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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광장 퀴어축제 허가 시, 시장 퇴진운동 전개하겠다/ 죽음 앞둔 아버지 병상 앞 결혼식 '감동'
    2016-03-18 11:52:56   read : 128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난해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모습.

    “서울광장 퀴어축제 허가 시, 시장 퇴진운동 전개하겠다”

    바성연, 동성애 단체들에 장소 사용 불허할 것 촉구

    바른성문화를위한국민연합(대표 안용운 목사, 이하 바성연)은 17일 '서울시는 17회 동성애 퀴어축제 장소 사용을 허락하지 말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바성연은 "동성애 단체들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서울시청 앞에서 동성애 퀴어축제를 위한 장소 사용 허락을 서울시에 신청한 것으로 알려진다"며 "동성애 단체들은 지난해에도 메르스로 온 국민이 떨면서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음에도, 외국 대사들까지 초청하여 동성애 행사를 강행한 바 있다"고 언급했다.

    이들은 "동성애가 그들의 말대로 '성소수자'라면 그대로 '성소수자'로 살면 되지, 굳이 대한민국의 수도요 수도 서울의 상징적 건물인 시청 앞에서 동성애 축제와 퍼레이드를 하겠다는 것이 온당한가"라며 "어느 나라도 퀴어축제를 자기들 수도와 시청광장에서 허용한 사례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바성연은 "재작년과 작년, 서울 신촌과 서울시청 앞에서 강행한 동성애 퀴어축제는 많은 국민들이 우려하던 대로 '알몸 과다 노출'과 '알몸 퍼레이드'였는데, 이런 행위에 대하여 검찰에서는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규정한다"며 "이런 행사를 서울시가 다시 허락한다면 이는 시민과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서와 양식에 반하는 것이고, 그 책임은 박원순 시장과 관계자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들은 △서울시는 전 국민의 79%가 '정상적 사랑으로 보지 않는' 동성애 퀴어축제 장소 사용을 허락하지 말라 △서울시 스스로 만든 서울시청 광장 관련 조례를 어기지 말라 △동성애 확산은 결국 시민들이 낸 세금에서 대가가 지불되므로 피해를 자초하지 말라 등을 주장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에이즈 환자의 치료비 100%를 국민들의 세금에서 지원, 결국 동성애와 에이즈로 인한 피해는 국민들의 지갑에서 모두 지불해야 하는 고약한 일이 된다"며 "사정이 이러한데도 동성애 퀴어축제를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서울광장에서 허락한다면, 궁극적으로 청소년들과 국민들을 동성애로 유도하는 국민 배반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서울시는 올해 동성애 퀴어축제를 서울광장뿐 아니라 서울시내 어떤 곳에서도 개최하지 못하도록 조치해야 한다"며 "성은 그야말로 개인의 사생활인 동시에, 밖으로 노출시켜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없는 사안 아닌가"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바성연은 "박원순 서울시장님과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허재완 위원장, 김숙경 부위원장, 박신의, 조숙현, 강희영, 김전승, 이현찬, 김인호, 강태웅 위원)는 '서울광장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에 따라 올바르고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시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이와 함께 "동성애 퀴어축제의 서울시청 광장 개최를 강행할 경우, 박원순 시장 퇴진운동과 관계자 문책 등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성명서 발표에는 바성연 외 68개 단체가 동참했다.



    퀴어문화축제 동성애

    ▲2014년 서울 신촌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당시 반나체로 거리를 활보하던 이들의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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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광장, 동성애 축제의 성지로 전락하나

    퀴어축제 측, 올해 6월 사용 신청… 한동위, 불허 요청 및 시장 면담 추진

    동성애 축제가 올해도 서울광장에서 개최 추진돼 우려를 낳고 있다.

    제17회 퀴어문화축제 측이 지난 10일 서울시에 오는 6월 8~11일 서울광장 사용 신청서를 제출함에 따라, 한국교회동성애대책위원회(이하 한동위)는 15일 긴급회의를 열고 서울시장 앞으로 서울광장 사용 불허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한동위는 아울러 서울시장 면담도 신청했다.

    한동위는 "퀴어문화축제 측은 지난해 6월에 이어 올해 6월에도 축제와 퍼레이드를 서울광장에서 진행, 서울광장을 아시아 퀴어문화축제 센터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제17회 퀴어문화축제 측은 오는 6월 8일(수)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퀴어축제 개막식을 진행하고, 6월 9일(목)에서 10일(금)까지 이틀간 오전 9시~오후 8시 동성애에 관한 예술작가 사진전을 연다. 또 6월 11일(토)에는 오전 9시~오후 7시 본행사에 이어 퍼레이드도 진행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한동위는 박원순 서울시장 앞으로 발송한 긴급 공문을 통해 지난해 퀴어축제의 폐해와 심각성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이는 서울광장 사용 조례에 전적으로 위배됨을 강조했다. 아울러 근거 자료를 제출하고,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하도록 요청했다.

    한동위는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면담이 성사되면 상세한 문제들을 제기해, 서울광장 사용 신청을 반려하도록 부탁할 예정이다.



    올해 6월 퀴어문화축제에 반대하기 위해 서울광장에 운집했던 교인들.

    ▲지난해 6월 퀴어문화축제에 반대하기 위해 서울광장에 운집했던 교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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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앞둔 아버지 병상 앞 결혼식 '감동'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병상 앞에서 결혼식을 올린 한 미국 여성의 사연이 감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여성은 아버지가 자신의 결혼식을 놓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 아버지는 결혼식 이틀 후 편안히 눈을 감았다.

    10일(현지시간) 지역매체 WHO-TV에 따르면 아이오와주에 사는 닉칼레나 베드웰은 지난 7일 아버지 톰이 투병 중인 병실에서 약혼자와 평생가약을 맺었다.

    닉칼레나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남편 톰은 그녀와 오는 6월 화촉을 밝힐 계획이었지만 결혼식을 조금 앞당기기로 했다. 닉칼레나의 아버지를 위해서다.

    닉칼레나의 아버지는 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오랫 동안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견뎠다. 하지만 건강은 호전되지 않았고 가족들은 이제 그를 놓아줄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남달랐던 닉칼레나는 아버지 없이 치르는 결혼식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나는 아빠의 사랑스러운 딸"이라며 "그래서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말했다.

    닉칼레나와 톰은 결국 가족들과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병상 옆에에 결혼 반지를 교환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닉칼레나는 결혼식장 대신 병원 복도를 따라 '특별한' 식장에 입장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아버지 앞에서 톰과 평생 사랑하며 살겠다고 맹세했다. 병실 밖에서 간소하게 부케를 던지는 일도 빼먹지 않았다.

    화려한 장식도 많은 하객도 없었지만 결혼식은 완벽했다. 참석자들은 간단한 음료수를 마련해 함께 건배하며 부부의 행복을 빌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닉칼레나와 함께 있었다.

    남편 톰은 "슬픈 상황이지만 분명 행복한 순간이었다"며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울음소리나 슬픔이 모두 사라진 날이었다"고 회고했다.

    닉칼레아는 결혼식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행사였다며 "삶을 축하하고, 사랑을 축하하고, 아버지의 존재를 축하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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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에 교회 앞에서 전도지 살포…기재된 홈피 주소는 ‘신천지’



    ▲신천지로 추정되는 이들이 나눠 준 ‘전도지’. ⓒ독자 제공

    최근 신천지 신도로 보이는 사람들이 주일 교회 인근에서 예배를 오가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전도지'를 나눠 주고 있어 주의가 요망된다.

    특히 교회 앞에서 버젓이 활동하고, 홈페이지 주소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를 공개하는 등 한층 대담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일이었던 지난 13일, 서울의 한 중대형교회 길목 세 지점에 이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예수교와 칼빈교 그 씨와 뿌리', '두 가지 씨, 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라는 제목의 문서를 나눠 주는 모습이 목격됐다.

    '예수교와 칼빈교…' 문건에는 "예수교는 예수님이 교주이시고, 칼빈교(장로교)는 칼빈이 교주"라며 "지구촌에 장로교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 수가 적다. 계시록에서 말한 바벨론은 영적 바벨론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옛 바벨론의 신이 들어간 교단"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 이 문건에는 '각종 교단의 집결지, 바벨론 한기총의 신학 교리', '한기총 소속 신학 교수의 144,000(계 7, 14장) 해설법' 등을 기재하고 있다.

