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미디어 시대를 위한 효과적 설교 방안: 2015-12-17 11:18:38 read : 1147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침례신학대학교 문상기 교수
서론
설교학은 두 가지 영역에서 연구가 이루어지는 학문이다. 첫째는, 설교는 무엇을 전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으로서 설교의 본질과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논하는 신학적인 문제이다.
둘째는,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하여 초점을 두고 접근하는 것으로서 수사학을 포함한 설교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가장 효율적인 설교는 이 두 가지 영역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때 가능하다.
왜냐하면, 설교의 내용, 즉 성경적 진리가 충분히 밝혀지고 하나님의 이 시대를 향한 계시의 말씀이 왜곡됨이 없이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반면, 아무리 잘 준비된 메시지라고 하더라도 청중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그 말씀은 생명력을 발휘하거나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21세기를 살고있는 현대 교회의 청중은 사회의 빠른 변화와 함께 가치 기준의 혼란을 겪고 있다. 사회가 점차 세속화로 치닫으면서 사람들은 보다 개인적이며 철저하게 존재론적인 양상을 띄고 있다.
이와 같은 의식의 변화는 기독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있는데,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아마도 설교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난 세기까지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경외와 권위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다면,
포스트 모던 시대의 청중에게 설교는 보다 “나” 중심적인 관점에서 어떤 유익이나 필요를 충족 받을 때만이 비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는 지극히 존재론적인 양상을 띄고 있다.
이와 더불어 현대의 가공할만한 테크놀러지의 발달은 전통적인 교회 체제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으며 청중의 설교에 대한 이해와 기대감도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대체적으로 이 시대의 청중은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설교에 대하여 냉담한 편이다.
리모콘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마치 흥미 없는 텔레비전 프로를 즉각적으로 다른 채널로 바꾸듯이 설교 역시도 흥미를 느끼지 못할 때, 그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다. 소위 현대인들의 선택적 청취 현상이다.
현대의 청중이 설교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전통적 설교가 가지는 전달체제 때문이다. 더 이상 청중은 일방적인 선포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이미지와 영상을 선호하는 현대 청중의 의식의 변화에서 오는 현상이다.
현대를 지칭하는 멀티미디어 시대는 문자 그대로 다양한 미디어를 이용한 정보 전달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조성하였다. 매체의 발달 과정에서 보여주듯이 지식과 정보의 전달은 과거의 단순히 쓰고, 읽고, 듣는 단계에서 이제는 이미지와 형상을 통하여 보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설교 역시도 단순히 말하고 듣는 통화 방식에서 이제는 이미지나 영상을 통하여 보여줄 것이 요청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요청에 교회가 만일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프랑스의 커뮤니케이션 학자 피에르 바뱅의 지적과 같이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지 못하게 되고 나아가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며 결국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것이다.1)
이러한 현대 청중의 욕구를 채워주고자 하는 노력으로서 설교의 영상 이용은 그 필요성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문제는 영상을 어떻게 이해 및 수용할 것이며, 어는 수준에서 적절히 사용할 것이냐고 하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여 영상 설교의 필요성과 한계 그리고 그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을 밝혀보고 어떻게 하면 영상에 길들여져 있는 청중에게 보다 효율적인 설교적 통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에 대한 하나의 방안으로서 센스어필을 제시하고 센스어필의 효용성과 활용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I. 멀티미디어 시대와 설교
1. 멀티미디어의 정의
멀티미디어는 최첨단 전자 기술을 이용하여 정보를 처리하는 일체의 기구와 매체 방식을 총칭하는 말이다. 오늘날 급변하는 세계화의 중심에서 이것을 가능케 하는 촉매자가 있다면 다름 아닌 멀티미디어이다. 멀티미디어는 컴퓨터의 발달과 커뮤니케이션이 만남으로써 정보 전달의 획기적인 변화를 주도해나가고 있다.
최인식에 의하면 멀티미디어는: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영상, 문자, 음성 등의 정보를 쌍방향으로 교환할 뿐 아니라 가공, 처리, 축적 등의 목적을 위하여 컴퓨터에 의하여 제어되는, 텔레비전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다.
이는 기존의 양식을 월등히 능가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2) 정보통신 분야에서 미디어(media)란 정보를 담아 전달하는 표현 양식으로서 그림, 소리, 문자, 기호, 화상 및 동화상 등을 포함하며 이러한 단일 매체들을 하나의 통합된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이 멀티미디어이다.3)
멀티미디어 시대는 전자시대로 대변된다. 멀티미디어에 이용되는 모든 기기와 정보 전달시스템은 전기와 반도체와 같은 전자 장치가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2. 멀티미디어 시대의 청중의 특징
매체 발달을 시대적으로 구분한다면 인류는 구전시대, 문자시대, 즉 필사본시대, 인쇄시대를 거쳐 멀티미디어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전자시대에 이르렀다. 구전시대의 통화는 말을 잘하는 것이 요청되었다면, 인쇄시대에는 글로 자신의 이야기를 잘 표현하는 능력이 요청되었다.
그러나 멀티미디어 시대에는 말과 글을 영상이나 이미지와 더불어 총체적으로 잘 표현하는 통화 양식이 요청되고 있다. 따라서 멀티미디어를 대변하는 것은 곧 이미지 또는 영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전자제품의 디지털화는 가전 분야의 전반에 걸쳐 발전을 거듭하고있는 가운데 소리나 문자는 물론 그림 이미지 동화상 등의 범주 안에서 변화하고 있다.
산업화 시대에 인류가 기계문명을 떠나서 살 수 없었듯이 전자시대의 사람들이 멀티미디어 환경 안에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은 이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현대는 교회, 사회, 직장인이나, 학생이나 멀티미디어(컴퓨터)의 영향을 떠나서 정상적인 업무를 해 나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멀티미디어의 출현은 인간의 정신 문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사용하여 온 문자 혹은 구두적 매체는 비교적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체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멀티미디어 방식은 듣고 말하는 기존의 방식에다 전자 매체를 가미한 통전적(wholistic) 의사전달 체제를 사용함으로 정보와 지식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의 보다 복합적인 정신 활동을 요청한다.
