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시대, 새롭게 설교하기(I)1) 2015-12-17 10:52:39 read : 996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 운 용 (장신대 교수, 예배/설교학)
철새인 야생오리는 결코 한 곳에 안주하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고 기온이 떨어지면 야생오리는 즉각적으로 그에 대처한다. 도래지 저수지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는 것 같지만 환경이 변화하면 언제든지 비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야생오리는 새로운 환경에 잘 대처하면서 그 생명력을 유지해 가는 심벌과 같다. 그래서 한때 세계 컴퓨터 시장에서 제왕과 같이 군림했던 IBM은 야생오리를 그 상징물로 삼았다.
길들여지지 않았으나 질서가 있고, 작은 몸뚱이나 강한 생명력을 가졌고, 한가롭게 놀고 있는 것 같으나 가장 뛰어나게 변화에 대처해 나가는 야생오리와 같이 서려는 그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리라. 그러한 그들의 열망은 첨단을 달리는 강력한 회사를 이루게 했으며, 그들의 상징, 야생오리와 같이 급변하는 세계 시장의 판도를 먼저, 명확하게 읽어가면서 IBM은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세계의 컴퓨터 시장을 열어갔다.
그러나 어떤 야생오리는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먼 거리를 여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에 널려 있는 옥수수에 맛을 들이면서 힘겨운 긴 여정을 포기하고 안주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꼼짝없이 계절의 변화 앞에서 얼어죽게 된다.
한때 IBM도 자만심에 빠져 안주하고 제왕의 자리가 주는 안락함을 탐닉하고 있다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비상은 커녕 점점 추락하게 되었다. 물론 나중에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서 그들은 다시 회복하게 되지만 말이다.
“변화에 대한 민감함, 적절한 대처로서의 비상, 생명력”이라는 이 세 가지 요소는 상호 연관성을 가진다. 변화에 민감할 때 적절히 대처할 수 있으며, 비상할 수 있을 때 생명력이 보존될 수 있다. 또한 생명력이 있을 때 비상이 가능해 진다.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변 환경에 민감하며, 안주하지 않고 비상할 수 있을 때 야생오리가 싱싱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원리는 기독교의 설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것은 오늘 급변하는 시대 속에 서있는 교회와 그 중심 사역인 설교가 취해야 할 자세를 잘 설명해 주는 하나의 메타포(metaphor)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상황에 전해야 하는 기독교의 설교는 그 상황의 변화에 민감해야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야생오리와 같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해석자(interpreter)여야 한다.
말씀, 청중, 또한 문화 사회적 현상이 그가 관심을 가져야 할 해석의 장이다. 또한 단순한 해석자일 뿐만 아니라 적절히 대처하는 자로, 다시 말해 해석을 통해 얻게 된 텍스트와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적절한 방법을 통해 전달하는 것을 강구하는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신학적인 행위(theological act)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교회는 그 사역들을 무기력하게 하는 급격한 변화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빠르게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 있을 때 그 엄청난 속도를 별로 못 느끼는 것과 같이, 그 변화가 너무 급격한 것이어서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사회가 변하는 동안 교회도 변하고, 그 안에서 교회의 구성원들도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교회의 생명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가장 위험한 요소는 역시 변화에 대한 무감각과 무관심,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는 무기력을 들 수 있다.
데이빗 호킨스(David R. Hawkins)는 그의 책, ??잠재능력과 실제의 힘??(Power vs Force)에서 인간의식의 에너지 수준을 소개해 주는데, 사람들은 “살아있으나 이미 죽음과 비슷한 에너지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어떤 요인들에 사로잡히게 되면 죽음에 가까운 에너지 수준에 처하게 되는데, 그러한 수준에 이르게 하는 요소들 중에 ‘무기력’과 ‘두려움’을 중요한 요인으로 들고 있다. 즉 자포자기의 특징을 가진 무기력은 희망이 없는 상태로 몰아가기 때문에 죽음에 가까운 에너지 수준이 되게 하며,
인간 삶의 보편적인 요소인 두려움은 이 세상이 오직 위협과 함정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게 하면서 창조력을 앗아가 버림으로 죽음의 가까운 에너지 상태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있는 사람은 감히 변화를 시도하지 못하고 외적인 환경의 힘에 굴복 당하면서 파멸해 가게 된다.