    다른 문건인 '두 가지 씨...'에는 "초림 예수님 때부터 세상에는 두 가지 씨가 뿌려졌고(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 추수 때는 세상 끝이며 추수되어 가는 자는 하나님의 씨로 난 자이고 추수되지 못한 자는 자기 밭(교회)에 남은 자이며 가라지 씨로 난 자라고 하셨다(마 13:37-40)"고 적혀 있었다.

    이 두 문건에는 뒤편 연락처에 나란히 '성경에 입각하여 빛과 비와 공기처럼 만물에게 동일하게 전하는 진리의 말씀 성경 해설!'이라는 소개와 함께 홈페이지 주소를 'www.scjschool.com'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홈페이지로 들어가면 각 포털사이트의 ‘진짜 바로 알자 성경과 신천지’ 카페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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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 저수지 한가운데 세워진 건물…16세기 교회의 비밀





    ▲배 위의 어부가 노를 저으며 저수지를 지나는데 멀리 큰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유튜브 영상 캡처

    커다란 저수지 한 가운데 교회가 우뚝 서 있습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12일(현지시간) 유튜브에 올린 영상을 보면 넘실대는 물결 속에서 꽤 큰 규모의 교회가 서 있습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이 교회는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멕시코를 침략했던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긴 유산이라네요.

    하지만 이 교회는 1962년 사라졌습니다. 멕시코 정부가 큰 댐을 만들면서 이 교회가 서 있던 지역이 수몰지구가 된 것이죠. 당시 이 교회를 비롯해 주변 지역 전체가 그대로 물에 잠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에 잠겼던 이 교회가 어떻게 다시 솟아난 것일까요? 인근에 사는 어부의 얘기에 따르면 이 교회는 다시 솟아난 게 아니라 댐 수위가 낮아지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합니다. 어부는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올해 들어 아직 한 번도 비가 오지 않는 등 가뭄이 극심한 상황”이라며 “댐 수위가 낮아지면서 교회가 다시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1962년 댐 건설 이후 교회가 모습을 드러낸 건 이번이 3번째라고 하네요. 아주 극심한 가뭄이 들 때마다 교회가 물결이 일렁이는 호수 가운데서 우뚝 솟아오른 것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댐 건설 당시 인근 지역이 모두 물에 잠겼다고 하는데 유독 교회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회 외에도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건물이 있었을 텐데 다른 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 퍽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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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랑 끝으로 몰지 말아 주세요

    동성애치유상담학교 개소한 이요나 목사…동성애 '반대'보다 '치유' 강조
    이은혜 기자 eunlee@newsnjoy.or.kr | 2016.03.15 14:13:33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한국교회가 '동성애 반대'를 외칠 때 꿋꿋이 '탈동성애'를 외친 목사가 있다. 젊은 날을 게이로 보내며 이태원에서 이름을 날렸던 이요나 목사(홀리라이프 대표). 그는 하나님 안에서 동성애를 '치유'받았다고 주장한다. 탈동성애에 성공한 산증인 입장에서, 한국교회가 동성애 반대에만 열을 올리지 말고 동성애자를 이해하고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지 말아 달라고 주문한다.

    이요나 목사는 얼마 전 '동성애치유상담학교'를 개소했다. 한국교회가 동성애 반대 운동에는 앞장섰지만 동성애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판단에서다. 동성애자가 이요나 목사를 찾아와 상담받는 것과 별개로 동성애에 무지한 목사들을 깨우고 싶기도 했다.

    동성애치유상담학교 개소식 다음 날 서울 논현동 갈보리채플서울교회에서 이요나 목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시작 전 30분이 주어졌지만 주제에 주제를 타고 인터뷰는 1시간 30분 정도 계속됐다. 그는 한국교회가 동성애를 대하는 방법부터 치유상담학교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 냈다.

    이요나 목사는 지금까지 자신이 상담한 기독교 동성애자들에 대한 통계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상담한 기독교인 동성애자가 1,500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 상담한 사람들 중 38%가 모태 신앙인이고 17%가 신학교를 다니거나 목사 자녀 등 사역 관련자라고 했다. 동성애치유상담학교 개소식에도 한 목사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참석했다. 탈동성애를 꿈꾸기 때문이었다.



    ▲ 교회 안 동성애자들이 벼랑 끝에 몰리고 있다. 한국교회는 동성애자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혐오 발언이 난무하고 '동성애 반대'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벼랑 끝에서 자살 택한 교회 안 동성애자들

    교회 내 동성애자는 분명히 있지만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교회는 찾기 힘들다. 교회는 동성애자들을 없는 듯 여기며 저주와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많은 목사가 동성애는 악하고 더럽다고 묘사하며 동성애자를 매도한다. 바로 앞에 앉아서 설교를 듣는 사람이 동성애자일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 한다.


    "나를 찾아온 사람 중에 목사 자녀도 많다. 이 친구들이 똑똑하고 재능이 많아 교회에서 교사로 봉사하고 리더로 헌신한다. 그런데 교회에서 매주 동성애자는 죽일 놈, 더러운 놈이라고 말하니까, 듣고 있으면 미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털어놓을 수도 없고…그러다 결국 자살을 택한다.

    얼마 전 자살했던 청년도 기독교 대학 다니던 모태 신앙 친구였다. 2년 전 전화해서 상담받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로 오라 했는데 그 뒤로 연결이 안 됐다. 지난 1월 집회 때문에 중국에 있었는데 새벽 두 시에 연락이 왔다. '목사님 죽을 것 같아요. 잠을 못 자요. 숨 막혀 못 살겠어요. 살려 주세요'라고. 그때 바로 전화를 했었어야 하는 건데…"

    말을 이어 가던 이 목사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 목사는 지금 해외에 있으니 서울 가면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그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뒤 청년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이요나 목사는 청년이 세상을 떠나고 2주 후 우연히 그의 어머니와 통화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동성애자면 어떠냐, 목사님을 만났으면 내 아들 살 수 있었을 텐데'하며 통곡했다. 그날 밤 이 목사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2년 전 일이다. 또 다른 이야기다. 광주에서 가장 큰 ㄱ교회 A 청년도 기독교인 부모와 갈등 속에 스스로 삶을 등졌다. 2년 전 광주·호남 지역에서 반동성애 운동이 거세게 일 때다. 교회에서는 매주 반동성애 서명을 받았다. 교회 가면 동성애자는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게 싫어 교회에 안 나갔다. 이번에는 부모가 아들에게 폭언을 했다. '동성애가 그렇게 좋으면 차라리 나가 죽어라.'


    "교회 내 동성애자 자살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 부모는 화가 나서 한 말인데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아들은 나가서 자살을 택했다. 교회가 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내가 모르는, 상담하지 못한 사람은 또 얼마나 많겠나. 죽은 A 생일이 5월이었는데 그날만 되면 엄마가 통곡하면서 전화를 한다."



    ▲ '나는 더 이상 게이가 아닙니다'는 동성애를 주제로 한 다큐 영화다. 이요나 목사는 이 영화 제작 과정 전반에 참여했다. 그는 이 영화와 관련해 할 말이 많았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동성애 강의가 아니라 에이즈 강의?

    이요나 목사는 현재 '탈동성애 운동'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가 '동성애 반대'만 외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성애 반대 진영의 일부 인사들이 너무 극단적인 발언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에이즈에만 집중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실제로 에이즈 감염자들을 교회에서 내쫓는 결과를 낳는다고 했다.

    "에이즈 감염인을 돌본다고 말하는 한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은 원래 암 환자들을 위한 요양 병원이었다. 그러다가 에이즈 감염인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 병원에 입원하는 감염인은 이전보다 많지 않다. 교회를 돌면서 강연하는 주요 강사들이 동성애 이야기를 한다며 에이즈에만 집중한다. 이런 경우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예수님 믿는 에이즈 감염자들이 교회를 떠난다. 내 경우만 해도 3년을 돌봤던 에이즈 감염 교인 두 명이 출석했다가 작년부터 잠적했다. 에이즈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감염자들을 더럽고 악하다고 묘사하는데 듣는 사람들 심정은 오죽하겠나."

