영화라 부르지 못하고...
노랑조아 / 어느 웹진은 '아가씨'를 레즈비언 영화라 부르지 않는 점을 지적했다. 나는 굳이 퀴어 영화라는 이름을 붙여야 하나 생각한다. 분명 퀴어 요소가 있긴 하지만 그렇게 억압받는 상황 안에서 상대를 괴롭히지 않는 사람끼리 사랑이 싹트고, 연애하고, 사랑하고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 같다. 여성들끼리 돌봐 주면서 사는 것. 그래서 거부감이 좀 덜하지 않았을까.
프시 / 나는 여성과 여성의 사랑을 지우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오류와 같은 종류인 것 같다. 그냥 퀴어들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굳이 사람과 사람이라고 희석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노랑조아 / 맞다. 퀴어 영화라고 하는데 별 이의 없다. 숙희가 여자라서 좋은 게 아니라 숙희여서 좋아한 거니까.
프시 / 히데코와 숙희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영화들에서는 일부러 동성애 요소를 지우거나 희석시키는 노력이 있는 것 같다.
노랑조아 / 이 영화는 드라마 '커피 프린스' 같은 것과는 좀 다르다. 공유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성인 줄 모르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안 받아들이려고 하다가 결국 받아들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에는 그런 게 없다. 그냥 두 사람이 마음을 나누고 가까워지고 그런 부분이 묘사가 잘 돼 있다. '내가 왜 여성을 좋아하지?' 이런 고민이 없다. 히데코가 자신은 숙희를 사랑하고 숙희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숙희가 백작과 결혼하라고 하니까 숙희 뺨을 막 친다.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런 감정을 담아서. 분명 애정 싸움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인데 물 흐르듯 넘어가니까 그냥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보였다.
프시 / <핑거스미스>라는 소설 자체가 레즈비언 소설의 바이블이라고 하더라. 흐름이 자연스러운 건 당연하다.
노랑조아 / 히데코와 숙희가 '왜 여성을 사랑하지' 고민하지 않는 부분이 좋았다.
프시 / 아까도 얘기했지만 두 사람의 섹스가 동성애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동성애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섹스 신 자체에 드러나는 감정선이 별로 없어서였다. 동성을 사랑하는 두 여성의 사랑 같지 않았고. 좀 불필요해 보였는데 함께 본 레즈비언 지인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냥 장면 그대로 너무 좋았다고. 그 친구가 보기에 히데코와 숙희의 정사 장면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이건 레즈비언이라 해도 사람마다 의견이 갈리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갈리는 것처럼.
▲ 영화 '아가씨'는 총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숙희 시점, 2부는 아가씨 시점, 3부는 모든 비밀이 드러나고 두 사람의 시점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원작 소설 <핑거스미스>와 가장 다른 것도 3부 내용이다. ⓒCJ E&M
동성끼리 아주 수위 높은 섹스 장면이 나오는데 기독교는 조용하다
프시 / 남성과 남성이었으면 반발이 심했을 것 같다. 반동성애 진영에서 레즈비언은 대상으로 치지도 않으니까. 물론 영화에서 사람과 사람의 사랑으로 보이는 것도 있지만 만약 주인공이 남남 커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조용했을까 싶다. 남성 성기가 없었다는 것 자체가 별 도움이 안 된 것 같다. 그냥 남성들이 자주 보는 야한 동영상 느낌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노랑조아 / 난 사실 영화에서 남성들끼리 섹스 장면이 나오면 아직도 많이 불편하다. 못 보겠더라. 여성이 벗은 몸은 익숙하고 많이 나오는데. 남성은 대상화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 같다.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