캐나다의 커뮤니케이션 학자 마샬 맥루한(M. McLuhan)은 기계문명을 주도해온 서구는 좌 뇌 우위의 통시적(diachronic) 사고의 바탕을 가지고 있고 동양의 종교 문명(비기독교적)은 우 뇌 우위의 공시적(synchronic) 사고의 틀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4)
좌 뇌는 시각적이고 언어적이며,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것으로서 분석적 기능을 한다면, 우 뇌는 청각적이고 촉각적이며, 총체적인 기능 등 직관적이며 감각적인 역할을 한다.
하나의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에서도 좌 뇌 우위적인 사람은 연역적이어서 자신의 주장을 먼저 밝히고 그것을 분석적으로 증명해 나가는 형태를 취한다면 우 뇌 우위적인 사람은 다양한 실례들과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명제를 찾아나가는 형태를 취한다.
전자가 선 추리(priori reasoning) 방식으로 지적인 정보를 주고자하는 특성을 가진다면, 후자는 후 추리(posteriori reasoning) 형태를 취하며 상상력을 발휘하여 창조적인 어떤 내용을 탐구하고자 하는 특성을 가진다.
21세기 전자시대를 살고있는 현대인은 좌 뇌 우의적인 분석적이며 기계적인 사고 체제보다는 우 뇌 우위적인 감각적이며 총체적인 정서 체제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긴 설명이나 주장을 거부하며 많은 양의 좋은 메시지보다는 짧고 속도감 있는 강렬한 감각적 체험을 보다 선호한다.
따라서 멀티미디어 시대의 설교는 다분히 전통적인 방법으로서 선언적이며 주관적인 것보다는 ‘짧은 이야기’ 형식의 플래쉬 커팅(flash cutting, 속보 편집)5)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청중이 스스로 메시지를 영상화 및 종합하여 말씀과 직접 대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대부분의 청중들이 설교자로부터 어떤 지식 전달을 받기보다는 자신의 존재 상태를 설교자를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멀티미디어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은 소리, 문자, 영상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양방향적 통화”시대로서 이주연의 지적과 같이 청중은 개인적이고, 흥미 본위이며, 자연스러움을 선호하고, 성별구분이 모호하며, 자기 사랑에 몰입하는 소위 PANTS(Personal, Amusement, Natural, Transborder, Self-Loving)신드롬 현상이 일반적인 특성을 보인다.6)
멀티미디어 시대는 인류에게 많은 풍요로운 것들을 제공하고 있다. 인류는 그 어느 시대 보다도 삶 속에서 물질 문명의 편리함과 화려한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멀티미디어가 인간 생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 최인식은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지적한다:
첫째, 개인의 심리적 변화이다. 컨트롤에 의한 피해의식의 증대, 과도한 일체감, 대인관계의 변화, 시간적 촉박감, 양자 택일의 사고방식, 스트레스, 우울증, 현실과 허구의 혼동, 현실 인식의 약화, 고정 관념의 조장, 공격성 증대 및 도덕성의 저하 와 같은 결과가 빚어질 수 있다.
둘째, 가정 생활의 변화이다. 가족 간의 유대가 약화되며, 이에 따른 이혼의 증가,
독신 노인의 급격한 증가 및 공동체 의식의 약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가 족 구성원들이 개인 단위의 커뮤니케이션을 행하기 때문에 나오는 환경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직장생활의 변화이다. 실업의 증가와 정보 처리량의 증대로 인한 과중한 노
동, 멀티미디어에 의하여 감시당하는 중압감에 따른 불안 등이 나타날 수 있다.7)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할 때, 멀티미디어는 동시에 인간 사회에 경계심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교회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특성과 이 시대의 사람들의 정서를 잘 이해하는 것은 물론 어떻게 하면 보다 효율적인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3.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설교이해
하나님은 인류 앞에 자신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시해 오셨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구속이었다. 하나님은 또한 인간들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 즉 응답을 원하신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시고 인간들로부터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신앙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신다면 여기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양방간에 일어나는 하나의 상호 작용이다. 커뮤니케이션 이라는 용어가 유래한 라틴어 ‘communicare’는 ‘나누다’ 혹은 더 문자적으로 풀이해서 ‘평균을 이루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공산주의를 지칭하는 ‘communism’은 재산을 균등하게 가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성만찬을 지칭하는 ‘communion’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공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8) 커뮤니케이션, 곧 통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의사를 전하는 쪽으로부터 정확한 메시지가 전달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구약시대는 물론 신약 교회가 시작되면서 설교라는 형태를 통하여 그 분의 말씀을 전하셨다.
그동안 인류가 오랜 세월의 문자시대와 인쇄시대를 지나오면서 하나님은 구두적 방법으로 설교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여 오셨고 인간들은 그 메시지를 충분히 받아들이고 반응하여 왔다. 21세기에 들어선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시기를 원하시며 인간들의 반응을 기대하신다.
그러나 멀티미디어 시대로 대변되는 전자시대의 청중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과거의 시대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변하지 않았으며 그 전달 방법도 여전하지만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청중의 의식구조는 대 변환기를 마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과거와는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고 사물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의사 표현이나 정보나 지식을 받아들이는 면에 있어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소위 커뮤니케이션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는 인류의 문화구조, 사상 구조 및 종교와 신학의 구조까지 변화시키고 있다.9)
이와 같은 매체의 변화에 대하여 윌리암 포어(William Fore)는 어떠한 기독교적 태도가 요청되는지를 말하여준다: “각각의 새로운 세대마다 그 세대의 새로운 기술을 취하고 종교적 진리들을 재발견하며, 그것들이 새로운 문화적 변화에 맞도록 의미를 부여하는 책임이 있다.