    동성애자 괴롭힌 탈동성애 다큐

    이요나 목사는 얼마 전 교계에 소개된 '나는 더 이상 게이가 아닙니다'라는 다큐 영화에 출연했다. 출연한 것만이 아니라 제작 과정 전반에 참여했다. 영화에 나오는 탈동성애자도 다 이요나 목사가 소개해 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요나 목사는 이 영화도 너무 동성애자를 비참하게만 묘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촬영 마치고 완성됐다고 해서 영화를 봤는데 내용이 너무 지나쳤다. 나오는 사람들 얼굴 모자이크도 엉성하고 자극적인 내용으로만 이야기를 꾸몄다. 그대로 나갈 수가 없어 나와 스폰서들이 미국에 모여 장면 하나하나 고치고 수정했다. 그렇게 해서 함께 완성한 영화다.

    이렇게 만든 것까지는 좋은데 원래 이 영화는 한국에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상영할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완성본 수정 과정에서 김광진 PD를 배제해 자존심이 상했던지 그후 일체 나에게 연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시사회를 하고 다닌다. 뿐만 아니라 대형 교회를 돌면서 영화를 상영하고 자기 후속작 제작비를 모금하고 있다. 같이 만든 영화인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이런 과정에서 철저히 나를 배제했다."

    영화를 앞장서서 만든 것은 이요나 목사지만 정작 이득은 다른 사람이 얻고 있다. 한국에 공개될 줄 몰랐다가 영화에 묘사된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 이 목사에 항의한 경우도 많았다. 대형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상영한 후 갈보리채플서울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던 이 목사의 제자들은 교회를 떠났다. 영화에 출연했던 심여호수아 목사도 지난 1월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교회에서 영화는 보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금지어'가 돼 버렸다.



    ▲ 탈동성애 운동을 하면서 '이요나 목사는 동성애 반대 운동을 싫어한다'는 오해도 받았다. 이 목사는 성경을 기반으로 한 성경적 상담이 탈동성애에 중요한 열쇠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동성애 반대'와 '탈동성애'는 달라

    '동성애 반대'만 치중하는 한국교회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뭘까. 이요나 목사는 지금 한국교회가 하는 동성애 반대 운동은 복음적이지 않다고 본다. 그는 동성애는 예수님의 능력 안에서 치유 가능한 죄라고 본다.

    "교회는 복음적으로 가야한다. 성 중독자나 동성애자들과 술집과 클럽에 드나들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같다. 왜 그런 것은 파헤치지 않는가. 간통죄 폐지될 때 왜 교회는 침묵했나. 청소년 10명 중 9명은 자위·스마트폰 등 온갖 중독에 빠져 있다.

    그런데 왜 동성애만 저주받은 인간으로 묘사하나. 동성애자들은 정말 자기 몸에 '보응'을 받았다고 할 정도로 충분히 괴롭다. 동성애라는 굴레에 빠진 것으로 인해 이미 충분히 괴로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위안 삼는 사람들인데 교회는 계속 동성애만 반대하고 저주받은 애들이라고 몰아가지 않나."

    이요나 목사는 한국 교계에 '이요나 목사는 동성애 반대 운동을 못 하게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고 했다. 그는 이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과거 동성애 반대 운동에 앞장서던 시절, 탈동성애자가 쓴 '동성애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글이 나갈 때 이요나 목사 전화번호가 공개됐다.

    이후 그는 동성애자들의 협박 전화에 시달렸다. 이 목사가 사는 곳을 콕 집어 말하면서 "내가 너 어디 사는지 다 알아"라는 전화가 오는가 하면, "나 에이즈 환자인데 너 하나쯤은 간단하게 에이즈에 감염시킬 수 있어"라는 전화도 많이 받았다. 이후 이 목사는 동성애 반대 운동을 정리했다. 그때부터 "이요나 목사는 동성애 반대 운동을 싫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주장했다.

    "동성애, 분명히 치유될 수 있다"

    그 뒤로 이요나 목사는 '반대' 보다 '치유'에 중점을 두고 상담 사역을 시작했다. 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가 여태껏 상담한 동성애자는 1,500명이 넘는다. 일주일에 많으면 열 명, 적을 때는 네댓 명이다. 동성애자를 상담하는 것 자체도 폭력이라고 보는 시각에 이 목사는 이렇게 답했다.

    "상담도 폭력이라는 주장은 잘못됐다. 의학적으로 보면 동성애는 성 중독의 일부다. 질병이 아니라고 밝혀졌으면 타고났다는 것도 잘못된 주장이다. 친동성애 진영은 아예 타고났다고 주장하지 않나. 타고났으면 생물학적으로 DNA를 제시해 주던가 해야 한다. 질병이 아니라고 한 것은 미국심리학협회가 질병 코드에서 삭제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봐서 약물·전기 등 각종 치료를 했는데 이것은 의학적인 치료를 말하는 것이다."



    ▲ 교계에서 이요나 목사는 '탈동성애 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탈동성애 운동은 '전환 치료'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이요나 목사는 '치유'와 '치료'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만약 동성애를 고칠 수 없다면, 자기 자신부터 동성애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이 목사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약 80여 명의 미국 탈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다. 이 목사는 분명하게 "동성애는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탈동성애가 가능하다고 해서 동성애에서 벗어나는 게 쉽다는 말은 아니다. 이요나 목사가 상담한 1,500명 가운데 완전히 이성애로 돌아선 사람은 7명이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더욱 오랜 시간을 들여 성경에 기반을 둔 상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목사는 얼마 전 진주사랑의교회 사건처럼 동성애를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면서 축사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건 오히려 동성애자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예수를 믿으면 죄를 정리해야 한다. 동성애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동성애를 끊어 내기 힘든 이유는 성(性)이 내부 요인이기 때문이다. 담배나 술은 외부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그러나 성은 아니다. 혼자서도 섹스를 하지 않나.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예수 이름을 믿어야 하고 성령 안에서 씻음이 나타나야 한다. 성령은 말씀 안에서만 역사한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성경 가르치는 것을 소홀히 하고 밤낮 옳고 그른 것, 선과 악만 말한다. 성경을 못 가르치니까 성경적 상담을 배제한다.

    심리 분석은 통계다. 인간의 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인데 이 영은 오직 하나님만이 감찰하실 수 있다. 심리학자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으면 예수님이 뭐하러 이 땅에 오셨나. 혼은 내 정신력이다. 정신은 항상 죄성에 의해 좌우된다. 예수를 믿으면 죄에서 벗어나 의인의 토대에 이른다.

    동성애자가 예수를 믿으면 영이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만 지식이 없으면 변하지 않는다. 동성애에 대한 지식과 느낌을 그대로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성경적 상담과 자기 대면 원리를 강조한다. 진리를 배우면 반드시 회개가 일어난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성령 안에서 씻음이 일어난다. 이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말씀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면 되는데 일부 몰지각한 목사들이 '동성애 귀신아 나가라' 이런 거나 하고 있다."



    ▲ 이요나 목사는 얼마 전 '동성애치유상담학교'를 개소했다. 그는 이 학교가 동성애 반대 일변도인 한국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길 기대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목사들 깨우고 싶은 '동성애치유상담학교'

    이요나 목사가 대표로 있는 홀리라이프 동성애치유상담학교는 다섯 종류의 상담 과정을 운영한다. 평신도와 목회자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과정이 있다. '성경적 상담사 전문가 과정'은 목회자들이 동성애에 대해 더 잘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시작한 과정이다. 물론 탈동성애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오는 치유 과정도 있다.

    그는 다시 한 번 한국교회에 '동성애 반대'에만 집중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동성애 반대'를 기조로 하는 당이 나오고 목사들의 혐오 발언이 난무하지만, 그것보다 동성애자들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먼저라고 했다.