이러한 에너지의 수준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무관심, 무기력, 그리고 두려움에 빠지게 되면 죽어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21세기의 출발점을 갓 지나온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있는가? 마르바 돈(Marva J. Dawn)은 오늘의 문화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예배와 설교, 사역의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교회는 이렇게 무기력하게 만드는 문화 사회적 변화의 환경 속에 서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믿고 확신하는 생명의 복음이 무기력해지지 않으면서(without “dumbing down”) 능력 있게 전해질 수 있게 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도전으로 와 닿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교회는 “보다 의미 있게 설교하고(meaningful talking), 보다 집중하여 들을 수 있게 하며(attentive listening), 보다 깊은 사고(profound thinking)를 던지는 자리”로 설교사역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인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십자가의 복음을 계속해서 생명력 있게 증거 해야 할 책임을 부여받은 설교자는 여기에 대해 반드시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있어야 하기에 설교를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설교를 새롭게 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새롭게 설교하려는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방법론의 필요에 앞서 적절한 설교 신학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설교에 대한 중요성과 바른 신학적 이해를 갖기 전까지는 이에 대한 노력들이 경주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 가장 고상하고 영광스런 사역
100여년 전 예일대학의 비쳐 강의에서 존 왓슨(John Watson)은 설교를 가리켜 청중들의 한 주간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사건”(the most critical and influential event)이라고 했다. 사실 기독교 역사에서 설교는 가장 중요한 사역의 하나로 자리 매김을 해왔음을 감안할 때, 그 말은 지나친 표현은 아님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계시”하시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파”하시기 위해 오늘도 하나님은 여전히 “설교”라는 도구를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의 시대 속에서도 설교를 통해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사건(event)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이 되어진다. 그러므로 온전히 행해지는 설교를 통하여 회중들은 더욱 강건한 믿음을 갖게 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에 보다 깊이 헌신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의 가장 중심 되는 목적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냄(disclosure of God)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유혹의 하나는 설교를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과의 바른 관계를 체결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매체(vehicle)로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강연이나 교훈적인 에세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도 인간의 말과 설명, 선포를 하나님의 사건이 되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살아 계신 역사 하심을 통해서 이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확신했던 설교자들은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가 말한 것처럼 설교 사역을 사람이 부름 받을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사명”이며 “교회의 일차적인 임무”라고 확신한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하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 있던 비밀의 경륜”(엡 3:10)을 드러내는 것은 오늘 교회의 임무이며, 설교자의 고유한 임무임을 확신하고 서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건으로서의 설교를 설교자가 바르게 감당할 때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 먼저 설교가 행해질 때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빛 비추심을 기대할 수 있다.
마치 창조의 첫날 “빛이 있으라”고 선언하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될 때 다시 빛을 비추셔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 이때 죄의 어두움은 물러가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시작된다.
설교가 행해질 때 하나님은 우리 삶의 어두움과 혼동(chaos)을 거두시며 친히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질서의 세계가 되게 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이 새로운 창조의 질서를 시작하시는 사건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언하는 사건이다.
또한 우리가 설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하심과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설교를 통해 상한 심령들에게 복음의 치료제를 나누어주신다. 십자가를 통해 허락하시는 “복음의 약”은 전혀 새로운 전인적 치유를 이루어 주신다.
성도들의 아픔과 고통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일을 기대하는 설교자는 광야에서 놋뱀 장대를 만들어 세우던 모세의 마음으로 행해져야 할 것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성도들로 하여금 마치 손을 내밀어 주의 옷깃을 만지는 여인의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에드문드 스타이믈(Edmund Steimle)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설교를 마치고 교회 입구에서 교인들을 배웅하면서 들었던 설교평 중에 가장 귀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환히 아실 수가 있습니까?’라는 것이었다.” 말씀을 통해서 그의 아픔과 안타까움이 깨끗이 치유되었다는 고백이 아닌가?
설교를 통해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던 성도들이 치유와 소망, 확신을 갖게 되며, 답답하던 문제 상황 속에 서있다 왔으나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되어 말씀을 통해 온전히 해결함을 받는 놀라운 은혜의 체험이 일어날 것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를 가져오고, 심령들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revival) 설교한다.