이것은 항상 종교적 책임이다.”10) 이 말은 새로운 매체, 즉 커뮤니케이션 문화가 변화를 맞이할 때마다 기독교는 탄력성 있는 반응과 함께 새로운 매체 문화에 적응하여 온 것을 전제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교회는 21세기에 도래한 멀티미디어문화 또한 적절한 수준에서 해석하고 이를 선교, 교육, 말씀 선포에 접목시켜 나가야 할 새로운 책임을 가진다.
II. 영상설교의 필요성과 한계성
1. 영상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는 인류 역사 가운데 관찰되는 기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면서 새로운 문화에 대한 교회의 반응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어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먼저 부정적이라 함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적인 것 또는 사회 규범을 거부함으로써 이방 사회의 관습과 제도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철폐할 것을 요구하는 접근법을 말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는 말씀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반면에 긍정적 측면은, 교회와 사회의 가치관 사이에 근본적인 일치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으로서 예수님도 민주주의적 원리와 조화하여 평화롭고 어우러져 사는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 역사 하시는 분으로 보는 견해이다.11) 21세기의 전자시대가 꽃피운 멀티미디어가 낳은 영상이라는 문화 또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가진다.
1) 긍정적인 면
기독교회는 지금까지 역사 가운데 새롭게 등장했던 매체 문화들을 거부해오지 않았다. 퀸틴 슐츠(Quentin Schultze)는 교회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매체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왔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신 과학 기술을 매스 커뮤니케이션에 접목시키는데
앞장섰었음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초기 식민 시대의 도서 출판에서
시작하여 19세기 말까지는 정기 간행물을 출간하였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라
디오, 1950년대에는 텔레비전,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위성 방송에 이르기까지 민
첩하게 신 과학 기술을 받아들였다.12)
이와 같이 교회가 역사 가운데 등장하는 매체에 대하여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것으로 보아 21세기에 도래한 새로운 전자 매체 사용은 점차적으로 교회 안에 그리고 기독교 사역에 보편화 될 것이라 짐작이 된다. 전자시대의 특징인 영상 매체 사용이 설교와 관련하여 아직은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점차적으로 이들을 이용한 적극적인 활용 방안들이 활성화 될 것이다.
어떤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 기존 세계에 대하여 갈등을 빗어 낼 수 있다. 새로운 매체는 기존의 매체에 위협적인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토니 렌츠(Tony Lentz)의 말처럼 새로운 매체와 기존의 매체 사이에 이런 긴장이 일어날 때,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활짝 피어나는 일도 동시에 기대 할 수 있다.13)
따라서 새로운 영상 매체에 대하여 교회는 보다 긍정적인 태도와 함께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창출해내는 선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새로운 영상 매체를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는 보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기독교 문화 창출의 기회로 삼거나, 새로운 기독교 사역(선교)의 전략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보는 것이 필요 할 것이다.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문화의 본질은 종교이고 문화는 종교의 외피[외적 표현]이다”14)는 말은 이 시대의 인간의 문화를 생성시키는 최고의 배양자로서 영상은 인류에게 신화, 교훈, 삶의 규범은 물론 종교에 관한 새로운 표현을 제공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따라서 멀티미디어 시대의 지배적인 영상 문화는 기독교 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될 것이고 동시에 기독교는 영상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의해 적절하게 표현되어야 할 필요를 가진다.
2) 부정적인 면
(1) 영상에 대한 청중의 해석의 다양성
하나 하나의 영상 장면은 각각의 이미지를 통해서 실어나르는 메시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하나의 영상물 안에는 연출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적인 생각이나 사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이란 복합적인 이미지나 복선이 깔린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청중에 따라 영상이 주는 메시지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 질 수 있다.
언어가 철저히 배제되고 영상만을 가지고 연출가가 자신이 의도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한다는 것은 한계점은 물론 어쩌면 위험성도 가진다. 왜냐하면 그 영상을 해석하고 그 안에 담겨있는 메시지를 찾는 것은 전적으로 시청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맥루언은 이 문제와 연관하여 매체를 뜨거운(hot) 매체와 차가운(cool) 매체로 구분하면서 설명한다. 뜨거운 매체는 하나의 감각 기관에 의해서 높은 전달효과(high definition)를 이루게 하는 매체라고 정의하는데 인쇄와 라디오가 이에 속한다.
여기에서는 독자의 어떤 주관적인 해석이 불필요하다. 반면에 차가운 매체는 텔레비전이나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로서 특정 화면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시청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동시에 요청된다.15)
영상으로 설교가 이루어진다고 할 때, 설교자가 얼마나 정확하게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청중에게 전달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가장 중대한 사항이 될 것이다. 만일 설교가 정확한 메시지의 구두적 제시가 없이 어떤 특정한 영상에 의존할 때 청중은 그 안에서 어떤 메시지를 부여받기보다는 영상의 강렬한 인상만을 기억하게 될 수 도 있다.
따라서 건전한 영상 설교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청중의 수준 높은 의식이 요청된다. 즉, 텔레비전을 비롯한 영상물을 볼 때, 시청자가 영상이 주는 이미지들을 말이나 사상으로 바꾸어 생각하여야만 비로서 비판적인 시청이 가능할 것이다.16)
만일 사람이 텔레비전의 특정한 장면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에 관계없이 단순히 바라만 보는 것처럼, 영상 설교에서 청중이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메시지에 관계없이 단순히 영상을 시청하는 것에 머문다면 영상은 오히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저해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정리된 메시지가 제시되지 않는 영상 설교는 심각한 위험성을 가진다.