    이요나 목사는 얼마 전 <리애마마>(키네마인)라는 자전 수필도 펴냈다. 동성애자로 살았던 과거를 회상하고 탈동성애를 이루기까지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요나 목사는 영화 '나는 더 이상 게이가 아닙니다'를 세상에 나오게 하기까지 겪은 분노와 고통 때문에 치유 사역을 정리하고 외국으로 떠나려 했다. 동성애 반대 운동에 몰두하는 한국교회와 부딪히는 것은 어떤 면으로도 유익하지 않은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계에 동성애자를 이해하고 그들을 상담하려는 이 목사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한국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교회가 탈동성애자들을 최종병기로 사용했으면 좋겠다. 수많은 동성애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치유될 수만 있다면 나는 모퉁잇돌처럼 쓰고 버려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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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안에 부활의 예수가 없다

    하나님나라 복음이 사라진 한국교회에 고함

    한완상

    이 글은 평신도 교회인 새길교회에서 신학위원으로 있는 한완상 박사가 2016년 3월 6일 '새길교회 창립 29주년 기념 주일예배' 때 나눈 설교문(설교 제목: '해방자 예수, 바보 그리스도', 설교 본문: 마태복음 6장 9-13절, 요한복음 21장 15-18절)입니다. 새길교회의 허락을 받아 <뉴스앤조이>에 싣습니다. 설교자 메시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문단을 나누거나, 띄어쓰기와 오자를 바로잡는 것 외에 수정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 편집자 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마태복음 6장 9-13절)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예수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쳐라.'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 떼를 먹여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요한복음 21장 15-18절)

    1.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저는 그것이 바로 <예수 없는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기에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크리스천들이 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안 계신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이런 슬픈 현실은 한국 기독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최고의 성서신학자 톰 라이트(N.T. Wright)는 복음서에서 잊혀진 얘기라는 부제를 달고 매우 날카로운 신학적 성찰을 해낸 문제작 <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2012)를 최근에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네 복음서 모두가 감동적으로 증언한 갈릴리 예수가 실종되어 버린 사도신경의 문제를 새삼 기독교의 심각한 문제로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지도자들이나 신학자들 중에 이 같은 예수 실종을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거의 없는 듯하여 저는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2008년 <예수 없는 예수 교회>라는 책을 부끄럽고 답답한 심경으로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오늘 저는 한국교회에서 역사적 예수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예수, 곧 그리스도도 안 계신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세상으로부터 온갖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를 흔들어 깨우고 싶습니다. 역사의 예수도, 부활의 그리스도도 부재(不在)하신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운동, 하나님나라 선교, 그리고 하나님나라 복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 한완상 박사. ⓒ목회멘토링사역원 엄태현

    기독교가 이른바 개독교로 변질된 것도 참으로 걱정스럽지만, 보다 저를 슬프게 하는 것은 예수도, 그리스도도 교회 안에 계시지 않고 하나님나라 복음도 한국 기독교와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운동 실천에서 새길 신앙고백이 나왔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새 사람으로 일으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질서, 새 구조를 만들어 가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새길 신학의 핵심인데, 이 복음의 핵심과 본질을 다시 새롭게 깨닫기 위해 먼저 우리들은 한국교회에서 왜 예수와 그리스도가 안 계신지, 그리고 왜 하나님나라 운동이 실종되어 버렸는지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2.

    먼저 예수와 그리스도 간의 단절이 가져온 신학적, 신앙적 문제점부터 간단히 살펴봐야 합니다. 하기야 이 단절은 예수와 바울 간의 단절과도 연관되고, 하늘과 땅 간의 분리와도 연관되며, 하나님나라와 죽어서야 간다고 믿는 천당 간의 괴리와도 연관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수가 그리스도에서 분리되고, 그리스도가 예수로부터 단절된 것이 오늘 기독교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먼저 한국교회의 역사와 현실에서 이 단절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세기 말 주로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전승된 기독교 복음에는 예수와 그리스도 간의 단절이라는 문제보다는 일종의 '몽매한 일치'가 두드러졌습니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성으로 인식한 듯합니다. 이런 소박하고 몽매한 동일성은 초기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신학과 신앙에서 비롯된 듯합니다.

    그들은 대체로 19세기에 풍미했던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했습니다. 하기야 19세기 서구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과 반발에는 근본주의 신학 이외에도 성서비평(고등비평)에 의한 고차원의 진보적 비판도 있었습니다. 특히 20세기 초 실존주의적 성서 해석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역사 탐구를 단절시켰습니다. 진보적인 성서비평도 희한하게 근본주의 신학과 함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게 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불트만(Bultmann)은 실물 예수의 말씀과 삶, 그의 성품과 의식 등을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재구성해 낼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네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위기에 봉착했던 초대교회가 삶의 자리에서 조명해 본 부활 예수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체험했던 부활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복음서를 해석한 것이지요.

    이런 신앙고백(케리그마)을 객관적 역사 사실로 환치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 결과 반세기 동안 서구 성서신학의 역사적 예수 탐구는 중단된 셈입니다. 이런 역사 예수 탐구의 중단이 가져온 심각한 역사적 후유증으로 우리는 히틀러와 같은 구조적 악 앞에서 교회가 무력했다는 사실에 새삼 주목해야 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초대 한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성서비평은 위험한 반신앙적 접근으로 보아 배격했습니다.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의 관점에서 복음서는 일점일획도 틀릴 수 없는 객관적 역사적 진실로 확신했습니다. 곧 예수와 그리스도가 동일하다고 문자주의 신앙으로 수용했지요. 역사와 신앙고백을 몽매하게 혼돈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이해는 하나님나라 운동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역사적 변혁성을 부적절한 것으로 무시했습니다. 예수와 그리스도 모두가 탈역사화되고, 사사화(私事化)되고 말았습니다. 이 같은 몽매한 미분화 인식에서는 감동적인 역사 변혁 실천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몽매함과 연관해서 우리는 한국교회 분열사(分裂史)에서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음을 눈여겨보고 반성해야 합니다.

    갈릴리 예수의 역사 실천 동력과 그리스도의 차원 높은 실천적 역동성을 모른 채, 교단 분열과정에서 예수와 그리스도는 분열되고, 가슴 아프게도 예수와 그리스도 간에 반(反)복음적 증오와 투쟁이 펼쳐졌지요. 분열 과정에서 예수 이름을 먼저 차지한 교단에 대항하여 분열된 다른 반쪽은 그리스도 이름을 독점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지요.

    1953년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 가슴 아프게도 예수교 장로교와 기독교 장로교는 분열될 수 없고 되어서는 안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반씩 잘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성결교단도 장로교 분열의 그 위선적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더 보수적 장로교단이 역사적 예수를 가져가고, 상대적으로 더욱 진보적인 교단이 부활의 그리스도를 가져갔습니다.

    하기야 저는 예수와 그리스도 간에는 그 역사적 진보성과 실천적 변혁성에 있어 본질적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많은 분들이 갈릴리 예수는 진보적 실천에 앞섰다고 보고, 부활의 그리스도는 보다 신비하고 영적인 존재로 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총체적으로 하나님나라 운동의 실천적 관점에서 보면 부활의 그리스도가 갈릴리 예수 못지않게, 아니 더욱 더 감동적 실천의 동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보다 더 따뜻하고, 보다 더 품어 인도해 주시고, 보다 더 인간적인 점이 넘치는 사랑의 메시아이심을 복음서는 증언해 줍니다. 부활 예수의 영성이 얼마나 더 공공적이고, 더 감동적이고, 더 변혁적인가를 증언하고 싶습니다. 오늘 저는 이 점을 좀 더 부각시켜 보고 싶습니다.



    ▲ 노엘 쿠아펠(Noël Coypel)의 '예수의 부활'(La Résurrection, 1700년 作.)

    3.