설교가 행해질 때 기대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공급해주신다는 사실이다. 광야에서 만나가 내려졌듯이, 부활의 아침 디베랴 바닷가에서 밤새 고기잡이로 지치고 허기진 제자들을 위해 주님께서 친히 조반을 준비하셨듯이,
오늘도 설교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늘 양식이 공급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서 오늘도 영적인 양식을 자녀들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설교 가운데서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적절하게 선포될 때 가져올 영적 부요와 그 효과에 대해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가 강력한 도구인 것은 하나님이 설교를 선택하셨고,
그것을 오늘도 여전히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설교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이며, 무엇을 ‘행하는 사역’(ministry of doing)이 아니라 ‘말함의 사역’(ministry of saying)이다. 즉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고,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고 계시며, 무엇을 행할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사역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설교는 포기할 수도 없고,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현장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기독교의 설교는 이천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우리는 그 위대한 전통 가운데 서서 설교하고 있다.
설교의 자리가 바뀌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쟈크 엘룰(Jacques Ellul)은 설교는 “가장 두려운 모험”(the most frightful adventure)이라고 하면서 설교자들은 설교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중요한 사역이라 할지라도 무기력한 설교자, 준비되지 않은 설교자, 민감하지 못한 설교자가 서있는 그곳에서는 이런 설교의 영향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늘도 설교자를 세우셔서 이 일을 계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계속해서 개선되어야 할 “기술”(skill)이다. 이것은 설교가 단순한 기교라는 뜻보다는 계속해서 다듬어지고 발전되어야 살 사역이라는 의미이다. 설교는 평생 완성을 선언할 수 없는 사역이다. 어느 목회자나 설교를 잘하고 싶어하지만 정작 설교에 관한 모든 것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설교자는 많지 않다.
열심은 있으나 급격히 변해 가는 설교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을 고려하지 않은 설교자에게서 그 효율성(effectiveness)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설교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말이 아니다.
잘 준비된 설교, 설교의 본문(text)인 성경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대한 영감이 있는 설교이지만 그러한 설교가 상황(context)의 변화 때문에 더 이상 생명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말은 많이 던져지지만 전달되지 않아 말씀의 역사를 이룰 수 없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탄식하실 일이 아니겠는가? 설교의 효율성을 위해서 설교자는 반드시 “말해지는 것”(what is said)과 함께 “들려지는 것”(what is heard)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특별히 설교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여건에서는 이러한 점들은 더욱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설교를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사건”이라고 이해했던 왓슨처럼 오늘의 설교자들도 설교의 중요성과 영향력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설교자가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영향력 있는 사건임을 고집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들려지는 현장에서 청중들이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설교의 위기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청중들에게도 설교는 여전히 “영향력 있는 사건”인가?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왓슨이 말한 영향력이 오늘 첨단의 기술 정보시대에도 설교는 여전히 청중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사건”으로 각인 되고 있는가? 설교자로 부름 받았다면 누구나 그러한 확신가운데 서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설교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희망하지만 청중들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때를 살고 있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현대를 가리켜 “변화에 의해 압도되고 있는” 시대로 묘사하면서, 그러한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재빨리 터득하지 못한다면 커다란 붕괴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현대인이 경험하게 되는 이러한 압도적인 변혁은 기술 폭발, 커뮤니케이션 혁명, 과학적 낙관론의 쇠퇴, 계몽주의 이후 형성된 지적, 정신적 체계의 붕괴, 물질주의와 쾌락주의, 레저 혁명 등의 급격한 문화 사회적인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가져오는 여파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필연적으로 변화를 초래한다.
교회는 이러한 변화의 폭풍이 전혀 미치지 않은 고립된 섬이 아니며, 오히려 가장 거센 여파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청중들이 되게 하며, 교회는 그 변화의 한가운데서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역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복음 전도자인 차알스 콜슨(Charles Colson)은 그의 경험을 통해 그렇게 말한다: “나는 현대 정신이 기독교의 메시지에 얼마나 저항적인가 하는 것을 실감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전통적인 복음 증거 방법이 우리 시대에도 효과적인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오늘의 시대정신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더 빨리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분석대로 빠르게 변하는 시대정신은 전통적인 복음 증거 방법이 무기력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대에 서있는 설교자의 눈은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에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임무는 무엇일까? 설교자는 무엇을 말하기 전에 반드시 무엇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의 눈과 관련하여 볼 때 설교자의 임무는 이중적이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 하고, 그 말씀이 선포될 오늘의 현장을 보아야 한다.
전환기에 살고 있는 설교자가 해야할 일은 현재를 이해하고, 우리의 자원을 점검하면서 새로운 양상의 커뮤니케이션을 배우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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