(2) 영상 매체의 비인격적 한계성
20세기의 탁월한 설교자 필립스 부룩스(Phillips Brooks)는 설교를 한 인격체를 통하여 전달되는 진리라고 천명하면서 인격적인 통로로서의 설교자의 역할을 지적하였다.17)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설에서 수사학적 세 가지 요소를 지적하면서 로고스(logos: 이성적 호소-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으로서의 진리),
파토스(pathos: 감정적 호소-청중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 그리고 에토스(ethos: 인격적 호소-청중에게 전달되는 연사의 인격적 요소)를 들었다. 하나의 사상이 연사를 통하여 전달될 때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중요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중에 에토스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지적하였다.18)
아무리 논리 정연한 말씀(연설 내용)을 전함으로 청중을 감동시킨다 할지라도 그 메시지를 실어나르는 연사의 인격이 청중에게 거부된다면 그 메시지는 청중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서 전달 매체요 전달의 주체로서 설교자의 인격적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사실이다.
매체가 하나의 메시지라고 하는 맥루한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전달되는 내용은 어떤 매체를 통하여 전달되느냐에 따라 그 효과에 있어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비인격적 기계 매체에 의하여 전달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한계를 가진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계시하실 때, 형상이나 도구를 사용하기보다는 인격체(선지자 혹은 설교자)를 들어 구두적 방법으로 선포하셨다.
이것은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선포자라는 인격체를 통하여 청중의 인격적인 변화를 목적으로 말씀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인식은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우리는 복음을 문자, 소리, 영상 등과 같은 형식에 담아 책이나 팜플릿, 라디오, 녹음 테이프, 영화, 텔레비전 등의 매체로 전달해 왔다.
그러나 메시지가 익명의 비인격적 미디어로 전달되는 것과 인격적 미디어로서의 설교자를 통해서 직접 전달되는 것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19)
물론 복음이 영상이나 드라마 등을 통해서 전달 될 수 있을 것이다. 청중은 여기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고 인정하게 되고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라는 인격체를 통한 살아있는 만남, 즉 감정을 가진 인격체와 인격체와의 교감을 통한 감동을 재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최인식은 “멀티미디어가 시공간의 제약을 놀라울 정도로 극복한 혁신적 정보통신의 방법이라 할지라도, 사람간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한 복음의 메시지 전달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20) 월드컵 경기를 텔레비전을 통해서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직접 경기장을 찾는 것은 보다 생생한 현장과의 접촉을 원하기 때문이다.
멀티미디어가 제공하는 여러 가지 유익한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름 받은 설교자가 인격적인 하나님의 메시지를 성령의 능력에 의지해서 청중의 가슴과 심령 깊은 곳에 전달함으로 그들의 영혼과 삶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요 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2. 멀티미디어 시대와 영상설교
매스 미디어에 새로운 이해를 촉진시켰던 마샬 맥루한(M. McLuhan)은 매체는 곧 메시지라는 이론을 제시함으로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21) 그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의 내용 그 자체보다 메시지를 실어나르는 매체이다.
설교와 연관하여 맥루한의 주장이 과거 그가 처음 이 말을 하였을 때보다도 오늘날에 이르러 더 각광을 받는 것은 전통적인 설교 전달(구두적 선포)이 매체 문화의 변화와 함께 더 이상 효과적인 전달법이 될 수 없음과 새로운 매체에 의한 전달 방법이 요청되는 현실적인 현상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맥루한의 주장을 오늘 기독교 설교에 접목을 시킨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곧, 오늘날과 같이 영상이 선호되는 시대적인 조류 속에서 설교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 자체로 보다 어떤 매체를 통하여 전달되느냐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명제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상이나 이미지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의식구조를 고려할 때, 가장 효율적인 진리의 전달을 위해서 영상 설교의 현실적 요청이 고려된다는 것이다.
영상설교(image preaching)는22)단편적인 이미지나 정지 화면을 이용하는 것에서부터 전면적으로 동영상을 설교에 접목시키는 것을 말한다. 일각에서는 설교 내용을 완전히 극화한다거나 동영상을 제작하여 설교를 대체하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맥루한에 의하면 텔레비전은 전자시대의 가장 대표적이고 핵심적인 매체이다. 텔레비전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 기관을 동원하여 사물이나 정보를 인식하게 함에 있어 가장 획기적인 영향을 준다.
그것은, 단순히 일방적으로 전하는 구두적 메시지에 비하여 영상을 통하여 전달되는 메시지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전 감각, 즉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을 전면적으로 동원하여 그 실체를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다.
최인식은 설교를 어떻게 멀티미디어에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메시지가 멀티미디어 화 할 때 그 전달력은 지대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어떻게 메시지를 멀티미디어 화 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메시지를 어떻게 여러 감각을 총체적으로 살리는 ‘드라마’로 만들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23) 이와 같은 요청은 오늘날 변화하는 청중의 의식에 따라 설득의 목적으로 설교하는 설교자에게는 하나의 도전으로 주어진다.
3. 영상설교에 대한 신학적 해석
현대 설교자들이 자칫 범할 수 있는 위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 시대의 틀이나 매체를 정당한 신학적 성찰 없이 받아들이고 사용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 던져지는 프래그매티즘, 곧 실용주의에 대한 경고는 바로 이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가시적 결과를 근거로 실용성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는 것이 프래그매티즘의 맹점이라고 한다면 단순히 메시지의 통화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어떠한 형태의 매체이든 거부감 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발상 또한 같은 맥락에서 위험성을 가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상설교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필요성을 가지게된다. 최인식은 다음과 같이 이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설교자들이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시대의 틀에 맞추어 전달하는 것이다. 특히 뉴미디어가 등장하게 되면 정당한 신학
적 반성의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서둘러 뉴미디어가 제공하는 새로운 기능을 통
해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뉴미디어란 단순한 매
개자만이 아니라, 세속적 정신을 반영하는 하나의 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 복음을 땅 끝까지 전달하라는 마태복음 28:18-20의 내
용은 ‘위대한 사명’(Great Commission)이 아니라, ‘위대한 캠페인’(Great Campaign)
으로 축소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뉴미디어에 적응시킴으로
써 시대적 흐름과 유행이 제공하는 페러다임에 하나님의 말씀을 맞추는 격이 되는
것이다.24)
이 시대가 선호하는 통화의 매체가 영상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대하여 설교는 어떠한 신학적인 입장을 취할 것인가? 일방적으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영상을 띄우고 영상으로 설교를 대신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부분적으로만 영상을 이용할 것인가? 그리고 과연 영상매체의 이용은 설교의 통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은 현대 설교가 먼저 바른 신학적 입장을 세울 때, 적절히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물론 이 점에 있어 기독교가 제시하고 있는 신학적인 답변은 아직까지 미미하다. 다만 여기에서 필자는 두 가지 관점에서 그에 대한 작은 시도를 꾀하고자 한다
1) 영상설교에 대한 신학적 입장
만일 현대교회가 영상 설교에 대한 전적인 수용을 할 수 없는 입장을 취한 다면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매체에 대한 생경(生硬)함에서 오는 일종의 거부감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영상 자체를 띄움으로 말미암아 설교의 메시지가 약화 내지는 사장된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음의 메시지는 구두적 전달일 때에만 정당성을 가지는가? 또한 구두적 메시지 전달은 당시(각 시대에)로서 전달 방법의 최선책이었기 때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방법으로 볼 것인가?