    예수 복음이 본질적으로 갖는 공공성과 감동성 그리고 변혁성에 주목하면서 복음서를 읽어 보면, 갈릴리 예수의 메시지와 그의 실천이 십자가 고난과 처형을 거치면서 더 강열하게 그 공공성과 변혁성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처형 후 사흘 만에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현에서는 놀랍게도 이 같은 공공적 변혁의 동력이 더욱 감동적으로 나타남을 확인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갈릴리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감동적 동력이 실체로 부활한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를 예수에서 추상적으로, 신학적으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 점을 확인해 보기 위해 갈릴리 예수의 대표적인 하나님나라 비전(또는 메시지) 하나와 부활의 그리스도 메시지를 하나를 특별히 부각시켜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의 기도, 즉 주기도문은 그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핵심을 짧게 그러나 강열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예수 메시지가 갖는 전복적인 진보성(또는 급진성)이 이 기도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예수의 이 전복적 비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하나님과 인간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먼저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하나님 인식과 그 오용을 지적합니다. 여기도 크게 두 가지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요.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예수의 미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바(Abba)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에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정치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버린 당시 종교 상황을 예수는 개탄하셨습니다. 신의 이름이 이데올로기로 변질되면, 한마디로 오웰(Orwell)의 소설 <1984>에 나타나는 극심한 언어의 도착이 일상화됩니다.

    끔찍한 구조 악의 위선적 자기 치장의 추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짓과 진실을 분별해 주는 이성적 능력이 구조적으로, 문화적으로 마비되어 버립니다. 이를테면 사랑성(省)이라는 국가기구가 고문이라는 폭력을 제도적으로 전담하게 되지요. 진리성(省)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 기구가 뻔뻔스럽게 거짓을 날로 유포하게 됩니다. 풍요성(省)이라는 국가 경제기구가 노동 착취를 합리화하게 되지요.

    이 같은 위선적 전체주의적 억압과 착취 구조 아래에서 밑바닥 인생은 빅브라더가 지시하는 대로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듯 열망하게 되고 마침내 그들은 가축화되고 말지요. 바로 이 같은 비극이 하나님 이름이 불경스럽게 오용되는 현실이기에 갈릴리 예수님은 그의 기도문에서 하나님 이름의 이데올로기적 변질을 극복하라고 당부하셨지요.

    하나님 이름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결단코 이데올로기적 왜곡되어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의 이름은 실천의 본질입니다. 허위의식의 겉치레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시편(23편)에서에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의(義)의 길로 인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했지요. 하나님은 이름이면서도 바로 공의와 샬롬의 변혁으로 이끄는 실천적 동력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 이름이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전반부 주기도문에서 또 다른 소중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이름이 바로 변혁의 동력이 된다는 위의 메시지와 긴밀히 연결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 반드시 우리의 땅, 우리의 역사 현실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당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지배(Love-dom)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역사 현실 속에서 이뤄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힘써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이름의 실천적 동력은 언어 도착이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제도화되어 있는 우리 현실에서는 이 도착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선교로 이어져야 합니다. 민주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가 죽어 가고,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가 짓밟히고, 평화의 이름으로 잔인한 전쟁을 부추기는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같은 구조 악의 지배를 극복해 내야 합니다.

    예수 이름과 부활의 그리스도 이름이 함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될 때, 그 이름이 뿜어내는 변혁 에너지는 엄청납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가 회당 입구에서 구걸하고 있던 지체장애자 걸인에게 준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들에게 알량한 돈 몇 푼 받고 싶어 했던 그 장애자 걸인에게 베드로는 사랑의 눈빛으로 그를 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던가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사도행전 3장 6절)

    자본주의 체제에 깊이 동화되어 있는 저희들로서는 베드로의 이 같은 변혁의 감동적 명령을 이해하기 참으로 힘들 것입니다. 금과 은의 힘으로 태연하게 자본주의적 갑질에 익숙하게 살아온 크리스천들은 이 이름, 곧 역사적 예수인 나사렛 예수의 이름의 힘으로 이 장애자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킨 사실의 참뜻을 우리 상황에서 항상 곱씹어 봐야 할 것입니다.

    금과 은 부스러기를 받고 평생 장애인으로 구걸하는 처지를 근본적으로, 급진적으로 바꿔 버린 이 총체적 변혁의 감동이 바로 주기도문의 핵심적 메시지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미 부활의 그리스도를 체험했기에, 나사렛 예수가 곧 부활의 그리스도임을 온몸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곧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 주는 역사 변혁의 힘을 그는 기쁘게 복음 사역으로 실천했던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후반부는 인간과 인간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중심으로 아바(Abba)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구체적 실천 프로그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는 프로그램이지요. 이 권고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광야 40년의 고난 순례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만나를 얻어먹었습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루 이상 쌓아둘 수 없었습니다. 축척하는 순간 그것은 썩게 되어 있었습니다. 축척을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본질의 빛 아래서 보면 이 권면은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축척 탐욕이 인간을 근원적으로 비인간화시킨다는 진실에 우리는 새삼 주목해야 합니다.

    다음 메시지는 또한 엄청난 메타노이아를 우리들에게 촉구하는 예수의 메시지입니다. 채권자가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 주듯이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죄와 빚을 용서해 주시고 탕감해 달라는 청원 메시지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채권자인 갑으로 채무자인 을들에게 갑질하는 한 주기도문을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제적 갑질을 뉘우치고 버리지 않는 한 우리의 기도는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우리는 우리의 을들에게 하고 있는 온갖 갑질을 그만두는 결단부터 내리고 당장 실천해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끼리의 공의와 평화를 소중히 여기시지요. 그래야 하나님나라가 우리 안에서 비로소 펼쳐지게 됩니다.

    주기도문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또한 유혹의 극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유혹은 예수님을 광야에서 유혹했던 사탄의 유혹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세상에서 지도자가 되려는 크리스천들에게 이 유혹 극복은 참으로 적절하고 절박한 메시지입니다. 교만과 독선과 힘에 의한 제압으로 세상을 이끌려는 지도자는 결코 하나님나라를 세울 수 없음을 주기도문은 명확하게 강조합니다.

    그 흔한 돌로 값진 빵(재화)을 만들고 싶은 물량제일주의나, 세상을 높은 곳에서 호령하여 천하를 자기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싶은 지배제일주의나, 하나님의 카리스마를 빙자한 종교 주술적 지배욕에 함몰하게 되면, 마침내 사탄 지배 질서에 항복하게 되고 맙니다. 이 진리를 장엄하게 주기도문은 깨우쳐 줍니다.

    그런데 이 사탄의 유혹은 바로 구조 악의 유혹이기도 하지요. 악의 구조적 민낯을 예수 따르미들은 항상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8장 26절에서 39절), 예수께서 거라사 지방 무덤가에서 참으로 비참했던 정신 질환자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왜 물으셨을까요? 그저 그를 고쳐 주면 되지, 왜 이름을 물으셨을까요?

    역사의 예수는 인간을 괴롭히는 사탄의 구조적 본질임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 짐짓 물으셨습니다. 그 정신 질환자는 자기 이름이 바로 로마 군단이라고 대답합니다. 당시 천하를 폭력적 승리주의로 지배했던 팍스로마나의 민낯, 그것도 그 제도화된 구조적 폭력 지배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지배, 공의 지배, 그리고 평화 지배와 선명하게 대조되는 사탄의 군사적 폭력 지배임을 폭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구조적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선교는 결단코 관념적, 명상적, 신학적 탐구활동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축사치유행위는 개인적 정신 질환의 치유만이 아닙니다. 그 질환의 뿌리에 스며 있는 사탄의 구조 악을 제거하는 총체적 치유였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예수가 추진했던 하나님나라 운동은 구조적 악에서 개인만 일으켜 세워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의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놀라운 힘을 드러내는 공공적, 감동적, 변혁적 운동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는데, 부활의 예수, 곧 그리스도로 격상된 부활 예수도 이 하나님나라 운동을 계승하고 지속하셨던가요? 부활의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이신데, 구태여 세상의 구조 악을 축출하는 이른바 하나님나라 운동에 얽매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4.

    이제 오늘의 말씀 증거의 핵심으로 들어가 봅시다. 우선 부활 예수의 존재는 과연 몸의 실체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라는 문제부터 잠시 살펴봅시다. 과연 예수 제자들과 초대교회는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새삼 주목해야 합니다. 지난 2천 년 가까이 제도 교회는 예수 부활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면이 있다고 지적하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톰 라이트(N.T. Wright)가 이 점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표적 성서신학자입니다. (2008년 그가 출간한 는 좋은 길잡이가 됩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부활 예수를 실체에서 분리된(disembodied) 영의 존재로 잘못 보았던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처음부터 영적 존재로 보았던 분들이 있었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예수는 신적인 영성의 존재이기에 육체의 아픔에서 완전 자유롭다고 믿었지요. 이것이 가현설(Docetism)의 예수입니다. 이런 예수는 이미 탈역사화되고, 탈실체화된 예수 인식이지요. 이들에게는 십자가 고난은 아무 의미 없는 사건이지요. 일종의 쇼(Show)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고난의 의미가 우리 가슴에 와 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변혁의 감동적 동력이 될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예수의 탈실체화 움직임은 역사 속에서 악을 변혁시키는 일을 과소평가하거나 아예 기피하는 움직임으로 쉽게 연결됩니다. 여기에 영지주의 영향이 작동하게 됩니다. 세상은 악하기에 이 세상을 떠나 천당에 가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구원의 종착이라고 믿게 됩니다.

    구원은 여기 역사 속에서 만물을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일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피난하여 피안으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영혼불멸설을 강조했던 플라톤 사상과도 상통합니다. 그래서 신플라톤주의 사상과 영지주의 사상이 초대교회를 혼란시킨 것도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복음서가 증거하는 부활 예수 곧 그리스도는 과연 육체를 떠난 탈실체화된 영적 존재였을까요? 그리고 부활예수는 하나님나라 운동에 전혀 무관심했을까요?

    여기서 초대 예수 따르미들이 가졌던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적 판단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몸의 부활 또는 부활 예수의 몸은 어떤 것일까요? 무엇보다 먼저 부활 예수의 몸은 실체(physicality)입니다. 그렇다고 썩어 없어지는 우리 육체의 몸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러기에 부활인 resurrection은 몸의 재생을 뜻하는 resuscitation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썩어질 몸이 잠시 소생했으나 결국 또다시 죽어 썩어질 몸이었지요. 그런데 예수 부활은 몸의 부활이지만 이 몸은 썩지 않은 몸입니다. 썩지 않는다는 뜻으로 또는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영의 몸 또는 영의 실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플라톤적인 영혼불멸의 영과는 다릅니다. 가현설적인 영과도 전적으로 다르지요.

    ▲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의 '나사로의 부활'(The raising of Lazarus, 1630년 作)

    부활의 몸은 썩지 않기에 썩을 우리의 육체의 몸보다 더 견실한 실체(physicality)를 지니고 있습니다. 실체성, 공간 점유성, 실천성, 감동성, 공공성, 그리고 변혁성을 모두 지니고 있지요. 그러니까 역사 변혁성은 부활 이전의 예수 삶에서 보다 더 강렬하게 작동합니다. 바로 이 점을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에서 29절을 보면 참으로 흥미로운 증언이 나옵니다. 부활 예수의 모습이 부활 이전 예수(역사 예수)의 모습보다 더 따뜻하고, 더 바로 보살피시고(바보스럽고) 더 품어 인도하시는 엄마와 아빠 같은 모습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제자들 중 도마는 어느 누구보다 계몽주의 이후 시대의 지식인다운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모더니스트(modernist) 제자였습니다. 합리적 비판의식을 지닌 제자였지요.

    톰 라이트(N.T. Wright)는 그를 역사 탐구적 태도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25절에 그는 이렇게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내 손가락으로 그 못 자국과 옆구리를 만져 보지 않고는 부활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했지요. 이때 제자들은 예수를 십자가형으로 죽인 공안 당국의 체포가 두려워 한곳에 모여 숨죽여 숨어있었습니다.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지요. 바로 이때 문이 꽉 닫쳐 있었는데,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유령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부활의 그리스도는 유령처럼 결코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매우 자상한 스승이나 엄마, 아빠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라고 하셨지요. 유령이 평화를 선포하고 엄마처럼 격려해 주나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도마에게 직접 다가오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를 믿지 않았던 그의 합리적 의심을 결코 나무라지 않으셨지요. 오히려 도마에게 예수의 손바닥 못 자국과 옆구리 상처를 손으로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때보다 더 인자하고, 더 부드럽고, 더 따듯하게 그의 부활의 몸을 만져보라고 했지요. 부활의 몸이 결코 유령의 영이나, 환상에 나오는 실체 없는 유령이 아님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확인하라고 말씀하셨지요. 도마는 썩지 않는 예수 부활의 몸이 썩을 수 있는 부활 이전의 몸과 겉으로는 다를 바 없음을 이 순간 만지지 않고도 알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몸이 육체의 몸 보다 더 실체적으로 따듯하고, 친절한 몸임을 깨달았지요.

    그리고 도마는 참으로 놀라운 신앙적, 영적 탄성을 발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허무주의를 뛰어넘는 역동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지요. 일찍 베드로가 뜻도 모른 채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한 고백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 두 고백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도마의 고백은 직접 자기 손으로 만질 필요 없이 부활 예수는 그리스도요, 메시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깨달았던 진정한 고백이며, 도마는 자기 고백의 의미를 스스로 감동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고백의 뜻을 깨닫지 못했기에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거짓말했습니다.

    도마의 응답에 대해 부활의 몸이 되신 예수는 이렇게 그때나 오늘이나 저희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며 깨우쳐 주십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 이 말씀 듣고 보니까 역사의 예수 모습도, 부활의 예수 몸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우리들이 2천 년 전의 예수 제자들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저희들이 진정 도마보다 더 큰 축복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으려면 적어도 도마처럼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역사의 예수를 볼 수 있고, 또 역사의 예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럽고 더 품어 보살펴 주시는 사랑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공동체에서 혹시나 역사적 예수에게는 부활의 따듯한 영이 없고, 부활의 예수는 순전히 영적 존재이기에 역사 변혁에는 관심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매, 형제가 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하나님나라 펼침의 기쁨을 우리 현실 속에서 온 몸으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부활의 예수께서 이 하나님나라 펼침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이제 마지막 메시지로 여러분들께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예수가 승천하시기 전 수제자 베드로에게 당부한 지엄한 권면의 뜻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인 21장에 주목해 봅시다. 놀랍게도 부활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마치 지난날처럼 아침을 먹었습니다. 식사 후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참으로 진지하게 세 번씩이나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부활 예수가 실체가 없는 유령이 아님을 주님께서 친히 차려주신 아침밥을 먹고 확인한 뒤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진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새삼 깨닫고 기뻐하고 있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수제자에게 세 번씩이나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예수를 세 번 모른다고 비겁하게 부인했던 터라 베드로는 매우 민망하고 송구스러웠겠지요. 세 번 모두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 그 사실을 부활의 주님께서 친히 알고 계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대답할 때마다, 부활의 주님은 이렇게 권면하셨습니다. "내 양 떼를 먹여라."

    도대체 이 명령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 명령이 하나님나라 펼침과 세움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 권고가 2천년이 지난 오늘 기독교 공동체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명령이 오늘 분단된 조국 땅에서 한국교회에게 주는 선교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특히 30세 생일을 앞두고 있는 새길공동체에게 부활의 주님과 이 명령은 어떤 의미를 던져 줄까요?

    5.