만일 구두적 방법이 문화적 상황에서 최선책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문화의 변화에 따라 전달 매체는 반드시 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고유한 방법이라면 설교에서 영상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른 각도에서 고려하여야 한다.
긍정적 관점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일체의 멀티미디어 방식을 긴요한 선교전략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 수용 가능한 매체를 필요 적절하게 이용하되 중요한 것은 말씀의 구두적 선포라고 하는 설교의 고유한 정체성을 교회는 동시에 지켜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최인식은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 . 전통적인 교회 강단의 설교는 성서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멀티미디어라는 뉴미디어 시대에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복음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설교자의 인격을 매개로하여, 듣는 자와 일 대 일로, 인격적으로 부딪치는 실제적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25)
설교자는 말씀 증거에 있어 청중의 변화 욕구에 부응하여 복음의 전달에 있어 영상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상이 곧 설교일 수 없으며 영상으로만 복음이 전달되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단, 설교의 보조 장치로서 설교자는 보다 효율적인 말씀의 통화를 위하여 영상을 어떻게 어떠한 수준에서 이용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구두적 사건으로서의 설교
구약에서 보여주는 여호와 종교는 구두적(oral) 계시의 종교였다. 하나님의 인간들을 향한 전통적 계시의 방법은 구두적 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들 앞에 계시함에 있어 의도적으로 시각적인 것을 회피하셨다.
십계명의 제 이 계명은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섬기지 말 것을 명한다. 구약에서 보여주는 교훈 가운데 하나는 보이는 것은 신적인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 신앙과 이방 종교와의 극적인 차이는 다름 아닌 섬김과 신앙의 대상이 인격적인 존재냐 아니면 형상을 가진 비인격적 존재냐 하는 문제였다.
이방종교는 언제나 시각적인 형상, 즉 보여지는 것을 신으로 섬겼으나 거기에 계시는 없었다. 반면에 여호와 신앙은 언제나 시각적인 형상을 거부하였으며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의존하여 인격적인 하나님을 섬겼다.
물론, 하나님의 자기 계시 방법은 언제나 일방적인 선포 방법으로만 행하여지지 않았다. 모세를 부르시던 하나님은 불꽃 가운데 나타나기도 하셨고 아브라함과 야곱에게는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나타나기도 하셨다.26)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어떤 물체을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구두적 계시로만 자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은 구두적 메시지를 통하여 계시를 완성하셨다.
불꽃 속에서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의 뜻을 모세에게 전하셨고, 사람의 몸을 입고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분명하게 구두적으로 전하셨으며,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또한 구두적 증거를 떠나서는 불완전한 현상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27)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구두적 계시나 선포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형상은 일종의 보조 수단이었다.
신약성경에서 보여주는 설교는 하나의 구두적 사건(oral event)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격적인 설교자를 통하여 계시하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 (히 1:1-2)”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곧 구두적 선포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통화하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구두적 사건이었다.
시각적인 매체는 성서시대에도 이방 종교에서는 보편적이었으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계시는 다분히 구두적이다. 따라서 영상 자체만으로는 설교가 될 수 없다.
다만, 만일 설교의 주도자가 여전히 설교자라면 메시지의 통화(communication)차원에서 그 효과를 높이고자 하는 시청각 보조장치로서의 영상 사용은 가능할 것이다.
III. 멀티미디어 시대의 효과적인 설교 전달 방안으로서의 센스어필
1. 센스어필의 정의와 필요성
센스어필이란 구두적 메시지를 전함에 있어 청중의 감각 기능을 활성화시킴으로 청중으로 하여금 전달되는 메시지를 느끼고, 체감하며, 나아가 시각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통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인 J. 아담스(Adams)는 센스어필이란 “설교 시에 외적인 자극 없이 오직 언어로 청중의 오관을 활동시키는 기술”28)이라고 정의했다. 아담스는 위대한 설교자였던 촬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의 설교의 주요한 특징이 곧 ‘센스어필’이라고 주장하면서 현대설교의 센스어필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센스어필은 원래 인간의 감각적 체험을 설명하는데 쓰인 심리학적 용어를 문학 용어로 전용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의식 속에 떠오르는 감각적 지각의 대상을 센스어필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문학에서 말하는 센스어필은 이런 심리적 현상과 구분된다.
문학적인 용어로서의 센스어필은 의식 속에 떠오르는 감각적 지각의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적 대상을 환기시키는 언어인 것이다. 이렇게 감각적 대상을 환기시키는 언어는 비유적 언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센스어필은 그림, 사진 도안 같은 도형적 이미지, 영상이나 투사 같은 광학적 이미지, 감각자료나 외모 같은 지각적 이미지, 꿈이나 기억이나 관념이나 환상 같은 정신적 이미지, 은유나 직유 같은 언어적 이미지도 포함한다.
따라서 설교와 연관하여 센스어필은 문학적 양식을 포함하여 다양한 통화적 기법을 이용하여 청중으로 하여금 보다 그들의 감각 기관을 활용하여 메시지를 체험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밝힌데로 오늘 기독교 설교는 영상으로 특징 지워지는 이 시대의 욕구를 간과 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도전의 물결을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현상은 마치 파도타기와 같다.
밀려오는 파도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밀려오는 파도를 잘 타고 넘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무분별한 영상의 도입만이 대안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 설교는 일종의 딜레마에 빠져있다.
영상 문화에 젖어있는 청중의 필요라는 하나의 세력과 설교는 구두적 선포라고 하는 신학적 명제 사이에서 이 시대의 설교자는 두 가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필요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설교자는 설교에 있어 센스어필의 필요성과 이에 대한 시대적 요청을 발견하게 된다.
2. 센스어필의 형태
센스어필은 앞서 기술한데로 감각적인 호소를 일컫는다. 센스어필의 효과를 기대하는 설교자는 직접적인 호소, 질문, 시어의 사용, 상상력 발휘, 서술적 묘사 등의 생동감 있는 언어의 표현 기법을 통하여 청중의 감각에 호소하여 자신의 설교에 청중을 참여시킨다.
현대 설교가 브라이언 채플(Brian Chapell)은 청중에게 지평을 보여주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의지를 불러일으키라고 설교자들에게 도전한다.29) 탁월한 설교가 스펄전은 그의 탁월한 언어 구사력과 함께 의식적으로 청중들을 위해서 언어 그림(word picture)을 그리며 설교하였다.
스펄전은 사람이 마음의 눈을 가지고 언어의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스펄전은 청중들이 모든 감각을 다 사용하도록 의도적으로 감각호소적(sense appeal)설교를 작성하였다: “
그러나 여기를 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려있는 저 분을 당신은 보는가요? 그의 가슴위로 고요히 떨어지는 그의 고통스러운 머리를 바라봅니까? 죄인이여! 당신은 그의 머리가 죽음 속에 매달려 숙여져 있는 것을 목격합니까?
창으로 꿰뚫린 부분과 십자가에서 내려진 시체를 봅니까? 오! 그대여, 이곳으로 오십시오!”30) 여기에서 스펄전은 청중으로 하여금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마음으로 십자가의 생생한 장면들을 그릴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처럼 센스어필이란 설교자자 청중의 마음속에 마음껏 감각적 반응이 일어나도록 직유, 은유, 비유 등의 다양한 표현법을 통하여 그림 언어를 제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은 시각, 청각 외에도 후각, 촉각, 미각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센스어필에는 시각적 센스어필, 청각적 센스어필, 후각적 센스어필, 촉각적 센스어필, 미각적 센스어필이 있다.
아담스는 그의 책 ‘설교연구’에서 스펄전의 설교에 나타난 감각 호소(sense appeal)에 대하여 폭넓게 논하고 있다. 그는 스펄전의 설교에 나타난 다섯 가지 영역의 센스어필 기법을 직접적인 호소와 간접적인 호소, 두 영역으로 나누어 실례를 들어 심도 있게 논하였다.
1) 직접적인 호소
직접적인 호소는 대개의 경우 명령이나 질문 등을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보라,” “그곳을 보십시오” 라고 말함으로 매우 강렬하게 시각 및 다른 감각기관에 직접적으로 호소함으로서 반응을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스펄전은 자신의 회심에 대한 간증을 직접적 감각으로 청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나는 조그만 예배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키가 크고 깡마른 사람이 설 교단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그는 성경을 펴 읽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땅 끝의 모든 자들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
아, 나는 땅 끝에 있는 자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서 그는 돌아보면서 마치 나를 알 고 있는 것처럼 응시했다. 그는 말했다. “보라, 보라, 보라.”31)
스펄전에게 있어 자신을 회심시켰던 이 한편의 설교가 깊은 인상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설교자의 감각에의 호소의 직접적인 사용이 매우 특이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직접적인 호소는 시각과 청각적 요소가 빈번히 사용된다. 다음의 보기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여기를 보십시오-십자가에 달려있는 저분을 당신은 보십니까? 그의 가슴 위로
고요히 떨구어진 그의 고통스런 머리를 바라봅니까? 그의 볼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의 원인이 되어 있는 저 가시 돋친 면류관을 봅니까?
꿰뚫려 갈라진 그의 두 손 과 잔인한 두 못으로 거의 쪼개어진,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그의 신성한 발을 당신은
봅니까? [여기까지는 시각에의 호소이고, 이제부터 청각적 호소가 사용됨] 죄인이여! 당 신은 그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는 외마디 소리를 듣습니까?
당신은그가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까? [다시 시각적 호소가 사용됨]당신은
그의 머리가 죽음 속에 매달려 숙여져 있는 것을 목격합니까? 창으로 꿰뚫린 부분과 십
자가에서 내려진 시체를 봅니까? 오! 그대여, 이곳으로 오십시오!32)
여기에서 스펄전은 시각과 청각의 감각을 결합하여 직접적으로 청중의 감각에 어필하고 있다.
2) 간접적 호소
직접적 감각의 호소에는, “보라, 느끼라, 바라보라, 생각해 보라” 등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면, 간접적 감각의 호소는 언어묘사(word description)를 수단으로 하는 감각의 간접적인 자극이라고 할 수 있다.
간접적 감각의 호소는 특히 시적인 표현, 감동적인 어구, 풍부한 형용사와 수식어의 사용 등을 통하여 청중의 감각적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것으로서 설교자의 탁월한 언변력과 상상력이 뒷받침 될 때, 더욱 빛을 발 할 수 있다.
설교자들 가운데도 특히 우 뇌가 잘 발달된 사람일수록 이 부분에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설교의 역사 가운데 간접적 감각의 호소에 뛰어났던 설교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스펄전과 같이 이 부분에 탁월하였던 사람도 흔치 않다. 다음은 간접적 감각의 호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의 설교문의 한 부분이다:
만일 우리가 그를 찬양하기를 그친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잊혀질까요? 아닙니
다. 돌들이 노래할 것이며, 언덕이 관현악이 될 것이며 산들이 양처럼 뛰놀 것입니다. .