    여기 "내 양 떼"는 무엇을 뜻할까를 예수 당시 상황과 오늘 우리 상황에서 심각하게 성찰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특히 부활의 몸이 되는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래, 그래야지. 나를 정말 사랑해야지. 너는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으니, 이제부터는 정말 나를 사랑해야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세 번씩이나 내 양 떼를 정말 돌보고, 먹이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역사의 예수나, 부활의 예수는 자신을 항상 이 양 떼와 동일시하시고, 그들과 공감하셨고 동고하셨지요. 그들과 역지사지하셨고, 역지감지하셨고, 나아가 역지식지(易地食之)하셨지요. 이것이 바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에게 베푼 사랑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과 같은 뜻이지요. 꼴찌(the last)와 지극히 작은 자(the least)와 동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을(마태복음 25장 31-45절) 우리는 부활 이전이나 그 이후나 한결 같다는 진리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양 떼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예수 당시의 정치경제문화가 심각하게 양극화되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로마 권력, 헤롯 권력 그리고 성전 권력에 의해 삼중으로 착취당했던 당시 꼴찌들과 지극히 작은 자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벗이요, 양 떼였습니다. 아니, 그들이 바로 예수 자신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의 최후 심판 얘기에서 확인하듯, 심판주 자신이 주리셨고, 목마르셨고, 나그네 되시고, 헐벗게 되셨지요. 그리고 병들게 되시고 나아가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놀라운 메시지 속에서 이른바 '높은 기독론(High Christology)'은 '낮은 기독론(Low Christology)'과 다른 것이 아님을 확인해야 합니다. 부활의 그리스도가 갈릴리의 예수임을 다시 명심해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부활의 예수께서 수제자 베드로에게 꼴찌와 지극히 적은 자들을 돌보고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한 이른바 '높은 그리스도'께서, '낮고 천한 자, 그래서 힘 있는 자들에 의해 고통당하는 낮은 자들'을 먹이는 '낮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이 비유의 실체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게르치노(Le Guerchin)의 '성 베드로의 눈물'(Les Larmes de saint Pierre, 17세기 作.)

    그리스도의 양 떼를 먹이는 일은 실체가 없는 영혼이 해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육체의 몸보다 더 실체적인 영의 몸으로 실천해 내는 일이지요. 곧 부활의 몸은 저 구름 위에서 실체 없는 영혼으로는 해낼 수 없습니다. 육체에서 분리된 불사의 영혼은 예수의 양 떼를 돌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구체적인 역사 현실 속에서 부활 그리스도의 명령을 우리는 따르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현실 속에는 악의 세력에 의해 고통당하는 양 떼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악의 세력을 예수의 십자가 사랑 곧 선재적 원수 사랑 실천으로 무력화 시켜야 합니다. 아니, 무력화보다 한 차원 높은 발선화(發善化)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의 악이 선으로 변합니다. 이 같은 변화는 악의 변화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악도 선으로 변화시킵니다. 여기에 발선은 당사자 개인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새 사람으로 일어서게 되는 변화), 구조적 변화, 곧 평화의 새 질서를 세우는 일로 이어집니다. 이때, 양 떼와 양 떼를 괴롭힌 악은 모두 변화되어 새로운 몸의 존재로 거듭나 비로소 새 질서에서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발선의 효험이 아니겠습니까(로마서 12장 20-21절)!

    첨가하여 부활과 연관된 기독교 전통적인 심각한 오해 하나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대체로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 부활로 죽어서 해체되는 영혼의 존재로 천당에 들어가 그곳에서 부활의 주님과 영원히 행복하게 지낸다고 믿습니다. 이 상태를 완벽한 구원 상태로 믿습니다. 이런 신앙은 성서적 신앙이 아니라고 톰 라이트(N.T. Wright)는 단언합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위로하시며 하신 말씀에도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또,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비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한복음 14장 1-2절) 이 말씀을 전통적 교회는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강도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갈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또한 전통교회는 예수님과 함께 천당에 가서 그곳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축복이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성서적 메시지가 아니라고 톰 라이트(N.T. Wright)는 역설합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신자들이 사후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영원히 사는 탈역사적 천당이 아닙니다. 파라다이스는 잠시 쉬는 곳일 뿐 영원히 사는 하나님 집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부활의 그리스도에게 땅과 하늘 모두를 다스리는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당신의 백성과 손을 잡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십니다. 이때, 그리스도의 백성은 그리스도처럼, 썩지 않는 부활의 몸으로 땅으로, 역사 속으로 내려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동역자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마치 신랑과 아름다운 신부가 만나 하나가 되듯 말입니다.

    이 하나 되는 일은 곧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서 완성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이것은 결단코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 곧 실체가 없는 존재의 향연일 수 없습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인격적이면서도 역사적 변혁의 기쁨이 확산되고 심화되는 하나님나라 잔치 기쁨입니다.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 완성되는 그러한 총체적 잔치의 기쁨이지요. 이것이 종말론의 완성이 아니겠습니까?

    역사 예수, 부활의 그리스도, 승천한 그리스도가 하나님 백성과 함께 모두 실체적 부활의 몸으로 종말적 희망을 역사 속에서 완성하는 일이 바로 오늘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주기도문의 비전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의가 큰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단비처럼 내리는 하나님 사랑 지배가 마침내 이 땅에서 이뤄져서 구원이 완성되고 창조가 원래의 아름다움이 회복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창조와 구원이 아름답게 만나 완성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명 위해 부름 받은 공공적, 감동적, 그리고 변혁적 공동체가 바로 교회 아니겠습니까! 새길교회가 과연 그런 공동체입니까? 이것이 29세가 되는 새길공동체가 메타노이아를 위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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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십일조'라 하지 말아요

    진짜인가, 가짜인가…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의 삶을 통해 선교하라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겁쟁이가 되어 버렸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야고보는 칼로 죽임을 당했고, 사도 바울은 목이 잘렸고,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순교했고, 요한도 결국 밧모섬에 유배되었다. 교회의 역사는 냉대와 핍박과 순교의 역사가 아닌가?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가 이런 교회의 역사를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의 따돌림을 두려워하는가?

    축구 경기를 하다가 이빨이 부러질 수도 있고, 전쟁에 나가 부상을 당하거나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그런데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를 지고, 남들과 다르게 살라'는 말에 놀라서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내가 비웃음 당하는 것이 불공평하니 내게 좀 편한 길을 보여 주세요'라고 말하려는가?"
    - A. W. 토저의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규장)

    내 글은 아무리 생각해도 오래 활동한 선교사님과 보수적인 목회자들에게 불편한 글이다. 그들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정죄하고 부끄럽게 만드는 것만 같고, 나는 그렇지 않으니 내 조언을 들으라고 느껴질 것만 같다. 나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조금 날 선 이 글들은 이후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나 자신을 향한 다짐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대에게 전통을 중요시하는 문화보다, 변질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삶의 모습을 닮아 가게 하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는 언제든지 내 글을 염려하는 조언들을 기다린다. 막연하게 "어른들이 불편해하니까 그런 글 자꾸 쓰지마"라는 질책보다는, 성경적으로 잘못된 해석과 방향이 있다면 그것들에 대해 조언을 해 줬으면 좋겠다. 내 글의 초점은 사실 다음 세대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 혹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이 공감하는 내용이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뒤돌아보는 것이 먼저 아니겠는가.

    나 역시 내가 정해 놓은 답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원하는 대로 이뤄지면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고백하고, 기도한 대로 되지 않으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것이냐고 투정한다. 나도 연약하고 부족하기 그지없는 사람임을 고백하며 글을 나눈다.

    결단의 때를 기억하라

    청년들과 학생들이, 신앙의 선배들이 고루 남겨 주신 좋은 것과 나쁜 것 중에 당연히 좋은 것들만 배우기를 원하는 마음이 크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이것을 명확하게 알려 주지 않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쁜 것도 답습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성경이 사실임을 깨달은 후, 남은 인생을 선교를 위해 바치겠다고 10년, 20년, 30여 년 전에 그분 앞에 결단했을 때를 기억하기 원한다. 어떤 이에게는 최근의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당장 마주 앉은 현실에 무릎 꿇고, 현재 상황에 유리한 말씀을 적용해 가며, 자기 생각을 주님께서 주시는 생각이라 합리화하며 1년, 2년, 그 이상을 살아왔다. 결국 그렇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우선순위로 놓고, 자신의 결단은 잊으려 애쓰며 살았던 시간을 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통해 한국 기독교에서 당연시 여겼으나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 말'을 흔들어 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조심스러운 것이 있다. 내 글의 포인트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은혜로운 말들이기 때문이다. 부디 본질을 놓치지 않고, 지혜롭게 분별하여 삶에 적용하길 소망한다.

    '보내는 선교사'라고?

    첫 번째는, '보내는 선교사'라는 말이다. 요한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으로 보내노라"는 예수님 말씀과 성령을 받을 것을 함께 기록했다. 사실 제자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엄청난 사명을 위한 준비를 모두 끝마친 다음에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는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할 것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내적인 평안과 성령님의 능력이 필수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것이기도 했다.