. 태양이 합창을 지휘할 것이며, 달은 그의 은빛 하프를 연주하면서 그 소리에 달콤하게
노래할 것입니다. 별들은 그들의 율동적인 코스에 따라 춤출 것입니다. . . 그리스도의
이름이 잊혀질 수 있을까요? 아니요. . . 바람이 그것을 속삭일 것이며, 폭풍우가 그것을
소리칠 것이며 바다가 그것을 영창 할 것입니다. . . 가축들이 그 이름을 굵은 소리로
울부짖을 것이며, 뇌성은 그것을 선포하고, 땅이 그것을 소리치며, 하늘이 그것을 메아
리칠 것입니다.33)
위의 경우, 청각에 대한 간접적인 호소는 많은 부분이 사람의 목소리를 포함하여 노래에 관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자연의 소리도 등장한다. 그 음향들은 때로는 감미로움과 아름다움을 자아내기도 하는 반면 가축소리나 뇌성과 같은 자연 음이나 둔탁한 소리를 느끼게 한다.
이 짧은 예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영원히 찬양 받는 대상이 될 것을 청각을 이용하여 청중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스펄전의 설교 안에는 간접적인 호소는 청각은 물론 시각, 후각, 미각, 취각 등 모든 감각 기관을 활용하는 많은 예들을 볼 수 있다.
시각과 미각에의 호소하는 스펄전의 가장 생생한 언어 그림 중 하나는 ‘꿀로 가득한 두 손(Hands Full of Honey)’이라는 설교에 잘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사자의 시체에서 꿀을 취한 삼손에 비유된다:
“양손에 꿀을 가지고 잔치를 계속하면서 그는 주위에 둘러서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의 즐거움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오, 맛을 보고 주의 선하심을 알라. 그를 믿는 자는 복되도다.”34)
후각적으로도 간접적인 호소를 나타내 주는 좋은 예가 있다. 스펄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습을 후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예수) 묘실을 향기로 가득 채우기 위하여 땅속에서 잠시 동안 쉬어야 했습니다.”35) 또한 복음 증거를 언급하면서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복음의 귀한 향기가 대기를 향기롭게 하기 위하여 밖으로 쏟아져야만 합니다.”36)
스펄전은 청중의 감각에 호소하기 위하여 의도적인 노력을 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을 하나님의 은혜로 적셨던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의 탁월한 능력은 다름 아닌 감각에의 호소에 있다. 만일 스펄전에게서 감각호소를 제거한다면, 그의 설교에는 활기찬 생명력이나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감동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3. 센스어필의 구성 요소
센스어필은 인지력, 상상력, 그리고 묘사력 등 세 가지 요소가 적당히 결합될 때 생산된다. 여기서 말하는 인지력은 감각의 영역 그 자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감각의 인지는 센스어필을 위한 원료를 확보하는 것과 같다. 설교자가 예민한 인지의 감각이 없을 때 센스어필은 원료가 부족하게 된다.
인지된 원료가 공급되지 않을 때 통합적인 상상력은 마치 가동이 중지된 기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감각인지는 기억을 더듬어서 상상력에 풍부한 활력을 주는 것이다. 상상력은 계시된 진리와 감각 자료들을 연관시키기 위한 종합 능력이다. 생각 중에 있는 설교문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인지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센스어필에 있어서 통합적인 상상력인데, 만일 통합적인 상상이 빈약하다면 설교의 메시지는 천박하고 진리와는 상관없는, 원료가 거칠고 불합리하며 호소력 없는 형태로 전달될 것이다. 즉 통합하는 상상력은 영상 속에 있는 생각들을 다듬고, 그것들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묘사력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진리에서 받은 동일한 감각적인 감화와 동일한 통합체를 다른 사람들에게 묘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비록 하나의 개념이 인지되고 훌륭하게 통합되어 감각에 호소할 준비가 되었다 할지라도 사실적인 묘사력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으면 쓸모 없는 생산품과 다를 바가 없다.37)
센스어필에 대한 지금까지의 분석으로부터 모든 설교자가 배워야 할 하나의 교훈은 센스어필은 정보화시대의 물결을 타고 영상을 선호하는 이 시대의 청중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싫어 나르는 도구로서 반드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과제라고 하는 사실이다.
센스어필은 이 방면에서 설교자가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고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함으로 주어지는 결과이며 센스어필을 형성케 하는 인지력, 상상력, 묘사력은 풍부한 독서가 뒷받침 될 때 얻을 수 있다.
스펄전은 그의 설교학 강의에서(Lectures) 센스어필 활용을 위한 설교자의 노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권면 한다: “착상의 축적 바로 다음가는 것은 풍부한 어휘이다. 아름다운 말들과 우아한 연설, 무엇보다도 설득력 있는 문장들을 발췌해야 하고 암기해야 하고 모방해야 한다.”
38) 특히 설교자의 풍부한 문학적 표현은 다양한 독서와 그것을 종합하여 하나의 메시지 화 할 수 있는 상상력, 그리고 그것을 표현 할 수 있는 언어구사력에 의존한다. 센스어필을 통한 설교사역이 좋은 결실을 거두려면 무엇보다도 설교자의 의식적인 연습과 훈련이 요청된다.
4.. 센스어필을 위한 상상력(창의력) 개발
하나의 설교 씨앗이 심기어져서 완성된 설교가 나오기까지는 일정한 시간과 단계가 요청된다. 마치 이것은 농작물이 자라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충분한 시간 속에서 영양분이 공급된 씨앗은 좋은 결실을 할 것이나, 충분히 숙성되지 못한 작물을 서둘러 수확을 하게되면 실한 열매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종류의 학습이나 배움은 시간을 통해서 이루어지듯이 한 편의 설교 역시도 충분한 시간이 뒷받침될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하여 그 폭과 깊이를 겸비할 수 있다.