    주님은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의 어려움이 담대함으로 바뀔 것을 알고 계셨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선교사'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과 함께 동행 하지 않는다면, 머리로만 예수를 알고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다면, 하나님나라 확장에 방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해야 한다.

    그렇게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삶으로 보여 주셨다.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에 대해 가르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에 나가 그대로 하라고 명령하셨다.

    우리가 선교적 삶에 온전히 헌신하지 않고는 선교사로서 삶을 사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사실 선교사로 나가는 사람들은 소수다. 하지만 하나님께 자기 삶을 드리고 선교적으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특정한 몇몇 슈퍼맨만 선교지로 향하고, 다른 사람은 '보내는 선교사'라 구분 지어 놓은 다음 모두에게 선교에 동참하라고 외친다.

    내가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위 사람들에게 내 비전을 외치며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다. 아마 고2 때였던 것 같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내게 어머니께서 어느 날 말씀하셨다.


    "상현아. 일단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 들어가서 돈 많이 번 다음에 빚 다 갚고 나서 선교지로 향하는 선교사를 돕는 '보내는 선교사'를 하렴. 그게 좋지 않겠니?"

    이 말이 틀린 말인가? 아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면 어찌 전파하리요. 가는 선교사가 있으면 보내는 동역자와 교회도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께 되물었다.


    "어머니,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생각해 보세요. 정말 제가 보내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그러시는지, 아니면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 들어가 돈 많이 번 다음 빚 다 갚고 현장으로 향하는 선교사나 어려운 이웃에게 헌금을 해도 한국에서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커서 그러시는 거예요? 양심적으로 대답해 보세요."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답하셨다.


    "시끄러, 이놈아. 어른이 얘기하면 그냥 그런 줄 알아야지 꼭 말대답이야."

    그렇게 대답하시고, 일주일 후 어머니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씀하시고, 그 후로 단 한 번도 '보내는 선교사'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으셨다.

    '가는 선교사', '보내는 선교사'라는 말은 참 좋은 말이다. 필요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자기 생각과 이익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된다면, '보내는 선교사'라는 말은 사라져야 된다. 이것은 성경을 자기 뜻대로 해석하고 자기 마음대로 적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보내는 선교사'의 역할을 마음대로 사용할 때 우리는 '진짜'가 될 수 없다. 이를 누가 가장 잘 아는가? 나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인생의 십일조'라는 말이 갖고 있는 함정

    두 번째는, '인생의 십일조'라는 말이다. 성경에도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말이 언제 어디서 시작됐을까. 언제부터인가 자기 인생의 1/10을 선교로 바치겠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많은 이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누군가가 그런 헌신의 자세로 간증하는 것을 들으면 깊은 감동을 받고 또 도전을 받는다. 하지만 그냥 지나가기에는 불편한 게 있다.

    어쩌다가 '십일조'가 성경에서 말하는 금전적인 측면을 뛰어넘어 인생의 차원까지 확대 해석되었을까. 내가 선교 훈련을 받을 당시 모두 돌아가면서 자기 삶을 간증하며 어떻게 선교 훈련을 받게 되었는지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대부분 은퇴하신 분이 많았다. 마지막에 선교 훈련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앞으로의 각오를 나누었는데, 다들 비슷했다.

    "제가 이제 인생의 십일조를 주님께 드리기 위해 훈련을 받기로 했습니다"라는 말이었다. 인생의 십일조를 주님께 드리는 것, '인생의 십일조'로 선교지에 가서 헌신하는 것, 사실 그 마음은 정말 귀하다. 그렇지 않은가. 선교지로 향하거나, 선교사의 삶을 결단하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이크가 내게 넘어왔을 때, 나는 용기를 내어 말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왜 인생의 십일조만 드리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왜 하필 마지막에요? 젊을 때 자신을 위해 모두 쏟아부었다가 할 것 다 해 보고, 자식 다 키운 다음, 왜 마지막에 인생의 십일조를 논하십니까. 비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인생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느 정도 되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헌신하는 분에게는 사실 해당되지 않는 반론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와 선교지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인생의 십일조라는 말이 그대로 다음 세대에 답습되고 있는 것을 본다.

    젊을 때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다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말씀을 적용하면서 살아간다. 자기가 하는 생각을 주님이 주신 생각이라 합리화하는 데 선수로 살다가, 결국 뒤늦게 깨달아 인생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외친다. 청년들이 이런 말에 혹할까 두렵다.

    일단 돈 좀 벌고, 일단 결혼도 좀 하고, 자리 좀 잡고, 일단 애들 교육 좀 마치고…. 가장 끄트머리에 와서 잠깐 신경 쓰면서 선교사적 삶을 살기 원하셔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 대신 못 박히게 하셨는가.

    결단과 헌신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필자가 사역하는 탄자니아에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정도 단기 선교사로 오는 청년들이 꽤 많다. 그들과 교제할 때, 나는 항상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선교지로 나올 결심을 하게 되었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하다.


    "선교사님, 저는 청년의 때를 십일조로 드리기 위해 나왔어요."
    "저는 20대를 십일조로 드리기 위해 나왔어요."


    "그래, 그 마음 너무 귀한데…. 나머지 인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당신의 아들을 못 박히게 하셨다. 그 희생의 가치가, 그 사랑이 '우리 인생의 십일조', '청년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밖에 안 되는가? 인생 전부를 드려도 부족하지 않은가. 창조된 이유조차 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는 위와 같은 고백들은 당연한 것처럼 대단한 말로 포장되어 사용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할 것이다.


    '이 정도면 하나님을 위해 충분히 했어. 다른 사람들보다 충분히….'

    사실 이 시대는 인생의 10퍼센트를 온전히 주를 위해 헌신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바쁘게 돌아간다. 한국 사회 시스템 속에서, 반강제적이면서도 좋은 핑곗거리인 '인생의 십일조' 통해 사람들이 선교지로 향하기도 하고, 그곳에서 인생의 십일조가 아닌 10의 10을 모두 드리는 경우도 없지도 않다. 그래서 인생의 십일조라는 말을 무조건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님께 인생의 전부를 드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십일조라는 말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여전히 선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번의 사례가 나왔다고 모든 선교 관심자들에게 '인생의 십일조'로 선교사적인 삶을 요구하는 것, 일단 선교지로 나오면 헌신할 것이라 생각해 "인생의 십일조를 먼저 드려라"는 식으로 선교 관심자들을 선교지로 불러내서는 안 된다. 본질을 잃은 것이다. 사역이 끝나면 나의 결단과 헌신에 스스로 만족하며, 남은 인생의 방향을 잘못 잡을 수도 있다.

    당신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선교를 선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된 이유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항상 고민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선교가 바로 그런 이유들의 답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교는 삶이다. 나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세계화로 선교지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 사이의 구별이 크게 의미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일반화된 지 오래다. 대한민국 사회 안에 이미 150만 명이 넘는 외국인 근로자와 20만 명이 넘은 외국인 유학생이 있다. 다문화 가정 비율도 아시아 최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리가 있는 곳이 바로 선교지다.

    선교사로 나가는 것은 사실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선교적 삶을 사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선교적 삶에 헌신하지 않고는 선교사로도 살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늘 인식해야 한다.

    사탄은 본질을 흔들어, 교묘하게 가짜를 진짜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당신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보내는 선교'에 참여할 것인가, '나가는 선교사'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 선교에 참여할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하고 결단하자. 이것이 당신이 창조된 목적이다.

    내가 살아가는 곳에서 먼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한다.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선교는 삶을 통한 선교다.


    학부에서 태권도와 신학, NGO를 공부하고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글로벌거버넌스(Global Governance)를 전공한 박상현 선교사는 인생에서 하나님께 젊음을 드리는 것을 소중한 가치라 여긴다. 박 선교사는 20대에 선교지에 가기 위해 할렐루야태권도선교단 활동을 하며, 29개의 자격증을 취득하고 12번의 선교 훈련을 받은 열혈 청년이다.

    지금은 GMP개척선교회 소속으로 탄자니아에서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를 하며, 할렐루야태권도단을 창단하여 태권도를 통한 선교로 탄자니아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아내 박새롬 선교사와 두 딸 예나, 조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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