설교에서 창의력은 설교자의 폭넓은 상상력과 함께 발휘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생리학적으로 인간의 두뇌는 양분화 되어있는데 좌 뇌는 수학이나, 추리, 등 인식적이며 논리적인 사고의 기능이 두드러지는 반면, 우 뇌는 음악, 미술, 등 예술적이며 창의적 기능을 한다. 좌 뇌가 어떤 사실들을 모으고 논리적으로 분석한다면 우 뇌는 모아진 정보를 특징적으로 분류하고 총체적으로 종합하여 표현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때 우 뇌는 수집된 정보를 실어나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감성적인 기능을 발휘하는데 여기에서 상상력은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된다.39) 폴 윌슨(Paul Wilson)은 상상력은 설교자에게 있어 가치 있는 자산임을 강조하면서 상상력은 창의적 사고의 한 형태라고 설명한다.40)
상상력을 소유하지 못한 설교자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설교자들이 상상력의 가치를 신뢰하지 못하거나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센스어필은 풍부한 은유법이나 비유법 사용이 요청된다. 그것은 이미지나 영상에 길들여져 있는 21세기 청중에게 그림 언어를 통하여 청중의 감각에 호소하기 위함이다. 은유나 비유를 통한 언어 묘사는 결국 설교자의 상상력이 발휘될 때, 높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는 상상력을 개발시키기 원하는 설교자들에게 다음 몇 가지의 내용으로 권면 한다.
첫째, 창조력은 삶의 방법이며 특별히 어떤 것에 도전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창조적이기를 바라는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창조적인 삶을 살기 위한 훈련 지침을 따르기보다는 창조력을 개발할 수 있는 보장된 공식이나
빠른 지름길을 찾는다고 지적하면서 모든 사람이 따르는 일정한 규칙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규칙에서 자유로워질 때 창의성이 나온다고 역설한다. 그는 규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은 모방자가 되지만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창조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둘째, 창조적인 삶의 스타일은 균형 잡힌 삶이라고 말한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창조적인 사람은 평범하며 균형 잡힌 삶을 산다고 말하면서 그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 특징들로서, 창조적인 사람들은 민첩하며 주변의 정황에 주의를 기울이며 관찰하고 귀담아 듣기 때문에 행복이나 불행 모든 삶의 경험으로부터 창의성을 발휘하는 점을 들고 있다.
셋째, 창조적인 사람들은 독서가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사람들에게 있어 다른 어떤 능력과 같이 상상력 또한 건강하고 우수한 상상력이 되기 위해서는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상상력이 최고의 것으로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 가장 불량한 것이 될 것이며 불량한 상상력은 불 경건해지거나 쇠약한 것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창조적인 설교자는 그들이 듣는 것, 보는 것, 읽는 것, 그리고 숙고하는 것을 통하여 그들의 상상력에 자양분을 공급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특히 독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강조한다.
넷째, 위어스비는 창조적인 사람은 어휘력을 키워나간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어휘는 등불과 같아서 보는 것이나 세워나가는 도구로서, 개념을 파악하게 하며, 그리고 때로는 싸울 때[논리를 세울 때] 도움을 주는 무기로서 설교자들을 돕는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창조적인 사람들은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혁신에는 언제나 위험이 뒤따르지만 창조적인 사람들은 정당한 기회들을 도전의 기회로 삼으며 실패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41)
위어스비의 주장은 창조력을 개발하기 위하여 설교자들이 부주의 스러워져야 한다거나 경솔하고 무분별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시도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늘 새로운 생각, 새로운 어휘, 새로운 진리, 새로운 표현법, 나아가 새로운 정신으로 날마다 자신을 신선한 말씀의 도구로 개발시켜 나가야 한다.
21세기의 청중은 변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들 주변의 모든 것들은 순간순간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반면에 설교자들이 증거 하여야 할 말씀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 말씀을 실어 나르는 도구는 언제나 상황에 민감하게 변화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창조 정신을 가지고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자. 그리고 청중의 감각에 호소하는 메시지를 전하자. 청중을 설교의 무대위로 기꺼이 불러들여 그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자세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자.
결 론
맥루한의 분석에 의하면 의사전달 수단은 음성, 문자, 시청각으로 나뉘어 지는데 음성은 청각으로 정보를 전달하며 인간의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문자는 시각에 의해 정보가전달되고 분산적 반응이 일어난다면, 시청각은 촉각에 의해 정보가 전달되고 이때 인간은 전체적으로 반응을 하게 한다.
즉 이것은 시청각적인 정보가 전달될 때, 인간은 그의 감각을 전체적으로 동원하여 반응을 보인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설교 전달에서 청중으로 하여금 그들의 감각을 폭넓게 이용하여 말씀에 반응하게 하는 것이 매우 효율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준다.
구전시대에는 설교를 위해서 말을 잘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문서 시대에는 말은 잘 못해도 글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 요청되었다면, 멀티미디어 시대의 설교를 위해서는 말과, 글과, 그림을 하나로 잘 조화시키는 전달력이 필요하다.42) 아마도 이와 같은 필요는 센스어필에 의해서 상당히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전자 시대가 빚어낸 멀티미디어라는 새로운 문화와 더불어 기독교 설교에 불어닥친 ‘영상설교’라고 하는 거센 물결을 설교자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활용할 것인지를 밝혀보고자 한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었다.
필자는 영상 무용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영상의 한계성을 설교자들이 문화적(매체로서의 영상의 장단점)관점에서 이해하고 또한 신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평가하고 하나님의 말씀 선포에 있어 건전한 범위 안에서 비평 수용하자는 것이다.
아울러 여전히 구두적 선포라는 전형적인 방법을 가지고 영상과 이미지에 길들여진 청중에게 효율적인 설교 커뮤니케이션을 이루기 위하여 영상적 언어 사용, 곧 청중의 감각을 활성화시켜 청중으로 하여금 구두적 설교를 입체적으로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센스어필을 활성화시키자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